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바다를 누빈 노장(老將)에게도 한 순간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지난 7월 30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출항한 29톤급 오징어 채낚이 어선 ‘800 연안호’가 조업 중 나침반 고장으로 항로를 이탈, 북방한계선(NLL)을 지나 북한 해역에 진입한 뒤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비정을 따라 원산항까지 끌려간 연안호 선원들은 약 한 달 동안을 독방에 감금된 채 갖은 조사와 심문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선장 및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밤을 지새웠으나, 선원들은 결국 다행스럽게도 지난달 29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4일 기자가 귀환납북자가족협의회 고명섭 회장 일행과 함께 약 6시간을 달린 끝에 강원도 고성군을 찾았을 때 동해바다는 맑은 하늘 아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푸르고 청명했다.
한 달 전 연안호가 출항했던 거진항에는 여전히 여러 척의 어선이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어민들은 분주히 손을 놀리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마치 무사 귀항을 염원하는 듯 갈매기들이 쉼 없이 날고 있었다.
남북을 잇는 유일한 육로(陸路)인 남북출입관리사무소가 소재한 고성군은 금강산을 경계로 해서 북한의 강원도 통천군과 접경하고 있으며, 군(郡) 자체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남한의 최북단 지역이다. 아직도 6.25 당시 매설된 지뢰가 상당수 남아있어 지난달 인근 8군단 병력이 동원돼 약 1천개의 지뢰를 제거하기도 했다.
연안호 나포 사건 당시 3명의 선원과 함께 북한에 억류된 선장 박광선(54)씨의 자택은 거진항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박 씨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일행은 우연찮게도 길에서 박 씨의 부인 이아나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전 날 남편이 정부합동조사반에 이어 해경 조사까지 모두 마친 탓인지 이 씨는 처음에는 외부인, 특히 언론의 접근을 극도로 경계했다.
어렵사리 설득한 끝에 자택에 들어가자 박 씨가 일행을 맞이했으나, 자리를 잡고 앉은 이후에도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끝에 기자는 박 씨 부부의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비로소 녹음기를 꺼낼 수 있었다.
[‘독수리’와의 교신에서 빚어진 착각. 그리고 항로이탈]
박 씨는 다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서글서글한 눈매로 한 눈에 봐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간 계속되었던 극도의 긴장이 갑자기 풀어진 탓에 지금은 심신이 모두 쇄약해진 듯 했다.
그는 연안호를 몰고 나갔다 나포되기 직전에 있었던 상황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 씨에 따르면 29일 고성군 일대에서는 속초와 주문진 앞 바다에 어종(魚種)이 많이 몰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 날 연안에서의 조업으로 얼마간 수확을 올렸던 박 씨도 지인들로부터 권유를 받아 3명의 선원들과 함께 연안호를 이끌고 거진항에서 출항했다.
전 날 박 씨는 어선의 항로 결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프로타(GPS를 지칭)’를 업그레이드를 위해 경기도 평택에 본사가 있는 OO전자에 맡긴 상태였지만 함께 출항한 어선 OO호가 위성항법장치를 갖추고 있었기에 안심했다고 한다. 일정 거리를 함께 항해한 후 OO호는 북쪽으로 나아갔고, 연안호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29일 오후 8시부터 조업을 시작했지만 소문과 달리 별다른 소득을 올릴 수 없었다고 박 씨는 회고했다. 그는 며칠간 몰린 피로감 때문에 9시쯤 잠을 청한 뒤 약 세 시간 뒤인 11시 40분에 깨어났지만 그 때도 갑판이 텅텅 빈 것은 마찬가지였다.
바다를 가득 메웠던 다른 어선들도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가운데 새벽 12시가 되자 선원들은 야참을 먹기 위해 조업을 중단했으며, 박 씨는 생각 끝에 서해로 이동할 결심을 굳힌 뒤 장거리 이동 준비를 위해 선원들에게 귀항을 지시했다.
