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기억해야 할 서울올림픽의 아홉 영웅들!

박정희, 박종규,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사마란치, 김운용, 이어령. 레이건.
다음 주 목요일 9월17일은 서울올림픽 개막 21주년이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사회의 선진화,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압도적 우위, 북한정권의 방해공작과 이로 인한 국제적 고립, 소련 중국 東歐 공산권 국가의 참여로 세계 평화에 기여, 한국 민주화의 보증수표, 동구 공산권의 붕괴 촉진, 북방정책으로 소련 및 중국 등과 수교 등 역사적 사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6.25가 한국을 나쁘게 알린 점에서 1등이라면 서울올림픽은 좋게 알린 점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서울 올림픽으로 해서 한국이란 브랜드 가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기업인들은 실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서울올림픽에 대하여 친북좌익세력은 입을 다물거나 폄하한다. 親北이냐 아니냐의 한 기준이 서울올림픽을 어떻게 보느냐이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에 기여한 국민들은 많지만 특기할 만한 여덟 분이 있다.


1. 朴正熙: 1979년에 서울올림픽 유치 결정.
2. 朴鐘圭: 朴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 유치 건의. 1981년 바덴바덴에서 득표활동.
3. 全斗煥: 10.26 사건 뒤 올림픽 유치 再추진 결정.
4. 盧泰愚: 유치작전 총지휘, 올림픽 준비 감독.
5. 朴世直: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실무 총괄.
6. 사마란치: 서울올림픽 유치 및 개막 때 IOC 위원장. 개최지 변경 운동을 묵살.
7. 金雲龍: 서울올림픽 경기의 국제협력 부문 담당.
8. 李御寧: 서울올림픽의 主題를 '벽을 넘어서'로 만드는 데 기여.
9. 레이건 대통령: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위하여 전폭적인 지원.

서울올림픽의 방해자는 김정일이었다. 그는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 차례의 테러를 자행했다. 1983년의 아웅산 테러, 86년의 김포공항 테러, 87년의 KAL기 폭파.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세계적으론 공산권의 붕괴에 기여하였고, 국내적으론 북한정권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김정일이,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자행한 잇딴 테러와 대응행사로 유치한 세계청년축제에의 낭비성 투자가 북한정권을 고립시키고 경제를 망가뜨렸다.

善意가 이기고 惡意가 망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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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 민주화와 서울올림픽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동구권의 민주화에 서울올림픽이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나는 올림픽 책임자로서의 자화자찬이겠지 하고 넘겨버렸었다. 며칠 전에 소련과 동구권을 여행하고 온 교수와 기업체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 갔더니 그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지난 해 말에 內韓공연을 한 보컬그룹 코리아나 단장 김영일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부른 88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가 동구권 민주화 운동 현장의 데모송이 돼있더라는 것이다. 코리아나는 1989년 12월에 동독 국영텔레비전 방송국의 초청으로 동베를린에 가서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 '손에 손잡고'를 불렀다. '손에 손잡고'의 가사는 동구권 민주화의 현장 분위기에 걸맞는 것이었다.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동구권 민주화의 에너지원인 민중의 힘을, '벽을 넘어서(Breaking down the Wall)'는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무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왜 동구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을까?

첫째, 소련.중국.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서울올림픽 참가 결정은 남한과 북한 중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행위였다. 그들은 서울을 선택함으로써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남한의 판정승을 인정하였다. 참가 결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평가해준 셈이었다.

둘째, 12년만의 온전한 올림픽인 서울올림픽은 동서 화합과 세계 평화 무드를 극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이념 대립과 냉전체제의 종언을 분위기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셋째, 공산국가 국민들은 자신들이 참여한 서울올림픽에 대해서 전례 없는 관심을 쏟았다. 위성중계를 통한 서울올림픽의 텔레비전 중계시간은 총 9천 시간으로서, 이는 로스앤젤레스대회 때의 세배였다. 세계의 이목이 서울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넷째, 그러면 동구권 사람들은 서울올림픽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한국은 분단과 전란, 화염병과 최루탄, 그리고 독재와 식민지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악선전에 의해 남한은 AIDS 환자들이 득실거리고 미군들이 멋대로 남한 여자들을 겁탈하는 나라쯤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비친 한국은 생기발랄한 현대 사회였다. 민주화의 길을 착실히 걸어가고 있는 자유분방한 나라였다.

특히 현대 한국의 이미지 메이킹을 이룩한 서울올림픽의 개. 폐회식은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와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동구권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독재국가라던 한국이 저 정도인데 우리는 무엇인가. 분단과 전란과 독재를 믿고 저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장점은 무엇인가. 50년 전만 해도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우리'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서울올림픽은 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1980년대에 한국은 두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첫째는 평화적 민주화이다. 분단과 전란의 나라, 그리고 민주주의 실천의 경험이 짧은 나라에서 군사정권과 민중들이 한판 승부를 벌였다가 6.29선언이란 타협점을 찾아 점진적 개혁과 평화적 민주화의 모델을 확립한 것은 개발도상국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외국에서는 서울올림픽을 '미국인의 상업정신과 일본인의 친절과 독일인의 정밀성으로 치러진 사상 최고의 평화축제'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서울올림픽이 실패하였다면 개발 도상국에서는 올림픽이 영원히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올림픽이 성공하기 가장 어렵다는 서울에서 사상 최대.최고의 올림픽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인의 끈기와 집념이 가져온 세기적인 역전 드라마였다.

이 올림픽이 동구권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면 한국인은 정말 위대한 인류의 유산을 남긴 셈이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는 세 번의 전쟁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반도와 그 주변을 무대로 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6.25전쟁 때 세계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에 의하여 한국은 주로 부정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 언론사상 최대의 보도진(1만5천여 명)이 붐볐던 서울올림픽은 한번의 평화축제로써 세 번의 전쟁 이미지를 덮어 버렸다.
외국에서 일하는 한국 세일즈맨들은 이제한국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한다. 헝가리 사람들은 한국인이란 걸 확인하면 '올림픽 코리언, 굿 코리언!'이라고 추켜준다는 것이다.

서울 올림픽의 동구권 민주화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검증과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국제적인 여론조사나 현지 취재를 통해서 인과관계를 설득력있게 규명하여 한국인들에게 가슴 뿌듯한 자랑거리를 만들어주는 작업 말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경멸을 들어야 했던 우리가 철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 한 몫을 했다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영웅이며 우리 시대는 영웅 시대인 것이다. 요즈음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사조가 유행인데 긍정적으로 보면 얼마나 감격적인 역사인가.

북한이 소련의 대리전을 청부맡아 일으킨 6.25전쟁은 남한과 미국이 손에 손잡고 버팀으로써 공산세력의 남하를 2차대전 후 최초로 저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승부 상태에서 남북한은 경제 개발과 정치 발전이란 두 종목을 두고 공개 경쟁에 들어갔다. 그것은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리전 시합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그 승부는 세계인들 앞에서 확실하게 되었고 그것을 재확인시켜준 것이 서울올림픽이었다. '손에 손잡고'가 동양인이 부른 노래로는 세계 음반 사상 최고의 판매량(카세트, 레코드로 9백만 장)을 기록한 것은 서울올림픽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손에 손잡고'가 세계에서 가장 적게 팔린 나라가 한국이라서 탈이지만.

<1990년 3월 아시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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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도 폄하
-잘한 일일수록 먹칠하는 反교육적 교과서
趙甲濟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高校用)는 全斗煥 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전면적인 부정을 하고 있다. 제목도 '전두환 정부의 강압 정치와 저항' '전두환 정부의 국민 회유책' '6월 민주 항쟁, 국민의 힘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로 긍정적인 게 없다. 全斗煥 대통령의 부정할 수 없는 공적인 單任약속 실천, 6.29 선언에 의한 직선제 개헌 수용, 세계최고의 경제성장률, 물가안정, 무역흑자, 서울올림픽 유치와 준비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盧泰愚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인 북방정책에 대해서도 악의적으로 썼다.
<1980년대말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노태우 정부는 이들 국가와 적극적으로 수교하여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북방정책은 소련, 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졌다>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방정책을 편 것이 아니고 세계사의 전환점을 맞아 서울올림픽으로 다진 인맥과 지식을 활용하여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힌 것이 북방정책이었다. 1992년의 韓中수교를 계기로 중국시장이 한국경제의 생명줄로 변한 사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정적 평가를 교과서가 하고 있다. 수교 16년만에 韓中무역액이 韓日, 韓美무역액을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 된 것도 관심이 없다. 학생들에겐 조국이 잘 된 것을 칭찬해주어야 하는데 잘 한 것마다 골라내 먹칠을 하는 이 교과서는 지극히 反교육적인 책이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모든 국민들이 뜻을 모아 성공시킨 금자탑이었다. 서울올림픽은 국내의 민주화와 선진화에 기여했고, 韓民族의 새로운 활동공간을 연 북방정책의 기초를 놓았으며 동구공산권 붕괴의 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성공한 대목일수록 더욱 집요하게 비방한다는 원칙을 세웠는지 사사건건 물고늘어진다.

<국민을 하나로 묶어서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국제사회에서 정권의 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스포츠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무허가 가옥과 도시 노점을 대대적으로 철거하자 이에 저항하는 생존권 투쟁이 일어났다>
[ 2008-11-21, 1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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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더 좋았다!


북경올림픽 개막식의 자신과 오만,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고매한 이상-'벽을 넘어서'가 비교된다.
趙甲濟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는 '벽을 넘어서'였다. 영어로 'Breaking down the wall'이었다. 주제가 '손에 손 잡고'의 영어가사에도 'Breaking down the wall'이란 대목이 나온다.

이념, 인종, 종교의 벽을 넘어서 全세계가 화합하자는 뜻을 담은 주제였다. 파아란 잔디에 굴렁쇠 소년이 등장하여 세계인이 希求(희구)하는 평화를 상징했다. 태권도단의 집단격파도 벽을 부수자는 뜻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全斗煥, 盧泰愚 정부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서울올림픽의 역할이 동서냉전의 벽을 부수고, 한국을 세계의 主流로 부상시킨 점은 구호(예언)의 실현이라 할 만하다.

