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 사형을 놓고 벌인 韓·美 줄다리기

柳炳賢 前 합참의장 秘話 수기:『韓美동맹 복원 위해 金大中 감형, 全斗煥-레이건 頂上회담 추진했다』
[한국 現代史의 막후 秘話] 柳炳賢 前 합참의장 秘話 수기
 
『韓美동맹 복원 위해 金大中 감형, 全斗煥-레이건 頂上회담 추진했다』
 
연세大 金大中도서관은 2005년 12월6일 지난 1980년 金大中내란음모사건으로 死刑을 선고받은 金大中의 救命운동과 관련된 문건들을 공개했다. 당시 新군부를 대신해 金大中 감형-全斗煥 訪美 협상을 추진했던 柳炳賢 前 합참의장의 수기를 독점 게재한다.<편집자>

柳炳賢

1924년 충북 청원 출생. 육사 졸업. 농림부 장관, 駐越 맹호부대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군단장, 합참본부장, 韓美연합사 부사령관, 합참의장, 駐美 대사 역임. 보국훈장 통일장, 청조근조훈장, 미국공로훈장 등 수상.
柳炳賢 前 주미대사·합참의장
한국 정보에 목마른 미국
 5·18 광주 사태로 사형이 선고되었던 金大中씨의 구명이 全斗煥 前 대통령의 訪美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韓美 간의 교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삼가 왔다.
 
 그러나 팔순을 넘기고 보니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 한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역사를 바로 적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全대통령의 비밀 지시를 받아 레이건 美 대통령과의 頂上회담을 추진한 작업의 암호명은 「新春計劃(신춘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내가 청와대, 그리고 미국과 교환한 통신문서는 2급비밀로 구분되어 있었다. 25년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은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내가 이제는 사실을 제대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였다.
 
 1980년 11월14일(토요일)의 김포공항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나는 존스 美 합참의장의 초청으로 아내와 함께 보좌관 李炳台(이병태·前 국방부 장관) 대령, 부관 박재하 소령(모토로라 한국 부사장)과 함께 KAL기에 몸을 실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은 美 합참의장인 데이비드 존스 대장이었다. 존스 합참의장은 내가 한국의 합참의장이 된 지 얼마 안 된 1980년 5월 1차로 나에게 미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다.
 
 하지만 당시는 내가 미국을 방문할 만큼 우리나라의 상황이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미국 측의 초청사실을 국방장관에게 알리지 않았고, 존스 대장에게는 「차후 적절한 시기에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980년 봄 미국 측이 나를 초청한 데에는 군사적 교류 차원 이외에도 몇 가지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9년의 12·12 사태 후 韓美 관계는 고위급 교류가 전반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는 등 이른바 新군부 세력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점차 명확해지자, 미국 측은 나를 급히 워싱턴으로 불러 대화를 나눠 보고자 했던 것이다.
 
1980년 3월 柳炳賢 합참의장이 위컴 駐韓미군 사령관과「韓美1군단」을「韓美야전司」로 개칭하는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新군부, 「미국 측과 접촉하지 마라」
 
 新군부 측은 세력구축 단계에서 對美관계, 특히 미국 측과의 접촉에는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계급과 직책을 막론하고 통역 없이 직접 미국 측과 대화하지 말라. 대화 내용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즉시 보고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미국이 나를 초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감한 新군부 측 정보망에 불필요한 억측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5월 중순에 崔圭夏 대통령의 中東방문을 수행하게 되어 나는 자연스럽게 미국 측의 초청을 거절할 수 있었다.
 
 崔圭夏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방문을 끝내고 귀로에 올랐을 때 국내에서는 비극적인 광주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新군부는 「대통령의 과감하고 신속한 통치력을 보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창설을 강하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그해 8월 말 崔대통령이 돌연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全斗煥 장군은 舊대통령 선거법에 의해 잠실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나라의 운명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러한 때(1980년 9월)에 美 합참의장의 두 번째 訪美 초청장이 왔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한국의 안보를 굳건히 하기 위해 내가 나서야 할 시기라고 판단, 訪美를 결심했다. 나는 세부출장계획서를 첨부해 청와대에 上申(상신)했고, 청와대는 지체 없이 승인해 주었다.
 