12시 40분 경 바다에 부려진 장비를 모두 걷어 올린 연안호는 그때껏 잡아 올린 어종들을 여섯 박스에 나눠 담은 뒤 뱃머리를 돌려 거진항으로 귀항하기 시작했다. 약 20년 동안 바다를 일터로 삼아 온 박 씨는 경험과 노련함에 의지해 콤파스(나침반)를 264도로 조정했다.
그는 설사 나침반에 에러(오차)가 있더라도 0.4~0.5정도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의 미미한 오차라면 그 위치에서 나침반을 264도로 조정해도 거진항에 들어가는 것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 때 까지만 해도 박 씨는 나침반이 고장났으며, 연안호가 서해가 아닌 북한으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거리 항해는 수동 운항이 어려운 탓에 당시 나침반은 연안호의 자동화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침반을 조정하면 연안호는 그 항로를 따라 자동 항해하도록 되어 있었다. 연료도 30일 아침까지의 분량만을 싣고 왔기에 서둘러 귀항해야만 했다.
3시간 정도 항해하자 연안호보다 2시간 정도 앞서 거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린 어선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때 ‘독수리(해경을 지칭)’가 무전으로 소속을 묻자 함께 있던 OO호가 보고를 했다.
그리고 약 10분 뒤 해경이 다시 무전으로 위도(緯度)상 북위 38도 24분선, 동경 129도 12분선 위치에 있는 선박을 호출하자 위성항법장치가 없던 박 씨는 주변에 다른 선박마저 없자 해경이 연안호를 호출하는 줄 알고 응답했다. 또 속초무선국(속초수협 어업정보통신국)에서도 무전이 오자 오전 8시 입항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그 때 박 씨는 해경과의 교신에서 연안호가 현재 북위 38도 24분선, 동경 129도 12분선 위치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거진항은 26분선이므로 24분선에서 계속 264도로 ‘배 질(항해)’하다 보면 경험상 틀림없이 항구 남쪽으로 가게 될 것이므로 그는 나침반을 다시 278도로 꺾었다.
그렇게 약 1시간 40분 가량을 항해하면서 연안에 몰려있는 작은 어선들을 보자 박 씨는 비로소 안심하고 귀항한 뒤 해야 할 일에만 골몰했다. 하루 종일 계속된 고된 어업(漁業)으로 인한 피로를 씻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문득 쏟아지는 졸음에 간간히 눈을 감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쯤 왔을까, 30일 새벽 6시경이 되자 레이더 상에 약 3마일 전방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큰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연안호가 예정대로 거진항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박 씨는 우리 해양 경비정일 것으로 판단하고 그대로 연안호를 직진시켰다. 하지만 그 때 한 순간의 착오가 연안호와 선원들을 30일 간의 납북(拉北)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북한 경비정은 북한 해역을 침범한 연안호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연안호는 항구에 입항(入港)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니 두 배가 마주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
0.5마일까지 거리가 좁혀진 뒤 자리에서 일어난 박 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한민국 국기를 단 한국 경비정이 아니었다.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한 그가 망원경을 집어 들어 바라보자 경비정 갑판에는 이미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연안호를 향해 조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때야 박 씨는 일이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을 알았다.
불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놀란 박 씨가 무전기를 집어 들고 긴급히 수협속초 어업정보통신국을 호출했으나 하필 그 순간에 신속한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비상주파수로도 여전히 연결이 지연되는 동안 북한 경비정은 연안호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제서야 비로소 연결이 이루어져 박 씨는 다급히 “큰일났다. 항로를 이탈한 것 같다. 북한 경비정이 와서 접안(接岸)을 요구한다”고 정보통신국에 무전을 쳤다. 정보통신국 측에서 위성항법장치 고장 여부를 묻자 그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박 씨에 따르면 당시 속초와 동해안 일대는 일순간 난리가 났다.
