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결정적 순간들
62년 생애의 62개 장면
조갑제 지음 | 812쪽 | 값 19,000원 |
ISBN 978-89-91965-20-1 03900 |
담당 조양욱 02.763.8996
<기획 의도>
금년 10월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30년'이라는 세월의 마디를 넘기면서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박대통령의 생애를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돌이켜보기로 했다.
독보적인 '박정희 연구가'인 저자(조갑제)가 그 동안의 성과를 꼼꼼하게 정리한 이 책은 62세를 일기로 타계한 박 대통령의 일생을 62개의 테마로 나눠 체계화했다. 모두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출생에서부터 학창시절, 교사 생활, 군인의 길, 대통령 시절 등이 편년체로 알기 쉽고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인간 박정희'의 진면목이 다시 한 번 독자들, 특히 과거사를 어둡게만 배워온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특징>
이 책에서는 박 대통령의 삶이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그려진다. 喜悲가 엇갈리는 숱한 에피소드들도 삽입되었다. 가령 陸英修 여사와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신랑 신부를 만난 적이 없었던 주례(당시의 대구시장)가 착각하여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의....'라고 하는 바람에 하객들 사이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또한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울릉도를 찾아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당시)이 거친 풍랑으로 인해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농담을 던지며 태연자약했었다는 이야기에서는 그의 큰 배포를 읽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육영수 여사를 흉탄에 잃은 뒤 '시인이 된 대통령 박정희'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10편 가까운 시와, 일기들이 실려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 詩作을 통해 고독한 대통령의 안타까운 심경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을 치른 이튿날 지은 이런 시는 모든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 /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 속에 / 씨롱 씨롱 씨롱 / 매미 소리만이 / 가신님을 그리워하는 듯 / 팔월의 태양 아래 / 붉게 물들은 백일홍이 /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 아내만 혼자 가고 나만 남았으니 / 斷腸(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
박대통령을 꺼려하는 사람들조차 그가 이 나라 경제발전의 토대를 굳건히 쌓았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한다. 정말이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우던 곤궁한 삶, 그것이 오늘날 'G 20'으로 상징되는 눈부신 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강인한 의지의 지도자가 국민들과 손을 맞잡고 흘린 땀과 눈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단적이 예가 독일에 파견되었던 우리 광부와 간호요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독일의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경제기획원 주재관 이기홍의 증언.
'당시는 단 1달러의 외화도 벌어야한다고 박의장의 진두지휘 하에 온 국민이 총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박의장이 혁명정부 지도자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불쌍해 보였고 고독해 보였다. 나는 경제기획원에 이 사안을 보고하고 추진키로 했다.'(307쪽)
여기서 말하는 '이 사안'이라는 것이 바로 독일 탄광에의 한국 광부 파견이었다. 광부 제1진은 1963년 12월 비행기에 올랐다. 광부들에 앞서 간호요원 20명도 독일에 와 있었다. 그로부터 꼭 한 해가 지난 1964년 12월, 박대통령이 독일을 공식 방문했다.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고생하는 동포들을 외면할 박대통령이 아니었다.
'광부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 자리에 모인 300여 명의 광부, 50여 명의 간호원, 박대통령 내외, 수행원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334쪽)
세계인을 감탄하게 만든 '한강의 기적'은 이렇게 하나하나 영글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횡포를 미워하였다. 그는 虛禮虛飾(허례허식)도 싫어하였다. 항상 淸貧(청빈)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은인)이다'면서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썼다. 자신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君臨(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가난과 亡國(망국)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총탄에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 최후를 맞은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朴正熙였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부분 인용
<목차>
머리말
1 出生證言
2 박정희의 手記-‘ 나의 소년 시절’
3 꼴찌학생
4 제자들이 본 자상한 교사
5 軍人의 길로
6 1945년 8월15일의 朴正熙
7 국군장교가 되다!
