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은 스물 두 번째 생일』
8월 13일 광복 5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는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8월 15일 첨탑을 철거하는 기념행사를 앞두고 얼룩덜룩한 막을 두르고 있었다.
이날 오전 7시 30분 金大中 새정치회의 창당준비위원장(71)이 서울 광화문의 코리아나 호텔 일식당에 도착했다. 인터뷰를 하기에 다소 이른 시각이었지만 金위원장은 감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이 金위원장님의 스물 두 번째 생일이지요?”라는 물음에 그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전 11시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관련 인사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에요. 벌써 20년도 넘었지요. 매년 이 모임을 갖게 된 게…”
1973년 8월 8일 金大中씨는 도쿄의 그랜드 팔래스 호텔에서 건장한 청년 5~6명에게 납치되었다. 민주통일당 당수 梁一東씨와 金敬仁의원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화물포장용 테이프로 金大中씨의 얼굴을 가리고 손발을 묶은 후 그를 어떤 배에 실었다. 그는 이 배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닷새 만인 8월 13일 金씨는 동교동 자택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날 인터뷰의 첫 번째 화제는 국립중앙박물관 철거문제였다.
金大中 위원장은 곧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룰 생각이라고 했다.
“박물관을 옮기더라도 새 박물관을 먼저 지어야지요.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는 온도·습도·통풍 등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던데 일의 선후를 바꿔 가면서 저렇게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중앙박물관 철거 문제는 두 가지로 그 의미가 요약될 수 있어요. 우선 일제 잔재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철거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일제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국민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언론에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는 48년의 초대 대통령 취임식 이래 제헌국회 9·28 수복 등 많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부분을 충분히 논의한 뒤에 철거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부 단독으로 결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첨탑만 제거하고 새 박물관 지을 때까지 철거는 보류해야』
-「先박물관 건설, 後철거」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이 아니라 상식의 문제이지요. 어떻게 전쟁이 나지도 않은 나라에서 국립박물관 수장품을 수년간 임시로 전시합니까?
『이제 첨탑 부분을 철거했으니까 상징성은 확보한 것 아닙니까 그 후에는 새 박물관을 지을 때까지 철거를 보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안타까운 것은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그런 방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못했지요. 이제 저희 당에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 새 박물관을 건립할 장소가 용산 가족공원인데 그곳은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전문가들이 박물관을 지을 자리가 아니라고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습기는 오래 된 유물에는 최대의 적이라고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참여가 중요합니다. 링컨이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라고 했는데 국민의(of the people) 정부라고 하면 국민주권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이고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이라는 측면은 사실 세종대왕 때도 이미 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세종대왕이 민주주의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결국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저는 국립중앙박물관 철거 문제처럼 국민들이 토론하기 좋은 주제도 없다고 봅니다.
국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는 과정은 국가통합에도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을 할 때는 국민투표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아마 스위스였다면 분명히 국민투표를 했을 겁니다. 스위스는 전투기 몇 대 사는 문제 가지고도 국민투표에 부치니까요.
이런 문제에 국민을 참여시키는 것은 국민을 신나게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인의 특성이 恨·멋·신명 아닙니까? 일본이나 독일국민들은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것을 잘 받아들여요. 그러나 한국인의 특성은 자신이 납득을 하지 못하면 안한다는 겁니다. 수평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자발적인 21세기에 아주 적합한 기질입니다. 이태리 사람들이 그렇지요.
21세기는 피라미드식이 아닌 자발적 참여의 오케스트라형 구조의 시대입니다. 지휘자는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지요.』
『박물관 철거보다는 그 결정을 위한 국민참여가 중요』
-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을 허문다는 것보다도 허물기 위한 또는 허물지 않기 위한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토론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요. 과정이 중요하지요. 국민들이 다 신이 나서 百家爭鳴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조율해 가는 과정, 그것이 정치의 멋이고 국민들이 정치를 즐기는 방법이 되는 것이지요』
-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중앙박물관을 허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미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非전문가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복원은 하되 꼭 박물관을 허물어야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 姜元龍목사가 중앙박물관 철거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계신데 이분 말씀이 이렇습니다. 경복궁 복원은 결국 세트 즉 가짜의 복원이기 때문에 가짜를 복원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역사를 허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가 무서우니까 함부로 말을 못해요. 문화계나 언론에서 논의의 場을 만들어야 합니다.』
金大中 위원장은 박물관 철거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아침식사를 끝냈다. 그는 밥 한 그릇과 된장국, 생선 한 토막과 야채가 놓인 그릇들을 아주 달게 그리고 재빨리 비웠다.
『장수 비결이 小食多動이라고 하니까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 돼요. 옛날에 궁중에 있던 어느 요리사가 임금이 음식을 너무 좋아하니까 「폐하 식사하시는 것은 거북이나 鶴에게서 배우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왕은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요리사가 「장수하기로 유명한 거북이나 학을 아무리 요리해 봐도 배를 갈랐을 때 위가 차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론으로는 다 아는데 실천은 잘 안되지요』
金위원장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못 먹는 음식도 없고 싫어하는 음식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고급음식보다는 그저 설렁탕이나 된장찌개류를 즐기고 『소화가 안 돼서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 그것은 金위원장님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성격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스트레스는 별로 안 받아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오래 갖고 있지는 않지요 이번처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종이를 내놓고 줄을 그어 세 칸을 만듭니다. 먼저 제일 첫 칸에는 부정적인 문제점을 쓰고 그 다음 칸에는 그 문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씁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비교하여 세 번째 칸에 결론을 내리지요.
이렇게 하면 정리가 아주 잘됩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밀고 갈 것은 밀고 가지요. 세상에는 완전히 좋은 것도 없고 완전히 나쁜 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좋고 나쁜 것을 비교해서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요.』
- 상황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로군요. 상당한 수준의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겠습니다.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어떤 육감이 있듯이 저도 살아오면서 직관 같은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느낌이 몸으로 먼저 옵니다.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그리고 나서 이론이 따라 오지요.
