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의 현대사 강좌”가 9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 홀에서 “6·25전쟁기간 남북한 신문전쟁”라는 주제로 열렸다. 강사로 초빙된 鄭晉錫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노동신문을 폐지로 인수하셔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노동신문을 많이 읽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노동신문을 읽으면서 ‘원수’라고 쓰면 스탈린이나 김일성이고, ‘원쑤’라고 쓰면 美제국주의나 李承晩을 의미한다는 표기법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한국 언론사를 연구할 때 북한 신문과 일제 시대에 발행된 매일신문, 경성일보와 총독지와 같은 기관지도 연구 대상이다”라면서 “한국의 학자들이 북한 종군기자였던 김사량이 쓴 기사 중 미군이나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기사만 골라서 그대로 책을 쓴다”면서 “우리가 제대로 연구를 안 해서 역사적 편향이 만연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직전의 북한신문을 보면서 북한이 위장평화 전략을 통해 남침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평화통일 기본방침 채택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대표 3명 남한파견 ▲조만식과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주하의 교환제의 ▲8·15 5주년 증산을 독려 ▲선전매체를 통해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통해 전쟁을 미리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노동 신문의 1950년 6월 기사를 보여주면서 한설야, 리기영, 김남천, 김사량, 리국로, 리기영, 한설야, 리태준과 같은 유명한 작가나 소설가들이 어떤 선전 문구를 썼는지 보여주었다. 실례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지낸 한설야는 “우리의 손에는 평화통일의 정당한 방법이 쥐여져 있다. 그 실천을 위한 길로 힘차게 매진하자!”고 말했고, 리기영 작가는 “남조선 국회의 소위 무소속 중간파 의원은 평화적 조국통일을 지지하여 투쟁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鄭 교수는 “당시 남한은 북한의 선전에 속아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면서 동아일보의 6월 26일자 기사의 글 “市內民心至極平穩(시내민심지극평온)”을 보여 주었다. 그는 6월 26~28일까지의 조선·동아·서울·경향신문에 국군이 총 반격전에 돌입했다거나 국군이 제공권을 장악해서 완전히 이기고 있고 북한군이 패주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여 주었다.
鄭 교수는 6월 28일 국방부 보도 과장이었던 김현수 대령이 보도를 하다가 28일 날 새벽 북한군 탱크부대가 와서 총에 맞아 죽은 기사를 보여주었다. 이어 그는 6월 26일자 노동신문 1면을 보여주면서 “김일성은 이때부터 완전 독재자로 신문에 사진이 엄청나게 크게 났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일부터 신문을 내기 시작했다”면서 “북한이 전쟁준비를 치밀하게 했다는 증거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鄭 교수는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에 나있는 기사를 근거로 남한의 정치인들이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 중앙방송 라디오에 출현해 북한 편을 들고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는 방송을 했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명단에는 제2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효석, 국회의원이었던 조소앙, 민족자주연맹의 주석이었던 김규식 등이 있었다.
이어 그는 전쟁 후 노동신문에 실린 문화인들의 선동적인 글과 詩를 공개했다. 리태준은 6월 27일자에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전국문화인들은 총궐기하자”고 했고, 리기영은 '트루먼은 조선인민의 도살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한설야(히틀러 후계자 미제 강도들은 우리 농촌과 도시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 백남운(조선인민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의 글을 소개했다. 鄭 교수는 이런 글들이 지식인의 양심에서는 절대 쓸 수 없는 글이라고 말했다.
鄭 교수는 서울이 함락된 후 6월 29일자 노동신문에 “조국 수도 서울은 해방, 대구와 광주에서 대폭동이 일어나고, 울진방면에 인민 무력대가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기사를 보여주면서 “북한은 남한에서 자기네들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서 전부 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완전히 해방이 다 되었다는 선전선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함락 4일 만인 7월 2일부터 서울신문은 조선인민보가 경성일보는 해방일보가 접수해서 신문을 발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에 서울신문과 같은 언론사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를 만드는데 협조를 했지만, 수복 후에 법적인 절차를 밟아 우리나라 언론인으로 크게 활동한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인쇄업을 했던 김팔봉(6·25전쟁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라는 사람이 언론노조로부터 인민재판을 받고 극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도 전했다.
