한국인과 유엔군이 버틴 결과로 대만의 보호, 일본의 부흥, 독일의 재무장, 미국의 군비확충이 이뤄졌다.
6.25 전쟁이 난 지 59년째가 다가오는 때 이 전쟁의 성격을 짚어본다.
*6.25 남침전쟁의 경과
1. 1949년3월5일: 김일성,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 타진. 스탈린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남침 반대.
2. 1949년7월 주한미군 철수.
3. 1949년8월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
4. 1949년10월 중공 성립, 약3만 명의 조선족 사단 북한으로 귀환시켜.
5. 1950년1월12일: 에치슨 선언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한국은 방어선에서 제외된다.
6. 1950년1월17일 이두연 주중대사 환송식에서 김일성, 남침의욕 밝혀. 스탈린, 즉시 김일성에게 訪蘇 초청.
7. 1950년3월30일-4월25일: 김일성, 모스크바 방문. 스탈린을 설득 성공.
8. 1950년5월13-16일, 김일성 박헌영이 모택동 방문, 남침 지원 약속 받다.
9. 1950년6월: 소련군이 작전계획서 입안.
10. 1950년6월25일: 전면 남침. 트루먼 한국 지원 결단.
11. 1950년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유엔군 북진, 북한군 붕괴 시작.
12. 1950년10월1일: 김일성, 모택동에게 구원군 파병 호소.
13. 1950년10월5일: 스탈린, 모택동에 파병 설득.
14. 1950년10월8일: 모택동, 김일성에 파병 통보. 그 직후 소련이 항공지원이 어렵다고 하자 중공 지도부에서 파병보류론 대두했으나 모택동 다시 파병 결정.
15. 1950년10월13일: 스탈린, 김일성에게 만주로 피신 권고.
16. 1950년10월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 회담. 맥아더, 중공 개입 가능성 부인(내심으로는 기대).
16. 1950년10월18일: 중공군, 북한지역으로 진입.
17. 1950년10월말: 중공군, 1차 공세 후 잠적.
18. 1950년11월말: 유엔군 대공세, 중공군과 정면 충돌. 유엔군 후퇴 시작.
19. 1951년1월4일: 서울 재함락. 워커 사망후 리지웨이 부임.
20. 1951년1월에서 봄: 맥아더, 중공본토 공격 혹은 한반도 철수 주장. 유엔, 對中 휴전안 제안, 중공 거부. 리지웨이 반격 성공, 서울 수복하고 38선으로 복귀.
21. 1951년4월: 맥아더 해임.
22. 1951년6월5일: 소련 말리크, 휴전협상 제의.
23. 스탈린, 김일성의 휴전요청 거부, 출혈전 지속.
24. 트루먼, 휴전협상 조건으로 포로들의 자유의사 존중 원칙 고수.
25. 1953년3월5일: 스탈린 사망. 3월19일에 소련 각료회의가 휴전하기로 결의.
26. 1953년6월: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한국을 희생시키는 휴전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여 미국의 對韓안전보장책 추궁. 중공군 중부전선 보복성 공격.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
27. 1953년7월27일: 휴전.
28. 1954년: 韓美상호방위조약.
*미결된 전후처리-평화협정시 타결해야 할 사건들
1. 약15만~20만명으로 추정되는 전쟁중 납북자
2. 약10만명으로 추정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자
3. 약2만5000명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미귀환자
4. 전쟁범죄자 처리 및 보상(베르사이유 조약)
*6.25 전쟁의 세계사적인 의미
1. 중공, 대만 공격 단념. 미국, 대만 보호 결정.
2. 일본의 경제부흥
3. 美日안보동맹 성립
4. 독일의 재무장과 NATO의 군사동맹화
5. 미국의 군비증강 본격화
6. 한국, 자유의 쇼윈도 내지 교두보 역할
7.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
8. 냉전의 공식적인 종언은 한국의 자유통일로 마무리된다.
*한국 국내에 끼친 영향
1. 1953년 체제 등장: 좌익을 일소하고 우파 자유민주주의 노선으로 근대화, 민주화 성공.
2. 군부의 등장과 박정희의 역할.
3. 한미동맹의 울타리 역할. 한국의 해양화 촉진.
4. 守舊, 좌파 관념론의 퇴조와 진보적인 실용주의 노선이 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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