70년 1월 3일자 「대한일보」에 1971년 선거에서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총통제 쪽으로 간다는 내용의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朴正熙씨가 총통제를 하는 구실로서 안보위기나 정반대의 통일 문제를 내세울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71년 대선에서 저는 계속 「이번에 정권교체를 못하면 총통제가 온다」고 주장했었습니다. 72년에 7·4공동성명이 나오기에 국민들은 통일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저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외신기자 클럽에서 한 연설에서 「朴正熙씨가 이것을 이용해서 총통제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3개월 후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10월 유신이라는 독재가 왔던 것입니다.』
『정계복귀 검토 시기, 96년 말이 나 97년 초로 생각』
- 이번에 검찰의 5·18 관련 발표 全文을 보니 金위원장님과 관련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수사기록 어디를 봐도 金위원장이 광주사태를 선동했다는 자료 자체가 없다. 다만 그때 나온 對언론 발표문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1980년 5월 17일 밤에 제가 체포됐고 5월 18일에 광주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들이 내건 슬로건이 첫째 「金大中석방하라」 둘째 「계엄령 철폐하라」셋째「全斗煥 물러가라」는 세 가지였습니다.
80년 3월께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鄭東年씨가 우리 집에 왔다가 제가 없으니까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발견하고는 鄭씨를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한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鄭東年씨가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1천만원을 받아다가 광주항쟁을 선동했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그가 받은 돈을 1천만원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그 액수가 5백만원으로 줄었습니다. 조 사관이 상부로부터 학생에게 1천만원은 너무 많다고 5백만원으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던 겁니다』
- 이번 발표문은 「金위원장님이 광주항쟁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공문서로서 명백하게 해준 것이니 상당히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서…』
- 직감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이번 6·27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들을 공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하셨을 때도 그 느낌이 왔습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저는 그렇게 빨리 선거에 개입할 생각도 없었고, 물론 정치에 개입할 생각도 없었어요. 제가 일산에 집을 지은 것도 이제 정치를 그만두었으니까 거기서 아내와 조용히 살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올해 수첩에는 제일 첫 번째로 「금년 정치 불개입」이라고 써있어요. 물론 다른 면도 있었습니다. 영국에 갔다 온 후에 사람들이 저에게 「이제 제발 정치 그만둔다는 소리 좀 하지 말아라. 사람이 없지 않느냐. 지난 선거 때 잘못 판단했었다」고 그래요. 물론 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린지 모르지만 저로서도 제 포부를 다 못했으니 마음에 뭔가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핵문제를 정부가 잘못 다루고 있는 것을 보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96년 말이나 97년 초까지 가봐서 정말 국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때는 내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하는 생각은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나올 생각은 정말 없었습니다.』
『정계복귀를 앞당기게 한 건 李基澤씨』
그는 자신의 정계복귀를 앞당기게 한 건 李基澤 민주당 총재였다고 했다.
『제가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작년 12월 李基澤 대표가 12·12사태를 구실로 2개월 동안이나 국회에 등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구실로 당권을 독점적으로 거머쥐려고 한 것 같은데… 그래서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정기국회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것은 의회정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고 여당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셈입니다. 예산심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穀價문제도 못 다뤘고 야당의원들이 각 상임위원회에서 준비했던 법률개정안도 나중에 일괄타결로 다 빼버렸고, 인천 부천 道稅사건도 그냥 지나가고 성수대교 붕괴문제도, 아현동 가스 폭발사고도 제대로 못 다뤘던 겁니다.
그때 李基澤 총재가 하도 기세등등하게 나가기에 저는 밖에 있으면서 말 한번 제대로 못하다가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전했어요.
「이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회주의에 어긋난다. 왜 병행투쟁을 하지 않느냐 원내 투쟁을 위주로 하고 12월에는 날씨가 추워 대중투쟁은 어려우니 상징적으로 하라」
그랬더니 곧 신문에 반발이 크게 나고 「오너 행세를 한다」느니 하면서 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정기국회는 완전 실패였고, 정부 여당만 기쁘게 해주었어요.
2월이 되니 李基澤씨가 「나를 당수로 확인해주지 않으면 당을 뜨겠다」고 당에 1주일 이상 나오지 않고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는 차라리 그가 당을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떠나지도 않더군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 것은 경기도 지사 공천件이었습니다. 저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좋은 후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李鍾贊의원을 2개월 이상 설득을 해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경기도에 趙淳과 李鍾贊이라는 환상의 콤비를 내세우기로 결정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천까지 포함해서 수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비난은 나중에 잘함으로써 회복하자』
나는 李鍾贊의원의 승낙을 얻고 나서 빨리 李基澤 총재에게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李基澤 총재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 그의 대답이 노(NO)예요.
「서울이 金大中씨 차지라면 경기도는 내 차지다」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張慶宇씨를 민 겁니다.
그래서 제가 李총재의 측근인 姜昌成의원 등을 오라고 해서 「나는 절대 당권에 개입하지 않겠다. 내가 공개적으로 선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서울이든 경기도든 다 차지해라. 그러나 조순·이종찬 콤비로 하지 않으면 서울도 위태롭다」고, 제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한편 저는 張慶宇의원까지 만났어요. 제가 그에게 「당신이 지금 무리하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나오면 떨어지고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하기 어렵게 된다」고 설득했어요. 그런데도 도저히 안되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제가 항복하는 심정으로 張慶宇씨를 받아들였어요. 하루 빨리 당 내분을 해소해서 서울이라도 살려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서울에서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요. 조순 후보가 계속 서울에서 뒤지는 겁니다. 趙淳 대 朴燦鍾의 지지 비율이 20대 40으로 나오는데 마지막 주에 가서야 趙淳 후보의 선전과 朴燦鐘씨의 거짓말 때문에 서서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30대 후반이 그리고 30대 전반 이어서 20대 후반과 20대 전반의 젊은 층이 돌았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힘든 선거였어요. 개표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李基澤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보다 자기 자신을 생각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선거를 해보니까 국민들이 전혀 金永三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金永三 정부가 우리 나라를 오늘의 위기상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야당은 전혀 기대가 안 되고 한 지붕 열 가족 파벌의 나눠 먹기식 운영과 비판과 견제 그리고 대안 제시라는 야당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고 당내 개혁의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비난과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길 밖에 없겠다」 생각한 겁니다. 「하면 9월 정기국회 전인 지금 이때 해야 한다」그리고 「비난은 나중에 잘함으로써 회복하자」이렇게 결단을 내린 겁니다. 이번에도 아까 말한 그 느낌이 온 겁니다.
