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수상과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1989년 11월10일, 헬무트 콜 독일(서독) 수상은 폴란드 방문 중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베를린(서베를린)으로 향했다.
이날 시청 앞에서는 빌리 브란트 전 수상, 발트 몸페르 서베를린 시장,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 등이 연설했다. 연설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콜 수상만이 지난 수십년 동안 자유베를린을 위해 보여준 지원과 단결에 대해 미국,영국,프랑스의 친구들에게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으며,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도 경의를 표했다 (콜 수상의 외교안보보좌관 호르스트 텔칙의 회고).

열흘 후 미클로시 네메트 헝가리 수상이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소련이 갑자기 헝가리에 공급하던 석유의 1/4을 줄이기로 하자, 서독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콜 수상을 찾아온 것이었다. 네메트 수상은 그해 여름 동독인들의 탈출 사태 당시 헝가리 국경을 개방, 역사의 물꼬를 바꿨던 인물이었다. 그의 결단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서곡이었다.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석유공급이 축소되면 헝가리의 경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네메트 수상이 이끄는 개혁정부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컸다.
콜 수상은 네메트 수상의 지원요청에 대해 헝가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콜 수상은 나중에 외교안보보좌관 호르스트 텔칙에게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독일을 위해서 힘써 준 헝가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 수상은 분단 시기 독일을 위해 애써 준 미국,영국, 프랑스 등의 전통 우방에 대해서나, 통일의 시기가 닥쳐왔을 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한 소련, 헝가리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에 보답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의 이런 태도는 그 자신은 물론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신뢰감을 제고시켰고, 이는 독일통일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우리 정부가 이라크에 3000명 규모의 비전투병을 파병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자, 미국은 서운하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파병 시기는 총선이 끝난 내년 4월 총선 이후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문득 지난 번 방미 당시 '52년 전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것'이라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난다.
아마 지금쯤 미국에서는 지난 번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나, 그리고 그동안 한미동맹강화를 외쳐온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숱한 발언들은 결국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던 시민단체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라크에 파병한다면 박정희 정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분명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다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월남전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다른 동맹국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을 때, 대규모 전투병 파병으로 화끈하게 미국을 도왔다.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이 6-25 당시 우리가 미국 등 우방국들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한 보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군사적 차원에서 우리의 국익을 철저하게 챙겼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F-4 팬텀전폭기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도, KIST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월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70년대 중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월남파병 덕분이었다.
월남파병으로 인한 국내정치적 부담을 걱정하는 여당 간부들에게 박대통령은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공화당 간판을 내리라'고 야단쳤다.
그렇게 강행된 월남파병은 물론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지만,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무력도발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경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콜 수상이 자기 나라에 도움을 준 외국에 대해 적절히 감사하면서 국익을 챙김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조화시킨 지도자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말은 요란하지만 명분과 눈 앞의 정치적 小利를 찾다가 명분도 실리도 놓치는 지도자가 아닐까?

동맹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지도자, 신뢰받지 못하는 나라....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는 훗날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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