박 씨가 나침반을 264도로 조정한 뒤 다시 278도로 변경해 북한 해역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보고하자 양 측의 무전 내용을 듣고 있던 주변 어선들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북방한계선 남쪽 인근 해역에 있던 OO호에서 “실수했다”는 무전이 날아들었으며, 뒤이어 여러 선박에서 교신이 어지럽게 발생하자 심지어 누군가는 “조용히 하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기자와의 만남에서 박 씨는 당시 그 순간 무전에 혼선(混線)이 발생했다고 밝혔다(이 혼선은 국내 일부 언론이 연안호 월선 원인을 위성항법장치 고장으로 섣불리 보도하게 함으로서 이후 연안호 선원들이 심문과정에서 고초를 겪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북한 경비정이 코앞까지 다가와 접안을 요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용기를 내어 뱃머리를 남쪽으로 조심스럽게 돌렸다. 눈치를 챈 북한 경비정이 따라서 뱃머리를 돌리자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렸지만 군용선(軍用船)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북한 경비정이 급커브를 틀어 앞을 가로막자 박 씨는 두 선박이 충돌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연안호를 멈춰 세웠다. 범의 입 속으로 들어온 이상 사방이 모두 북한 해역인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도망갈 곳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배를 세우자 소총으로 무장한 북한 해군 병사 11명이 연안호 갑판 위로 뛰어내렸다. 그 중 4명이 선장인 박 씨에게로 다가왔으며, 북한 경비정이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박 씨에게 경비정을 따라갈 것을 명령했다.
총구가 바로 앞에서 이마를 겨냥하고 있는데 버틸 재간이 어디 있겠는가. 박 씨와 선원들, 그리고 연안호는 속절없이 북한 경비정에 이끌려 북한 땅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얼마나 기름졌으면 국수를 바다에 버려?”]
그렇게 연안호가 끌려가 처음 입항한 곳은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장전항이었다(고성군은 남북으로 갈라져있다).
장전항은 지난 98년 여객선 금강호가 남한 관광객 1천여 명을 싣고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입항하면서부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역으로서, 작년 관광 도중 북한 경비병에게 피살된 故 박왕자 씨도 이 항구를 통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장전항으로 인도한 북한 경비정은 연안호를 안까(닻)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외항에 그냥 띄워 놓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육지와 가까운 곳에 정박시킨 뒤 자신들은 바깥에서 연안호를 감시했다.
30일 오후 6시가 되자 북한 경비정은 연안호를 장전항보다 더 북쪽인 곳으로 끌고 들어가 닻을 내리게 했다. 그리고 어딘지도 모를 그 곳에서 약 이틀 간 정박하게 했다. 정박하는 동안 첫 날에는 박 씨와 선원들이 자체로 밥을 지어 먹었지만, 이틀째가 되자 북한 병사들이 국수를 한 사발 가져 왔다.
박 씨는 국수가 도착했을 당시 발생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국수가 도착했을 당시 박 씨와 선원들은 북한에서 식사가 제공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하고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군인들은 국수 두 그릇을 세 명의 선원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한 그릇은 통째로 박 씨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미 식사를 마친 그들이 이 많은 국수를 다 먹기는 불가능했다.
박 씨는 그래도 혹시 국수를 먹지 않으면 병사들로부터 해코지를 당할까 하는 걱정에 억지로 국수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반쯤 먹자 한계에 도달했다. 북한에 들어와 있으니 초긴장 상태라 더욱 목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박 씨는 귀환 이후에도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그는 남은 국수를 바다에 버렸다.
그런데 사실 그 때 박 씨 자신은 몰랐지만 큰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후에 강원도 원산의 ‘61연락소’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박 씨를 심문한 조사원들에 따르면 국수가 버려지는 것을 목격한 굶주린 병사들이 “얼마나 남쪽에서 기름져서, 배가 불렀으면 국수도 안 먹고 바다에 버렸는가”라고 발끈하며 박 씨를 해치려 했었다는 것이다. 월선 경위를 해명하기도 전에 단지 ‘국수’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박 씨와 선원들이 선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줄곧 그 북한 병사들이 따라 붙었다. 브릿지(뱃머리)에 3명이 상시 대기하고, 심지어 선원들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항상 선상에서 감시했다.