『6·27선거에서 민주당이 성공한 이유』
- 6·27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일 큰 원인은 반사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YS정권이 실패한 데 대한 반사이익이지요. 두 번째 원인은 민주당의 차별성입니다. 그것은 이제 新黨으로 옮겨 왔는데, 민주당은 민주주의를 위해 수십년 동안 싸우고 그러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던 사람들이 모인 정당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부 재야나 학생들의 극단주의를 반대하고 의회주의를 고수했습니다. 또한 지난 20년간 평화적·단계적 통일 논의를 착실하게 발전·정착시켜 마침내 남북 양쪽의 정권조차 수용 내지는 공감하게 만든 정당입니다』
- 반사이익이란 金永三 대통령을 지지하던 보수 중산층이 金대통령에게 실망하여 민주당 쪽으로 표를 던진 것이지요. 이런 경향이 다음 총선에도 지속되리라고 보십니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金대통령은 아직 패배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큽니다. 金대통령이 패배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증거로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金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가장 불안을 주는 분야는 통일정책입니다. 어떤 때는 초강경으로 나갔다가 어떤 때는 초저자세로 나아갑니다. 저자세를 넘어서 굴욕적인 것이 이번 쌀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북핵문제 일괄타결과 카터 防北을 주장했을 때 金대통령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美北합의가 이뤄지자 사흘도 못 가 수락을 했어요. 결국 국가적 위신과 위치만 약화시키고 계속 수세로 몰리는 겁니다.
그 동안 핵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나라가 북한 외교에 판판이 졌어요. 그쪽 사람들은 한 자리에서만 5~10년씩 일한 전문가이고 그 동안 中·蘇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익힌 노하우도 만만치 않습니다. 깔봐서는 안 됩니다.
북한을 다룰 때는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은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방하지 않으면 망한다. 그러니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아라」는 식으로 느긋하게 대하면서 미국과 일본과의 협조만 유지하면 됩니다. 즉 남북 협력 없이 北美관계도 北日관계도 개선될 수 없다는 원칙만 확실히 하면 되는 겁니다. 조건은 우리에게 유리한데 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지 걱정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통일을 국내정치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북한에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 약점을 잡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쌀 주면서도 한국産이라는 표시도 못하고 15만t이나 되는 쌀을 주면서 뺨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일지 몰라도 지정학적으로는 큰 나라입니다. 지금 남북 합해서 7천만의 인구이면 세계 15위입니다. 경제 규모는 남한만 가지고도 12위입니다. 세계에 180개 국가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남북통일이 이뤄지면 21세기 초반에 아마 세계 5대 국가 안에 들게 될 겁니다. 지금은 민족의 상승기입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저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바른 정치만 하면 잘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北核문제 괜히 끼어들어 경수로만 떠안은 꼴』
- 지난 94년 가을 미국과 북한간의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우리 정치권의 반응을 보면 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여당은 반론을 제기할 입장이 아니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언론에서만 문제를 제기했지요.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당시 언론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야당이 의무적으로 반대를 해야 정부의 입지가 오히려 강화되는 것 아닙니까?
『북한 핵문제는 법적으로는 유엔과 북한 사이의 문제입니다. 미국은 유엔을 대표하여 북한과 회담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기술적으로 관여하고 있지요.
미국은 북핵문제를 통해서 장래의 핵문제로 즉 NPT연장과 핵강대국의 지위를 보장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핵 제조를 우려한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과거의 핵문제 즉 북한이 핵을 한두 개 가졌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요.
결국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북핵문제에서 당사자가 될 수 없었던 겁니다. 북한이 핵협상 당사자가 된 것은 우리와 달리 NPT조약을 안 지키고 핵을 가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문제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놔둬도 미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어 있고 그러다가 보면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주게 되거나 상당한 부담을 지게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괜히 끼어들어 당사자 노릇도 못하면서 경수로만 떠안게 된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북합의서에 의해 만들어진 핵통제위원회를 통하여 북의 과거 핵을 따지는 문제입니다. 정작 할 일은 안하고 남의 이야기만 한 겁니다』
- 1993년 8월 25일에 김 위원장님이 저와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93년 10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그 인터뷰에 제가 후기를 썼습니다. 얼마 전에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金위원장은 정계를 은퇴한 것이지 정치를 은퇴한 것은 아니다. 800만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정치를 떠날 수 없다. 金永三 대통령의 실패가 金大中씨를 정치로 불러낼 것이다. 金大中씨가 정계로 돌아오는 시점은 1995년 지방자치제 선거 전후일 것이다. 그것은 地自制에 대한 金大中씨의 평소 집념으로 보아…」
결국 金위원장께서 저의 입장에서는 「예측가능한 정치」를 한 셈입니다. 요즘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자들이 「정치를 안한다더니 왜 약속을 어겼느냐」는 질문을 하지요. 그때마다 金위원장께서는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그리고 1980년 10월 金永三 대통령의 정계은퇴 선언을 예로 드시면서 합리화를 하려고 하시던데, 김대통령의 경우 정계 은퇴를 발표한 것은 상당히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행해진 것 아닙니까?