8 그가 가장 비참하였을 때
9 6·25 남침일의 박정희
10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
11 38線의 봄
12 陸本의 深夜참모회의
13 朴槿惠출생과 李龍文의 죽음
14 일과 사람
15 淸貧한 군인
16 4·19의 소용돌이 속에서
17 독한 마음으로 쓴 편지
18 5·16 군사혁명, 한강다리에서
19 몰래 양말 빠는 권력자
20 朴正熙와 李秉喆의 역사적 만남
21 케네디에게 당당하게 원조 요청
22 울릉도 방문
23 한 운명적 인간의 裸像
24 방황하는 사람
25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26 1963년 대통령 선거: 15만 표차의 선택
27 광부들, 西獨에 가다!
28 6·3사태… 다시 계엄령
29 대통령과 광부들이 함께 흘린 눈물
30 철없는 학생들과 위선적 지식인
31 朴正熙-존슨 회담과 越南파병
32 弔辭: 朴正熙가 李承晩에게
33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34 실무 국장과 다섯 시간 토론
35 “대통령병 환자들을 싹 쓸어버리겠다”
36 《殉敎者》의 작가가 본 祖國
37 박정희와 마르코스의 라이벌 의식
38 박정희 후보 선거 연설
39 북한 특공대, 서울을 치다!
40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41 統一의 철학·戰略·전술
42 동해안에 北게릴라 부대 상륙
43 “국민이 나를 이렇게 대접해!”
44 공화당 實權派숙청
45 10월維新-두번째 쿠데타
46 尹必鏞사령관 숙청의 내막
47 金大中납치 사건
48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
49 ‘魔彈의 射手’文世光, 박정희를 향해 돌진하다!
50 부인 잃고 詩人이 된 대통령
51 越南이 망하던 날의 日記
52 浦項석유는 가짜였다!
53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54 美軍철수를 둘러싼 카터와의 갈등
55 거대한 비전: 중화학공업건설
56 이슬숲 프로젝트
57 카터와 朴正熙, 앙숙의 對座
58 釜馬사태와 金載圭
59 카빈과 효자손
60 殺意의 탄생
61 金載圭, ‘야수의 마음으로’ 朴正熙를 쏘다!
6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머리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였던 사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朴正熙 傳記’(全13권) 작업을 일단 끝낸 뒤 아들 志晩씨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나무, 꽃, 강아지를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를 쓴 글이 없더군요.”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면을 지적한 것이다. 朴正熙 死去 30주년에 즈음하여 13권의 傳記 가운데 특히 드라마틱한 부분을 뽑아 이 책을 만들면서 새삼 志晩씨의 충고가 이 분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山林녹화에 성공한 것은 의무감에서라기보다는 숲과 나무를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가 富國强兵에 성공한 것은 못 살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日記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일기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朴 대통령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초등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함은 物情을 모를 때의 마음상태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청탁)을 다 들여 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朴 대통령이 1973년 7월3일 경주 불국사 復原 준공식에 참석하여 내린 지시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불국사 주차장의 1~2호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植栽(식재)하여 미화할 것. ‘화랑의 집’ 뒤편 남산에 自生하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클 수 없는 잡목은 제거하고 적합한 樹種(수종)으로 대체할 것>
사람들은 “대통령이 화장실 주변에 나무 심는 것까지 간섭해야 하는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자동차로 지방을 다니면서 창밖을 살펴보다가 가끔 수행원에게 “저기 좋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베었어?”라고 묻기도 하였다. 한국의 山野를 자신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75년 8월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는데, 한 기자가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삼성의 이병철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入山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제4호에 실린 5학년생 朴正熙(당시 19세)의 ‘大自然’이란 제목의 詩.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작고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애정
朴正熙는 視覺的(시각적)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건설한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엄청난 重量感을 가진 조선소와 제철소로 상징된다. 한반도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였던 스케일 감각이었다. 朴正熙와 鄭周永의 합작품인 울산 공업단지는 2008년 780억 달러의 수출을 올려 세계최대의 공업도시로 팽창하였다. 이런 거창한 사업 뒤에 숨은 들꽃, 농부 등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朴正熙의 眞面目일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였다는 朴正熙가 가장 사랑한 것은 한국사람, 특히 가난하고 어렵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그를 평하여 ‘자신의 恨을 민족의 恨으로 여기고 한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킨 사람이다’고 하는데, 민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1951년 朴正熙가 9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북한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戰死者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사단장에게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종갑 사단장이 박정희를 불러 준비를 시켰더니 그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아마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
1963년 그가 ‘국가와 혁명과 나’를 朴相吉씨에게 구술, 代筆시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朴 의장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것을 좀 넣어줄 수 없습니까”라고 어색하게 말하더라고 한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는 이런 ‘서민적 반골정신’을 권력자가 되고나서도 죽을 때까지 유지한 사람이었다. 朴 대통령은 1972년 연두 순시 때 노동청을 방문,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職工(직공)인데, 그 작은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니 저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책임자가 다니다가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電氣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것은 간단한 착안입니다.”