선상에서의 억류 3일째가 되던 날 드디어 박 씨와 선원들은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병사들은 박 씨와 선원들에게 작업복 대신 배에서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게 한 뒤 수건과 칫솔 등 소지품을 모두 챙기게 하고 큰 선박과 육지를 오가는 작은 배(예인선)에 갈아타게 했다.
북한 땅에 발을 디딘 박 씨와 선원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승합차)에 총기로 무장한 북한 요원 4명과 함께 탑승해 약 두 시간 동안을 비포장도로를 따라 달렸다. 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박 씨와 선원들은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날씨는 무척 더웠다. 박 씨와 선원들을 태운 승합차가 무더위를 뚫고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3층으로 구성된 어느 건물이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 건물은 지상 이외에도 지하에 밀폐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 날 기자와 동행한 귀환납북자 출신의 고명섭 귀환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그는 박 씨와 마찬가지로 강원도 해역에 조업을 나갔다가 납북되어 30년간 억류된 뒤 2005년 탈북해 귀환했다)은 박 씨가 억류되었던 건물을 ‘61연락소’로 추정했다.
‘연락소’는 대남 공작기관을 일컫는 은어(隱語)로서, 숫자가 붙은 연락소는 대개 대남 공작을 총괄하는 ‘어머니 연락소(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에 귀속되어 있다.
61연락소는 현재 외부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고 회장에 따르면 이 연락소는 대남 유화(宥和) 공작에 동원되는 기관이다. 즉, 북한정권은 애초부터 박 씨와 선원들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뒤 추방할 방침을 내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던 박 씨와 선원들은 두려움에 질린 채 총기로 무장한 요원들의 강압적 지시에 따라 건물 3층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박 씨는 복도 제일 끝 방에 감금되었으며, 나머지 선원들도 각자 독방에 가둬졌다. 그 이후로 박 씨는 석방 직전까지 선원들을 만나지 못했다.
심문은 바로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두 명의 조사관이 들어와 박 씨에게 월선 경위와 간첩 혐의를 추궁했다. 박 씨는 위성항법장치(GPS)가 없어 실수로 북방한계선(NLL)을 넘었고 자신은 남한 정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적극 해명했지만, 문제는 남한의 언론보도에서 터졌다.
박 씨의 진술과는 달리 국내 일부 언론이 연안호의 월선 원인을 위성항법장치 고장으로 보도한 것이다. 조사관들은 언론보도 내용과 박 씨의 진술 내용이 다름을 꼬집으며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든 협박에 고문 위협도 가해졌으며, 이러한 과정이 약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박 씨에 대한 의혹 또한 국내 언론보도에 의해 벗겨졌다. 혹독한 심문이 계속되던 어느 날 조사관들은 뜻밖에도 박 씨의 진술을 인정했다. 뒤늦게야 언론사들이 연안호의 월선 원인을 나침반 고장으로 정정보도 한 것이었다.