지난 8일의 北京올림픽 개막식은 중국의 자신과 함께 오만을 보여주었다. 中華주의의 표현이었다. 세계인들에게 이 개막식은 물량면에서, 기술면에서 압도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남았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을 이런 식의 국수적인 선전에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 중국이 인류문명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을 想起시켜준 점에선 성과가 있었겠지만 '벽을 넘어서'와 같은 보편적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엔 소련과 중국 및 동구 공산권 국가 전부가 참여하여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축제가 되었다. 스포츠를 國策사업으로 육성했던 공산권 사람들의 텔레비전 중계 시청률은 대단했다. 그들은 '파쇼독재 국가' '美帝의 식민지 국가' '한국전쟁의 폐허'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멋진 경기운영과 발전상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도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뭐냐?'하는 반발심이 생겼고, 이런 심리가 그 1년 뒤 동구공산국가들을 차례로 민주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시위대는 '손에 손 잡고'를 합창했다고 한다.

애국적으로 이야기한다면 北京올림픽 개막식보다는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더 좋았다. 後者는 역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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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의 성공비결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시청한 직후를 꼽겠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졌던 그때의 그 감동은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힘이다'는 확인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광야를 질주하는 듯한 박력과 화려한 색채감과 아기자기한 섬세함, 그리고 무서운 조직력과 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휘어지는 유연함이 「벽을 넘어서」라는 메시지로써 통일돼 장대한 '한국의 이미지'를 연출했던 개회식은 단순한 공연 행사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꾼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나는 개.폐회식을 준비한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등 관계자들을 여러 번 만나 이 대성공의 요인들을 알아본 적이 있다.

첫째는 서울올림픽의 목표를 높게 잡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朴 위원장은 '5최(最)'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最多의 참여, 最高의 성과, 最善의 화합, 最適의 안전, 最大의 절약을 목표로 설정하고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서 5000년 역사에 처음인 절호의 기회다.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는 만고(萬古)의 역적이 되고 만다'고 직원들을 몰아붙였다.

둘째는 개.폐회식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집중 투자한 점이다. 서울올림픽은 서울시가 주최하지만 세계인의 축제이므로 각 경기가 텔레비전에 비쳐졌을 때는 한국을 유별나게 선전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은 참가국 160개의 하나일 뿐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에서는 일찌감치 개.폐회식이야말로 주체적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라는 판단을 하고, 이 준비에 전력투구했다.

박위원장은 사석(私席)에서 '서울올림픽 준비의 80%는 개.폐회식 준비이고 그 중에서도 개회식 준비가 80%이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능한 경영자의 첫째 조건으로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는 판단력과 추진력'을 꼽고 싶다. 조직위원회는, 서울올림픽의 성패는 텔레비전에 의해서 결판난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였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 의한 이미지 조작이 '제2의 현장'을 창조하여 全세계 시청자들의 뇌리에 한국의 인상을 깊게 심어줄 것이므로, 개.폐회식은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에 근사하게 비쳐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셋째, 조직위는 '새로운 우리 것'을 보여주었다. 부채춤 같은 한국의 상투적 이미지를 배제하고 순수하면서도 신선한 이미지를 발굴, 속도감 있게 이들을 연결함으로써 의외의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속도감(speed).뚜렷한 주제(subject).신선한 충격(suprise)의 '3S'가 개.폐회식을 어떤 드라마보다도 재미있게, 그릭 감동적으로 보이도록 한 비결이었다.

넷째, 개.폐회식에는 철학과 메시지가 있었다. 개회식의 메시지는 「벽을 넘어서」였다.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화합과 전진'이라는 다소 딱딱한 낱말이었다. 개.폐회식 자문위원 이어령(李御寧) 씨(현 문화부장관)가 그 특유의 언어감각을 발휘하여 '화합과 전진'을 '벽을 넘어서'란 생동하는 말로써 구체화시켰다. 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개.폐회식의 기조가 개방시대의 세계 조류와 맞아떨어지면서 「벽을 넘어서」는 이 시대의 철학적 메시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의 일관성과 통일성과 역사성이야말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성공 비결이 우리 것을 우리 식으로 당당하게 보여준 주체성이라고 믿는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것을 實證했다고 할까.

「벽을 넘어서」라는 메시지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손에 손잡고」는 한국, 동구 공산국가 등 세계 곳곳에서 민주화를 주도하던 민중의 힘을 상징하고, 「벽을 넘어서」는 이념과 민족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자유를 확대해가고 있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요약한 것이다. 「손에 손잡고」는 한때 동독에서도 금지 가요가 되었는데 '벽을 넘어서'란 가사 때문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기를 즈음해 이 노래는 동구권 민주화 현장의 데모 노래로 널리 불러졌다고 한다. 그 전 중국의 천안문사태 때도 이 노래는 시위 학생들의 애창곡이었다.

약 900만 장(테이프, 음반, 콤팩트디스크 등)이 팔려 동양인이 부른 노래로서는 사상 최대의 판매고를 기록한 「손에 손잡고」의 성공에서는 국제적 감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당초 국내에서는 한국 작곡가. 작사가와 한국 가수가 참여해서 국적 있는 주제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朴世直 조직위원장은 이런 여론을 누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노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세계적인 이탈리아인 작곡가 모로데, 세계적인 미국인 작사가 휘트로크에게 일을 맡기고, 노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한국인 보컬그룹 코리아나, 판매 및 제작은 세계 최대의 다국적 음반회사 폴리그람에게 의뢰하였으며, 이들 요소를 통합, 조정한 것은 조직위였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자원들을 잘 조합시켜 세계적인 유행가를 만든 것이다.

이 사례는 국제화시대를 맞은 한국의 기업도 참고할 만한 것이 아닐까 한다. 주제가를 만들 때 만약 개. 폐회식 때처럼 민족적 입장에서 접근했더라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주제가를 듣게 되는 사람은 세계 각국의 각양각색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한국식 노래를 강요하다시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연히 국제적인 시각에 서서 보편적인 감각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개.폐회식의 경우는 고객, 즉 세계의 시청자들을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였으므로 우리 것을 일방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민족적 관점에서 특수한 이미지를 자신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는 사람의 시장(buyer's market)에서는 국제성을, 파는 사람의 시장(seller's marker)에서는 지역성을 부각시킨 것이 서울올림픽 상술(商術)의 성공 요인이었다.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우선은 되살려야 할 서울올림픽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여러 방면에서 연구 분석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1990년 3월 社報 럭키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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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서울올림픽 안전 위해 소련을 압박
'북한에 영향력 행사하여 장난 치지 못하도록 하라'
趙甲濟


미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소련을 통하여 북한정권에 압력을 넣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칼루치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소련을 움직였다. 이런 사실은 1988년 6월8일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한 프랭크 칼루치 미 국방장관의 보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칼루치 장관은 크라우 합참의장 등을 대동했다. 그는 그 직전에 있었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서울올림픽의 안전문제에 대해 거론했음을 밝혔다.

<북한문제와 올림픽 안전에 관해서는 수차 소련 측에 의견을 개진하였는 바,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오찬시 레이건 대통령께 북한은 도발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대하여 미 측에서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나, 분명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슐츠 장관은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소련 측에 북한이 최근 SA-5 미사일을 전방배치 한 것을 지적한 바 있고, 본인도 만찬석상에서 옆에 앉은 그로미코 의장(과거 25년간 외상을 지냄)에게 촉구하였던 바, “그는 북한에 알아본 바, 올림픽을 방해할 하등의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 고 하였으며, 본인이 한국 측에 그렇게 전달해도 되겠냐고 문의한데 대해서 좋다고 확답을 하였습니다. 후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소련 외무부는 북한에 올림픽 방해책동 자제를 요청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 건에 관한 소련의 언질은 단호한 것이 아니고, 항상 약간의 회피성을 보였는바, 예컨대 “북한은 독립주권국가이다” “우리의 영향력엔 한계가 있다” “우리도 참가하므로 똑같이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는 등, 단서가 붙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멋지게 끝난 이틀 뒤 10월4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스페인)은 노태우 대통령을 청와대로 예방하여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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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일찌기 바덴바덴의 결정이 있은 이후, 오늘까지 많은 역경을 함께 극복하고, 국제적으로 여러 거센 바람을 막아오는데, 위원장께서 헌신적으로 노력하시어 이런 성공적 대회를 마칠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해서 우리 국민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올림픽 금장은 國政의 책임자로 받은 것으로 알며, 앞으로 더욱 귀하와 IOC와 협조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위원장 :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습니다. 각하는 올림픽을 성공시킨 국가원수일 뿐 아니라, 그간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데서도 제일인자였습니다. 그간 여러 차례 국제정치관계로 어려움이 있었고, 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공한 것은 대한민국의 보람이요, 영광입니다.

대통령 :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탕’남작 이래 정치적, 인종적, 지역적 장애를 모두 초월하여 古代올림픽의 이상을 재현시키는 데 귀하는 그야말로 제일인자였습니다. 귀하의 업적은 올림픽史에 찬연히 빛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그간 너무 노고가 많으셨는데, 며칠간 편히 휴식하시기 바랍니다.
위원장 : 한국은 이번에 큰복을 받았습니다. 대회준비뿐 아니라, 선수단도 33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全기간을 통하여 한 건의 사건, 사고도 없었고, 일기 또한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런던 타임스가 폐회식과 관련, 논설을 실었는데, 올림픽에 관한 논평 중 이렇게 극찬한 것은 전에 없었다 생각하여 각하 참고로 가져 왔습니다.

각하와 영부인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내외를 위해 친절히 오찬을 베푸셨고, 영부인께서는 장애인 시범경기에 나오셔서 시상도 해 주셨고, 바쁘신 중에 페막식까지 참석해 주셨습니다.

대통령 : 이 모든 것이 귀하가 주재하여 성공하였으니, 귀하에게도 행운입니다. 서울대회의 성공이 올림픽 운동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라며, 4년 후 바르셀로나 대회는 더욱 성공할 것으로 믿습니다. 본인은 항상 귀하 옆에 있고, 도움 된다면 무엇이나 협조하겠습니다. 이곳에 동석한 박 위원장은 본인으로부터 직책을 인수하여 본인과 귀하의 뜻을 완전 성취시켜 주었고, 김운용 위원은 IOC 및 국제경기연맹과의 빈틈없는 협조를 이룩했고, 조상호 장관은 한국선수의 훈련을 통하여 훌륭한 성과를 올렸는데, 세분이 그야말로 올림픽 금메달 감이며, 본인은 이분들에게 감사하고, 무한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위원장 :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장애자 올림픽때 다시 뵙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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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9일 전인 9월8일에도 노태우 대통령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는 '북한의 설득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국은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북한의 불참은 예상했던 바이나, 쿠바의 카스트로의 태도에는 실망이 큽니다. 물론 북한의 압력이 있었겠지만, 니카라과에도 불참을 종용했다고 하고, 결과적으로 이디오피아, 마다가스칼도 불참케 되었습니다. 그중 쿠바는 훌륭한 선수들도 많은데 불참케 되어 대단히 실망스러우며, 카스트로는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마란치는 또 '우리는 북한과의 접촉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3종목을, 후에는 5종목 할애를 제의함으로써, 우리의 성의를 표시했고, 이것이 소련 등 동구권과 중국이 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들은 현재 부자권력 승계를 95%에서 100%까지 이행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러한 시기에 북한 내부에 억압된 욕구들이 분출될 우려 때문에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하더라도 올림픽 참가가 초래하는 개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오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서 '현재 소련의 KGB 책임자가 9.9절 참석차 북한을 방문중인 바, 북한에 대하여 올림픽 도발을 억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생일각의 공동 올림픽 주최, 단독 올림픽 반대 등 주장이 언론에 과장 보도됨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 바 있으나, 귀하가 오셔서 직접 확인하신 바대로 현재는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본인은 야당 지도자들과 회합하고, 그들의 확고한 지지 약속도 받았습니다. 전국적으로 기백명 정도의 좌익 극렬분자가 있지만 전국민은 올림픽 열기에 동참하고 있으므로 무시해도 될 정도입니다.

