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國者의 핸드북

一流시민이 되는 길
1. 수비형 국가에서 공격적 국가로


우리는 왜 사는가? 法治확립-自由통일로 一流국가를 건설하자


공세적 國家의지: '북한노동당 정권의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

우리 헌법은 '북한노동당 정권의 평화적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을 國家의지와 國家목표로서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선언하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못박음으로써 북한지역도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國家의지를 확실히 하였다. 북한지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려면 통일을 해야 하는데,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하라고 명령하였다. 헌법 1, 3, 4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正體性을 담은 헌법의 뇌수요 심장이다. 여기에 손을 대는 것은 國體변경을 가져오므로 개정 불가조항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여 북한지역까지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자유통일 사업을 위하여 헌신할 의무'를 지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1, 3, 4조는 한반도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의 이념-무장대결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과 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의 각성

우리의 국가적 목표는 자유통일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최종적인 국가목표는 자유통일을 달성하여 북한주민들까지 자유민으로 만든 뒤 7000만 민족집단이 一流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구성원이 창조적으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즉, '통일되고 번영하고 강력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국가목표에 同意하는 주변국가는 현재로는 미국밖에 없다. 韓美동맹은 우리의 생명줄이자,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에 필수조건이다.
한반도의 再통일은 韓民族의 단결과 민족自決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뤄질 때 어떤 外勢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북한주민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북한주민들이 남한의 同族과 합치겠다고 결단하도록 지금부터 그들의 마음을 잡아가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人權문제 등을 꾸준히 제기하여 북한노동당 정권을 압박, 북한주민들에 대한 탄압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북한주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의 방도를 모색하고 확대함으로써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돈, 자유, 人權, 진실을 들여보내 그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힘으로 북한노동당 정권을 몰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對北풍선보내기나 對北방송은 북한동포직접돕기의 좋은 예이고, 개성공단 사업이 상호주의적으로 진행될 때는 접촉면을 넓히는 데 좋다.

法治와 교양

북한의 자유화는 민주주의의 基地인 남한이 法治주의를 성숙시켜야 가능하다. 한국인들은 지난 61년간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국민국가 건설과정을 지나왔다. 남은 과제는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그 힘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法治의 생활화를 뜻한다.
法治주의를 정착시키려면 정부, 정당, 언론, 대학 등 이 사회의 지도층부터가 憲法정신을 행동윤리로 신념화해야 한다. 反헌법적-反국가적 세력을 응징, 순화하여 약화시키고, 6.15 선언과 같은 反헌법적 정책을 폐기하여야 한다. 惡黨과 깽판세력을 응징할 수 없는 나라로 계속 간다면 통일도 一流도 안 된다. 惡을 응징하려면 국가엘리트의 自淨-自强 노력이 先決되어야 한다.
동시에 卑俗語(비속어) 및 암호로 전락하고 있는 韓國語를 교양어로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언어가 思想을, 思想이 행동을 지배한다. 한국어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으면 나라도 정상적일 수 없다. 한국어의 2大 표기 수단인 漢字와 한글 중 漢字를 포기함으로써 반신불수가 된 한국어를 復元하는 길이 바로 선진화의 길이다. 한국은 인터넷 사용률은 세계 1등이지만 文盲率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漢字)문맹률 70%인 나라의 정신은 아무리 잘 살아도 3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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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을 사기 치려다가 사기를 당하고 있다!
-김정일을 속일 수 있다는 詐欺的 對北정책을 그만두어야.