『우리들은 다 잡혀가서 감옥살이 하고 고문당하고 사형선고 받을 때 그럴 때 그 양반은 신변보호를 위해서 정치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했거든요. 보통 정치인도 아니고 지도자인데… 그러나 한 가지 강조할 것은 저는 정계은퇴의 약속을 못 지킨 것을 분명히 사과했습니다. 여기에 변명이 없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도박』
- 金위원장님의 이번 정계복귀는 인간으로서도 큰 도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기를 원하셨고 「무엇이 되는가보다는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 성공한다면 정치의 논리에 의해 위약을 하신 것도 다 용납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실패했을 때는 한 인간으로서도 굉장한 비판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번 일에 있어서는 정말 고민도 많이 하고 주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제 소신으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때로 비난 받고 욕을 먹고 일생을 망칠 우려가 있다 해도 국민과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면 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 즉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좋은 말 듣고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명예를 후세에 맡기고 결단할 것은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어떻게 사느냐의 또 하나의 단면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저에게 가장 큰 교훈을 주고 참고가 된 것은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의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에는 남쪽을 철저히 응징하고 규탄하겠다고 했지만 승리가 다가오면서 링컨의 판단은 달라졌습니다. 남쪽이 진 후에 남쪽을 철저하게 응징하면 결국 남쪽은 미국에서 떨어져 나가 적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링컨은 국민들에게 남쪽을 용서해야 한다고 설득을 했지요. 그때 그가 자주 한 말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그러나 악의는 누구에게도 갖지 말라」였지요. 국민들과 링컨의 공화당은 일제히 그를 비난했습니다. 링컨을 가리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했지요. 링컨은 자신의 본심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게티스버그에 사는 친구에게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링컨을 만나러 갔을 때 링컨은 앉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한 시간 반 동안 방안을 걸어다니면서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링컨도 그렇게 고통을 느꼈던 겁니다. 그래도 결단을 했던 겁니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때 링컨이 그 비난을 감수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면 미국이 두 개로 나뉘어졌을 것이라며 그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金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2년 반을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당이라도 잘 해야 하는데 이미 말한 대로 그럴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당 출현의 필연성이 여기 있습니다』
『金 대통령이 내 노리개를 다 빼앗아갔다』
- 한국정치는 지금 구조적으로 해체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기본적인 구도가 호남 對 非호남이었다면 이제는 PK(부산·경남)對 非PK구도입니다. 이제는 한 정당이 과반수를 넘는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어려워지고 다수의 정당이 생기는 식으로 지역이 세분화됐습니다. 그중에서도 충청남북도를 金鐘泌 총재가 통일했다는지, 보수층이 지난 6·27선거에서 金 위원장 쪽을 지지했다는 것 등이 새로운 현상인 것 같습니다. 金위원장께서는 오늘의 정치상황을 어떻게 보시고 앞으로 이런 정치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해 나가려고 생각하는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與건 野건 부자연스런 통합에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여야 모두 그러한 정치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해체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정치 전체의 구심점이나 방향타가 되는 대통령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점이 오늘의 정치가 이렇게 된 원이라고 봅니다.
첫째 부자연스런 통합에 대해서 말하면 金永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3당 야합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을 잡고 나니까 누가 더 몫을 차지하느냐가 문제가 돼 공화계가 떨어져 나가고 민정계도 내부적으로는 분리되고 있습니다. 이미 TK지역 사람들의 마음은 떴고 이제 PK국회의원들만 남아 있습니다. 3당구조는 사실상 끝난 셈입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무리하게 야합을 한 결과지요.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신민당과 민주당이 통합했는데 무리한 통합이었어요. 7석밖에 안된 정당에 60여석 가진 정당이 당명도 양보하고 공동대표 해주고 동수(同數)의 집단지도 체제를 해주며 大 야당의 당수가 되도록 도와줬는데 결국 화학적 통합이 못되고 모래알처럼 분열되는 과정을 거쳤어요. 내가 사력을 다해서 李基澤 총재를 밀어 당권을 잡도록 했는데 자기 계보의 이익을 위해서 경기도 지사를 양보 못한다는 데서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야당은 수권정당이 돼야 하는데 「한지붕 10가족」이 돼 총재 1명, 부총재 9명이 당직을 하나씩 갈라 먹습니다. 작년에 하위 당직 하나 결정하는데 7개월이 걸렸어요. 파벌은 있어도 당은 없습니다. 심지어 말단 당원까지 계보를 갖고 있어요. 당선가망 없는 조직책을 갈 길도 없습니다. 이러니 개혁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세 번째는 金대통령의 리더십인데, 리더로서의 덕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어요. 자기 당내에서는 민정계와 공화계를 하나로 품어 안는 포용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야당이나 정적(政敵)에 대해서도 너무 협량했습니다. 특히 나와 아태재단에 대해서는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8월 13일이나 8월 14일에 해야 할 광복절 사면복권 발표를 우리가 창당발기인대회를 하는 날에 하는 것 보십시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이 정도로 반대파에 대해서 여유가 없습니다. 언론에 대해서도 우리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도청·감시·파괴공작을 군사정권 때보다도 실제 더 합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가지고 있는 시간을 보낼 「노리개」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서 그걸 다 빼앗아버린 겁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다시 정치를 하게 된 면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정치에 다시 끌어온 것도 金永三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난번 6·27선거지원에 나가서 연설하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10년 먹은 체증이 다 내려가더라니까요.
『大選이후 金대통령과 한 번도 못 만났다』
- 그런데 그동안 金 대통령과는 몇 번 통화하셨습니까?
『한 번도 안했어요. 선거 끝난 직후 축하전화 한 것 외에 한 번도 없었어요. 아마 그때도 제가 전화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영국서 돌아온 다음에 두 번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그쪽에서 다 취소했어요.
제가 외국 나가서 가장 곤란한 질문이 「당신 金대통령과 그동안 몇 번 만났느냐」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못 만났다」고 하면 모두 놀라면서 「그 이유가 뭐냐」고 또 물어요. 그러면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려요. 이럴 땐 정말 국민으로서 수치를 느껴요』
- 앞으로 우리 정치가 재정립되기 위해서는 主題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중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가 내각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金위원장의 입장은 「지금은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한다. 그러나 다음 총선 때 결과를 보고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내각제를 지지한다면 따라가겠다」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고 한 다음 그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국민을 설득하든지 해야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습니다. 과거 兪鎭午 박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나는 내각제 신봉자다. 그러나 대통령제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민이 바라기 때문에」라고. 저도 동감입니다.
내각제와 대통령 중심제가 하나는 惡이고 하나는 善이라면 제 태도가 기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거에요. 중요한 것은 운영이지 제도가 아니에요.
민주주의 원칙에서 보면 다 똑같은 善인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국민의 뜻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의견은 있습니다. 저는 선거 때 대통령 중심제가 좋다고 할 거에요』
『내각제 하려다 재벌중심제 될 수도』
-그러면 다음 선거에서 새정치연합이 제 1당이 된다면 그건 대통령 중심제를 원한다고 봐야 합니까?