鄭 교수는 해방일보의 7월 8일자 신문에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낸 유명한 시인인 林和의 詩를 소개했다. 鄭 교수는 “林和가 미군정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공산주의자였으며 53년에 김일성이 남로당을 처형할 때 박헌영 일파와 함께 죽었다”며 “자기가 3년도 못살고 김일성에게 죽을지도 모르고 이런 시를 썼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7월 28일자 조선인민보에 “중앙청에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 밑에 보면 스탈린 대원수 만세가 적혀 있다”면서 “적화가 되었으면 우리도 동유럽과 같이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평양의 노동신문과 서울의 조선인민보와 해방신문은 똑같은 배치를 하고 있다”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기사만 써 일반인들은 도저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기간 3개월은 완전 暗聽(암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피살된 언론인 36명을 비롯해 납북된 언론인이 285명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 중에 판매된 북한 잡지를 소개하면서 “이들 잡지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사회 상황을 보도하지 않고, 남한 정부에 대한 악랄한 비방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북한의 작가들 중 ‘김남천’을 예로 들면서 “이 사람은 일제 말기에 親日행적을 한 게 있는데 우리나라 연구가들은 이 사람을 ‘위장친일’이라고 하면서 좌익활동을 한 사람의 친일행적을 면제시켜 준다”고 말했다. 그는 9·28 서울 수복이 된 후 ▲1950.10.1 서울 신문 복간 ▲10.4 동아일보 복간 ▲10.11 경향신문 복간이 되었다면서 “당시 신문의 크기가 타블로이드 두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뒤늦게 복간한 조선일보의 10월 31일자 기사를 보여주면서 “李承晩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많은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크게 감격했다”고 말했다. 이어 鄭 교수는 중공군의 불법침략으로 국군이 후퇴를 하는 소식에 관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기간에 인쇄 시설이 너무나 빈약해서 한글과 한자를 제대로 갖추어서 조판을 할 수 없었다”면서 한자와 한글로 조합한 제목의 기사(장津湖先鋒部隊興남到達, 1950.12.12 동아일보)를 소개했다. 그는 “남한의 언론사들이 6·25전쟁 직후에는 신문을 전혀 내지 못했지만 1·4후퇴 때는 우리 언론이 대비를 해서 피난을 갈 때도 발행할 준비를 다 하고 갔다”고 말했다. 실례로 동아일보는 1·4후퇴 때 1월 3일까지 신문을 발행하고, 피난 보따리를 싣고 가서 부산에 있는 민중신보에서 계속 발행을 했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서울의 再수복에 관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그는 부산에서 일어난 큰 정치적 갈등사건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는 북한과 달리 언론의 자유가 있어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고, 부정부패를 폭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끊어진 신문들의 복간사 ▲51년 4월 10일 맥아더 해임 ▲51년 7월 10일 휴전협정 시작 ▲52년 1월 20일 李承晩 라인 선포 ▲부산에서의 ‘思想’잡지 탄생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기사를 차례로 설명했다. 그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도트 준장이 북한 포로수용소의 포로가 된 사건을 소개하면서 “기사에 보면 ‘돗드준將救出’으로 표시되었다”며 “당시 '준'이라는 한자 형판이 없어서 한글로 표시한 것이다”고 말했다.
鄭 교수는 휴전협정을 전후로 한 시대의 여러 기사들을 설명해 주었다. ▲1953년 3월 6일 스탈린의 죽음 ▲신익희 국회의장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 참여 ▲53년 6.19~18일 李承晩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여권신장의 획기적인 법이었던 간통죄에서 남성도 처벌한다는 기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검사였던 황윤석 ▲한미공동방위조약 체결 ▲대구에서 '학운'잡지 탄생 ▲빨치산 두목 이현상 사살 ▲전후의 세태를 말해주는 소설 '자유부인'연재 예고등의 기사를 보여주었다. 특히 李承晩 대통령의 반공 포고 석방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이라며 당시 李承晩 대통령이 “내 책임하에 명령했으며, 엄숙한 주권의 발동이다”고 말한 내용의 기사를 공개했다.
끝으로 鄭 교수는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신문이다'면서 '남한과 북한 쪽의 신문을 다 봐야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신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김일성정권의 선전의 도구로만 획일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