1981년 1월22일 韓美 頂上회담이 발표된 다음날 全斗煥 당시 대통령은 내란음모사건으로 死刑을 선고받은 金大中씨를 無期징역으로 減刑했다.

 
 全斗煥의 놀라운 제안
 
 나는 출장 1주일 전에 全斗煥 대통령에게 訪美 출장을 신고했다. 출장 신고는 대통령과의 獨對(독대)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출장의 목적과 중점 업무, 그리고 방문처와 면담자, 일정 등을 요약해 설명했다. 대통령의 결재 후 일어서려다가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全대통령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駐美 대사와 안기부에도 지시했으나 별다른 보고가 없어 의장께 부탁하고자 합니다. 나는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새로 당선된 레이건 美 대통령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기는 대통령 취임식 전후가 좋겠지요. 만일 그 일이 성사되면 미국이 바라는 金大中의 감형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의장께서는 미국 각계에 知人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출장 동안 나의 뜻이 성사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당시 레이건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 불과 수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全대통령은 재빨리 그와 頂上외교를 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全 대통령이 레이건과의 頂上회담을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단숨에 세워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金大中씨 감형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는 미국과의 대립을 頂上외교로 풀어보겠다는 구상이었다. 나는 내심으로 「全대통령이 그저 권력욕만 넘치는 후배 군인의 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 정치를 할 잠재력도 지닌 사람이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국가안보의 기본 틀인 韓美동맹이 金大中 사형 선고 등으로 대표되는 인권문제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全대통령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외국의 군인이 워싱턴에서 정치적 교섭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특별한 말씀이시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큰 기대를 갖지는 마십시오』
 
 
 워싱턴 上空에서 레이건 탑승機와 조우
 
1970년대에 駐韓美軍 사령관을 지낸 스틸웰 장군(오른쪽)과 필자.

 샌프란시스코에서 KAL기를 내려 美 육군의 제6군 사령부 귀빈 숙소에서 1박한 후 존스 합참의장이 보내온 특별 전용기로 갈아탔다.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네브래스카州에 있는 美 전략공군 사령부를 급유를 겸해 방문한 후 11월16일 오후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앤드류스 공군기지 상공에서 착륙을 미룬 채 상공을 선회했다. 4성 장군인 나보다 착륙 우선권이 높은 레이건 美 대통령 당선자의 안전한 착륙을 위해 착륙 우선권을 양보해 달라는 관제탑과 조종사의 말이 들려왔다.
 
 정권 인수팀을 발족시키면서 레이건씨가 한 번도 근무해 보지 못한 수도 워싱턴에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예감이 좋았다. 美 대통령 당선자 레이건과 동시에 워싱턴에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회로 생각됐다.
 
 숙소인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착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 온 스틸웰 장군(대장·前 UN軍사령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건 당선자의 국방부 담당 정권인수반원이기도 한 스틸웰 장군은 워싱턴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워싱턴은 新舊 권력 교체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지금 새 정부 요직 임명 예정자들이 워싱턴에 몰려와서 레이건과의 면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번에 柳장군이 만날 예정인 헤이그 장군은 국무장관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워싱턴에 도착한 첫날 저녁 대사관저에서 金溶植(김용식) 대사가 저녁식사를 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교포 10여 명은 고국의 政情(정정)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쏟아 냈다.
 
 나의 공식 일정은 다음날인 11월17일 엘링톤 국립묘지 참배로 시작됐다. 펜타곤의 깊은 지하에 위치한 국가군사본부도 방문했다. 韓美연합사의 지휘본부, 합참의 종합상황실이 여기에 연결돼 있으니 한국 안보의 核이라고도 할 수 있다.
 
 10·26 朴正熙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위컴 사령관은 본국 출장 중이었다.
 
 그래서 韓美연합사령관의 권한을 내가 대리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비화장치를 써서 펜타곤의 군사지휘본부에 朴正熙 대통령의 유고를 알리고, 美 합참의장과 위기관리를 협의했다.
 