지난번 6월 방한시 귀하가 야당 당수들을 만나 주신 것은 효과적이였으며, 그들은 본인과 만났을 때, 귀하로부터 좋은 설명을 듣고 이해를 새로이 하였다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전임 全 대통령은 지난 7년간 올림픽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다행히도 올림픽준비 등 조용히 지냈으며, 또 국민의 직선으로 당선된 도움으로 야당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 솔직한 대화도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그들에게는 경쟁상대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성장을 위하여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7년간 올림픽준비에만 전념하려던 것이 길이 빗나가 정치인이 되고, 이제 대통령으로서 이 큰 일을 매듭짓게 되어 대단히 감회가 큽니다. 비록 북한, 쿠바 등이 불참한다 하나, 동·서 모든 나라가 12년만에 처음으로 한데 모여 이곳에서 평화의 축전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며, 이러한 찬란한 업적은 귀하의 공적이며, 그를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레이건 일기』와 서울올림픽


서울올림픽은 북한이 처참하게 망해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죽어라 방해하려다가 결국 자기가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趙甲濟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추석을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새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레이건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부터 1989년 사이에 8년 동안 재임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의 변화를 유도를 하고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결국 레이건에 의해서 냉전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났다.’ 이런 평가를 받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입니다.

요새 미국의 역대대통령을 순위를 매기면 1등은 무조건 링컨 대통령이 됩니다. 제퍼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그리고 요새는 트루먼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을 높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의 대결 시절에 승리의 기반을 만든 분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마셜 플랜이라는 것을 통해서 유럽을 부흥시키고 나토를 만들어서 유럽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군대를 보내서 한국을 지켜낸 위대한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잘한 레이건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동시에 전형적인 미국 사람입니다. 우리가 전형적인 미국 사람이라고 하면 첫째는 사물을 아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정직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소박한 사람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쓴 일기를 읽어보면 그 바쁜 중에서도 어떻게 대통령이 매일매일 이렇게 일기를 썼는지 그것이 아주 경이롭게 생각이 됩니다. 일기도 아주 솔직하고 인간적으로 썼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낸시 여사와의 부부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그럽니다. 이 일기를 읽어보면 부인인 낸시 여사가 외국 여행을 간 뒤에는 백악관에서 혼자 버려진 것처럼 ‘백악관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곳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대목도 있고, 부인이 출장을 가면 ‘밥맛이 떨어져서 음식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대목도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은 여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레이건 일기』의 567페이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88년 1월 14일 목요일에 쓴 일기입니다.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 레이건의 일기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배경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그 전인 1987년 11월에 김현희라는 여인과 김성일이라는 나이가 70 넘은 공작원 두 사람이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에 탔습니다. 거기에 시한폭탄을 두고서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렸습니다.

김현희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승객들을 둘러보고는 ‘이 사람들이 몇 시간 뒤에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저며오는 듯이 아팠으나 ‘조선혁명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하는 교육을 받은 기억이 떠올라서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고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레인 공항에서 김성일과 김현희는 경찰에 체포되게 되는데 이때 김성일은 입에 물고 있던 독약을 깨물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김현희도 평소 배운 대로 독약을 깨물었지만 기절만 했습니다.

한국으로 압송되어 온 김현희는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았습니다. 김현희는 처음에는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말을 아주 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정체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기부에서 기초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고문을 할 필요도 없이 김현희로부터 자발적으로 자백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현희가 생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습니다. 김현희는 수사를 받는 가운데서 안기부 수사관과 함께 서울 시내로 외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놀란 것은 남대문 시장을 둘러본 뒤였다고 합니다.

남대문 시장에 진열된 그 풍부한 상품과 상인들의 살아있는, 생동하는 모습을 보고 북한에서 받은 교육, 즉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로서 거지떼들이 거리를 헤매고 미군들이 마음대로 한국의 여자들이 겁탈을 한다는 식의 이런 엉터리 교육이 거짓말이었음을 단박에 알았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는 김현희가 과연 북한공작원인지 독자적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사람을 보내서 김현희를 여러 모로 심문을 한 결과 역시 북한공작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인데 그 사실을 레이건 대통령은 메모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이건 일기의 624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1988년 6월28일 화요일에 쓴 일기입니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휴전선에는 북한군이 10개 사단을 더 배치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위협하는 도박을 하려고 할 지 모른다. 소련은 그런 도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한 바 있다.’

미국은 1988년 9월17일에 서울에서 개막될 예정으로 있던 올림픽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도왔습니다. 레이건은 먼저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통해서 북한 정권이 테러라든지 도발을 할 수 없도록 압력을 넣어줄 것을 부탁을 합니다. 고르바초프도 이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소련과 동구권 국가는 12년 동안 온전한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에 열리게 되어 있었던 모스코바 올림픽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는 바람에 미국 등 서방세계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림픽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가 또한 보복으로 참여하지 않아서 반쪽 올림픽이 되고 말았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소련, 북한을 제외한 전 공산권 국가가 다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2년 만에 온전한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자신들의 팀이 서울올림픽에 참여하게 되어 있고 당시에는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항상 1등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열릴 수 있도록 북한이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어서 꼼짝 못하게 했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12년 만에 동서 갈등을 초월한 온전한 서울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이 서울올림픽은 가장 성공적으로 치러진 올림픽이었습니다. 모든 행사가 시간에 맞게 질서정연하게 치러졌습니다. 관중들의 응원자세도 아주 좋았습니다. 또 서울올림픽을 통해서 한국의 여러 가지 사회적 기반, 도로, 호텔시설 등이 선진화되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올림픽을 국가선진화의 한 계기로 삼았습니다. 지금 중국이 북경올림픽을 20년 뒤에, 즉 서울올림픽이 치러진 그 20년 뒤인 내년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북경의 중국정부가 똑같이 북경올림픽을 중국의 선진화의 한 계기로 지금 삼아서 추진하고 있는데 서울올림픽의 성공모델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박세직 조직위원장에 대해서는 중국 사람들이 자주 자문을 들으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서울올림픽에 대해서 레이건 대통령이 ‘걱정을 많이 했다.’라는 것을 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벽을 넘어서>, 영어로 말하면 '브레이킹 다운 더 월'이었습니다. 동서이념의 벽을 넘어서 이루어진 서울올림픽은 그 다음해 즉 1989년에 동구권이 공산주의자들이 무너지는 일에도 일조를 했습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동구공산권 국가들, 그리고 그 선수들을 통해서 “서울이 잘 산다. 한국이 발전했다.” 하는 것이 동구에 알려지고 이것이 동구에 있는 공산주의 압제 하에 살던 사람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서 불만을 갖도록 하고 궐기하도록 하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서울올림픽은 또한 북한이 처참하게 망해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김정일은 서울올림픽을 막기 위해서 1983년 12월9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미얀마에서 아웅산 테러사건이라는 것을 일으켜서 17명의 한국의 장관급 요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김현희 김성일을 시켜서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일으켜서 115명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중동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죽게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에 대응한다면서 평양축전이라는 것을 개최를 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퍼부었습니다. 한 50억 달러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도 북한을 경제적으로 망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남한에서 벌어지면 같은 민족이 벌이는 세계적인 축제니까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것을 죽어라 방해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레이건 일기』를 읽어보면 서울올림픽이 성공하게 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일본 그리고 소련까지 포함해서 여러 나라들의 좋은 마음 착한 마음이 합쳐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레이건과 트루먼은 북한 사람들한테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남한만이라도 발전을 해서 결국 그 힘으로 북한동포 여러분을 해방시키고 도와주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기지가 그래도 남한에서 활동하고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트루먼과 레이건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07-10-06, 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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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盧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과정과 배경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한 표밖에 없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기 반년쯤 전인 그해 3월, 올림픽 관계 장관 회의가 열렸다. 내가 예편하기 전이었다. 체육부가 없을 때여서 문교부장관이 올림픽 주무 장관을 맡고 외무부장관, 안기부장 등이 관계 장관으로 꼽혔다. 朴대통령 시절인 1979년 9월19일에 정부가 유치키로 결정한 뒤 1981년 2월16일에 유치키로 결정한 뒤 1981년 2월16일에 유치신청을 끝낸 올림픽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회의의 주제였다. 개최 결정 6개월을 남겨 놓고 관계 장관들이 모여서 유치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런데 결론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유치할 수도 없고, 유치한다 해도 그에 필요한 엄청난 재원을 어디서 조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맡고 있던 김택수(金澤壽)씨는 이런 말을 했다.
『IOC 멤버는 모두 82명인데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려면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위원장이 사회를 맡게 되므로 과반수는 41명이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표는 내 표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그렇다 해도 우리가 올림픽 유치를 취소하거나 반납하지는 말자. 이 티켓을 가지고 있다가 1986년도 아시안게임 유치를 결정하는 때에 일본에게 양보해주는 대신 일본이 우리의 아시안게임 유치를 도와줄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안기부장(兪學聖), 외무부장관(盧信永) 등이 『너무 한심하다. 우리가 한 표라니 무슨 말이냐. 노력도 안 해보고 백기(白旗)를 드는 것은 안된다』해서 상의한 끝에 IOC 위원이 있는 외국 공관에 전부 훈령을 내렸다. 『로비를 하라. IOC 위원들이 우리를 지원하도록 활동하라』는 강한 훈령을 내렸다.