朴正熙는 가장 작은 郡을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2년 10월 해군배로 울릉도를 찾았다. 그는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도동 항구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本船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일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전복될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해군 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다. 그때 풍랑은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전송 나왔던 島民(도민)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갔을 때 朴 의장을 비롯한 乘船者(승선자)들이 한 사람씩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내렸다. 다행히 水深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朴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건너편 학동 항구로 갔다. 그쪽 바다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학동 항구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朴 의장은 밧줄로 묶어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本船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朴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동행하였던 동아일보 李萬燮 기자(국회의장 역임)는 “만약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朴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은인이다.”
작고 낮은 곳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겸손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반영이었다. 아들 志晩씨에게서 들은 이야기.
“아버지는 가끔 술을 많이 드시고 내 침대로 쳐들어와서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過飮(과음)을 하셔서 내 침대에 토해놓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에 나를 불러 ‘지만아, 어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시는 거에요.”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로 일하였던 분의 증언도 비슷하다. 朴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자주 회식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야당 총재에 대하여 좀 과격한 말을 했는데 그 다음 번에 회식을 할 때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들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면서 ‘내가 그때는 과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그는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거절하였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하였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혔다. 그날을 생일이라고 생각한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해도 그냥 받아주었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횡포를 미워하였다. 그는 虛禮虛飾(허례허식)도 싫어하였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면서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썼다. 자신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君臨(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뒷모습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김재규로부터 가슴에 최초의 한 발을 맞았을 때 대통령의 왼편에 앉아 있던 가수 심수봉은 자신 쪽으로 쓰러진 그를 부축하여 앉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편에 있던 신재순 여인이 일어나 심수봉 쪽으로 가서 대통령의 등에 손을 댔다. 뜨거운 게 물컹 잡혔다. 피였다. 한 차례 총성이 멎자 실내 화장실로 피했던 경호실장 車智澈이 문을 빼꼼히 열고 머리만 내밀고는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 신재순이 보니 총 맞은 차지철의 오른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아.”
대통령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수봉이 앉았던 방석이 대통령의 流血(유혈)로 적셔졌다. 申양은 손수건 같은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피가 솟고 있는 대통령의 등에 손을 꼭 댔다. 신재순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박정희의 숨소리는 “크르렁, 크르렁” 하고 있었다.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申양이 물었다.
“응, 나는 괜찮아…….”
申씨는, “나는 괜찮아”라는 生前 마지막 말의 뉘앙스가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는 뜻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50년 戰時 부산에서 맞선을 보던 날 陸英修는 朴正熙 소령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 安家에서 朴正熙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가난과 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하여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총탄에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朴正熙였다.
이 책은 2006년에 나온 朴正熙 傳記 13권(조갑제닷컴)에서 뽑은 62개의 장면들을 모은 것이다. 주로 그의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選定하였다. 朴正熙 死去 30주년을 맞은 2009년 초에 출판사 ‘기파랑’의 安秉勳 사장께서 그런 출판 아이디어를 제시하셨다. 安 사장은 조선일보 在職(재직) 시절 필자에게 朴正熙 전기를 신문에 매일 연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朴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安 사장은 지금은 유명한 말이 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근대화 혁명가의 말년 獨白을 필자에게 전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2009년 10월 著者
<저자 약력>
조갑제(趙甲濟)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다.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 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月刊朝鮮>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했다. 2001년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이다.
저서로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朴正熙≫(全13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