『그것은 이번에 당의 정책을 세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개인으로서는 대통령 중심제를 가지고 나가지만 당이 정할 문제니까 제가 꼭 혼자서 말할 수는 없지요』
- 내각제가 과거의 대통령 직선제처럼 국가가 진행하는 방향과 맞아떨어져 대세가 될 가능성은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크게는 안 봅니다. 내각제에 대해서 제가 걱정하고 경계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남북대결이 완화된다고 해도 상대의 강력한 지도자와 협상이 필요한데 강력한 리더십 없이 흔들려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각제를 하면 안정되고 전통 있는 정당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데, 과연 내각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의원과 정당이 하루아침에 성숙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각제가 되면 의원이 재벌에 예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국은 주식이 분산돼 회장이나 사장이 모두 재산이 없는 전문 경영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재벌은 회사 돈 외에도 자기가 쓸 수 있는 비자금을 수백억 가지고 있고, 이들이 국회의원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시대 때 일본에 미쓰이와 미쓰비시 두 재벌이 있었는데 당시 兩大 黨으로 있던 민정당과 정우회 두 당을 이들 두 재벌이 좌우했어요.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재벌이 국회의원 매수하는 것은 문제 없잖아요. 이 세 가지가 내각제 하는 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잘못하면 대통령 중심제 없애려 하다가 재벌 중심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렇습니다』
- 정치의 주제가 뭐가 되어야 하느냐가 나라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金위원장처럼 큰 정치가일수록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식탁에서 무엇을 주제로 얘기하도록 하느냐, 말하자면 아젠다(agenda)를 만드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정치의 주제를 뭘로 만들어가실 생각입니까
『하나는 지역 간의 화해입니다. 군사정권 34년 동안 산산이 갈라놓은 감정을 하나로 합해야 합니다. 이번 선거결과가 과거 차별받던 지역이 뭉치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호남·충청·TK·강원 말입니다. 서울이나 경기도는 지금까지 큰 차별을 안 받았기 때문에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이 없지만 다른 곳은 안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방자치를 통해서 지방등권시대가 왔습니다. 과거처럼 중앙정부가 특정지역만 비호하고 나머지는 차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방정부는 서로 협력하면 득이 되고 할거주의를 하면 손해이므로 지방정부는 지방정부대로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협력하게 됩니다. 인접 시·도끼리 하천의 관리·공해대책·관광 등 협력할 일이 많습니다. 정부도 이렇게 유도해야 하고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화합을 기초로 해서 남북화합으로 가야 합니다. 남한 내 화합 없이 남북화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참여」가 중요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아무리 대통령이 정치를 잘해도 국민이 참여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金永三 정부의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국민과 함께 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옛날 군주정치는 임금이 혼자 한 것이지만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이니까 참여시켜야 해요. 지역 간의 화합과 국민참여 이 두 가지가 지금 우리 정치에 있어 가장 급선무라고 봅니다. 여기서 계층간의 화합 여·야간의 화합도 나오고 국민의 총 참여에 의한 국정의 운영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북문제도 자신 있게 그리고 북에 대해서도 당당히 추진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21세기는 중소기업시대』
金위원장은 대화합 이외에 통일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그리고 문화를 중요한 이슈로 꼽았다.
『통일 문제에도 국민을 참여시켜야 합니다.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부 앞으로 창구를 일원화해야 하지만 남북접촉은 창구 다원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나옵니다. 앞으로 우리 경제가 중소기업 시대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보호육성 차원이 아니라 중소기업 체제가 경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0세기는 소품종 다량생산의 대기업 시대였지만 21세기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중소기업 시대입니다. 이제는 소비자가 획일적이 아닌 다양한 물품을 찾습니다. 대량생산은 못하게 됩니다.
예를 하나들면 미국의 어떤 세계최대의 전기기기 제조회사는 한 기업을 1300개 중소기업으로 갈랐습니다. 전부 회계가 다릅니다. 학자들은 새로운 경제 아래서 사회는 최고로 전문화돼야 하고 기술은 최고로 정밀화돼야 하며 생산은 최고로 차별화되어야 하는데, 이 차별화는 중소기업만이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세기는 경제와 군사력이 국력이었는데 21세기는 경제와 문화가 국력입니다. 문화가 과거와 같이 정신적 가치를 높이는 것뿐 아니라 대단한 경제적 가치를 갖고 나옵니다. 미국의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쥬라기공원」이 우리 자동차 150만대 수출에 맞먹는 8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이지 않았습니까?』
『북한 개방시키면 우리가 이기는 것』
- 지금까지 말씀하신 정치의 이러한 큰 주제가 잘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 우리의 안보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남북한 상황을 굉장히 위험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주로 주한 미군 쪽에서인데, 한반도의 전쟁위험이 앞으로 1~2년 사이에 가장 높아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북한 군사력은 지금 피크에 도달해 있는데 앞으로 2~3년 지나면 그 부품 공급이 제대로 안된 것이 누적돼 힘이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전쟁을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찬스라는 겁니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로서는 개방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탈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선택은 전쟁이냐 자체 붕괴냐인데, 이 때문에 전쟁에 더 유혹을 느낄 겁니다. 여기에다 권력층 안에서 어떤 내분이 일어나 김정일이 자기 입장이 불리하다고 느낄 때 전쟁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앞으로 2년 사이 한국의 정치 권력 게임이 피크에 달할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게 전쟁을 유발하도록 하는 초대장을 낼 수도 있다고 하는 등 안보면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시각이 있습니다.
『저는 안보를 중시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안보가 위기에 있고 1~2년 사이가 피크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첫째 김정일은 개방하려고 합니다. 이미 다 정해졌고 시작했습니다. 미국과의 핵무기 해결이 이미 개방을 결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 내에서 강경세력들의 저항이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등소평이 지난 78년에 정치에 복귀한 후 완전히 개방한 것이 92년 남순강화 때였습니다. 14년이 걸린 것입니다. 북한도 일거에 할 수는 없습니다. 개방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하면 망하니까 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북한의 최대 정책이 「親美·接日·反韓」이에요. 미국과 일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WTO체제 아래서는 10년 내에 경제의 국경이 없어집니다. 개방 안할 길이 없습니다.
金正日의 리더십도 확실합니다. 다음으로 무기 노후화 문제가 있는데 이 경우 북한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전쟁이 있을 수 있고 하나는 핵무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매년 50억 달러의 무기를 사는데 북한은 하나도 못 사와요.
20년만 지나면 남한은 1천억 달러의 최신무기를 사오고 북한은 단 1불도 못사옵니다. 북한이 초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북한은 핵무기밖에 없지요. 그러니 북한은 핵무기와 남한인구를 두 번 없앨 수 있는 화학무기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핵무기나 화학무기 포기를 실현시키려면 남북한의 전통무기도 밸런스를 맞춰야 합니다. 상호신뢰가 와서 군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축을 먼저 해야 상호신뢰가 오는 것입니다.
