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 관훈클럽 초청 大選 후보 초청 토론회가 열렸다. 나는 질문자로 나갔다. 김대중 후보와 이런 말씨름이 진행되었다. 한나라당측에서 폭로한 비자금이 쟁점이었다.
趙甲濟: 왜 이 돈을 당의 경리부서에 맡기지 않으셨습니까? 왜 친척을 통해서 관리하셨습니까?
金大中: 제가 정치활동에 쓰라고 준 건데 당에다가 한꺼번에 갖다 놓으면 돈을 많이 쓸 가능성도 있고, 또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재정에 관한 비밀보장도 안되고 그래서 제가 관리하면서 필요한 만큼 갖다 쓰고 그랬습니다.
趙: 금융실명제 실시가 1993년 8월11일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마치시고 한 8개월 이상은 이 돈을 유지하고 계셨다고 그러는데, 그럼 이 돈을 대선 때 쓰고 남은 殘金(잔금)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金: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저 개인 돈입니다.
趙: 그럼 개인 돈하고 정치자금하고는 어떻게 구별할 수가 있습니까?
金: 그건 보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구별이 되겠는데, 선거도 끝났고 그래서 그 후로 저한테 준 것은 저 개인이 활동하는 데 보태 쓰라고 준 것입니다.
趙: 그런데 이형택씨한테 돈을 맡겼다는 것은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公黨(공당)에 맡기지 않고 개인에게 맡겼다는 점이고, 개인 중에서도 처조카란 분에게 맡겼기 때문에 지금 신한국당이 주장하듯이 김대중 일가 1000억 원 대 비자금 치부, 이런 제목의 글이 나오게 되는 틈을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金: 아까도 말씀했습니다만 당에서 쓸 돈도 한꺼번에 당에다 갖다 놓을 수 없는 그런 사정 때문에 제가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 당에다 가져가는 그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요. 처조카한테 맡긴 게 아닙니다. 처조카를 통해서 은행에다 맡긴 것입니다. 다만 처조카에게 맡긴 이유는 야당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제 이름으로 떳떳하게 가서 맡길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려운 세상을 살아온 것은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도 좀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 맡기기 위해서 처조카를 택한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趙: 여기서 김 후보님이 지금까지 말씀하신 데서 모순이 발견되는데요. 이것을 처조카에게 맡긴 이유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보호가 되지 않아서 했다. 그렇다면 이 돈은 분명히 정치성 자금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김 후보님의 소신은 정치자금은 당에 맡기고 개인적인 돈은 내가 따로 관리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모순이 됩니다. 왜 그러면 정치자금을 처조카한테 맡기셨습니까?
金: 명백히 당에 준 것, 당에 보태라고 주신 것은 당에 주었고요. 그리고 저에게 주면서 김 총재가 어려우니까 보태 쓰라고 준 것은 저는 이것을 당에서 공식적으로 써야겠다, 공금으로 써야겠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을 결코 내 私有(사유)로 써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아까 말씀한 것과 같이 제가 관리하면서 은행에 있는 처조카를 통해서 처리를 한 것입니다.
“지금도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趙: 이 돈이 혹시 재벌급 기업인들한테 받은 것입니까?
金: 뭐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떠한 조건 가지고 받은 바는 없습니다.
趙: 김 후보님께서는 평소에 정치자금을 받는 원칙 중 하나가 재벌급 기업인들로부터는 안 받고 중소기업이나 조건 없는 돈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과 조금 배치되지 않습니까?
金: 문제는 돈의 성격이 깨끗하냐 아니냐가 문제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趙: 깨끗한 정치자금과 깨끗하지 못한 정치자금의 구별, 판별기준은 무엇입니까?
金: 조건이 있거나 부탁이 있거나 잘 봐달라고 여러 가지를 하거나... 그것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고, 저 자신이 여러 가지 힘든 환경 속에서 야당 한다고 야당도 있어야 하고 또 야당이 강해야 여당의 횡포도 덜 부리고 이러니까 야당의 필요성이 있다는 그런 생각, 또 저 개인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공감 이런 생각에서 준 것이 깨끗한 것이죠.