 그때 백악관의 군사지휘본부, 각군 총장, 태평양 사령관이 모두 나의 보고를 방청하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朴대통령 유고 이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진전을 지체 없이 보고받았다.
 
 우리는 북한의 金日成이 건국 이래 미증유의 위기에 편승해서 개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의 군사 대응조치가 너무나 빨라 「10·26 사태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설이 국내에서 나돌 정도였다.
 
 
 金大中 사면에 목 맨 카터 행정부
 
 11월17일 오후 합참의장 회의를 시작하기 전 브라운 국방장관을 면담했다. 15분으로 예정됐던 의례적인 禮訪(예방)이 40분을 넘기는 토의가 돼 버렸다.
 
 브라운 장관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全斗煥 정부의 앞날은 인권의 존중 여하에 따라 평가될 것이며, 韓美 양국 관계 개선의 걸림돌은 金大中씨 문제다. 金大中씨의 사형 판결은 재판과정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 金大中씨는 사면되어야 한다』
 
 나는 『金씨의 사형은 한국의 사법부가 정당한 法절차에 따라 판결한 국내 문제이며, 더구나 군인인 내가 직접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고 전제한 후, 『브라운 장관이 각별하게 강조하는 사항이므로 본국에 돌아가면 보고하겠다』고 했다.
 
 브라운 장관은 韓美연례안보협의회를 개최하자는 나의 제안에 대해 『받아들이면 카터 정권이 한국의 인권침해를 묵인하는 인상을 줄 수 있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음날 오전 브라운 장관이 다시 만나자고 요청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브라운 장관과의 두 번째 면담은 金大中씨 문제에 이르러 다시 교착됐다. 그는 전날의 발언 요지를 되풀이하면서, 어제 둘이 나눈 대담에 대한 서울의 응답 유무를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내심 곤혹스러웠다. 브라운 장관은 우리의 행정체계를 모르고 미국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중요한 문건이 수신자와 관계 참모에게 동시에 배포된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과 체계가 다르다.
 
 
 크리스토퍼 국무부 副長官과의 만남
 
1980년 新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金大中씨와 관련자들.

 브라운 장관과의 면담 보고서는 보좌관 李炳台 대령과 국방 무관이 공동 기안한 것을 암호화하여 서울에 보내면 국내에서 다시 평문으로 해독한 다음 결재 단계를 밟기 시작한다.
 
 설사 브라운 장관이 희망한 대로 하루 만에 신속하게 청와대로 보고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법부와도 관련된 나라의 중대한 정책이 2개월 후면 정권을 내놓는 카터 정부의 요망대로 쉽사리 수정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우리 정부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다』고 전하자, 브라운 장관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워싱턴을 떠날 때까지 서울에서 개최될 차례인 韓美연례안보협의회 개최에 매달렸고, 브라운 장관은 그 나름으로 金大中씨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진일보」를 기대했으니 서로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내가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美 국무부관리 중 홀부르크 亞太담당차관보와 아마코스트 副차관보(前 駐日대사)가 면담을 요청했다. 워싱턴에 와보니 홀부르크 차관보는 발 빠르게 구직차 뉴욕으로 출타 중이었다.
 
 11월18일 아침 아마코스트 副차관보로부터 『크리스토퍼 副장관(클린턴 1기 정부 국무장관)이 柳장군을 만나자고 한다』고 전화가 왔다.
 
 미국 정부 조직에 副장관 직제가 있는 부서는 국무부과 국방부뿐이다. 두 부처의 副장관 자리는 다른 부처의 장관과 같은 서열이다.
 
 金溶植 대사도 副장관을 사무실로 찾아가서 만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외교관도 아닌 현역 군인인 나를 면담하겠다고 하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미국 정부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金溶植 대사에게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고, 朴健 (박건·前 駐美대사) 참사관이 통역을 맡아 주었다.
 
 우리 일행이 副장관실에 들어선 것은 11월18일 늦은 오후였다.
 