*해설/김일성 김정일이라는 한반도의 巨惡을 도덕적으로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小惡을 다스릴 수 없다. 法治가 무너지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지며 국가목표가 흐리멍덩해진 가장 큰 이유는 정부와 많은 국민들이 김정일과 그 정권에 대한 엄정한 평가자세를 포기한 데서 비롯된다. 국회입법서기관 柳世桓씨는 노무현 정권 때 현직 대통령을 국가반역혐의로 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대한민국憲法제3조'(조갑제닷컴)를 냈다가 징계를 당한 적이 있었다. 憲政질서를 수호하라고 연간 20조 원 이상의 월급을 받는 100만 공무원중 유일하게 정권의 反헌법적 행태에 반기를 들었던 이다. 그의 글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聯合-聯邦制 혼합식 통일이라는 6.15 內亂詐欺劇에 넘어가게 된 가장 핵심적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유사회인 대한민국과 극단적인 공포사회인 김정일 집단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南北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김정일 독재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간 대한민국 정부가 機能主義的인 對北정책을 통해 '남북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金哥 집단을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對北정책 기조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人的. 物的 교류를 확대해 나가다 보면, 김정일 체제는 대한민국에 의존적인 체제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결국에는 金哥 집단이 개혁개방에 나서 金哥 독재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기능주의적 對北정책이었다.
이는 결국 김정일을 속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은 김정일을 자극하지 않고 김정일이 원하는 달러와 물자를 주면서 남북교류를 확대해 나가면 결국 김정일에게는 毒이 되어 김정일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김정일로 하여금 自滅에 이르게 하는 선택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경제적 지원이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 김정일 독재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기능주의적 對北정책은 김정일을 속일 수 있다는 일종의 사기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30년이 넘게 정부가 앞장 서서 이런 對北정책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태도와 믿음을 갖고 있다.
<나도 북한 인권문제가 심각한 것을 잘 알고 있고, 김정일이 정말 나쁜 놈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상황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여 김정일을 자극하는 것이 북한 人權문제를 개선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金哥 집단을 점진적으로 개혁개방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金哥 집단에 대한 경제협력을 통해 김정일 체제가 정상국가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김가 집단에 대한 경제협력을 통해 김가 체제가 정상국가가 되도록 돕는 것은 단기적으로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북한지역의 경제수준을 높여 통일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人權문제 등으로 김정일을 자극하는 방식은 남북관계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불러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접근방식이다. 만약 현재 상태에서 북한지역의 김정일 체제가 붕괴한다면 대한민국은 감당할 수 없는 통일비용을 부담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주장은 비단 김정일을 추종하는 세력들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中道정부는 물론 보수세력이라고 알려진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 사이에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입장들이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이에 학습되어 공감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능주의적 對北정책의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김정일에 대해 사기를 치려다 오히려 사기를 크게 당하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다.
김정일을 속이려다 보니 국민들에게조차 김정일을 대한민국의 동반자라고 속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니 대한민국 사람들의 도덕적 정치적 판단기준은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김정일을 추종하는 반역자들이 대한민국 내에서 民主인사행세를 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한민국은 속수무책으로 김정일에게 넘어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연합연방제 통일이라는 사기극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김정일을 속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되어온 기능주의적 對北정책의 모순을 인식하고, 人權과 자유, 민주주의 진실에 바탕 한 原則主義的인 對北정책만이 북한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김정일 독재의 제1기반은 독재를 합리화하는 거짓말이다. 이 거짓에 대해서는 진실로 맞서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人權, 자유의 기치에 바탕 하여 김정일의 독재체제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노예체제로 규정하고, 김정일이 물러날 것, 아니 대한민국에 투항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모든 對北지원에 대해서는 人權개선과 민주화 조치의 시행을 전제로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진실을 외쳐야 한다. 김정일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동반자가 아니다/柳世桓(국회입법서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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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노선을 法治와 安保에 적용하면 안 된다!