趙: 신한국당은 어제 보도 발표문에서 김 후보께서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방법은 친인척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公的(공적)인 조직을 통해서 했던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인 부패보다도 더 심한 부패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 전혀 동의를 안 합니다. 전두환, 노태우씨는 부정한 행위를 통해서 돈을 모았기 때문에 돈을 누굴 통해서 관리를 시켰건 그것은 범죄고, 저는 아까 말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趙: 이형택씨가 관리했던 돈과 관련해서 혹시 납세신고를 했다든지 세금을 내신 적이 있습니까?
金: 네?
趙: 세금을 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금융소득이 있었을 텐데요.
金: 그 문제에 있어서는 제가 그런 것을 신고하게 되면 출처를 밝혀야 되는 점도 있고, 과거에는 모두가 관행으로 저뿐 아니라 그런 것은 세무의 신고를 안 해 왔기 때문에 저도 하지 않았습니다.
趙: 그럼 김영삼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정치자금을 돈세탁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포탈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지금 유죄를 구형받았습니다. 그럼 같은 케이스 아닙니까?
金: 저는 그런 뇌물로 받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것하고 성격이 다르지요.
趙 : 김 후보께서는 지금도 스스로를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金: 네 그렇습니다. 완전히 그렇게 살았다곤 주장하지 않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고 지금도 다른 정치지도자에 비하면 그렇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趙: 저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는 양심대로 깨끗하게 살 수 있지만 민주화 정치지도자는 깨끗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金: 그건 각자 견해 차이니까요.
趙: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 직선제 대통령을 통해서 뽑힌 분은 자동적으로 가장 부패한 정치지도자가 되게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직선제 대통령이 요구하는 굉장한 정치자금 수요 때문이지요. 그것을 증명하듯이 노태우, 김영삼 두 분의 大選(대선) 자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후보께서는 지금까지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서 당선 안 되셨습니다만 네 번 도전하셨습니다. 네 번의 도전에 필요한 정치자금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네 번의 정치자금을 다 합치면 어느 정도 됩니까?
金: 지난 번 92년은 아까와 같이 정치자금 선거자금 중앙선관위에서 준 것까지 포함해서 370억~380억 정도 썼고요. 그 외에 소소한 비용이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7년 그때는 선관위에서 나온 돈도 없고 거의 빈 주머니로 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큰돈을 못 썼고 물론 71년도 그랬고요. 그래서 선거자금을 쓴 것을 여당과 야당을 비교하면 양쪽이 전부 대포를 겨누고 서로 포격을 하면서 싸우는데 여당은 한 1만 발쯤 포탄을 쌓아놓고 있으면 저희들은 불과 40~50발을 쌓아놓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래서 선거에서 진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돈 가지고 과거에는 아시다시피 행정조직까지 동원해서 선거를 했으니까 그런 돈의 선거에 과거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경계령 발동이 왜 미국을 자극하나요?'
趙: 그러면 김일성이 죽었을 때 우리 정부에서 북한에 대해서 모욕적으로 한 일이 뭡니까? 구체적으로?
金: 그때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 온 문서를 발표하면서도 전쟁범죄자라고 하고...대화를 하려고 했던 상대방이 죽었으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할 필요까지 없었다 그런 얘기입니다.
趙: 사실 오인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때 우리 정부가 발표한 짤막한 코멘트는, 김영삼 대통령이 그날 나와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하여서 아쉽다 딱 이 한 마디였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정부에서 한 게 아니고 우리 언론에서 보도한 것입니다. 민족의 원수인 김일성이 죽었을 때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고 언론입니다. 그럼 언론의 그런 자유 언론의 원칙에 입각한 보도까지도 모욕적인 일이라고 취급하십니까?
金: 북한은요 잘 아시다시피 정부와 언론을 구별하지도 않고 더구나 정부가 소련 러시아에서 받은 문서까지 발표했고 또 김영삼 대통령은 비상경계령까지 선포했고...이런 등등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은 말하자면 정부와 민간을 구별할 수 없는 그런 빌미를 얻게 된 것입니다.
趙: 지금 김 후보님께서 판단하신 근거는 평양에서 본 시각 아닙니까?
金: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완전히 대한민국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원칙은 같아도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장점이 아닙니까?