조사관들은 관련 전문가까지 동원해 연안호를 시험 운전한 끝에 나침반이 정상 각도보다 무려 30도나 틀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한 조사관들은 이제 다른 꼬투리를 잡아 박 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안호가 북방한계선을 넘어 월선 할 당시 남한 경비정들은 저지에 나서지 않고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정보수집 임무를 부여받고 월선하는 연안호를 남한 해경과 해군이 일부러 보내준 것이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공화국 영해에 들어온 목적이 뭐냐”고 몰아붙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체포된 미국인 여기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12년 노동교화형을 언도받은 사실을 아느냐며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씨는 일부러 “우리는 고기나 잡아 먹고사는 어부들이다. 미국 여기자가 북한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잡아떼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독방에 갇혀 하루가 멀다 하고 협박과 추궁이 되풀이 되는 동안 박 씨에게는 수 차례 허위진술 요구가 가해졌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고 회장에 의하면 북한정권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납북자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북한정권은 박 씨와 선원들을 애초부터 적당히 조사하고 풀어줄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박 씨가 만약 그 때 허위진술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억류 기간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귀환 하루 전 날 석방통보 받아.. “지하로 호출되는 순간 면도칼로 혈관 끊을 준비 했다”]
박 씨에 따르면 박 씨와 선원들은 납북된지 약 한 달이 지난 8월 29일 오전 8시 20분에 연안호를 타고 강원도 원산항을 출발해 남한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들은 귀환하기 불과 하루 전에야 석방을 통보받았다.
그 동안 가해진 협박, 특히 미국인 여기자 이야기에서 언급된 ‘인민재판’ 회부 협박으로 박 씨는 귀향(歸鄕)할 희망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때문에 28일 조사관들이 돌연 박 씨를 독방에서 지하로 내려오게 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박 씨는 만약에 재판 회부 결정이 내려진다면 자살을 결심했다고 한다. 비록 그 간의 조사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는 없었지만, 미국인 여기자들처럼 12년형을 언도받아 북한에서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미국인 여기자 유나 리(Euna Lee)와 로라 링(Laura Ling)은 연안호 납북 직후인 8월초 석방되었지만 조사관들은 박 씨에게 이 사실을 은폐했다).
그는 지하로 내려가기 전 연안호에서 챙겨 온 면도칼을 미리 준비했으며, 면도칼로 혈관을 끊는 것이 실패한다면 이불이나 옷자락으로 목을 매달 준비도 했다. 자신이 목숨을 끊지 않으면 월북자의 혈육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에서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갈지도 모를 가족들의 모습도 어른거렸을 것이다.
조사관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지난 한 달 동안 얼굴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연안호 선원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박 씨가 지시에 따라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그를 심문했던 조사관 두 명이 들어와 맞은편에 앉고 낯 선 얼굴의 누군가가 박 씨의 옆에 앉았다.
박 씨 및 선원들과 마주 앉은 조사관들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으로 입을 열었다. 박 씨는 처음에는 현정은 회장의 이름을 말하는 조사관들의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조사관들은 “현정은 회장과 국방위원장(김정일)이 대화를 나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한 것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박 씨가 모른다고 하자 그들은 “공화국에서 조문단도 갔다 왔고 6.15공동성명 결의식도 있었다”며 “그래서 모든 것을 완화해 내일 오후 5시에 당신들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주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석방을 통보한 것이다.
석방 통보 후 그들은 연안호 기관장에게 선박 시동에 필요한 것이 없는가를 물어 배터리가 필요하다는 대답을 들은 뒤 석방 당일 아침에는 선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하고 아침 7시 전까지 소지품을 챙겨 내려올 것을 지시했다.
또 줄곧 강압적이던 태도를 바꿔 “공화국에 와서 술 한 잔씩들은 했는가”라고 물은 뒤 선원들이 고개를 내젓자 “오늘은 가기 전에 술 한 잔씩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작별인사도 건넸다.
강원도 원산의 대남 공작기관 61연락소 건물 지하에서의 일방적인 석방 통보가 끝난 뒤 박 씨와 선원들은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박 씨는 북한에서 석방되기 전 날,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조사관들은 이제 막 방에 들어가 소지품을 챙기고 쉬려고 하는 박 씨와 기관장을 건물 지하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로 따로 은밀히 호출했다.
박 씨와 기관장을 포함한 7~8명의 인원이 탑승한 승합차는 미끄러지듯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과 방향을 말해주지 않으니 박 씨의 심정이 몹시 불안해진 것은 당연했다.