법치와 안보는 敵(적)과 惡(악)을 상대로 하는 분야이므로 중도는 결국 敵(적)과 惡(악)을 편들거나 묵인하는 것이 된다. 정책에선 中道(중도)가 가능하나 도덕성과 가치관이 걸린 문제에선 중도가 낄 수 없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실용 노선을 표방한 前後(전후)의 행적을 보면 몇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
그는 국가 정통성 및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에서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와 交戰(교전)한 共産敵國의 호지명 묘소에 참배한 것, 형사피의자 신분에서 자살한 전 대통령을 국민장으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을 현직처럼 대우하여 國葬으로 특별 대우한 것, 그러면서도 近代化 대통령과 建國 대통령을 무시-냉대하고 있는 것, 6.25 남침 60주년 행사 위원장에 국가반역자 추모 사업위원장 출신을 임명한 것, 대한민국에 반대하여 김일성의 총애를 받은 작가를 이례적으로 외국 頂上회담 출장에 동반한 것 등이다. 이런 자세는, 李 대통령의 중도실용 노선이 反대한민국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핵심 가치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사게 한다.
中道는 헌법정신과 충돌한다. 헌법 1, 3, 4조는 ‘북한노동당 정권의 평화적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을 국가의지와 국가목표로 규정하였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임을 선언,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李明博 정부는 명백하게 헌법을 위반한 6.15 선언의 폐기를 아직도 선언하지 않고 있다.
북한정권의 對南공작 노선에 동조하는 강령을 가지고 행동하는 민노당은 違憲정당임이 분명한데도 해산절차를 밟지 않는다. 이 민노당의 母胎이며 노선을 같이하고 특히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민노총에 공무원 12만 명이 가입하기로 결의한 사태를 막지 못한 것은 민노당에 대한 헌법적 판단을 구하지 않았던 것이 한 이유이다.
MBC의 총체적 방송법 위반, 전교조의 각종 법률위반, 과거사 위원회들의 反헌법적 활동에 대하여 법적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많은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中道를 反헌법 세력에 대한 타협이나 양보 노선으로 이해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여야 할 공무원 집단이 체제 수호를 꺼리고 주한미군 철수 같은 체제파괴적인 주장에 동조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中道 노선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
안보는 國內 좌익반역세력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것이고, 國防은 북한군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는 개념이다. 中道 노선이 체제의 敵에 대하여도 적용된다면 군대, 검찰, 경찰, 국정원은 主敵개념이 흐려진다. 북한군의 금강산 관광객 사살, 임진강 無斷방류에 의한 한국인 6명 사망, 개성공단 거주 한국인 수시 억류 사태에 대하여 제대로 문책이나 응징을 하지 않았다.
거의 1000만 명이 서명한 韓美연합사 해체 반대 운동을 무시하고 2012년 해체 계획을 밀고 나간다. 군 미필자를 핵심 要職에 집중적으로 起用한다. 무리한 군 복무기간 단축 계획을 수정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징병제 폐지나 減軍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별 생각 없이 북한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中道 노선이 對北관계에도 적용된다면 北核 폐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김정일이 거래에 의하여 核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死活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위기로 몰릴 때만 核을 폐기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한국은 一戰不辭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對北정책은 헌법과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여선 안 된다. 국군포로, 납북자, 탈북자, 강제수용소, 공개처형 등 북한人權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평화협정 단계에선 6.25 전쟁범죄를 반드시 따져야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不法에 대한 응징력과 敵에 대한 보복력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中道 노선은 해답을 주지 못한다. 中道가 脫이념을 의미한다면 理念전쟁이 한창인 한반도 정세에는 맞지 않는 노선이 된다. 法治와 安保 분야에 있어서도 沒가치적 개념인 中道노선을 추구하면 국민정신을 병들게 하여 체제수호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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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적 가치가 빠진 '그랜드 바게인'은 성공할 수 없다


李明博 대통령이 北核 문제 해결책으로 제안한 소위 ‘그랜드 바게인’이 꼬이고 있다. 우선 명칭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을 할 때 作名을 잘못하면 평생 고생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북한정권에 대하여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전폭적으로 하겠다는 게 그랜드 바게인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일괄타결(一括妥結)이란 말이 맞다. 왜 한국어가 있는데 생소한 영어를 썼는지 모르겠다.

1. ‘바게인(bargain)’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거래, 흥정한다는 뜻이 강하다. 北核 문제는 원칙적으로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북한정권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하여 모든 核시설을 폐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代價로 한국은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하고 수십 억 달러를 들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미국은 重油를 제공하였다. 김정일 정권은 그 사이 우라늄 농축 방식의 核개발을 불법적으로 진행하여 왔다. 이 사실이 폭로됨으로써 2002년 이후 제2차 核위기가 조성되었고 6者 회담이 진행되었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2005년에 核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 1년 뒤 그들은 이 약속을 깨고 核실험을 하였다. 6자 회담은 2007년 2월에 또 다시 북한으로부터 핵 폐기 약속을 받아내는 합의를 하였으나 북한정권은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올해 두 번째 核실험을 하였다. 북한은 받을 것은 다 받아 챙기고, 줄 것은 주지 않는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장사꾼식의 거래와 흥정이 통할 것인가? 不法을 일삼는 집단에 대하여 흥정이란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법정신과 도덕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심리적으로 이미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자세론 절대로 흥정에서 이길 수 없다. 敵과 惡에 대하여 법적, 도덕적 기준을 포기한 협상은 절대로 國益을 도모할 수 없다.