내가 1981년 7월15일에 군복을 버고 외교·안보담당인 제2정무장관을 했을 때였다. 정무장관실이 지금은 헐린 중앙청내 외무장관실과 붙어 있었다. 나는 그간의 사정을 잘 모를 때였는데 9월 초에 노재원(盧載源) 외교안보연구원장(후에 외무부차관·초대 중국 대사)이 내 방엘 찾아왔다. 그는 상당히 흥분해서 『장관님,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올림픽을 할 겁니까, 안할 겁니까』하고 말을 꺼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외무부를 통해 여러 나라에 훈령을 내렸는데, 그 결과가 지금 들어왔습니다. 협조 가능한 나라가 한 20개국 되는데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하는 얘기였다. 과반수의 절반은 확보한 셈이다. 그는
『처음부터 백기(白旗)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지더라도 일본과 아슬아슬하게 지면 체면이 서지만, 압도적으로 지면 체면이 뭐가 됩니까. 아시안게임에도 영향이 있고, 우리 국정(國政)에도 영향이 있으니 이걸 하든 안하든 결말을 내야 되겠습니다』하고 열을 올렸다. 나는 비동맹국 사람들을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오래 전부터의 지론을 생각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내게 그 성과를 알려주던 외교관들의 모습도 떠올렸다.

나는 곧바로 全斗煥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심해 주십시오』하고 건의서를 썼다. 그때가 9월 초였는데, 건의서를 올린 바로 다음날 아침에 全대통령이 관계 장관들을 소집했다. 그래서 그날 회의에서 유치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고, 그 책임자로 나를 선임한 것이다. 나는 비동맹국들에게 기울인 노력이 이렇게 성과를 올리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우리 역량을 총집중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에게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한다』는 식으로 나자빠져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이었는지 일본은 프레젠테이션이다 뭐다 하나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형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했다. 심지어 스튜어디스와 미스 코리아들까지 동원해싸. 비동맹국들을 중심으로 IOC 위원들에게 유치홍보를 했다>

『전쟁 위험이 있기에 평화의 올림픽을 해야』

盧 전 대통령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본은 아무 준비도 안한 채 바덴바덴에 왔고, 우리는 상상치도 못할 준비를 해서 갔어요. 미스 코리아와 스튜어디스들까지 동원해 IOC 위원들 손을 잡고 안내하니까 우리쪽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당시 외국에서는 『한국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화약고(火藥庫)라는 표현도 있었다. 『아시아의 화약고에서 올림픽을 해서 되겠느냐』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우리는 이에 대응해 거꾸로 『맞다 화약고다. 때문에 화약고에 전쟁의 불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올림픽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우리는 또 『올림픽은 선진국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된다. 개발도상국에서도 열려야 한다』면서 비동맹국 표를 공략했다. 이 두 가지 논리에 비동맹국을 중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리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활동한 결과 52대 27, 일본에 압도적인 표차로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 북방정책의 기본전략, 기본철학을 구상했던 시발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당시 올림픽 유치에 표를 준 나라들은 주로 비동맹국이었고, 그 다음이 서방의 자유진영 국가들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우리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격렬하게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뒤에도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에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서울올림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억지 논리를 펴대며 방해공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비동맹국들을 1차적으로 안았으니까 이제는 동구권도 안을 수 있다며 동구권을 겨냥하자고 했다. 원래 자유진영은 스포츠와 정치가 분리되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것이 분리가 안되고 모두가 정치에 귀결된다. 때문에 그들을 올림픽에 참여하도록 유치한다는 자체가 정치적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전제를 세웠다. 나는 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서 동구권을 참가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비롯해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협력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포츠를 중심으로 스폰서를 하는 기업들도 우리를 많이 도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유명한 스포츠 메이커인 아디다스社가 IOC의 스폰서를 맡았는데, 이 회사의 다슬러 회장은 동구권의 여러 지도급 인사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사람들의 협력을 얻고 해서 그 높은 벽을 넘었던 것이다>

「북한 개방=통일」이란 공식

여기까지 육성증언을 마친 盧대통령은 올림픽 유치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보안사령관 시절에 외교관이 20∼30명이 바뀌었는데 (그들이 부임하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보안사령부에 와서 보안교육도 받고. 그때가 계엄령하였거든. 그때만 해도 김재규(金載圭)가 죽고 해서 안기부의 역할이 좀 약했어요. 보안사 역할이 강했다고. 그때 (외교관들이) 교육받으러 왔을 때 내가 뭘 강조했느냐.
「여러분이 나가서 할 일은 훌렁 벗어라. 훌렁 벗고 (현지 사람들과) 얼굴을 부비고 껴안고 뒹굴어라. 우리도 이보다 더 어려울 때도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하니까 살게 되더라. 우리가 겪은 경험을 함께 나누자. 이런 식으로 정을 주고 안고 뒹굴면 우리에게 올 것이다」이것을 강조했거든.

그리고 진척되는 상황을 나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두어 달쯤 되니까 연락이 와요. 어떤 대사는 수지침을 배워서 주재국 사람들이 말라리아, 소화불량 걸리면 수지침을 놔주었어요. 이렇게 넥타이 풀고 몸을 던지니까 비동맹국 표가 우리 편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북방문제도 그래. 판문점에서 (남북대화를) 수십 년을 해도 안 되거든. 그래서 방법을 바꿔야 한다, 북한을 통일하는 개념은 개방이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도 개방만 되면 변한다. 그래서 멀리 돌자.

첫째는 비동맹국이다. 그 다음이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이다. 마지막이 중국이다. 이렇게 전략 개념을 세워서 가능성의 길을 닦고 연계를 시킨 것이 올림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올림픽만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북방정책, 통일정책과) 다 같이 했다고요.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요. 그중 한 분이 고인(故人)이 된 다슬러 회장이야. 이 사람이 내게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당신 소련에 가서 스포츠 장관 만나서 이것을 좀 해달라, 동구권 가서 좀 해달라」하면 다 해줬어요. 북한이 필사적으로 방해했잖아요. 처음에는 살기가 있었다고요. 북한이 하도 드세게 나오니까 나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소련 체육상이 북한 눈치 보느라고 비밀리에 간첩 만나듯이 나와 만나고 그랬다고』

서울올림픽이 동구권 붕괴시켰다

盧 전 대통령은 다시 자료를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올림픽 추진과정에서는 우여곡절도 많았고 무산될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동구권을 열심히 회유하느라 애쓰는 중에 제일 믿었던 미국쪽에서 문제가 튀어나왔다. 『서울올림픽 안된다』라고 LA타임스, 뉴욕타임스 등이 주장하고, 상원의원들은 의결까지 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 일로 굉장한 고통을 받았다. IOC 본부 로잔느에서도 집행위원들이 『정말 서울에서 올림픽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장소를 바꿔야 하는가』하고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그 어려운 벽을 필사적으로 뛰어 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만약 IOC 집행위원회가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 메인스타디움 한 가운데 사마란치 위원장의 무덤을 만들고, 나머지 81명의 IOC 위원 무덤을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겠다. 그 비석에 무슨 내용을 새기려 했냐면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을 망친 장본인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이곳에 묻혀 있노라」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관광객들이 침을 뱉게 하겠다고 독설을 했습니다. 이 내용을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에게 말하면서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그대로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올림픽 유치는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면 동서(東西)의 벽을 그때부터 허물기 시작한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온 사회주의 국가들이 올림픽에 참여해서는 현실이 1백80도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방의 최전선(最前線)에 놓여 있는 「형편없는 미국의 앞잡이 나라」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실제로는 자신들이 듣고 배운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충격이 동구(東歐)가 붕괴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올림픽은 나의 북방정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기도 하지만 東西화해, 동구권 붕괴 등에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와 함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엇다고 할 수 있다>
[ 2003-07-14, 1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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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헝가리와 한국의 友情


동구권 국가로서 최초로 한국과 수교, 폴란드 체코와 함께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나라. 몽골반점이 있는 국민들.
趙甲濟

1989년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72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는 동구공산권 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국가가 민주화된 해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 루마니아가 공산정권을 몰아냈다. 루마니아를 제외하곤 총 한 방 쏘지 않고 공산주의 정권을 밀어냈다. 동구공산권 붕괴의 방아쇠를 당긴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였다. 무력으로 탄압당했던 1956년의 헝가리 義擧, 1980년의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이 1989년에 와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결실을 맺은 셈이다. 헝가리는 동구 공산권에서 맨 첨 한국과 수교한 나라였다. 1989년 2월1일 헝가리의 줄라 호른 외무담당 국무장관이 서울에 와서 양국의 상주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기는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국교 수립에 이르렀다. 이날 호른 장관은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하고 그로스 서기장의 친서를 전달한 뒤 환담했다. 崔浩中 外務部長官, 盧昌熹 儀典首席(通譯), 朴哲彦 政策補佐官, 金宗輝 外交安保補佐官이 배석했다. 헝가리側에선 에트레(Sandor Etre) 駐韓 常駐代表와 호바드(Gabor Horvath) 通譯官이 배석했다.