趙: 남침을 한 김일성이 죽었는데, 우리가 경계령을 발동했다. 이것이 왜 북한을 자극합니까?
金: 김일성이 살아났다면 경계령이 필요하지만 죽었으면 경계령이 필요 없다고도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고 또 미국측에서는 그런 태도를 안 취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이 실제로 말하자면 북한이 그 후 우리가 아무리 대화를 하자고 해도 남한하고 안하는 그런 빌미를 줘서 김정일만 결과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趙: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경계령을 취하지 않은 것은 북한과 接境(접경)을 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미국이 하는 대로 우리가 따라가야 됩니까?
金: 한국의 안보문제는 우리가 미국하고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더구나 유사시에는 미군사령관이 작전 지휘권을 갖는 그러한 특수한 사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국하고 우리하고 對北(대북)안보 문제, 군사문제는 어디까지나 일치해야지, 여기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趙: 혹시 김 후보님께서는 우리가 취한 경계령을 동원령으로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金: 여하튼 나도 그렇게는 보지 않지만 상대방들은 그것을 최대로 악용했고 또 그것을 하려면 미국 측하고 같이 했어야 되는데 같이 안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 있어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저는 그걸 꼭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느냐 그 얘기입니다.
趙: 남북회담이 지금 안 되고 있는 게 북한책임은 없고 남한책임만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金: 그러니까....
“출생은 1923년 1월이 맞다”
사회 : 조용히 하세요. 네, 조용히 하십시오.
金: 조용히들 하십시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나쁘니까 나도 책임 없다 한다면 외교가 어디 있고 또 정치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얘기할 때 북한은 인구가 우리의 반입니다. 우리는 경제가 세계 11번째인데 북한은 100도 못돼요. 북한은 100번째도 못돼요. 북한 사람들은 자기 백성 밥도 못 먹여 가지고 지금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공장은 다 쉬고 있어요. 기차도 자동차도 움직이지 못해요. 그런 북한 하나를 우리가 지금 다루지 못해 가지고 이런 상태로 있다는 것이 우리 지금 외교를 제대로 한 것입니까?
趙: 태어나신 해가 정확히 1925년입니까, 23년입니까?
金: 제가 태어난 것은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이에요. 그런데 호적은 1925년 12월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日帝(일제)시대 때 징병제도가 취해져 가지고 한국 사람들을 군으로 끌어갔어요. 그런데 23년을 그대로 두면 일본병대 1기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25년 12월로 해놓으면 2기가 늦어져 가지고 3기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호적 신청을 했더니 다행히 제 것만 통과가 되었어요. 그래서 생년월일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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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刊] '續·金大中의 正體' 출간
단순 교통사고를 암살음모로, 무고한 운전자를 살인범으로 몰았던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前대통령의 本色을 밝힌 추적보고.
조갑제닷컴
제 목: 속·김대중의 정체
출판사: 조갑제닷컴
저 자: 趙甲濟
판 형: 신국판
ISBN: 978-89-92421-54-6
가 격: 1만원
페이지: 216쪽
“지금도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단순 교통사고를 ‘암살음모’로, 무고한 운전자를 ‘살인범’으로 몰았던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前(전)대통령. 그의 숨겨진 本色(본색)을 밝힌 趙甲濟(조갑제) 기자의 추적보고 『續 · 金大中의 正體』(조갑제닷컴, 216쪽, 1만원)가 발간됐다.