병사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지나 얼마쯤 달렸을까, 문득 박 씨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곳이 원산 해수욕장이다” 박 씨를 태운 차량이 30년대 일제(日帝)치하 당시 완공되어 외화벌이를 위한 북한의 주요 관광지역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원산 해수욕장(송도원(松濤園)해수욕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마침 박 씨가 원산 해수욕장에 도착한 날이 북한의 ‘청년절(8월 28일)’이었다. 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자 동해안과 인접한 넓은 규모의 ‘해안광장’이 나타났다. 그 곳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 남녀들이 어울려 춤을 추며 ‘무도회(舞蹈會)’를 열고 있었다.
북한정권은 매년 청년절이 되면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오후 반나절의 휴식을, ‘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사노총)’에 가입된 학생들이나 군인들에게 하루 전체의 휴식을 주고 무도회에 참여토록 유도한다.
남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인 집단무도회는 각계각층의 사기를 높이고 활기찬 문화적 풍토의 확산을 도모한다는 취지이지만, 실은 열악한 북한 내부 실정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꾸민 모습을 외부에 선전하기 위한 의도가 크다. 귀환을 앞둔 박 씨를 다시 호출해 무도회장에 데려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목적은 또 있었다. 무도회장 인근 앞 바다에 한 달 전 박 씨 및 선원들과 함께 납북된 연안호가 정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석방되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연안호가 아직 장전항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박 씨는 조사관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그제야 비로소 배가 원산항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박 씨가 조사관들에게 연안호의 시동 테스트를 요청하자 수락이 떨어졌다. 무도회장과 해안도로를 차단한 철조망 때문에 아파트 등 민간 거주지역을 통과한 뒤 먼 거리를 돌아 해안도로로 나간 승용차는 얼마 가지 않아 연안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한 달 만에 연안호에 다시 승선한 박 씨와 기관장은 북한당국이 제공한 배터리를 배에 연결하고 시동을 걸었다. 약 5분간 시동을 걸었다 끄자 조사관이 다가와 내일 출항에 지장이 없는지를 물었다. 기관장이 “괜찮을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박 씨와 기관장을 다시 원래 감금되었던 장소로 데려왔다.
도착했을 즈음 주변은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독방에 들어간 박 씨에게 식사와 함께 컵에 담긴 술 한 잔이 제공되었다. 밥을 서너 숟갈 밖에 뜨지 못 할 정도로 소화불량에 시달리는데다 술이 얼마나 독한지 박 씨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석방을 하루 앞 둔 그 날 밤, 박 씨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북방한계선(NLL)으로]
다음날 아침 7시가 되자 조사관들은 박 씨와 선원들에게 소지품을 챙겨 지하에 모이도록 했다. 박 씨가 모처럼 선원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자 조사관들은 바로 승합차에 태운 뒤 원산항으로 이동시켰다.
무장한 병사 4명과 함께 박 씨와 선원들이 연안호에 오르자 조사관들이 혹 미처 챙기지 못한 소지품이 없는지를 물었다. 배 안은 굶주린 북한 병사들이 쌀이고 뭐고 모두 가져가버린 통에 텅텅 비다시피 되어 있었지만, 석방되어 귀환하는 와중에 사소한 것까지 챙길 겨를은 없었다. 박 씨는 이상 없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연안호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작은 경비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따라갈 것을 명령했다.
박 씨는 그날따라 파도가 유독 높았으며, 원산항에서 장전항까지의 거리가 꽤 멀었다고 회고했다. 오후 3시 무렵까지 항해한 끝에 한 달 전 연안호를 나포한 경비정이 대기하고 있는 장전항에 도착하자, 함께 승선한 병사들이 나포 당시 압수했던 휴대전화 단말기를 선원들에게 돌려주고 하선했다.
