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청허청, 광화문의 새벽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 어느날, 오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어, 장기표? 학생운동·노동운동·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진 바로 그 장기표. 광화문 사거리 동화 면세점 앞에서 ‘수도 분할 반대 시위’를 한다더니, 정말 밤을 꼬박 새워 연좌 시위를 벌이다가 새벽이 돼서야 돌아가는구나. 현수막 하나 만들어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다가 사진촬영 끝나면 흩어지는 요새 시위와는 너무 다르구나. 그도 이제 64세, 저 나이에. 수도 분할은 망국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천막 치고 자리 깔고 앉아 ‘아날로그식 농성’을 벌인다. 신념은 참으로 무섭다.
장기표는 세속 정치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정치인이다. 왜 40여년을 그렇게 살까? 자신의 정치 세계를 만들려다가 번번이 기성 정치의 문턱을 넘지 못해 금배지를 달지 못했다. 출세할 기회도 많았다. 2000년 총선 땐 한나라당이 장기표에게 전국구 자리를 약속했다. 비화다. 장기표는 듣자마자 거절해 버렸다. “내가 살아온 길과 한나라당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민주화운동 경력은 출세 담보용 훈장이었다. 완장 찬 불나방들은 권력을 향해 변신·곡학아세·부화뇌동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장기표는 그땐 또 살아있는 권력들을 비판해 미움을 샀다. 신념은 출세 지향주의자들에겐 퇴기(退妓)의 하룻밤 순정에 불과하지만, 신념파에겐 치유할 수 없는 존재의 이유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갈파했다던가. 인간의 영혼에는 욕망, 이성, 그리고 패기(thymos·티모스)가 존재한다고.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 인류의 진보를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대세(大勢)를 거스르려는 ‘티모스‘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패기가 없으면 신념이 생길 수 없다. 영혼이 없는 인간! 대한민국 정치가 이 지경인 건 국회가 영혼 없는 출세주의자들, 눈치보기에만 달통한 월급쟁이들의 집합소가 돼가고 있기 때문.
한나라당의 그 많은 금배지들은 세종시 문제를 뻔히 목격하면서도 충청도 유권자들의 집중포화가 두려워 침묵하거나 말장난에 매달리고 있다. 영혼 없는 금배지들의 폭탄돌리기. 광화문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수도 분할 반대’를 포효하는 장기표. 멋지다!
[[윤창중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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