헝가리어를 아는 통역이 없어 헝가리어를 영어로, 영어를 한국어로 이중통역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외교관계 개설을 위한 의정서를 서명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요즈음 그로스 서기장께서는 건안하시지요?”라고 인사했다. “오늘은 한·헝가리 양국관계뿐 아니라, 동·서간의 장벽과 긴장을 허물고, 화해, 협력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테이프 절단식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동구권으로서는 최초로 우리나라와 이렇게 수교를 한 헝가리의 노력에 대하여 세계 모든 나라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로스 서기장께서 동·서 화해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역사적 결단을 내리신 데 경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양국간의 모범적인 협력관계가 앞으로 유고 등 다른 동구권국가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소련도 헝가리의 주도적인 행동에 찬동하면서, 우리와의 관계개선을 바라고 있고, 중국도 우리와의 실질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만이 이러한 만족스러운 국제조류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그들로 인하여 헝가리도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 듯하여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가까운 앞날에 그로스 서기장께서 방한해 주시기를 희망하며, 그 기회에 정상간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확고히하고저 합니다. 나로서도 구라파를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귀국을 방문하여 그로스 서기장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호른 장관은 “양국 수교에 대한 국제적 반응에 대하여는 각하와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우리 동맹국들도 그를 이해하고 공감을 표시하였습니다. 東歐제국들이 속도는 느리지만, 우리와 같은 조치를 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양국 수교에 대한 평양의 반응을 보면 헝가리 역사상 그다지도 무례하게 외국의 질책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헝가리로서도 그에 대하여는 부당한 내정간섭으로 단호히 거절하였지만,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들과의 관계 단절을 원하지 않지만, 만약 그들이 그렇게 고집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저희 서기장을 대신하여 각하께 정식으로 저희 나라를 방문토록 초청 드립니다. 그리고 각하께서 서기장의 방한을 초청하셨다는 말씀도 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서기장께서는 금년 중 또는 언제라도 각하께서 구주 방문시에는 꼭 헝가리도 포함시켜서 정상회담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그를 위하여 헝가리는 양측의 사정을 감안하여 각하 방문일자를 정하는 등 만반의 준비태세가 되어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이 기회에 두 가지 말씀을 참가코자 합니다. 첫째는 양국관계 개설을 위한 박철언씨의 공헌입니다. 박씨는 작년 8월 부다페스트에서 교섭을 시작할 때부터 아주 유능하고, 능숙한 협상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희가 접촉한 외무부의 관계관들도 모두 훌륭한 외교관이었음을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둘째는 한국 政界에서 헝가리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여당의 대표단을 헝가리에 조기 파견하여 정당단 교류를 갖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와 관련, 금년 3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되는 IPU 회의가 좋은 기회일 듯 하온데, 각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돌아가시면 그로스 서기장께서 안부 전해주시고, 경제개혁과 복수정당제 등 정치발전을 이룩하신 영도력에 경의를 표해 주시고, 머지 않아 곧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부탁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여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똑 같이 민주화의 과정을 밟고 있던 헝가리와 한국은 인종적으로도 공통점이 있다. 헝가리는 몽골-투르크족으로 구성된 훈족이 유럽을 정복할 때 그 본거지였고, 10세기엔 몽골-투르크족과 비슷한 마잘족이 들어와서 오늘의 헝가리 토대를 만들었다. 헝거리 사람들중엔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도 많다. 지금 헝가리는 폴란드, 체코와 함께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육박하는 등 선진국 문턱까지 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年 11月 22日(水) 오후 4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국회의사당으로 집권여당인 사회당 총재 레죄 니에르쉬(Rezso Nyers)를 예방했다. 헝가리側에선 호른(Gyula Horn) 外務長官 등이 배석했고, 한국측에선 崔浩中 外務部長官, 盧在風 正治特補, 金宗輝 外交安保輔佐官 등이 배석했다. 당시 동구권은 대격변의 한가운데 있었다. 8월에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물러났고, 13일 전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체코에선 반공시위가 진행중이었다. 이런 동구권의 변화를 격발한 것이 헝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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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헝가리 사회당 발족을 축하합니다.

총 재 : 한국과 수교하고 경제, 문화관계가 진전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각하의 방문을 특별히 환영하는 뜻이 깊습니다. 역사를 회고하면 2차대전 이후 우리 양국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각하의 북방정책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은 외부 세계와 공개적인 관계를 갖고저 하는 우리 정책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남아 특히 그 핵심인 한국에 대하여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 옳은 말씀입니다. 양국 수교는 세계 실정에 맞는 결정이었습니다. 한국은 정치, 이념적 대립을 해소하고, 전세계적 협력을 추진하려는 생각을 올림픽으로 실천했습니다.

총 재 : 올림픽은 큰 성공이었으며, 특히 각하께서는 준비위원장이셨으니, 개인적으로도 축하드립니다. 올림픽은 그야말로 새로운 한국의 모습을 동구라파에 소개하였습니다.

대통령 : 올림픽직후 유엔서의 연설을 통하여 우리의 북방정책을 세계에 선언하였는데, 좋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감사말씀 드릴 것은 내가 올림픽준비위원장 당시 올림픽 서울개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공산국가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헝가리가 선두에 서서 우리 입장을 도와주었습니다.

총 재 :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북한의 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현금의 여러 가지 국제정세 변화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인가요?

대통령 : 우리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헝가리와의 수교가 있었고 최근 폴랜드와도 수교하였고, 유고, 소련 등과도 관계개선이 되고 있는데, 다만, 불행하게도 북한은 이에 응해 오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가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 북한만이 이에 반대하고, 더욱 폐쇄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김일성이 40여 년간 일인 독재를 하고, 이제 그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하려는 마당에 통제가 이완되면 북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 날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충격 없이 북한이 개방토록 유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들이 문을 걸어 닫고 있지만, 결국은 개방할 것이므로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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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테러 억제를 위한 몬트리올 협약의 의무 조항을 협약체결국이자 항공 테러 피해국인 한국이 피할 수 있을까?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몬트리올 협약은 金正日을 KAL 858 테러 지령범이라고 발표했던 한국 정부에 「피하기 어려운 의무」를 강제하고 있다


許容範 朝鮮日報 워싱턴 특파원 (heo@chosun.com)


金正日을 체포해야 할 국제 협약상의 의무


『북한의 국방위원장 金正日이 만일 서울을 방문할 경우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체포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金正日의 서울 답방을 고대하고 대환영하는 측에게는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金正日을 서울로 초청하기에 앞서 우리 정부가 깊이 검토해 봐야 할 사안이다.

우리 정부는 1987년 金賢姬에 의한 대한항공 858기 폭파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그 테러가 金正日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으며, 테러범인 金賢姬 자신은 그녀가 金正日의 친필지령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항공테러범이 자국의 영토 내에 있을 경우 어떠한 예외도 없이 반드시 체포해야만 하는 의무를 규정한 「민간항공 안전에 대한 몬트리올 협약」에 가입해 있다. 이 「몬트리올 협약」에는 소위 말하는 「외교적 면책」에 관한 규정도 없다.

따라서 법리적으로 말한다면, 金正日이 「사실상의 국가원수」이든 혹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를 받은 사실상의 國賓이든 상관없이, 우리 정부는 이 몬트리올 협약에 의해 반드시 金正日을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테러 교사범으로 체포, 재판에 회부해야 하는 국제적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金正日을 체포해야 하는 국제적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몬트리올 협약과,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수사결과, 그리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조치 등으로 법리적 해석에 아무 무리가 없다.

우선 「몬트리올 협약」을 보자.

이 협약의 공식 명칭은 「민간항공의 안전에 대한 불법적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Convention for the suppression of unlawful acts against the safety of civil aviation)으로, 1971년 9월23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체결되었다. 한국은 그 2년 뒤인 1973년 가입했으며, 북한도 1980년 8월13일 가입, 체약국이 되었다.

이 협약은 현재 가입국 수만 해도 151개국에 이르러, 민간항공기를 보유·운행하는 사실상 세계의 모든 국가가 가입되어 있는 세계 최대의 국제협약 중 하나이다. 한 마디로 세계 민간항공기를 대상으로 한 모든 범죄를 다루는 국제법이며, 군용·세관·경찰기를 제외한 모든 민간 항공기에 관한 범죄에 적용되는 세계적 규범인 셈이다.

몬트리올 협약은 다음에 열거하는 다섯 가지 행위 유형을 이 협약의 적용을 받는 범죄행위로 규정하면서, 여하한 자도 이런 행위를 할 경우에는 범죄를 범한 것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조 제1항).

그 다섯 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비행중인 항공기에 탑승한 자에 대하여 폭력행위를 행하고, 그 행위가 그 항공기의 안전에 危害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2. 운항중인 항공기를 파괴하는 경우 또는 그러한 비행기를 훼손하여 비행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비행의 안전에 危害를 줄 가능성이 있는 경우.

3. 여하한 방법에 의해서라도, 운항중인 항공기상에 그 항공기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거나, 그 항공기를 훼손하여 비행을 불가능하게 할 가능성이 있거나 또는 그 항공기를 훼손하여 비행의 안전에 위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장치나 물질을 설치하거나 또는 설치하도록 하는 경우.

4. 항공시설을 파괴 혹은 손상하거나, 그 운용을 방해하고 그러한 행위가 비행중인 항공기의 안전에 危害를 줄 가능성이 있는 경우.

5. 그가 허위임을 아는 정보를 교신하여, 그에 의해 비행중인 항공기의 안전에 危害를 주는 경우.

협약은 이어 「여하한 자도」 ▲위에 규정된 범죄를 범하려고 시도한 경우나 ▲그러한 범죄를 범하거나 또는 범하려고 시도하는 자의 共犯者인 경우에도 범죄를 범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조 제2항).


金賢姬 증언에 의해 金正日의 테러 지령 밝혀져


한편 金賢姬와 수사당국에 따르면, 金正日은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가 버마(現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 추락하는 사건이 터지기 한 달 보름여 전인 1987년 10월7일 이들(金賢姬와, 자살한 다른 남자 범인 김승일)에게 『88 서울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11월10일 『11월28일 23시30분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고 이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라디오에 시한폭탄과 액체폭약을 몰래 숨겨 탑승한 뒤 7시간 뒤에 폭발하도록 장치한 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수사결과와 범죄자 자신의 고백에 의거한다면, 金正日은 몬트리올 협약 제1조 제1항의 3번 항목 범죄 (폭파물질과 폭파장치의 설치)에 대한 敎唆犯(교사범)이 되는 것이다. 敎唆犯은 共犯의 일종이므로, 金正日은 대한항공 폭파의 共犯으로서 범죄구성 요건상에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刑法은 제31조 1항에서, 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 敎唆犯을 범죄를 직접 저지른 正犯과 동일한 형으로 처벌토록 하고 있다. 金賢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특별사면되었다.

나아가 그 제2항과 제3항에서는 각각 교사를 받은 자가 범죄의 실행을 승낙하고 실행의 착수에 이르지 아니한 때에는 「교사자와 피교사자를 음모 또는 예비에 준하여 처벌한다」, 「교사를 받은 자가 범죄의 실행을 승낙하지 아니한 때에도 교사자에 대하여는 전항과 같다」고 규정, 피교사자가 범죄를 실행하지 않은 때에도 교사자를 처벌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확립된 법이론과도 부합한다.

국제사회도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가 金正日의 지시에 의한 북한 공작원의 소행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를 근거로 북한에 대해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이 사건 이후 14년째 北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이다. 미국은 1979년,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이른바 「反테러법」을 제정하고, 매년 「테러지원국」 명단을 발표하면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국가에 대해서는 소위 불량국가(rogue state)라는 이름을 붙여 강력한 무역·경제제재 조치를 취해오고 있다.