 크리스토퍼 副장관은 『번스 국무장관이 외국 여행 중이어서 내가 대신해서 면담하게 되었다』며 朴참사관에게 통역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곧장 나와의 직접 대화를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金大中 재판 수긍 곤란』
 
 크리스토퍼 副장관은 내가 韓美 안보현안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자, 곧 강경한 어조로 한국의 인권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국 內政에 관해 깊이 언급하지 않겠으나, 金大中씨의 재판 과정은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어 미국으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판결이다. 그러나 아직 全斗煥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미국은 金씨가 사형까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인권을 존중하는지 확인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만일 미국의 기대가 어긋날 때는 韓美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정권이 공화당으로 바뀌어도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여론에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반박했다.
 
 『金大中씨 문제는 한국의 국내 문제다. 한국적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고 워싱턴의 시각으로만 판단할 때는 오히려 편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인 나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는 뜻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통령이 행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면권에 대해 내가 언급할 입장은 아니다. 現 시점에서 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안정이다. 한국이 하루 속히 안정되도록 미국이 도와주는 것 또한 한국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한 방안이 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副장관은 『미국의 강한 요망을 全대통령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柳장군이라고 판단하여 柳장군과 면담하는 것』이라고 부언했다.
 
 다음 날짜 「뉴욕 타임스」는 『크리스토퍼 副장관이 訪美 중인 한국 합참의장 柳장군을 국무성으로 불러 한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면서 金大中씨의 감형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美 국무부가 면담 사실을 누설한 게 불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희망 베이커 원내총무
 
柳炳賢 합참의장과 알렌 特補의 만남을 주선한 하워드 베이커 당시 美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

 이렇게 이틀 동안 국방·국무 양 부처와의 회의와 협의를 마쳤다.
 
 남은 이틀 동안 레이건 당선자의 정권 인수팀과 의회를 상대로 교섭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미루어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아 숙소에 돌아와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80년 11월 초에 막 끝난 선거에서 對外 정책을 주관하는 대통령과 상원은 공화당이(2석 차) 차지했지만, 예산지원을 주관하는 하원은 민주당이 차지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이었다. 이 이틀 동안에 레이건 새 정부와의 연결 고리를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재적 의원 3분의 1이 낙선했기 때문에 의사당은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면담 일정이 잡힌 의회 지도자로는 상원에서는 공화당의 하워드 베이커 원내총무, 타워 군사위원장, 하야카와 亞太분과위원장과 민주당 의원인 샘넌 군사委 간사, 글렌 의원이 있었다.
 
 하원에서는 공화당의 베어드 원내총무, 더위스키 군사委 간사와 민주당의 프라이스 군사위원장, 스트래튼 군사委 자원분배소위원장, 울프 亞太소분과위원장 등 모두 10명이었다.
 
 이틀 동안 이렇게 많은 정계 거물들과의 면담 일정을 짠 美 국무성 「한국과」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면담자가 결정된 것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美 의회지도자들이 全斗煥 정권의 성격과 앞날을 알아보기에 내가 적격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민주·공화 양당의 의회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새 정부는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권이며, 정치적 안정과 점진적인 민주 발전을 도모하고, 東北亞에서 미국이 계속하여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베이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였다.
 
 全斗煥-레이건 頂上회담 성사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내심 초조했다. 여기서 실패를 자인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베이커 의원과의 면담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는 공화당의 선출직 정부 요인 중 대통령·副통령 다음가는 서열의 인물이었다.
 
 베이커 상원위원은 원내총무실에서 보좌관들을 배석시키고 나를 맞이했다. 그와는 첫 대면이었다. 베이커 총무는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연장되는 것을 우려했다. 나는 베이커가 미국의 잣대로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안보 정세에 대한 심각성을 이해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북한은 소련 및 중공과 즉각 자동 개입하는 3각 군사동맹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韓美상호방위조약은 우리가 침공을 당하더라도, 양국은 서로의 법적 절차에 따라 개입 여부를 결정하고 군사원조를 하게 되어 있을 정도로 느슨하다. 이 점을 金日成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베이커 원내총무와의 獨對
 
 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한국의 정치를 미국과 비교하면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이 참여하는 입법절차에 따라 상당히 합법적으로 운용되어 왔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것이다. 건국한 지 겨우 35년인 신생 국가가 안보와 경제발전의 두 바퀴의 균형을 잡으며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있다』
 
 나는 『의식이 충족해야 예의를 알게 된다』는 동양의 옛말을 인용했다.
 