저자인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前 월간조선 편집장)는 김대중 前대통령과 여덟 번의 인터뷰를 했다. 총 스무 시간이 넘는 대화였고, 노트에 질문을 준비해 집요하게 캐묻는 趙대표때문에 김 前대통령은 그와 인터뷰한 뒤에 피로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터뷰 후의 기사에 대해서는 그가 한 말을 정확하게 기록하였으므로 김 前대통령으로부터 불만의 표시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趙대표는 1987년 大選(대선) 운동기간 중 月刊朝鮮(월간조선)의 기사를 준비하다 김대중 당시 후보가 언급하던 ‘박정희 정권이 트럭을 동원해 김대중씨가 탄 승용차를 밀어 죽이려 했다’는 사고를 조사하게 된다. ‘의문의 죽음을 했다’던 김대중씨의 승용차와 교통사고를 낸 트럭운전사는 무덤 속에 있지 않고,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취재 후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박정희를 모함하기 위해 무고한 운전사를 ‘살인범’으로, 단순 교통사고를 ‘암살음모’로 몰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趙대표는 ‘김대중씨의 인격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대중 前대통령은 朴正熙(박정희)·全斗煥(전두환) 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투옥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는 사형선고를 받고 연금도 당했다. 그가 1981년 대법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對南(대남) 적화에 종사하는 反국가단체인 ‘韓民統(한민통)’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이다. 2004년 서울 고등법원은 김 前대통령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 관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韓民統 결성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인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민주투사’로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맞섰던 그는 그런 불굴의 용기를 稀代(희대)의 학살자 김정일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700만 人命(인명)의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과 손잡고 연합제·연방제 혼합 통일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 유일한 合法(합법)․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 정권과 동격으로 놓는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
김 前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 현대그룹을 창구로 하고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김정일)의 마카오 내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냈다. 林東源(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2003년 對北불법송금사건 특검수사에서 “金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송금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요지의 증언했다.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보내는 돈이 군사비로 轉用(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 不法(불법)임을 인식하고도 송금을 지시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서해교전) 때와 2006년 1차 北核(북핵)실험 때는 그의 對北굴종이 利敵(이적)행위로 치닫는다. 국군통수권자가 영해를 침범하는 敵船(적선)에 대해 自國(자국)의 해군에게 “먼저 쏘아선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리고, 主敵(주적)의 핵무장을 “미국이 못살게 굴어” 핵실험을 했다며 옹호했다. 2009년 6월 초순에는 그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 李明博(이명박) 정부를 사실상 ‘독재’로 규정하고, 김정일에 대해서는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동정하는 한편 국민들이 궐기해 反정부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前대통령은 6·15 선언 이전까지는 인권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었다.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에 대한 응원도 열심히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탈북자, 납북자,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김정일에게 그렇게 많이 갖다 주고도 국군포로를 돌려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정부였다. 그러면서 김정일에 충성하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명령을 받아 일본인을 납치한 辛光洙(신광수)까지 北送(북송)시켜주었다. 일본 경찰은 신광수를 국제수배했다. 이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인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人格體(인격체)안에서 같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좌익이 그의 숨겨진 本色(본색)이었다”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였느냐에 의해 대충 결정될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그리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촛불亂動(난동)과 같은 法治(법치)파괴, 6·15선언과 같은 헌법파괴까지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설명하곤 했다. 권력을 잡은 이후 이러한 그의 민주주의觀(관) 때문에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역할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8월18일에 他界(타계)한 김대중 前대통령,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한 章(장)이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의 역사에서 그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독자들은 조갑제 대표의 추적보고 『續 ․金大中의 正體』에서 ‘40년에 걸친 김대중과 북한의 끈질긴 게임과 거래’, ‘누가 北核(북핵)개발에 돈을 대고 정보를 제공했는가’, ‘기회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던 김대중의 정체와 본색은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진정 행동하는 양심이었던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문방법
- 홈페이지의 도서쇼핑몰과 전화(02-722-9411~3), 팩스(02-722-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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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머리글 | 국민과 法이 다시 파낸 태극기
1부
1차 北核(북핵)실험 직후 | 金大中(김대중)의 초조한 생존투쟁
-그는 왜 이렇게 초조한가
-人生 말년에 本色을 드러낸 이유는?
-40년에 걸친 金大中과 북한의 끈질긴 게임과 거래, 그 종착역은 어디인가?
2부
2차 北核실험 직후 | 한국판 로젠버그는 누구인가?
-누가 北核개발에 돈을 대고 정보를 제공하였는가?
3부
秘話 | 金大中과 함께 한 한국 現代史의 뒤안길
-그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이었던가?
4부
國葬파문: 다시 파낸 태극기
-김대중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였냐에 의하여 대충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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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趙甲濟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전 13권) 등을 출간했다.
紙上중계/金大中후보-趙甲濟기자 일문일답
- 관훈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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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25, 17: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