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병 戰死者가 가장 많은 학교는 군산중(63명)!

2위는 경북中 53명, 이어서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군산 상업中 각 45명順.
이 글은 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심층취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學徒兵 5만 명이 6·25 參戰>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모두 1976명이 戰死한 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었다. 동판에는 學徒兵 戰死者의 이름은 없었다.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였고,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료는 1975년 재향군인회에서 발간한 「보병제3사단-학도의용군(남상선 著)」이란 책에 실린 후 많은 사람들이 再인용해 오고 있었다.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61)씨는 지난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2000년 우리 학교 출신 한 명이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들렀다가 그곳에 출신학교별 學徒兵 수가 새겨져 있는 동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학교가 97명이라는 전국 最多의 學徒兵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곧바로 동창회에 보고되었고, 동창회는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이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를 당시 학적부와 대조해 확인한 결과 전쟁기념관 동판의 전사자 수보다는 적은 63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확인했다.

<군산中, 전교생의 20% 지원·參戰>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72)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 『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69)씨는 『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전쟁이 나자 박종수라는 배속장교가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 놓고 「펜을 총으로 바꿔 들고 참전하자」는 연설을 했습니다. 안동농中 학생 120명이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며 집단으로 입대했어요. 당시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林씨는 이때 입대하지 않고 영천 쪽으로 피란왔다가, 경북 북부 출신 학생 60여명과 같이 6사단에 자원입대했다. 전황이 급할 때 입대한 學徒兵들은 군복도 없이 운동화에 학생복 차림으로 전방으로 투입되었다. 林씨는 『8월에 입대했는데 군번은 9월에 가서야 나왔다』며 『훈련받을 시간이 없어 전선 아래서 일주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慶北中 교장 아들도 학도병으로 자원>

국군이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전이 펼쳐지고 다시 再반격하기까지 당시 대구·경북지역에 있던 학생들의 입대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張聖坤(71)씨는 대구 인근 고산고등공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7월15일 학교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그곳에 가니 학생들을 무조건 차에 싣고 가 대구 계성국민학교에 내려 놓았다. 이유도 몰랐다. 모인 학생은 700명 정도 되어 보였다.

여기서 3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성구에 있는 대구농림학교로 이동해 단발 장전식인 9·9식 일제 소총을 지급받았다. 다시 3일 후 학생들은 6사단에 배속되어 곧바로 戰線인 안동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야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훈련받을 때와는 다른 총이라 총에 탄약을 장전할 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다쳤다. 영천 근방 신령전투에 30명의 學徒兵이 갔는데, 그를 포함하여 3명이 살아왔다. 이후 그는 9사단에 투입되어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경북中 32회 졸업생 중 學徒兵으로 나간 사람은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귀순 교장의 아들 조성환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석방되었다.

대구 중구에서 정형외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진홍씨는 대구의과大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1950년 평남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송환되었다. 2001년 그는 33개월의 포로생활을 그린 「돌아온 패자」란 책을 냈다. 경북中 31회 출신인 그는 6·25 전쟁이 났을 때 대구의과大 1년에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

『아, 낙동강까지 밀려 왔는데 우리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냐는 생각밖에 없었지, 뭔 생각을 해요. 애국심이 가슴에서 끓어 오른 거지. 기사에다 「애국심」이란 단어는 쓰지 마소, 6·25 北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에 사람들 웃습니다. 허허』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23회)군도 참전하여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결사대와 같은 學徒兵들의 용감함은 제3사단 학도의용군 부대장이었던 남상선씨가 지은 「학도의용군」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제3사단 學徒兵들이 안동 방어를 할 때 적의 탱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작전참모인 박경원 소령이 부대원들을 모아 놓고 누군가 결사대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비장한 연설을 했다. 그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서울 중앙대학에 재학 중이던 주정만이란 학생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이후 學徒兵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결사대 지원병으로 나섰으나 탱크 육탄 저지 계획은 사단장이 실행에 옮기지 않아 취소됐다. 學徒兵 戰死者들에게는 대부분 자식이 없다. 유가족이 잘 파악되지 않아 母校에서 명예졸업장을 주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 學徒兵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나면 학생으로 돌아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철모보다 「中」자가 달린 학생모 쓰기를 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각 학교 동창회는 순국한 學徒兵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보였으면 합니다. 그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하고 최대한 예우를 해야 합니다. 學徒兵에게 무관심한 현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學徒兵에 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6·25 전쟁 첫날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 333명 중 277명이 포천전투에 투입되어 첫날 86명이 전사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는 휴교했고, 정부는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종합학교를 세웠다.

육군종합학교에서는 1950년 9월부터 1951년 8월까지 7000여 명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은 일선 소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들 가운데 1377명이 戰死하고 2556명이 부상당했다. 2명 중 1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 중학교 학생들, 즉 學徒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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