장전항에서부터 북방한계선(NLL)까지는 연안호를 나포했던 경비정이 인솔하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 항해하자 북방한계선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경비정의 무전이 들어왔다. 그런데 돌연 멈춰선 경비정의 군인들이 무언가를 줄 것이 있다며 박 씨에게 배를 가까이 붙일 것을 지시했다.
양 쪽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연안호로 날아든 것은 밧줄이었다. 경비정의 군인들은 박 씨에게 밧줄을 배에 걸게 하고서 같은 속도로 움직일 것을 지시한 뒤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박 씨는 또 다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실은 북한 함정이 연안호를 끌고 오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북한 경비정과 밧줄을 연결한 채 북방한계선에 도착하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해군으로부터 무전이 날아든 것이다.
북한 경비정을 호출한 해군은 북방한계선을 넘지 말고 연안호를 선상(線上)에 놓아둔 채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박 씨의 표현에 따르면 북한 병사들은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알았다”를 두 번 외친 뒤 묶었던 밧줄을 풀게 했다. 그리고 연안호에게 우현으로 피할 것을 지시한 뒤 자신들은 좌현으로 피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 경비정이 연안호로부터 멀어지면서 그렇게 박 씨와 선원들은 약 30일간의 악몽 같았던 북한 억류생활을 끝내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청천벽력같은 ‘어업허가 취소’ 가능성]
고향인 고성군에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박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 일 간에 걸친 정부합동조사반 조사와 별도의 해경 조사, 그리고 끊이지 않는 외부인의 출입과 언론의 끈질긴 스포트라이트였다.
정부합동조사반이 전문가에게 의뢰해 속초 외항에서 약 1시간 동안 시운전한 결과 연안호의 나침반은 북한에서의 결과와는 다르게 정상보다 26도 가량 틀어져 있었다. 나포 직전 나침반을 264~278도로 조정한 것에 26도가 더해지고, 거기에 물 흐름까지 북쪽으로 흐르자 곧장 북한 해역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비록 모든 조사는 끝났지만 박 씨 가족의 앞날은 아직 어둡기만 하다.
비록 조사 과정에서 월북(越北) 혐의는 벗었지만 조사 당시 박 씨는 경황이 없던 터에 전문지식마저 없어 진술서에 연안호의 납북 유형을 ‘피랍’으로 작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 씨와 부인에 따르면 조사 결과 연안호가 어로한계선을 넘어 피랍된 것으로 판명될 경우 관련법 상 어업허가 취소, 월선인 것으로 판명이 날 경우에도 60일 허가정지에 벌금이 부과된다.
월선으로 판명될 경우 박 씨 가족은 또 벌금 이외에도 석방을 위해 정부가 지출한 1억원 가량의 자금을 갚아야하는 처지가 된다. 사실상 파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확인한 결과 2008년 4월 8일 개정된 ‘수산관계법령 위반행위에 대한 행정처분의 기준과 절차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선박안전 조업규칙’ 제31조를 위반한 선박은 어업면허증 등을 압류 당하게 되며, 선박안전 조업규칙 제18조를 위반해 조업자제선을 월선한 선박은 1차 위반 시 60일 면허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런데 박 씨에 따르면 연안호 납북에 앞서 유사한 사례들이 네 번이나 있었다. 그 중에는 음주 상태에서 일부러 배를 북쪽으로 몰아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체포된 사람도 있지만, 소액의 과태료만 내고 지금은 멀쩡히 조업 중이라고 했다.
이 날 인터뷰가 끝난 이후 박 씨 부부는 기자와 동행한 고 회장의 권유를 받아 귀환납북자가족협의회 회원으로 등록했다.
비록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0일 간의 억류였지만, 그도 다른 귀환납북자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귀향(歸鄕) 이후에도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납북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부 조사 등 사후(事後)처리로 다망(多忙)한 와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광선 선장과 부인 이아나 씨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올린다.
오주한 기자 ohjuhan@hotmail.com
"망원경 속 경비정엔 무장군인들이 조준"
- 오주한(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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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09, 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