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가 샤를르 드골은 1970년에 80세로 사망하였을 때 유언에 의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고향에 묻혔다. 그는 죽기 전해 대통령職을 사임하였다. 행정개혁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스스로 물러나 고향 콜롬베로 돌아갔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동맥경색으로 急死하였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함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參禮하는 것을 금하였다. 2차대전 때 프랑스 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戰友들의 참례만 허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聖堂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가졌다.
드골은 조촐한 자신의 墓碑에는 이름과 生歿(생몰) 연도만 쓰라고 유언해 놓았다. 그래서 이렇게만 새겨졌다.
'Charles de Gaulle, 1890–1970'.
그는 은퇴후에 대통령의 年金을 받지 않았다. 다만 대령계급에 해당하는 年金만 받았다. 유족은 그의 死後 관리능력이 없다고 하여 그의 저택을 팔았다.
드골은 1940년 국방차관으로서 敗戰을 맞았다. 프랑스군이 히틀러 군대에 大敗하자 그는 런던으로 망명, 자유프랑스군을 조직, 抗戰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서 지지는 않았다'는 연설이 유명하다.
그의 抗戰에 호응,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연합군과 함께 파리 등 프랑스 수복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얄타 회담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프랑스는 戰勝國 대우를 받고 독일 분할 점령 통치에도 참여하고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드골의 공이었다.
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일하던 그는 戰後의 政界 분열에 실망, 은퇴를 선언, 고향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알제리 독립문제로 국가가 혼란에 빠지자 1958년 다시 국민들이 그를 불러냈다. 드골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改憲하여 만성적인 정치불안에 종지부를 찍고(제5공화국 출범) 알제리를 독립시켜주었다. 독립반대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企圖가 있었고 알제리 주둔군의 쿠데타도 진압하였다.
드골의 治下에서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核무장을 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등 미국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었다. NATO의 작전통제권에 프랑스군이 들어가는 데 반대한 드골은 NATO엔 머물면서도 프랑스군을 빼버렸다. 퐁텐블루에 있던 NATO 사령부도 밀어냈다.
그의 임기중 프랑스는 처음으로 국민총생산 부문에서 영국을 앞섰다. 그의 死後에도 드골 노선은 프랑스 정치의 主流로 이어지고 있다.
드골의 가족장 이야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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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19, 07: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