부시가 전술핵을 철수하니까 北도 UN에 가입하고 남한과 남북합의기본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군축을 먼저 하니 서방세계가 신뢰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강자입장이니까 어떻게 하면 북한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易地思之(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판단해 해결해야 합니다.
북한은 지금 강해서가 아니라 약하니까 강박관념으로 큰 소리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개방만 시키면 이기는 것입니다. 경계는 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북이 만일 전쟁을 시작하면 초전에 어느 정도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반격으로 북한은 災(재)가 됩니다.
金正日 체제의 미래
-안보상황 판단의 전제조건이 북한이 개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저는 金正日 체제 하에서는 북한의 개방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개방 전에 개혁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金日成의 유일사상을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부정이 되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중국이 개방할 때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개방했습니다. 공산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방했어요』
-하지만 毛澤東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했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모택동 밑에서 나쁘게 행동한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지 모택동을 비난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안해요. 정신적인 상징입니다. 천안문에는 그대로 毛의 초상이 걸려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도 사회주의를 고수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도 중국처럼 이중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으로는 주체사상을 부르짖으며 한편으로는 개방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개방은 일단 시작하면 못 막습니다. 중국도 심천만 개방했는데 나중에 다른 곳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더구나 앞으로는 WTO 체제로 들어갑니다. 이미 말한대로 WTO 체제라는 것이 10년 내에 경제적인 국경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그렇고 북한도 여기에 저항할 수 없어요』
- 그렇다면 金正日 체제는 어떻게 된다고 보십니까.
『누구도 예단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 체제는 현재는 분명히 확고하지만 앞으로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여부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경제를 회복해 북한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다른 하나는 북한 사회의 개방과 경제의 시장화에 따라 정치의 경직성을 수정할 수 있느냐인데 두고 볼 일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미국이 봐주면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安保觀에 대해 물어 보겠습니다. 아까 남북간 신뢰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군축을 먼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신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북한과 진정한 화해를 하려면 우선 안보가 튼튼해야 하고 이걸 바탕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을 안심시킨 후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에 대해서도 체념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가 진짜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국방비를 증액해서라도 우리의 안보를 더욱 확실하게 해놔야 진정한 남북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군축이 아니라 군비증강을 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우리가 GNP로 환산해 북한보다 5배, 6배 군사비를 쓰면서 북한보다 우리의 안보가 약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金정권 들어선 이후 군내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사기가 떨어진 점을 더 걱정합니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많이 사와도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사관들의 후생복지와 제대후 사회진출을 위한 교육 등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단순히 무기증강만 국방이라 생각하지말고 사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대우개선, 군복무자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 등이 있어야 합니다』
『金日成의 죽음을 애도하라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軍의 사기가 엉망이어서 만약 전쟁이 나면 과연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게 걱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념상의 혼란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병사들이 왜 DMZ에서 총을 들고 북한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렇게 만드는 것은 후방에 있는 정치권과 일부 좌익 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金위원장께서는 金日成이 죽고 나서 조문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총을 들고 북한을 바라보는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金日成을 민족의 원수라고 배웠는데, 그 원수에게 난데없이 조문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이념적인 혼란을 조장해 온 정치인들이 자숙하는 게 우리 군의 사기를 높이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趙부장과는 의견이 다릅니다. 클린턴도 조문했습니다. 제가 여러번 얘기하지만 조문에는 가서 喪主 손잡고 함께 눈물 흘리면서 하는 애도의 조문이 있고 체면상, 사업상 안가면 욕 얻어 먹으니까 하는 외교상 조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원수라면 왜 정상회담은 하려고 했습니까. 역대 대통령이 다 그랬습니다. 정상회담 하려고 金대통령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까. 정신적으로 「안됐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조문 안할 거면 가만이나 있지, 지금 사람 죽어서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거기다 왜 감정을 악화시키는 얘기를 합니까. 그것이 오늘날 남북관계의 경색을 가져온 결정적인 구실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을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창당하는 데 돈은 별로 안들었다』
-조문을 안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경색된 게 아니고, 북한이 하기 싫으니까 그것을 트집잡아 경색시킨 것으로 봐야 되지 않습니까.
『구실을 주었다는 이야기지요』
-미국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논쟁을 할 때 공화당의 논객인 진 커크 패트릭 여사가 민주당을 비판하면서「저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을 먼저 비판한다(Blame America first)」고 했습니다. 우리 경우도 남북문제가 있을 때 이중 90%는 북한의 책임인데도 오히려 남한의 책임인 것처럼(Blame Korea first) 자학적인 자세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3월에 제가 남북문제에 대해 연설할 때, 북한에 대해 10여개 항목에 대해서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면 경수로 문제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라, 남북대화에 즉시 응하라는 것 등 북한에 대해 할 말 다했습니다.
이번 쌀 문제도 북한이 배를 억류한 것은 잘못이라고 엊그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남북문제 가지고 야당과 협의를 하지 않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4천억설, 괴문서 등 돈이 政街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金위원장의 정치자금 모금에 대한 괴문서가 저희한테 들어오기도 했고요. 새당을 만들려면 돈이 수백억원 들텐데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창당을 시작하셨습니까.
『(웃으면서) 그런데요, 괴문서는 기관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가지 복잡한 것을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정보도 있고요. 그 괴문서에는 저도 모르는, 제가 포항제철에서 1백50억원을 받았다고 써있는데, 저는 일생에 포항제철에서 쓴 차 한잔도 얻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4천억원설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신당 창당 과정에서 당사 임대비용에 8억원이 들고 전당대회를 하는데 많이 들면 5억원이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돈 많이 안 들어요. 그리고 당의 체제를 중 중당당의 부서는 11개에서 5개로, 국장도 한 부서에 4,5개 있던 것을 1,2개 정도로 하는 등 대폭 축소합니다. 경비절약이 크게 될 겁니다.
당내에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특별당비로 1,2억원씩 내고 저도 한 3,4억원 냈습니다. 그러니까 돈이 몇백억원이 들 이유가 없어요. 20억 이내면 됩니다. 창당대회하는데 돈 걱정 하나도 안하고 있어요』
『4천억說 납득 될 때까지 조사해야』
-徐錫宰 장관이 말한 4천억원 비자금설에 대해서 그동안 기자들에게 말한 것을 보면 金위원장께서는 그것을 거의 사실로 믿고, 검찰이 끝가지 조사해서 밝힌 후 이게 안되면 국회에서도 조사하겠다고 하셨는데···.