 『국민소득 60달러로 건국하여 혹독한 戰禍(전화)에서 벗어나 겨우 개발도상국이 된 우리나라를 카터 정권이 가혹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비난 공격하는 것은 동맹국에 대한 적절한 외교정책이 아니었다. 특히 발전도상국의 절대적 발전의 동력은 강한 자존심임을 알아 달라』
 
 베이커 총무는 『앞으로 공화당은 카터 민주당 정권의 인권정책에서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나는 『양국 간의 현안을 타개할 방안이 있으니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토의를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베이커 원내총무는 즉각 동의하고 별실로 나를 안내했다.
 
 
 베이커, 알렌 特補 소개
 
베시 美 육군참모차장(가운데), 金溶植 駐美대사(오른쪽)와 자리를 함께한 필자(왼쪽). 駐韓美軍 사령관을 지낸 베시 장군의 관사에서 알렌 特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단 둘이 만난 자리에서 베이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와 내가 나눈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柳炳賢: 워싱턴에 와보니 金大中 사형 문제로 불거진 한국內 인권에 대한 韓美 양국의 심각한 대립상태를 감지하게 되어 유감이다. 나는 귀국 즉시 金大中씨의 감형을 강력히 건의하겠다.
 
 한국의 全대통령이 이러한 조치를 취할 때 레이건 새 대통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우리 대통령하고 頂上회담을 열어 韓美 간의 외교현안을 일거에 해소하여 양국관계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 기회에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과 다른 새 외교정책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이커: 문제 해결을 위해 흥미 있고 획기적인 제안이다. 내가 할 일은?
 
 柳炳賢: 나의 제안을 레이건 당선자에게 전달해 현안인 金大中씨의 감형과 韓美 간의 頂上회담을 성사시켜 주기 바란다.
 
 베이커: 그런 일이라면 나보다는 레이건 당선자의 최측근 참모인 알렌 안보特補에게 일을 직접 다루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柳의장과의 연락 방법과 숙박처는?
 
 柳炳賢: 오늘 저녁에는 워싱턴에 와서 신세진 분들에게 답례로 연회를 베푼 다음 밤 10시경부터는 美 육군참모차장 베시 장군 집에 머물다가 내일 오후에는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다.
 
 베이커: 韓美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귀하의 성의에 감동했다. 일이 성사 되기를 바란다>
 
 
 베시 장군의 배려
 
 11월20일 저녁 이번 방문에서 신세진 분들에게 내가 답례연을 베풀었다. 존스 합참의장을 포함한 軍 간부,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 국방부와 국무부의 관리, 그리고 학자 등 60여 명이 참여했다.
 
 만찬 후 베시 장군의 관사에 돌아와 있는데 알렌 特補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알렌: 베이커 상원 원내총무로부터 柳의장이 韓美관계 개선에 기여할 제안이 있다는 소개도 있었고, 柳대장이 직접 내 사무실에 면담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안다.
 
 柳炳賢: 그렇다. 나의 일정으로는 내일 오후에는 출국길에 오르니 오전 중에 필히 면담하는 것이 韓美공동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알렌: 피차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다. 내일 오전 중에 정부인수단과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滯京(체경) 중인 레이건씨를 離京(이경)시켜야 한다.
 
 柳炳賢: 나는 귀하와 직접 대면해 중요한 일을 협의하고자 한다. 귀하가 현재 정부 인수로 몹시 분주한 것을 알고 있으니 필요하다면 나의 출발을 조정할 용의가 있다.
 
 알렌: 진지한 토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대통령 당선자의 방침에도 따르고(레이건 대통령 당선자는 정권 인수단에게 취임 전에 외국 사절과 일절 만나지 말 것을 지시했다), 現 정부의 감정도 거슬리지 않게 내일 오전 7시에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커피를 같이 하자.
 
