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8일 사단법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가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2』을 발간했다. 2권 발간은 1권에 이어 3년 만이다. 2권엔 피랍자 가족 및 친척 70인의 생생한 肉聲(육성) 증언, 휴전회담에서의 민간인 송환협상 실패 사실이 드러난 휴전회담 당시 회의록, 국내 주요신문보도 및 『失鄕私民名簿』, 『6·25事変被拉致人士名簿』,『납북·월북자 수 비교 통계』와 같은 민간인의 납북을 입증하는 납북자 名簿(명부), 납북자 문제를 다룬『제1회 국무회의 회의록』등과 같은 정부 행정문서, 당시 미국의 입장이 드러난 일급비밀에서 해제된 외교문서 등을 수록하고 있다.
『失鄕私民名簿』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2009년 7월 발굴해낸 1만1700명의 납북자 명단이다. 이 명부는 ‘국군 군총사령부 군사냉전위원회’가 3여년의 기간 동안 조사해 1963년 1월1일 작성한 것으로 북한으로 납치된 민간인 명단이다. 국방부 차원에서 엄밀히 조사·집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발견되지 않은 한 권이 더 남아있을 것으로 가족협의회측은 추정하고 있다. 이 명부에는 납북자의 성명, 연령, 성별, 주소에 관한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공개한 『제1회 국무회의록』에는 납북자 문제를 토의한 내용이 수록됐다. 1952년 1월4일 이범석 국무총리 서리 외 15인의 장관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6·25사변 납치자 수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일반 민간인 피랍자: 3만6172명 ▲강제 의용군: 7만3613명 ▲비강제 의용군: 1만6240명으로 총수는 12만 6325명이다. 국무회의에 기록된 12만6325명의 인적사항이 담긴 명부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피랍인사의 납북 당시 직업별 인적사항이 기록된 『6·25事変被拉致人士名簿』도 추가 발굴됐다. 이 명부는 1952년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초대 가족회)가 작성했다. 2514명의 피랍인사들을 직업群에 따라 성명, 연령, 직업, 주소, 피랍년월일을 구분해 표시했다. 피랍자의 성명은 한자와 영문으로 병기되어 있다(아래 사진). 납치된 가족을 찾기 위한 초대가족회의 힘겨운 노력이 보이는 부분이다.
납북자들의 직업군은 정부요인 및 관공리,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 실업계 등을 비롯하여 예술가에서 학생에까지 이른다. 靑年團(청년단) 및 民保團(민보단) 활동가가 442명으로 가장 많이 납북되었으며, 다음이 실업계 391명, 정부요인 및 관공리 328명 順이다.
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拉北(납북)이 자발적 선택이 아닌 북측이 특정인물을 指目(지목)을 해서 의도적으로 拉致(납치)해 간 전쟁 犯罪(범죄)로서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근거자료”라고 밝혔다.
『납북·월북자 수 비교 통계』는 1954년 영남일보社가 발간한 『한국연감』에 실렸던 자료이다. 여기에는 시도별 납북자수·월북자수가 도표(막대그래프)로 수록되어 있다. 이 도표에 나타난 납북자 총수는 8만2959명이다. 이 숫자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6·25사변피랍치자 명부』총 5권에 수록된 각 시도별 납북자 수와 일치하는데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부는 전국적 규모의 납북자 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공보처 직원에 따르면 實査(실사)에 의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납북인사가족협의회측은 “이 명부 역시 상당수의 납북자가 누락되었고, 전시 상황에서의 조사가 불충분했고, 특히 주민들이 주거지에서 이탈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사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고 밝혔다.