2. ‘그랜드 바게인’은 이행이 불가능한 제안이다. 일괄타결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김정일이 핵을 포기한 뒤에 지원을 해주는 게 맞다. 그런데 김정일이 먼저 무장해제를 하여 자신이 가진 카드를 버릴 리가 없다. 핵을 포기하기로 약속한 시점에서 지원을 해주면 지원만 받고 핵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實證되었다. 행동 對 행동 원칙으로 핵 폐기 과정과 단계적 지원을 맞바꾸는 방식도 시도해보았는데 북한이 시간을 끌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런 단계적 방식은 일괄타결도 그랜드 바게인도 아니다.
동시 해결이란 방식이 이론상으론 존재한다. 내일 김정일이 핵시설을 모두 폐기하면 모레부터 지원이 들어간다는 식이다. 정말 核폐기를 했는지의 與否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북한이 이 확인 작업에 협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김정일 정권이 정직하게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전부 공개할 리가 없다. 따라서 그랜드 바게인, 즉 동시적 일괄타결은 불가능하다. 북한정권에 대한 체제보장도 불가능하다. 東歐공산체제를 해체시킨 것과 같은 민중봉기가 일어날 때 國軍을 보내 김정일을 위하여 시위를 진압해주겠다는 말인가?

3. ‘그랜드 바게인’에 매달리면 김정일에게 이용당한다. 북한측에 흥정을 제안하였으니 지금부터는 김정일에게 강하게 나가기가 힘들다. 李明博 대통령은 김정일이 억지를 부려도 덮어야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벌써 그런 경향이 보인다. 북한군의 임진강 무단방류 사태에 대한 미온적 대처가 한 예이다. 그랜드 바게인에 집착하면 아무 얻는 것 없이 금강산 관광과 對北지원도 재개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유엔 안보리의 對北제재 결의를 우리가 휴지로 만들게 된다.

4. 시간은 李明博 대통령 편이 아니다. 임기 없는 독재자를 상대로 임기 있는 한국 대통령이 초조한 마음으로 협상에 나서면 百戰百敗이다. 임기중에 성과를 거두려고 욕심을 내면 양보를 해야 한다. 私益을 위하여 國益을 희생시켜야 한다.

5. 이런 식의 6자 회담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미국과 한국이 군사적 대응책을 스스로 배제하는 한, 중국이 북한정권을 압박하지 않는 한 김정일이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다.

6.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첫째, 국제사회가 북한정권의 핵무장을 폐기시키지 못한다면 한국은 합법적으로 NPT를 탈퇴하고 자위적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카드를 내밀어야 한다.
둘째, 韓美日이 공조하여 중국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
셋째, 韓美日 세 나라의 민간부문을 중심으로 하여 김정일을 전쟁범죄, 대량학살, 反인류범죄 혐의로 국제법정에 세우는 운동을 전개한다.
넷째, 한국군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참수작전 개념의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작전계획을 도입하여야 한다. 정부는 북한의 민주화를 촉진시킬 對北공작을 재개하여야 한다.
다섯째, 국제적인 對北금융제재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
여섯째, 절대로 對北퍼주기를 재개하여선 안 된다.
일곱째, 헌법에 입각한 ‘북한노동당 정권의 평화적 해체에 의한 한반도 자유통일’을 對北정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對北정책의 목표는 현상관리가 아니라 자유통일이어야 한다. 對北정책은 자유통일정책이어야 한다.
여덟째, 李明博 대통령은 일본과 중국이 가까워질 때 한국이 설 자리가 좁혀진다는 점을 直視하고 이를 견제할 韓美동맹 강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韓美연합사 해체를 최우선적으로 막아야 한다.
아홉째, 국군은 휴전선상의 對北선전 방송을 再開하여 북한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해야 한다.
열 번째, 對北정책을 진실, 헌법, 正義, 자유의 원칙 위에 다시 세워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랜드 바게인’은 성공할 수 없다. 김정일을 속이려 하다가는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北核문제는 김정일 문제이다. 김정일이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이다. 김정일을 無力化시키지 않는 한 核폐기는 없다. 북한사람들을 각성시켜 그들로 하여금 김정일을 권좌에서 몰아내도록 하는 게 최선의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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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적 작전개념: 참수作戰과 선제공격
-우리는 기습을 허용할 수 없다. 기습 당하였을 때 물러날 공간이 없다.