 柳炳賢: 오늘밤 유숙하고 있는 베시 장군 관사가 한적하다. 단독으로 만나자.
 
 알렌: 동의한다. 내일 오전 7시에 만나기로 한다>
 
 알렌과의 약속이 정해진 후 나는 베시장군에게 『내일 새벽에 새 정권의 요인이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베시 장군은 『柳장군을 찾아오는 사람이고, 나는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인사를 하지 않겠다』면서 『관사를 柳장군 집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알렌과의 만남은 베시 장군을 포함해 네 사람만 아는 일이 되었다.
 
 
 알렌 特補와의 비밀회동
 
 11월21일 아침. 나는 美 육군 참모차장 베시 장군 관사의 작은 마당 너머로 차도에 면한 응접실 창가에서 탁자용 램프 하나만을 켠 채 일부러 방을 어둡게 해 놓고 알렌의 방문을 기다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어둠이 가시지 않고 인기척이 없는 집 앞 길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나는 내 집에 온 손님을 대하듯 직접 나가 현관문을 열고 알렌을 마중했다. 알렌을 응접실 창가로 안내하여 미리 준비한 커피를 따라 주면서 대담을 시작했다.
 
 알렌은 나보다 젊은 50代 초반으로 보였다. 그는 달변이고 직설적으로 분명한 표현을 구사했다. 예리한 판단력과 강한 추진력이 있어 보였다. 처음 대면인 데도 직감적으로 「이 사람과는 어려운 일을 같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겼다.
 
 대좌하기 전 나는 마음속으로 두 가지 원칙을 세워 놓았다.
 
 첫째는 교섭하다가 金大中씨를 감형만 하고, 全대통령이 頂上회담에 초청받는 데 실패하는 愚를 범하지 말 것,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외 여러 사정으로 金씨의 감형이 극히 어려운 일임을 강조할 것.
 
 둘째로는 우리 두 사람이 합의한다 하더라도 후속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뜻에 어긋나거나 불리해질 때는 내 개인의 책임으로 한정하고 정부에 累(누)를 끼치지 말 것 등이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후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곧장 협의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섰다. 전날 베이커 상원 원내총무와 가졌던 1차적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실현단계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알렌 안보特補와의 대화 요지는 내가 청와대에 보고한 보고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는 나와 알렌이 全 대통령의 訪美와 金大中씨의 감형에 합의하는 부분은 빠져 있다. 고도의 비밀 사항이어서 내가 별도로 직접 구두보고했기 때문이다.
 
 
 『공화당도 金大中 처형 반대』(알렌)
 
 <柳炳賢: 베이커 상원 원내총무의 주선이 있었다고는 하나 지난밤의 전화통화만으로 면식이 없는 본인과 이른 아침에 대담에 응해 주어 사의를 표한다. 무척 바쁠 텐데 대통령 당선자의 근황은 어떠한가.
 
 알렌: 나와 대통령 당선자 간에는 성격상의 차이는 있으나 정책방향과 문제처리의 방법에는 서로 공명해 왔다. 지난 4년간 레이건씨를 당선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도와 왔고, 앞으로는 국가안보特補직으로 레이건을 힘껏 보좌하겠다.
 
 柳대장과 대담한 후 부시 부통령 당선자(前 미국 대통령·現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父), 헤이그씨를 포함한 당선자와의 정책회의를 가진 다음 오후에 離京하는 레이건씨를 보좌할 예정이다. 柳대장의 訪美 목적과 일정은?
 
 柳炳賢: 존스 합참의장의 초청으로 訪美 중이며, 첫째 한반도에서의 韓美연합전략과 戰力증강을 협의하고, 둘째 상호군사협력의 증진, 셋째 안보적 측면에서 상호 이해 촉진에 이바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안보와 군사협력 증진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나, 한국의 정치발전에 관해서는 사실상 카터 정부의 요인들과는 견해와 입장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유감이다.
 