어느 신문이 納凉笑劇이라고 했듯이 검찰 발표를 보면 徐장관이 헛소문을 경솔히 판단하고 기자들에게 경솔히 얘기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저도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데, 이게 아니라는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
『(가볍게 웃음) 첫째 봅시다. 徐장관은 대통령의 최고 측근이고 현직 총무처 장관입니다. 그 분이 말하자면 건달들의 뜬 소문을 듣고 얘기했다는 것인데, 믿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에요. 4천억원이다, 전직 대통령이다, 50%의 先수수료를 준다, 정와대 특정 비서관과 국세청장과 상의했다는 등 너무도 분명합니다.
거기다 徐장관이 조사과정에서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는 6월17일 부산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8월1일에 처음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咸承熙 변호사가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확인했는데, 위에서 못하게 해서 그만 뒀다」고 하고 있지 않아요. 자기가 자료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검찰이 수사 안합니까. 언론이 보도한 대로 작년 2월부터 4월까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추적하다 그만뒀다고 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現 정권이 선거때 신세졌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특별검사라도 해가지고 납득될 때까지 조사해야 합니다. 이래도 없으면 깨끗하게 의심이 해소될 것 아닌가요.』
-88년 5共비리가 한창 문제가 됐을 때 당시 평민당이 5共비리 의혹이라고 밝힌 30여 가지 항목 가운데 全斗換 煎 대통령이 호주에 재산을 도피시켰다고 한 대목이 있는데 사실로 확인 안 됐고, 다른 부분에서도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金위원장이 月刊朝鮮 8월 호에 보도된 「鄭鎬溶 의원과 1백억원」이라는 기사에 대해서 민정계가 당을 떠나는 것을 발목잡기 위해 정권측에서 정보를 흘린 것 아니냐는 언급을 하신 걸로 보도를 동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 4천억원설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사실로 확인된 것을 가지고 전직 대통령을 추궁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의심이 간다든지 철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괜찮지만 이게 사실이라고 공언하면 명예훼손 문제가 생기는데,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 동네북이라 하더라도 사실 확인 없이 정치공세 차원에서 제기하면 우리 사회가 너무 불안해지고 사회적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咸변호사의 경우도 「대통령의 비자금을 찾아냈다」고는 안하고 단지 어느 신문에서 유추해서 보도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믿으신다면 金위원장의 정보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제가 지어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현직 총무처 장관이 두 번이나 그 말을 장소를 달리해서 한데서 시작된 것인만큼 우리가 추측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때 들었던 記者들을 대질한 적 없습니다. 자기가 혼자 얘기해 놓고 기자들이 잘못 썼다고 했는데, 왜 기자들과 대질하지 않습니까. 이러니 검사가 수사를 했다고 볼수가 없어요. 4천억원이 있다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고 의혹이 있으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것입니다.
최대의 금융 스캔들의 주인공인 李源祚씨를 조사하지 않는 것을 보세요. 사정이 정부의 뜻대로 좌지우지돼 불공정하게 행사되니 의문이 크다는 겁니다. 咸변호사 件도 조사해 보라는 겁니다』
국민들의 뜻을 아는 방법
-金위원장께서는 국민들이 원한다면 다음 大選에 출마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국민들이 金위원장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선거를 치러 當落으로만 알 수 있는데.
『그거야 국회의원 선거도 있고 국민 여론조사기관도 있고, 당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하면 알 수 있지요. 물론 마지막에는 제 책임 하에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새정치연합이 추구하는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입니까?
『정치경제적으로는 그렇죠.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 말하자면 보수정당도 아니고 혁신정당도 아닌 중도입장에서 중소기업과 중산층을 중점으로 생각하는 국민정당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自民聯과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자민련은 아예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다고 표방했습니다. 만일 그에 충실한다면 남한에서 자민련이 최초의 계급정당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정치회의는 사실상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하는데, 현대 사회에서 정당이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다른 정당들은 입으로는 뭐라고 말했건 실제로는 대기업과 재벌을 대변해 온 것입니다. 정말로 중산층을 대변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당은 대기업이나 부유층을 敵으로 삼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당의 차이점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딱딱한 질문만 한 것 같습니다. 요새 노래방 같은 곳에 가십니까.
『가끔 갔어요. 한두번 갔습니다』
-요즘 즐겨 부르시는 노래는 무엇입니까.
『노래 못 불렀어요. 노래를 듣기는 하지요. 가곡이나 국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국악은 장단도 조금 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듣고도 그냥 잊어버리니까. 그런데 요즘 왜 「서태지와 아이들」이 안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태도를 보고 상당히 감명받은 적이 있어요. 제3집 「발해를 그리며」인가(정확히는 「발해를 꿈꾸며」임)였는데, 거기에 그걸 만든 이유를 설명해 놨더라구요.
그걸 보니 서태지가 말하기를, 「통일을 왜 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말에 놀라 「이래서는 안된다. 젊은이들이 통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해서 만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김건모 노래라든가 이런 노래는 재미는 있는데 마음에 크게 다가오지는 않고 도대체 그들의 노래를 따라부르기는 전혀 불가능해요. 역시 김동건씨가 월요일에 하는 「가요무대」가 제일 쉽더라고요』
-18번은 무엇입니까?
『남일해의 「이정표」와 「고향의 봄」을 좋아합니다』
-목포의 눈물이 애창곡은 아닙니까.
『그것도 들어가지요』
차라리 감옥에 가고 싶을 때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
『21세기위원회에서 만든 「2020년」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독서는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하십니까.