미국은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反테러법 및 무기수출통제법에 의거, 다음해인 1988년 1월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하였다. 미국은 이후 지난 4월30일 발표한 연례 세계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비롯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써, 북한에 대해서는 1988년 1월 이후 14년째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북한은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하긴 했지만 작년 클린턴 정부 말기에는 거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는 작년 6월15일 남북 頂上회담 이후 한국 정부의 꾸준한 노력도 작용했다. 작년 10월 북한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과 미국은 「국제 테러에 대한 美·北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국 법률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대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기로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8월4일 있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 간의 「모스크바 선언」에도 이 부분이 제1항으로 올라와 있다. 金正日이 미국의 무역·경제 제재조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보여 주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金正日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지도자」라는 의심의 딱지를 붙여놓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金正日 체포의 의무를 면할 수 없다


「몬트리올 협약」은 누구나 안심하고 비행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민간항공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고의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제법(국제협약은 국제법의 일종이며, 국제법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이 그 실효적 효력을 보장받으려면 그만큼 규정이 명확해야 하고 이 규정의 위반행위에 대해 엄격한 법적용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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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 [秘話] 서울올림픽-테러를 막아라




북한 테러 위협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韓ㆍ美ㆍ日 3국 정보기관의 共助 내막



CIA는 세계 테러리스트 자료 넘겨주고, 日本 경찰은 赤軍派 체포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朴正熙 기획- 全斗煥 실천


사마란치 IOC위원장 초청으로 올림픽회관에서 자리를 함께한 여야 정치 지도자와 조직委 임원들.


1988년 9월17일 낮 12시25분, 소흑산도 分校 교사 鄭善萬(정선만), 서울예고 孫美廷(손미정)양, 마라톤 국가대표 金元卓(김원탁)씨 등 3명의 聖火(성화) 點火(점화)주자가 서울 잠실 주경기장의 성화대 승강판을 타고 올라가 화로에 성화봉을 댔다.

성화의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 공군 제18전투비행단 소속 A-37연습機 다섯 대가 창공에 5色 줄을 그리면서 주경기장 위를 지나갔다. 성화 점화와 동시에 경기장 통과라는 절묘한 타이밍은 서울올림픽의 역사적인 성공을 알리는 序幕(서막)이었다.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보름간 치러진 서울올림픽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를 포함해 160개국 1만3304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의 대회였다. 서울올림픽의 성화가 꺼진 지 15년. 서울올림픽은 단지 성공개최라는 사연만 남긴 것이 아니다. 그 이후 한국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큰 사건이 서울올림픽이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리며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을 높인 것도,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며 선진국으로 도약의 기치를 올린 것도 서울올림픽이 가져다 준 효과였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안길에는 미국과 일본 등 우방국 정보기관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연도 묻혀 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개최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대회 유치도 그랬고 대회 준비, 대회 진행도 모두 힘들었다. 그 어려운 과정의 출발점은 1979년이었다.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경제 高度 성장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고 ▲북한의 제3세계 외교 攻勢에서 우위를 점해 南北 대결의 실질적인 해결의 계기를 마련하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1988년도 하계올림픽을 유치할 것을 지시했다.

1979년 10월, 鄭相千(정상천) 당시 서울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88올림픽의 서울유치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는 대한체육회의 올림픽 유치활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올림픽 유치의 주역이던 朴鐘圭(박종규) 회장이 사실상 체육회의 일상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政局이 혼란스럽게 되자, 올림픽 유치사업은 「冬眠(동면)」에 들어갔다.

1980년 8월27일 全斗煥 대통령이 제9代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88올림픽 유치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事案을 특별한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88올림픽 유치신청서를 기일內에 제출토록 지시했다.

서울市는 그해 12월2일자로 88올림픽 유치 후보국이 될 뜻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공식통보했다. 1981년 2월26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人便(인편)으로 한 트럭분에 달하는 유치신청 서류를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에 제출했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88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79명의 IOC 위원들이 나고야와 서울을 놓고 표대결을 펼쳤다. 드디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수백 명의 보도진과 유치위원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봉투 깊숙이 있던 서류를 꺼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울(Seoul)』 한국인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한 마디였다.

朴英秀(박영수) 서울시장, 曺相鎬(조상호) 대한체육회장,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우리 측 관계자들은 일제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52대 27로 한국勝.


「南朝鮮 인민들이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반대하고 있다」

북한은 88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된 지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올림픽 개최에 대해 언급했다. 다음은 1981년 12월3일자 로동신문 내용.

<최근 南朝鮮의 군사 파쑈 분자들은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된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괴뢰 당국의 고위층과 관계 요원들, 그리고 어용 나팔수들을 내세워 매일 같이 괴이한 소란을 피우고 있다. 이번 기회에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 불가담 나라들에 접근하여 국교 및 공식관계를 맺어 보려는 괴뢰들의 책동은 南朝鮮을 그 무슨 「국가」로 인정받아 보자는 것이다.>

북한은 그 후로도 「南朝鮮 인민들이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반대하고 있다」는 등으로 宣傳을 계속했다.

북한은 이때부터 서울올림픽이 南北의 역학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로 판단하고 그 대응책으로 테러를 준비하게 된다. 우리 측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1981년 7월 全斗煥 대통령이 아시아 5개국 巡訪(순방)길에 올랐을 때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살해를 계획했고, 1982년 2월 아프리카 및 캐나다 순방길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1983년 10월8일, 북한은 北京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 정부에 미국ㆍ남북한이 참석하는 이른바 「3者회담」을 제의했다. 바로 다음날, 북한은 버마(現 미얀마)의 랑군에서 이곳의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한 우리 사절단에게 폭탄테러를 가했다. 徐錫俊(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정부 요인들이 피살되고 14명이 부상했다. 테러의 표적이었던 全斗煥 대통령은 도착이 늦어 무사했다.

당시 安企部 해외담당 차장이었고 나중에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이 된 朴世直(박세직ㆍ70ㆍ現 한국청소년마을 총재)씨는 사건 당일 미국 CIA 서울지부장과 朴俊炳(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을 초청해 安企部 청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1시경 悲報(비보)를 접했다고 한다.

朴씨는 일단 북한의 폭탄테러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安企部, 경찰, 軍에서 對共 및 폭발물 처리 전문 요원 13명을 선발해 이튿날 버마로 떠났다. 버마 당국의 엄정한 수사와 우리 조사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건발생 25일 만에 범행의 진상이 규명됐다.

체포된 강민철, 진모가 북한 공작원으로 드러남에 따라 버마 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해 정부 승인을 취소하는 한편, 11월4일 對北 斷交(단교) 조치를 발표하고 48시간 내에 全공관원이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북한이 그 시기에 테러를 자행한 1차적 목표는 국가원수를 살해함으로써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서울올림픽 「물타기」 전략, 「공동개최」

아웅산 사건 半年 후인 1984년 3월30일, 북한은 LA올림픽 참가 선수 명단 제출 마감일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서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북한은 LA올림픽 개막에 임박해 宣傳 목적의 회담을 제의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4~5월에 걸쳐 판문점에서 세 차례의 南北체육회담을 가졌다. 북측은 회담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4월9일 첫 회담에서 북측은 아웅산 사건과 崔銀姬·申相玉 납치사건을 완강히 부인하고 도리어 우리 내부 문제에 대한 중상과 비방을 계속하다 급기야 일방적으로 퇴장했다.

제2차 회담에서는 우리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 성냥갑을 던지고, 북한 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두드리며 욕설을 퍼붓는 등 행패를 부렸다. 5월25일 열린 제3차 회담에서는 이미 전날 공산권에 동조해 LA올림픽에 불참하기로 결정해 놓고도 회담장에 나와서는 우리 측에게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방해한 사실을 시인, 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회담을 깨버렸다.

1984년 末 북한은 본격적으로 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쿠바의 카스트로를 前面에 내세웠다. 카스트로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카스트로는 미국에서 개최키로 한 汎미주대회와 서울올림픽 대회의 장소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IOC 측에 올림픽 운동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1984년 12월16일, 북한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 김유순은 사마란치에게 편지를 보내 88올림픽 개최지 변경을 요구하고 나섰다. 金위원장은 『군사분계선 上에서 交戰(교전)상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 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경기대회할 도시가 교전 상태에 있으면 통지문으로써 그를 취소할 수 있다고 지적한 憲章(헌장)의 요구를 하루 속히 실행할 것을 절박한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서울올림픽경기대회가 우리나라의 남쪽에서 열리는 것도 반대하며 북쪽에서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올림픽의 안전문제로 들먹였던 「개최지 변경론」은 1984년 12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89차 국가올림픽위원회(IOC)특별총회에서 서울대회에 세계의 모든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참가할 것을 다짐하는 「로잔 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수그러들었다.


金正日의 대한항공機 폭파 親筆 지령

북한의 金日成ㆍ金正日 父子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를 결심하게 된 것은 국제적 고립으로 초조해졌기 때문이었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로써 서울올림픽을 저지하려고 기도한 지 4년 만에 그들은 다시 폭력적 수단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金正日은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가 버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 추락하는 사건이 터지기 전인 10월7일 金賢姬(김현희)와 金勝一(김승일)에게 『88서울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親筆(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두 공작원은 11월10일 『11월28일 23시30분 바그다드發 서울行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고 이 비행기를 폭파한 것이다.

1987년 11월29일,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 金賢姬가 바레인에서 체포됨으로써(主犯 김승일은 자살) 북한의 야만적인 행위가 白日下에 드러났다. 국제사회도 북한에 대해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反테러법 및 무기수출 통제법에 의거, 다음해인 1988년 1월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미국은 지난해 4월30일 발표한 연례 세계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비롯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써, 북한을 1988년 1월 이후 14년째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朴世直씨는 『북한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등으로 인해 제3의 테러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88서울올림픽을 무사히 치른 한 요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진 것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115명의 陰德(음덕)이었다』면서 『이 사건은 異域萬里에서 귀국길에 오른 中東근로자들을 죽인 金日成을 어떤 논리로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좌경세력에도 타격을 입힌 셈』이라고 했다.


在野의 공동주최 주장

곤경에 처한 북한을 도와준 것은 뜻밖에도 남한의 在野(재야), 학생 그리고 일부 야당 세력이었다. 1988년 봄부터 재야, 학생세력들은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주장을 들고 나왔다. 5월11일, 35명의 在野 인사들은 남북한 양측 정부에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협상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5월28일에는 이른바 「전국 67개 민주 사회단체」가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범민주단체선언」을 발표하는 가운데, 서울올림픽의 공동개최를 요구하였다. 일부 운동권 대학생들은 북한의 공동주최 주장에 동조하는 시위를 벌였다. 운동권 지하서클인 소위 「무등산 결사대」는 1988년 8월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남북한 공동 올림픽 개최를 선언하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朴世直 당시 올림픽조직委 위원장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동개최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在野 세력들의 攻勢(공세)에 대응해 나갔다. 정치권을 설득하는 일에 사마란치 위원장도 나섰다. 사마란치는 1988년 6월 서울을 방문, 尹吉重(윤길중) 민정당 대표, 金大中(김대중) 평민당 총재, 金泳三(김영삼) 민주당 총재,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초청해 IOC와 남북한 간의 협상과정을 브리핑하기도 했다.