 알렌: 지금 본인이 표현하는 정책들은 미국 現 정부의 것이 아니고 앞으로의 공화당 대통령 취임 후의 방향을 시사하는 것이다.
 
 카터 정부는 미국의 내외정책을 파경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생각한다. 특히 對外정책 면에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후퇴를 자초했다. 결과적으로 자유 우방에게도 미국의 신뢰성을 실추시켰다. 레이건 새 정부는 한국과의 방위공작과 협력을 前 정권보다 더 강력하게 존중하고 추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정치적인 배려 없이 金大中을 처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카터 정권과 다름없이 공화당 정권이 답습해 나갈 정책이 될 것임을 유념해 달라. 그렇게 될 경우에는 韓美관계의 개선은 기대하기 어려워지며 미국의 新정부에게는 政敵을 처형하는 정부와 협력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므로 韓美관계는 중대한 난국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金大中은 한국적 여건에서 봐야 한다』(柳炳賢)
 
 柳炳賢: 지난밤 존스 의장이 공화당의 견해라고 하며 같은 말을 연회석상에서 귀띔해 주더라. 그러나 金大中 사건에 관해서는 외국 언론을 통하지 않는 당사자의 말을 직접 들어주기 바란다.
 
 첫째로 한국은 분단된 국가이며, 둘째로 實在하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어서 월남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의지이다. 또한 인력 이외에는 자원이 없는 나라이므로 국력이 분산되거나 시간이 낭비돼서도 안 된다.
 
 한국의 가치관과 국가적 목표는 무력침공의 위협이 실존하는 여건을 극복하면서 국가 발전을 지속적으로 실현하겠다는 데에 있다. 金大中은 前 대통령의 정적이었으나 現 정부에 의해 일단 사면되었었다. 그러나 계엄령을 고의적으로 위반하고 보도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어야 자란다」라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했다. 그 자가 학원소요와 광주사태를 유발시킨 상당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형사범이지 정치범이 아니다. 金大中 사건은 한국적인 여건에서는 안보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국민들도 제2, 제3의 광주사태 재발은 억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소망이다. 미국과 여타 외국 언론이 金大中을 유명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한국인의 뜻에 반한다.
 
 알렌: 한국의 입장에 대한 설명을 잘 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 법조계의 견해는 사형은 지나친 중형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金大中을 사형시켜도 좋다는 방향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金大中을 사형시킬 때 공화당 정권은 駐韓美軍 철수를 재론할 정도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잠재적이고 상당히 깊은 反韓감정이 美 국민에게 잔류할 것이다. 그같은 양상이 만연되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고립되는 것은 미국의 이익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방으로서 金大中 사건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국내 문제이지만, 만일 金大中씨가 군법회의 결과대로 사형될 경우에는 한국의 국제적 신망이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조언하고 싶다. 가급적 사형만은 면하게 된다는 한국으로부터의 시사가 있기를 바란다.
 
 柳炳賢: 한국의 新헌법에 의하면 대법원은 미국의 그것보다도 더 독립적이다. 대통령이 대법관을 추천하거나 국회가 임명을 추인하는 절차도 없다. 新헌법에 의해 제5공화국이 출범하려는 이때 우리의 맹방이 우리나라의 독립적인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면서 간섭하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이러한 행위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오히려 유해할 것이다.
 
 알렌: 여하튼 간에 金大中 사형 문제는 韓美관계 개선에 분명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는데 어찌하겠는가>
 
 이상은 문서로 기록한 보고서의 요지다. 이와 별도로 내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비밀 대화록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韓美 頂上회담 제안
 
1981년 2월, 全斗煥-레이건 韓美 頂上회담. 全斗煥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첫 頂上회담을 가진 국빈이 됐다.

 <柳炳賢: 全대통령은 訪美하는 나에게 카터 정권과는 달리 공화당의 새 정권과는 양호한 관계를 열어 나가고자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 金大中씨 문제가 볼모가 되어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으며, 그 반사 이익은 우리 반대자에게 돌아가고 있다. 카터 정부는 공개적으로 他國의 인권 문제에 개입해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서로의 이익마저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번 워싱턴 방문 중에 내가 얻은 결론은 양국이 이해하고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유대와 우호 관계는 획기적으로 복원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 방책으로 나는 귀국 즉시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로서 金氏를 감형조치하도록 건의하겠다.
 