權泰榮 박사는 육군사관 학교 제18기 출신으로서 KAIST 산업공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군 안팎에서 존경 받는 戰略연구가이다.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국방부 군사혁신기획단장 등 現業에 종사하였고, ‘21세기/통일대비 국방발전방향’ 등 많은 著書가 있다. 그가 노훈 박사(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와 함께 쓴 ‘21세기 군사혁신과 미래전’(法文社)은 우리나라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맞추어 ‘先制공격’을 포함한 적극적, 예방적, 억제적 방위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權 박사는 이 책을 포함한 자신의 著書에서 북한군에게 기습을 절대로 허용하여선 안 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1. 북한군은 핵무기, 화학생물 무기, 그리고 長射砲 등 장거리 기습 및 타격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수도권에 인구의 반, 國富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데다가 휴전선과 인접한 포천, 의정부, 고양 지역이 급격하게 개발되었다. 따라서 기습을 당하였을 때 물러날 공간이 없다. 물러났다가 반격작전으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수도권의 황폐로 實益이 없다.
3. 따라서 과거와 같이 敵에게 영토를 양보한 다음 반격해서 失地를 회복하는 방위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영토 밖에서 단기간 내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전쟁을 사전에 예방, 억제하는 방위개념의 채택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억제 및 예방차원의 방위(Preventive Defense)를 하려면 과거의 ‘守勢-소극’방위에서 ‘攻勢-적극방위’로 전환하고, ‘선제 기습적 공격/타격(Preemptive Attack/Strike)’도 필요시 허용한다는 ‘위엄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4. 방위의 목표와 수준을 ‘적극, 예방, 억제 방위’로 格上시키려면 군을 첨단 情報技術軍으로 탈바꿈시켜야 하며,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先制공격 개념은 이스라엘이 實戰에서 활용한 바 있다. 1967년 6월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기는 아침 출근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 비행장을 기습, 수백 대의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하였다. 이로써 전쟁의 향방을 전투 30분 만에 결정지었다.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공격을 천명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先制공격은 自衛的 차원의 결단이란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주었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집트의 기습을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습을 허용하였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중대한 誤判을 하였다. 이집트 군이 開戰 전에 여러 차례 벌인 훈련은 전쟁 企圖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속아 넘어갔다. 이집트 군대가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도 “또 훈련이군”이라고 안심하였다. 전쟁 몇 달 전에 이스라엘은 이집트군의 훈련을 開戰준비라고 판단, 예비군에 비상을 걸어 약4000만 달러의 예산을 날린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이건 전쟁이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開戰 여덟 시간 전이었다. 골다 메이어 수상, 모세 다얀 국방장관, 그리고 참모총장이 모여 先制공격 與否를 놓고 토론하였다. 결론은 “얻어맞자”는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면 침략자로 몰려 미국으로부터 軍援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 대신 예비군 10만 명을 우선 소집하기로 하였다. 미국 닉슨 행정부에 긴급 연락을 취하여 소련과 아랍 국가들을 통하여 이집트가 기습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닉슨의 안보 보좌관 키신저도 메이어 수상에게 “먼저 공격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만약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였더라면 미국은 여론의 악화로 이스라엘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 군대는 처음 1주일간 苦戰하였다. 한때 다얀 국방장관은 수상에게 핵폭탄을 사용할 준비를 하자고 건의하였다. 수십 개의 히로시마급 원자폭탄을 점검하였다.
곧, 이스라엘 군대는 미국이 急送해준 수만 톤의 신무기의 도움도 받고 해서 반격작전에 성공하였다. 보름간 계속된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약3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부상자까지 합하면 1만 명이 戰死傷한 것이다. 그때 인구가 500만 명도 되지 않던 이스라엘로선 큰 손실이었다.
막강한 이스라엘도 기습을 당하면 이렇게 어려운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이다. 權 박사는 “한국과 이스라엘은 안보 환경이 비슷하다. 특히 縱深이 얕아 기습을 받은 뒤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先制공격 개념을 배제하여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군은 기습당하는 것을 前提로 한 防禦전략을 갖고 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한국 내에 막강한 從北세력을 구축해놓은 현시점에서 기습을 허용하는 것은 自滅의 길이다. 초장에 북한군의 기습이 성공하여 서울이 대혼란에 빠지거나 북한군에 포위되면 從北세력은 폭동을 일으키고 연약한 정부라면 현위치 休戰까지도 감수할지 모른다. 수세적 방어개념을 가진 군대는 士氣에도 문제가 생긴다. 반면 북한군은 ‘武力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고 항상 공격적이다. 한국군은 자유통일을 뒷받침하는 武力이라는 自覺과 先制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북한군을 누를 수 있는 '위엄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한국군은 先制공격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敵의 지휘부를 집중 타격하는 ‘참수작전’ 을 위한 신무기 개발에 돈을 쓰고, 첨단 NCW(Network-Centric Warfare) 戰力도 갖추어야 한다는 게 權 박사의 제안이다.
NCW는, 敵陣에 대한 실시간 정보와 敵의 지휘부와 신경계통을 同時병렬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신무기 체제의 결합을 의미한다. 敵의 戰略重心거점(Center of Gravity)을 수백, 수천 개 選定하여 놓았다가 開戰 즉시 미사일, 전투기, 유도폭탄 등으로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하면 순간적으로 敵의 지휘체제가 마비된다. 지휘체제가 마비된 군대는, 머리가 잘려나간 뒤의 몸통으로 변한다.
權 박사는 이런 공세적 방어체제를 구축하면서 김정일 정권에 대하여도 적당히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자들이므로 전쟁을 企圖하다간 敗家亡身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전쟁을 포기한다는 논리에서다.
이런 공세적, 예방적 防禦戰略은 國家지도부의 意志 없이는 군인의 손만으로써 만들 수 없다. 文民優位의 군 통제가 시행되는 한국에선 민간인 대통령의 國防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自主국방 의지가 신념화되어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安保는 정치인들의 몫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의 몫이다. 安保는 보통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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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처럼 보복력을 가져야
국가公認암살단을 만들어 뮌 헨올림픽 테러 관련자들을 20년간 추적, 모조리 처단.


