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렬
『그는 이 무렵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가족사의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자신의 존재로 인해 이제 막 시작하는 전교조에 좌경용공의 색깔이 덧씌워지고 더 심한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말」지에 나오는 吳씨의 가족사 요지는 이렇다. 「38년생인 오종렬의 부친 오정근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서 해방공간에서 여운형을 따라 건국동맹,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고, 나주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농민조합장을 맡았었다. 그의 부친이 몸담던 나주 인민위원회도 탱크를 앞세운 미군에 의해 폐허가 됐고 오정근 선생은 광주형무소로 끌려가 옥고를 치러야 했다.」
부친 오정근에 이어 오종렬의 가계(家系)의 좌익 전력은 3대를 이어갔다. 오종렬의 아들 창규氏는 93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과 한총련 산하 남총련 의장을 지내고 있을 때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여 7년을 수배자로 보내다가, 98년 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이후 「박승희 열사 정신계승사업회」에서 활동하다 2006년 5월 민노당 후보로 광주 北구청장에 출마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이 자주와 평화통일에 힘써왔다?>
국내 친북좌파 중 많은 수는 오종렬氏와 같은 「가족력」을 가지고 있다. 건국과 6.25 과정에서 빨치산, 인민군 후예로 겪어 온 상처(傷處)가 치유되지 못한 탓이다. 이들의 육체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정신은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었고 이로 인해 『김일성』에 대한 경의(敬意)의 뜻을 숨기지 않아왔다.
吳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김일성 사망 하루 뒤인 94년 7월11일 전국연합 차원에서 이른바 애도성명을 발표한 뒤 언론에 이렇게 인터뷰했었다. 『金 주석이 자주(自主)와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위해 힘써왔던 것을 민족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남북 정부가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던 정신에 기초하여 자주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국내외 반통일세력의 준동을 막아야 한다.』
소련, 중공 등 외세를 끌어들인 남침전쟁을 일으켜 400만 민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백정 김일성을 가리켜 『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해 힘써왔다』니? 이는 대한민국에 대한 친북좌파의 뿌리 깊은 저주와 원한의 배경을 추측케 해준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대한민국과 화해할 수 없는 역사적 DNA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미군의 소위 6.25양민학살 문제 제기>
吳씨는 2000년 9월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을 통해 『연방제 통일』을 결의하면서 『연방제가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역량에 가세·결집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해설했다. 이런 이념을 가진 이들에게 주한미군은 필연적으로 철거의 대상이고, 국가보안법은 철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吳씨의 반미투쟁은 실제 집요하고 끈질기게 계속됐다. 그는 △2002년 여중생범대위(11월30일 조직. 대표 : 오종렬, 한상렬, 홍근수, 단병호, 천영세, 문정현), △2004년 탄핵무효범국민행동(3월12일 조직. 대표 : 오종렬, 이수호, 문규현, 박원순, 최열), △2005년 10월 反부시국민행동(상임대표 : 오종렬, 정광훈), 2005년 11월 전용철범대위(공동대표 : 오종렬, 한상렬, 정광훈, 문경식, 권영길), △2005년 평택범대위(공동대표 : 오종렬, 한상렬, 정광훈, 홍근수, 문정현, 문경식, 이정미), △2005년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공동대표 : 오종렬, 정광훈, 문경식)등 대부분의 좌파성향 범대위의 대표로 참가했다. 吳씨는 △전국연합을 계승한 한국진보연대 1기 공동대표 및 △우리민족끼리연방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계승연대),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등의 간부를 맡아왔다.
吳씨가 제기한 반미운동의 주요 이슈는 6.25당시 미군의 이른바 양민학살 문제였다. 그는 2000년 5월10일 베이징에서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위원장 윤기복)과 이른바 「미군의 학살만행 진상규명을 위한 전민족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라는 기구를 구성해 『남북한이 학살문제를 공동조사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는 남한에서 전농, 민노총, 한총련, 범민련 남측본부, 민족화해자주통일운동협의회 등 2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吳씨는 2001년 11월5일 여의도 공원에서 한국전쟁을 전후로 「국군, 경찰, 우익청년단체, 미군 등에 의해 사망한 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을 제정하라며 300여명이 참석한 합동위령제를 열기도 했었다. 그는 이날 추도사를 통해 『유족회가 바로 서서 미군의 범죄를 밝혀내야 한다』며 『그 작업에 각계각층의 시민사회단체와 청년학생이 동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닥빨갱이의 인민재판, 20세기 대학살 사건>
오종렬과 같은 인물들이 벌이는 6.25 양민학살 선동은 극단적으로 치우친 선동이다. 북한정권에 대한 이념적 친근성(親近性) 내지 가족사에서 기인하는 「한풀이」 성격이 짙다. 6.25는 북한정권의 기습남침에 대한 대한민국의 정당방위 과정이었다. 양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중 피아(彼我)식별이 어려운 상황서 빚어진 불가피한 교전행위였다. 『국군, 경찰, 우익청년단체, 미군의 학살로 죽은 민중』 운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티끌」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북한정권의 「들보」에는 눈을 감아버리는 외눈박이 시각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 당시 양민학살은 인민군 치하 「바닥빨갱이」로 불리는 빨치산들에 의한 「인민재판」형태로 진행됐다. 빨치산들이 6·25당시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한 양민의 수는 13만. 남경대학살, 바르샤바 게토(Warsaw Getto)의 유태인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전쟁사학자들은 6.25사변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13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잔혹성(殘酷性)에 있다고 지적한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虐殺) 운운하는 반한(反韓)선동이 휴전선 이북(以北)이 아닌 이남(以南)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이 비극의 진앙(震央)엔 「오종렬」과 같은 이들이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