 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한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할 때,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식 때 全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頂上회담을 열어 駐韓 美 지상군 철수의 취소를 포함한 양국 관계의 근본적 개선과 안보와 경제 협력의 증진을 협의해 주기 바란다.
 
 한국에서는 全대통령이 朴대통령 서거 후의 혼란을 타개해 가면서 국민에게 언약한 대로 민주정치를 토착화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 한국은 敵의 도발을 억지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미국이 절대로 필요하고 미국 역시 동북아의 평화유지를 위해서는 한국이 절대로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韓美 간에 존재하는 중요 관심사항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도록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韓美 정상회담의 의의는 자못 크다고 생각한다.
 
 
 비밀 연락관 지명 합의
 
1981년 9월 레이건 美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柳炳賢 駐美대사.

 알렌: 양국의 국가 이익에 합치하는 획기적이며 실현가능성이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오전 중에 레이건 당선자를 모시고 하는 회의가 계획되어 있다. 柳의장의 제안을 레이건씨에게 보고해도 좋은가.
 
 柳炳賢: 좋다. 그러한 조치가 취해질 때에는 아시아에서 카터 정부가 손상시킨 미국의 대외적 위신과 신뢰성도 급속히 회복되어 자유진영의 집단 안보체제가 한결 튼튼해질 것이다.
 
 알렌: 문제 해결의 시급성에 비추어볼 때 조속히 성사되어야 양호한 성과가 기대될 듯하다. 대통령 취임식 직후 초청할 외국 원수급의 명단까지는 아직 구상할 단계가 아니다. 또 취임식 전후에 레이건의 일정은 분주할 것이므로 긴 회담은 기대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柳炳賢: 본인이 귀국하면 全대통령에게 자진하여 金氏를 감형하고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訪美해 두 나라 대통령이 회동하여 관계개선과 협력증진을 논의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유익하다는 것을 강력히 건의하겠다. 그분이 나의 건의를 승인하면 그 뜻을 회신하겠다. 정권인수단에는 당신에게 최초로 제안하는 것이니 베이커 상원의원과 더불어 극비사항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하자.
 
 알렌: 동감이다. 오늘 아침의 비밀회담은 내용을 기록에 남기지 말고 전화로 통화하지도 말자. 서울 정부의 결심의 전달방법과 워싱턴에서의 한국 측 후속조치자는?
 
 柳炳賢: 12월 첫 주 중에 본인이 베시 장군을 통하여 「당신과 합의한 대로 업무를 추진하자」란 신호를 보내면서, 한국 정부의 연락관을 지명 통고하게 되기를 바란다. 全대통령의 訪美를 계기로 레이건 新정부와 획기적으로 개선된 관계를 수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알렌: 같은 바람이다.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기 전이기 때문에 카터 現 정부에게 미리 알려져 비위를 거슬리지 않도록 하자. 유익한 대화였다.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柳炳賢: 본인의 제안은 한국과 미국 상호 간의 이익에 공헌할 것이라 확신한다. 대담할 기회를 주어 다시 감사하고 레이건 정부와 당신의 앞날에 성공이 있기를 바란다>
 
 
 全斗煥 개인을 위해 한 일은 아니었다
 
 합참의장 회의와 대통령의 특별지시. 이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이 모두 성취되었으므로 귀국길의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金大中씨의 감형에 이어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의 韓美 頂上회담으로 나의 임무는 결실을 보았다. 이 일은 군인으로서 내가 국가를 위해 했던 마지막 큰 봉사로 기록될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 둘 일이 있다. 「군인인 합참의장의 신분으로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는 외교적 역할을 한 것이 타당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다.
 
 나는 全斗煥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입지와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해 미국 朝野(조야)를 설득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韓美 頂上회담을 통한 韓美동맹의 정상화가 한국의 안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정리·李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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