국회는 7월9일 임시국회에서 북한선수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독재체제 아래서 서울올림픽이 강행되면 이는 나치下의 베를린올림픽과 같게 될 것이다』고 연설했던 金泳三 총재도 서울올림픽 적극 지지로 돌아섰다. 在野ㆍ학생 세력의 공동주최 주장은 이때부터 급속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북한은 서울올림픽 최종 엔트리 마감일인 9월2일 북한 NOC 성명을 통해 不參(불참)을 선언했다.


뮌헨 올림픽의 교훈, 親切보다 安全이 우선

북한과의 줄다리기와 함께 정부는 대회의 성공개최의 관건이 안전문제라고 보고 이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해 나갔다.

우선 1987년 3월 안전대책위원회를 정점으로 13개 정부 관계부처 170명 합동으로 안전통제본부를 구성했다. 1988년 2월3일 安企部 주도의 안전통제본부는 출입국 관리ㆍ對테러 대책 등 20개 분야별 대책을 확정하고, 요인 신변 보호대ㆍ경기장 경비대ㆍ선수촌 경비대 등 16개 기능별 전담 조직을 편성 운영하게 됐다. 아울러 264개 대회 관련 시설에 현장 안전본부를 설치했다.

安全분야의 사령탑은 陸完植(육완식) 당시 안전통제본부장이었고, 서울올림픽의 안전 업무에 대한 총체적 기획과 책임을 담당했던 이는 黃圭雄(황규웅ㆍ60) 당시 안전국장이었다. 黃圭雄씨는 『서울올림픽 준비 및 대회기간은 살얼음을 딛고 발길을 떼는 것 같은 초조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1972년 뮌헨올림픽 대회 도중 터진 테러사건은 통제본부의 머리를 짓눌렀다. 서울올림픽을 두 달 앞둔 1988년 7월초에 조직委는 1974년 뮌헨올림픽 때의 안전관리 책임자였던 슈라이버(당시 뮌헨 경찰국장)씨를 초청했다. 슈라이버씨는 안전관계자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의 안전관리가 어려운 것은 최대의 안전과 최소의 불편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뮌헨올림픽에선 高位 정책수립가들이 최소의 통제로 최대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면서 경비원 수를 줄이고, 安全시설을 축소하는 등 친절에 주력하다가 流血(유혈)의 올림픽을 自招(자초)했다. 安全이 친절이나 불편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슈라이버씨는 뮌헨올림픽 때의 특별법 제정 사례를 소개했다. 조직委에서는 이것에 착안, 1988년 8월5일에 공포된 「올림픽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黃圭雄씨는 1986년 1월8일 조직委 안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부 안전 유관기관과 협조해 호텔과 경기장, 식당 등의 요원들에게 「부드러운 안전」을 요구했다. 딱딱한 규율이 몸에 밴 軍과 경찰은 한걸음 뒤로 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창구에 내세워 친절하게 선수단과 관광객들을 대하게 했고, 軍·警은 뒤에서 이들을 뒷받침하게 했다.

그는 올림픽 기간 중에는 매일 일과시작 전 IOC 본부가 있던 신라호텔에서 IOC안전대책반의 코마르씨와 조찬을 겸한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 회의는 주로 우리 측이 안전에 대해 설명해 참가국의 이해를 돕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협조를 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이듬해인 1981년 하반기부터 「올림픽 방해 무장 특공조」에 대한 장기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5년부터는 「제3국에서 한국인을 가장, 침투하고 테러를 가해 세계 각국이 올림픽 참가를 포기토록 한다」는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88서울올림픽 저지를 위한 특수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우리가 얻은 첩보에 의하면, 1988년 2월11일,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 정영진은 평양 공관장 회의를 다녀온 뒤 대한항공 858편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재발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그는 『88올림픽 이전에 지난번 대한항공기 사건과 비슷한 일이 北朝鮮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서방국가에 의해 또 자행될 것』이라고 했다.


赤軍派 2인자 마루오카 오사무 체포

朝總聯(조총련)과 일본 赤軍派(적군파)의 서울올림픽 방해 공작에 대한 첩보도 입수됐다. 朝總聯 중앙본부는 1988년 5월 말 對韓 공작을 독려하기 위해 중앙본부 사무총국장 권순희 등 간부 4명을 나고야에 파견했다. 권순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올림픽을 저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승리』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朝總聯이 올림픽 南北 공동개최를 지원하기 위해 全大協(전대협)의 8ㆍ15궐기대회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입수됐다고 한다.

1988년 5월24일, 미국 워싱턴 토론회에 미국 측 대표로 참석한 美 국무성 차관 더윈스키는 『제24회 서울올림픽은 북한의 테러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우려했다. 수집된 첩보에 의하면 일본 赤軍派는 일련의 테러를 준비 중이며, 이들의 목표에는 서울올림픽 시설 파괴, 한국 要人(요인) 및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기타 인사 납치, 해외 한국공관 및 국내 외국공관 占據(점거), 무장봉기 지원 등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일본 赤軍派는 韓·美·日 3國이 연대해 올림픽 협력하는 것에 대해 대항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레바논에 거점을 둔 일본 적군파는 「Political Review」誌 1988년판에서 「韓·美·日 3者 동맹은 아시아 인민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변했다」고 지적하고 「모든 인민들은 韓美日의 올림픽 협력체제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88년 4월 일본 외무성은 북한에 체류중인 요도號 납치범이 수시로 북한을 출국, 제3국에서 일본 赤軍派 요원과 접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첩보를 제공받았다. 우리 정보기관은 赤軍派의 이와 같은 동향이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테러사건의 사전 준비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기도 했다.

1988년 4월 일본 警視廳(경시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赤軍派 간부인 마루오카 오사무(丸岡修ㆍ53)는 일본 赤軍派 2인자로서 외국에서 활동하던 중 1987년 11월 일본에 잠입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한국 요인을 암살하려던 메모를 소지하고 있었다. 체포 당시 그가 삼키려다 실패한 메모용지의 암호를 분석한 결과, 암살 대상 한국 정부 요인들의 이름과 「피바다로 물들이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암살대상 명단에 적힌 이름에는 全斗煥 대통령, 盧泰愚 민정당 총재의 이름 등 정부 요인의 이름이 있었다.

1970년 요도號 납치사건 당시 16세로 가장 어렸던 시바다 야스히로(紫田泰弘)는 1985년 몰래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돼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그는 체포 당시 북송교포 이황(일본명 나카오 아키다)이란 이름의 위조여권을 갖고 있었다. 시바다 야스히로의 체포와 관련, 북한에 생존해 있는 요도號 납치범들은 아사히 텔레비전과의 위성중계를 통해 『시바다의 체포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일본 赤軍派들이 북한의 사주 및 배후지원을 받아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포착되기도 했다.

朴世直 당시 위원장의 회고다.

『IOC에서 개최지를 뮌헨으로 하자는 등 서울올림픽의 안전에 대해 의구심을 갖던 상황에서 북한의 테러 한방이면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할 나라는 없습니다. 對人테러도 문제지만, 개막식 의상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의 對物테러도 간단히 올림픽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어요. 오히려 북한의 테러 위협이 반사작용을 일으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다고 생각됩니다』


「위조·변조 여권 식별 전산망」 설치 운영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韓·美·日 3국 정보기관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韓·美·日 3국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각종 테러 관련 危害(위해) 첩보를 입수해 유관기관에 전파하고 처리하는 데 긴밀하게 협조했다.

朴世直씨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 일본과 CIA가 협조를 한 덕분에 金賢姬를 체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위해 서독ㆍ영국ㆍ프랑스ㆍ이스라엘 등 26개국 35개 우방국의 정보기관과 협력체제를 구축했으며, 특히 미국과 일본 정보기관의 협조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올림픽 조직委 안전국장을 맡았던 黃圭雄씨는 당시 미국과 일본에 대한 共助요청은 『당연히 대회를 치르는 우리가 한 것』이라며 『각국에서는 대회에 참가하는 자국 선수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안전에 관한 정보를 우리 측에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세계 테러에 대한 자료나 해결능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라면서 『돌발적인 테러가 발생했을 때 그 처방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고, 평화와 안전, 그리고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온 결과』라고 말했다.

朴世直 당시 조직委 위원장은 『그동안 미국, 일본 등 우방국과의 정보교류는 계속돼 왔지만 서울올림픽 유치 이후 1983년 아웅산 사건이 발생하는 등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가 계속되자 미국은 CIA의 人力을 보강하고 그들의 북한 정보를 우리 측에 100%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과는 요도號 사건 때부터 일본 경찰청과 총리실 산하 정보기관인 「內閣調査室(내각조사실)」과 共助를 해 왔다』면서 『최근 美 CIA(중앙정보국)와의 정보교류가 서울올림픽 당시만 못한 것 아니냐』면서 안타까워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 등 정보기관에서 전달된 첩보는 총 141건으로 국제테러분자 관련 첩보 68건, 僞造(위조)ㆍ變造(변조)여권 첩보 22건, 망명 企圖(기도) 첩보 2건, 기타 30건 등이다.

일본의 경찰 및 공안 당국이 취한 엄격한 출입국 관리 업무와 통제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특히 일본을 통한 테러범의 침투에 대비해 1988년 4월부터 두 달간 韓日 간 「올림픽안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해 국제테러에 공동 대처하기로 하는 등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黃奎雄씨는 『일본 측에서 야쿠자 등 기피인물 명단을 우리 측에 제공했고, 김포공항에서 이들의 입국을 취소하는 등 상호 협력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우방국 정보기관과 美 FBI(연방수사국), CIA 등 관계기관이 갖고 있는 세계의 테러리스트 자료를 우리 쪽 안전관리 컴퓨터 터미널과 연결시켜 위험 인물의 入國(입국)을 예방하도록 했다.

국제테러 관련 정보 수집에 따라 확보된 자료는 즉각 법무부로 보내 전산관리 했다. 安企部 및 미국 정보기관ㆍ美8군ㆍ일본 경찰청ㆍ이탈리아 정보기관ㆍ대만 안전국ㆍ인터폴(국제경찰) 등 국내외 각종 정보기관에서 제공한 국제 테러용의자 첩보에 따라, 1988년 1월1일부터 10월2일까지 법무부에 신규 입국금지 및 전산 관리토록 조치한 자료는 64개국 5274명에 달한다.