『제가 독서하는 사람들한테 자꾸 권하는 것이, 독서는 읽고 생각을 안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많이 읽거나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읽으면서 반드시 생각하고 내것으로 소화해야 해요. 저는 사실 알려진 것보다 독서량이 많지는 않아요. 단지 정독을 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요』
-독서하는 방법을 보면 하나는 마치 영화를 보듯이, 책 읽는 것이 즐거워서 하는 분이 있고 책 속에서 어떤 지식을 취해야 되겠다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인격에 도움이 되고 진정한 교양이 되려면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책을 읽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책 속에서 어려운 진리를 배우는 것도 즐거운 것입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책을 읽다 보면 어떨 때는 「내가 여기에 안 왔다면 이 좋은 진리를 못 깨닫고 죽었을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감옥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감옥에서 나와 한동안은 좋은 책이 있는데도 읽지 못하면 초조해서 「감옥이나 다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이 말씀하신 대로 읽는 것 자체도 즐겁지만 거기서 배우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도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합해져야지요. 제 경험으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어려운 책도 기쁨을 줍니다』
-92년 대선 때 보니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분하고 책을 적게 읽는 분하고 붙었는데, 책을 적게 읽는 분이 이기더라는 농담도 있었습니다. 정상적 국가라면 책 많이 읽는 분이 이겨야 되는데….
『이번 지방자치 선거 보고 굉장히 부럽게 생각하고 나도 저런 기회가 있었으면 달라졌을 것이다 하는 것은 바로 TV토론이었어요. 우리 때는 한번도 못했거든요. 金泳三후보가 한다고 해 놓고 안해서. TV토론 했다면 제가 떨어졌던 최대 이유인 용공문제도 해명됐을 거고 과격하다는 이미지도 불식됐을 겁니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서 얻은 식견도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일평생 국민을 위해 헌신한 것을 설명하고 차별 없이 그들을 사랑한 점을 알릴 수 있었다면, 경상도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TV에서 말했다면, 오해가 많이 풀렸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대통령 선거에 세 번 나섰지만 한번도 공정한 선거를 해보지 못한 셈입니다. 지자제, 언론의 공정보도, 선거자금의 조달 등 무엇하나 여당 후보와 대등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여유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토록 갈망하시던 地自制가 이루어졌고, 이제 지방정부에서는 사실상 집권야당이 돼 金위원장께선 이미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오는 97년 大選에서 金위원장과 金鍾泌 자민련 총재, 민자당에서는 金대통령의 내세우는 세대교체의 카드로서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 각각 후보로 나올 것으로 보는데, 동의하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죠』
-金대통령은 누굴 밀어 주리라고 보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총선 때 새정치연합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전과 같이 호남 對 非호남, 아니면 DJ 對 反DJ로 갈려서 反DJ에서 헤게모니를 찾으려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될 경우 대통령 선거에 나오셔도 또다시 당선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안 나가야지요. 결국 우리 새정치국민회의의 차별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국민과 민족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해내는데 가장 적임자다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이제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김종필 총재와 최근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날 계획도 없으십니까.
『필요하면 만날 수 있겠지요』
-오늘날의 정치를 보면 金대통령이 주도권을 놓친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과 같은 大赦免 등을 통해 金대통령이 앞으로 주도권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金대통령이 각계 인사를 초청해 식사도 하고 하지만 역시 정치는 정당이 하는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길을 놓고 뫼(산)로 가고 있어요. 조직적으로, 정치역학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상대와는 말을 안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과 말을 하니 별 소용이 없어요. 크게 방향을 바꿔야 해요. 그러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닌 국민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대통령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는 여유있는 자세, 덕성을 가지고 반대파 사람과도 情을 나누고 동지로서 인간적 관계도 맺고 예우해 가며 지내야 합니다. 국민적 의사통합 과정도 없고, 야당과도 대화 안하고, 이러면서 북한과 대화할 때 북한이 얼마나 정부를 약하게 보겠습니까. 김대통령이 자신의 약화를 자초하고 있어요』
- 작년에 金대통령이 어떤 자리에서 金위원장이 첫째는 건강 때문에, 둘째는 약속을 깨는 순간 여론의 반발이 극심할 것이기 때문에 정계에 복귀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건강은 자신 있습니까.
『그렇죠』
-계산해보니 만약 97년에 대통령이 되신다면 21세기를 준비하는 대통령으로 퇴임할 때는 80이 되시는데….
『80은 아니죠. 그에 가깝죠. 하지만 아데나워처럼 84세까지 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체력과 정신력이지요』
-혹시 보청기를 끼십니까.
『한 1년 됐어요. 안 끼어도 들리지만 약간 불편한 정도입니다』
-당뇨같은 건 없으십니까.
『의사말은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과감해진 DJ
-현재 살아 있는 대통령이 세 분 계십니다. 이런 것이 우리나라 정치가 앞으로 밝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번 비자금件도 그렇고 정치계와 언론이 너무 이분들을 동네북으로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분들이 국정을 운영했던 노하우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것이고, 조금 있으면 金대통령도 전직 대통령이 될텐데···. 이분들의 좋은 경륜을 사회적으로 활용할 방법은 없습니까.
『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보복 등을 반대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잘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깨끗이 사과해야 합니다. 진상도 밝혀야 합니다. 어차피 머지 않아 밝혀집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12·12건 광주건 전부 변명만 하고 있어요. 이러니 그들을 용서하고 전직 대통령을 활용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정계은퇴를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세 번 나와도 당선이 되지 않으니까 은퇴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내가 정계은퇴를 한다고 했다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全斗煥씨나 盧泰愚씨가 12·12와 5·17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과했을 때 용서가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 분들이 진작 사과하는 태도를 취했으면 문제가 쉬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광주문제만은 진상을 밝혀서 恨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처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崔圭夏 前 대통령에 대해서는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정말로 국민을 무시한 사람이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내가 볼 때 그분은 자기가 중대한 약점을 잡히지 않은 이상, 그의 현재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국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터뷰는 질문자(趙甲濟)에게 있어서 金大中 위원장과의 일곱 번째 만남이었다. 약 10년에 걸친 인터뷰 기간에 金大中 위원장의 말이 변화해 간 것을 점검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변화는 변절이 아니라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자신을 적응시켜가는 노력의 결과일 수가 있다. 그것은 金위원장이 엄청난 노력가이며 현실주의자란 반증도 된다.
1994년 12월9일에 있었던 인터뷰 때와 비교해서 이번에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金위원장의 언론자유 확대이다. 특히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과감한 비판은 전에는 없었던 행동이었다.
이것은 金위원장이 정계에 복귀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金泳三 대통령의 권력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회복했음을 엿보게 해 준다.
질문 : 趙甲濟 월간조선 부장
정리 : 姜仁仙 梁根晩 월간조선 기자
"金泳三 대통령이 나를 다시 불러냈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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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18, 1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