사료집 제2권에는 유족회가 발굴한 70여명 유족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새벽에 가족들의 눈앞에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 누이 다 누워있는데, 군화 발자국 소리를 내며 인민군하고 바닥 빨갱이(밀고자)가 ‘동무, 문열어.’ 그러면서 문을 확 열고 들어왔어요. 일어난 우리들은 무서워 밤에 오들오들 떨었어요. 바닥 빨갱이는 우리 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1950년 8월 중순 경기 강화군 양사면 덕하리에서 피랍된 金明爀(김명혁·당시 면사무소 부면장)의 차남 김원형(69)씨의 증언이다. 그의 부친은 대한청년단원을 조직해 反共(반공) 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밀고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좌익이었다.(2007년 10월19일 증언)
▲“8월 초쯤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집에 변장을 하고 서울에 오셨는데 신변에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신 거지요.” 6·25전쟁 당시 대한탄연 상무로 재직 중이던 金箕貞(김기정)씨의 차남 김재조(68)씨의 증언이다. 그는 “그런데 옆집에 반장이 살고 있었어요. 새벽 5시 반장이 앞장서고 그 뒤에 내무서원 3명이 권총과 장총을 들이댔어요. 그 사람이 빨갱이였던 것입니다”라며 부친의 피랍 상황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납북자 가족들의 원한, 그 원통한 마음을 누가 알겠냐”며 “정부가 하루빨리 대책을 강구해서,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2008년 4월3일 증언)
▲“아버님은 6·25전쟁이 난 후에는 아무것도 안 쓰셨어요.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쓸 필요가 없다고…. 인민군이 글을 쓰도록 여러번 회유를 하셨지만 완전히 거절하셨죠.”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1982~1950)의 차녀 李廷華(이정화·74)씨의 증언이다. 절필을 선언한 춘원은 7월12일경 인민군 셋이 자택으로 찾아와 자수(대한민국에 협조한 혐의)를 종용, 당일 서대문형무소로 연행되었다. 차녀 李씨는 9월25일경 행방을 찾아보려 했지만 북한은 7월에 이미 春園을 평양으로 보낸 상태였다.(2007년 3월13일 증언)
▲1950년 7월경 치안국 경감으로 경무대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던 金吉源(김길원)씨는 서울 함락 직후 모처에 피신해 있던 중 가족이 걱정되어 다시 서울에 있는 집을 찾아 왔다. 그는 그의 집 앞에서 잠복해 있던 인민군에게 연행됐다. 장남 김억(69)씨는 “아버지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이 되었다가 인민군이 1차 후퇴를 할 때 (1950년 9월18일 인천상륙 직후로 추정) 인민군에게 끌려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송된 것으로 본다”고 증언했다. 金씨는 “그 후 9·28 수복 직전 전체 인민군이 서울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어머니(허남도씨)도 납치됐다”며 “그들이 퇴각을 하면서 인근 금와산 개울에서 체포했던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을 자행했을 때 어머니가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체는 찾지 못했다”며 “공직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납치 후 살해하고 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2006년 10월17일 증언)
대부분의 납치 발생일은 6·25전쟁발발 직후에서 9·28 수복까지의 3개월 기간에 집중 (88.2%)되어 있었고 피랍치자의 98.1%가 남성이었다. 새벽이나 밤에 자택으로 찾아와 납치 대상자에게 잠시 동행하자고 하여 데려간 후 돌아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납치대상자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집에 오면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바로 납치해 가기도 하였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납치된 사람도 있었다.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김미영 연구실장은 “(북한의 이런 전쟁범죄를 방치하게 된 데는) 당시 한국정부뿐만 아니라 UN의 문제도 있다”면서 ▲북으로 납치된 ‘납북자’를 고향을 잃은 사람이란 뜻인 ‘失鄕私民’으로 표현함으로써 용어의 선택을 잘못해 이들의 송환을 어렵게 만든 점 ▲軍포로에 대해서는 중립기구 심사를 관철시켜 포로교환을 했으면서도 민간인에 관한 중립국의 심사는 관철시키지 못한 점 ▲휴전 협정 당시 외국 민간인 55명의 송환은 성공하고도 대한민국 민간인의 송환은 포기했던 점을 이유로 제시했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李美一 이사장은 간담회에서 “휴전상태를 끝내야 한다면, 묻혀졌던 납북민간인 문제야말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불행이었지만, 이분들은 휴정협정 당시 (북쪽에 끌려간 채)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며 반드시 데리고 왔어야 했던 사람들”이라며 “6·25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분들의 문제처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앞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협의회는 앞으로 휴전협정 당시 UN軍을 사실상 지휘했던 미국의 의회에 납북자 송환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점을 認定(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요청할 계획이며, 美오바마 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을 요구할 것이라 밝혔다. 또한 북한의 조직적·강제적·무차별적 납치범죄에 관해서 “국제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를 통해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