1988년 2월1일 미국 측은 정보협력차원에서 韓美 간 보유하고 있는 각종 위조ㆍ변조 여권 관련 정보자료를 상호교환하기 위해 법무부 및 김포공항에 「위조ㆍ변조 여권 식별전산망」(Red Net)을 설치ㆍ운영했다.

이렇게 입력된 전산망을 바탕으로 1988년 1월부터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한국 입국을 시도하던 국제테러 용의자 또는 여권 위조 혐의자 33명(12개국)을 입국심사 과정에서 적발해 퇴거조치했다. 이 중 국제테러 용의자는 7개국 20명이었으며, 여권 위조 혐의자는 7개국 13명이었다.

적발해 낸 국제테러 용의자는 일본 赤軍派 소속인 니시 텐페이(西天平), 시노하라 사토시(原敏), 세오 미케오(妹尾美喜夫)등 세 명이다. 안전통제본부는, 입국심사 과정에서 적발된 국제테러 용의자를 포함, 올림픽 패밀리 1만6315명의 신원사항을 전산테이프에 입력해 법무부 및 美 FBI에 신원조회를 의뢰했다. 이 중 7개국 9명의 테러 관련 신원 특이자가 드러나 이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향을 감시하기도 했다.

레바논 보도진의 일원으로 입국한 기술자인 사라라 왈리드는 프랑스에서 테러범을 소탕할 때 추방된 西베이루트 거주 좌익계 시아派(파) 테러범인 것으로 확인됐고, 서독의 카메라맨인 볼프강 그람스는 서독 赤軍派(RAF) 소속으로 경찰이 수배중인 자와 이름이 같았다. 모로코의 복싱연맹 배심원인 모하메드 벤키란(Benkirane)은 이슬람 정통 테러범과 이름이 비슷해 추적대상 리스트에 오르는 등 7명이 대상에 올랐다.

올림픽을 불과 보름 앞두고 赤軍派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입국 시도가 이어졌다. 9월2일 북한 및 일본 적군파와 연계된 국제 테러리스트 가네코 에이코 등 4명이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국내 입국을 시도했으나 적발되었다. 9월4일에는 방콕에 체류하는 동안 배터리, 전선 등을 구입하고 수하물 검색에 불응하는 등 거동이 수상한 이란 외교관 여권 소지자 스마지 등 3명의 국내 입국 기도를 적발하였다.

9월27일에는 일본 적군파 테러리스트 20여 명이 조당 2~3명씩 편성해 레바논 비밀기지를 출발했다는 정보와 함께, 이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미국과 이스라엘 선수단에게 테러 공격을 준비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안전통제본부를 비롯한 관계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美 FBI와 CIA의 對테러 교육

특히 美 FBI(연방수사국) 「폭발물 자료센터」 등 전문기구에서는 한국 측에 폭발물 탐지ㆍ폭발물 탐지犬(견) 훈련 요령 등을 제공했고, 美 CIA에서는 테러사건 분석자료ㆍ테러사건 진압 지휘 요령 등 對테러 「노하우」를 전수했다.

조직委에선 美 CIA전문 교관단을 초청해 安企部·내무부ㆍ국방부 등에서 선발된 요원들을 대상으로 1987년 중 경호와 對저격훈련 등의 교육을 실시했고, 1988년에는 위조여권 식별ㆍ외사감시ㆍ공항보안ㆍ人質犯(인질범)의 심리연구 및 협상기법 등의 교육을 받았다.

1988년 올림픽 직전까지 13차례에 걸쳐 미국 對테러 전문 요원 42명이 訪韓해 對테러 전문교육을 하고 돌아갔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閔丙敦(민병돈) 前 육사교장은 1987년 10월 당시 美 특수부대인 델타포스(Delta Force) 부대원들과 함께 한 對테러 훈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특전사 對테러 실내훈련장에서 우리 대원들이 서로 마주보고 實彈(실탄) 사격을 실시했다. 특전사 707특수임무 대대원들과 함께 훈련하려고 內韓한 미국 델타 부대원들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가 국제 테러리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경기를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한 1981년부터이고 對테러 대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86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둔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때 安企部의 노력으로 이 분야 선진국인 미국과 프랑스 등의 관계기관 내지 對테러부대의 지원을 받아 교육·훈련과 신형 장비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사실 對테러작전에서의 첫번째 어려움은 이 싸움이 프로 살인범들과의 대결이라는 데 있다. 즉 국제테러범들은 여러 번 항공기 납치, 폭파, 살인 등을 자행한 歷戰(역전)의 흉악범들임에 비하여 우리 대원들은 정신력과 체력, 전술과 戰技(전기)는 뛰어나지만 「살인」 경험이 없는 선량한 젊은이들이다. 선량한 인간은 부득이 살인을 해야 하는 순간에 주저하게 된다.

선량한 우리 대원들이 테러범들과 맞닥뜨려 그들을 죽여야 할 때 과연 주저없이 그들에게 실탄을 발사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캄캄한 실내 전투사격장에서 고글(goggle, 夜視장비)을 쓰고 상대방의 왼쪽 가슴(심장)에 실탄을 사격하는, 극히 위험한 훈련을 반복했다.

왼쪽 가슴 위에 방탄복의 천을 오려서 두껍게 여러 겹을 덧씌운 「私製(사제)방탄복」을 입히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전우)의 심장에 실탄을 발사하는 쌍방사격훈련을 하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었다』

올림픽이 가까워짐에 따라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 각국 정보기관 요원, 올림픽 관계자, 주한 외교사절 등 16개국 28개 기관의 236명이 안전통제본부를 찾기도 했다.

안전통제본부는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 제공한 정보자료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對테러 기본 정보자료집으로 만들어 43종 8265부를 발간했다. 이 책자들은 대통령 경호실 등 유관기관에 배포해 88서울올림픽의 안전활동 업무수행에 큰 보탬이 됐다고 한다.


航母 엔터프라이즈號와 미드웨이號 한반도 배치

美 에너지省은 1984년 LA올림픽 당시 核사고 조사팀(NEST: Nuclear Emergency Search Team)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7년 8월 안전통제본부에 88올림픽 기간 중 核사고 조사업무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안전통제본부는 이 제의를 과학기술처에 의뢰했고, 과학기술처 간부가 미국에 출장해 核사고 조사팀의 현황을 청취하고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韓美 간 협의에 따라 한국 核사고 조사팀을 안전본부內에 설치했다.

조사팀의 임무는 核을 이용한 테러에 대한 정보분석, 국내 주요 방사선 시설의 동향파악은 물론, 주요 올림픽 시설 및 김포공항에 대한 방사능 감시와 核 및 방사능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1988년 9월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소련 선수단의 반입 물품을 검사한 결과, 微量(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확인되었으나 사소한 것으로 밝혀져 반입물품을 보세창고 보관하다 반출토록 조치했다고 한다.

88서울올림픽 대회 기간 중 북한의 무력 도발 기도를 억제하기 위해 우리 軍은 韓美연합 작전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美 국무부는 더윈스키 차관을 두 차례 한국에 보내 안전에 관한 韓美 양국의 협조체제를 만들도록 했다. 黃圭雄 당시 안전국장의 말처럼, 서울올림픽 安全의 제1선은 韓美동맹체제, 제2선은 軍警의 경계, 제3선은 경기장 진행요원들의 안전관리, 제4선은 조직위 관계자들이었다.

올림픽 기간 중 美軍의 「무력시위」도 이어졌다. 美軍은 美 7함대 항모인 미드웨이항모전투단과 엔터프라이즈 航母(항모) 전투단과 뉴저지 전함 전투단 등 막강 해상전력을 한반도 근해지역에 展開(전개)하고 극동지역 주둔 美軍의 훈련을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실시했다.

주한미군은 공격헬기, 스팅어미사일 등을 수도권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 美軍은 對北 감시활동도 한층 강화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와 SR-71기, 전술위성 등의 항공정찰을 통한 정보수집 활동을 늘리는 등 조기경보 및 전장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고 한다. 주한 美 공군의 제8 및 15 비행단을 최대한 운용, 24시간 공중 초계 임무와 대기 태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우리 軍도 1988년 8월부터 데프콘3 수준을 유지하면서 단계적으로 對北경계 수위를 높여 대회 직전에는 「진도개 하나」에 준하는 고도의 대비태세를 유지했다.


「平祝」에 50억 달러 투입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을 즈음, 북한은 고립을 만회하기 위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했다. 마치 가난한 집에서 빚을 내 분수에 맞지 않은 화려한 잔치를 치른 뒤 고스란히 빚더미에 올라앉는 형국이었다. 국토통일원이 밝힌 1989년 북한 경제 종합평가에 따르면, 당시 북한이 청년학생축전에 쏟아 부은 여파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89년 북한은 제3차 7개년 계획(1987~1993년)의 3차 연도를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3차계획의 成敗(성패)를 가름할 수 있는 3차 연도에서 계획된 경제건설 사업보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에 역량을 총결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1987년부터 3년간 「平祝」 개최와 관련해 총 50억 달러(약 6조원)를 지출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기간 중 5ㆍ1경기장(능라도 경기장), 능라도 「물놀이場(수영장)」, 능라도경기장과 문수거리를 연결하는 현수교 등을 건설했다. 만경대 안골에는 10여 개에 이르는 체육경기장과 체육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 밖에 청년학생축전 참가자들의 민박시설로 만든 광복거리와 청춘거리 건설 등 총 120여 개 단위 건설공사를 벌였다.

북한은 1989년 원유도입량이 1988년도의 316만4000t보다 18% 이상 줄어든 260만t을 기록했고, 이에 따라 정유공장을 74%밖에 가동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정치적 宣傳(선전) 목적에 따라 개최한 「平祝」의 과다한 재정 지출 때문에 1980년엔 2차 7개년 계획의 조정기인 1986년(2.1%) 이후 가장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1995∼2000년)를 재촉하게 됐다.

1988년 10월2일 오후 7시 세계의 이목은 다시 잠실 주경기장으로 쏠렸다. 아직 기울지 않은 한가위 보름달이 淸明(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성화대 위로 불끈 솟아올랐다. 대회에 참가한 공산권 국가를 포함한 모든 선수단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로 惜別(석별)의 情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무고한 人命을 살상해 가며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던 金日成ㆍ金正日 父子는 그순간 50억 인류가 하나가 된 잔치의 이방인으로서,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전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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