1972년 西獨의 뮌헨에서 열린 여름 올림픽의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들을 인질로 잡아 경찰과 대치한 끝에 11명을 죽였다. 서독 경찰관 1명도 사망하였다. 테러단 5명이 총격전으로 죽었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직후,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 군대가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만들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집중,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2년 뒤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팀은 살라메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발견,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이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뮌헨 사건 관련자 중 생존자는 두 명이라고 한다. 이 보복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수년 전 개봉되었던 '뮌헨'이란 작품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였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自國民에게 가해진 외부세력의 危害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조차 갖지 않는다면 正義불감증에 걸렸다고 봐야 한다. 그 첫 징조가 法治파괴 현상에 대한 정부의 무감각이다. 두번째 징조는 主敵에 대한 적개심의 무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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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탄야후 이스라엘 수상과 李明博 대한민국 대통령
-6.25 전쟁의 원인을 생략한 대통령과 이란 대통령의 억지를 들어주었다고 화를 낸 수상.

벤자민 네탄야후 이스라엘 수상은 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면서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란의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계획 관련 문서를 들고 나와 연설하였다. 이런 요지의 말도 하였다.
'어제 이 연단에서 유태인 학살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항의하는 의미로서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던 사람과 연설도중 퇴장한 분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여러분들들은 도덕적 분별력을 지키기 위하여 행동하였고 여러분들의 조국을 명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태인 학살을 부정하는 연설을 한 자에게 귀를 빌려주신 분들에게 우리 국민들, 유태인들, 그리고 모든 교양 있는 분들을 대신하여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부끄럼을 모릅니까, 예의를 모릅니까?'
그 하루 전 李明博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면서 6.25 南侵전쟁 때 유엔군이 우리를 구해준 데 대하여 감사하였으나 북한군이 南侵하여 일어난 전쟁이란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켰다. 善만 이야기하고 惡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설명하면 결국 善이 죽는다. 무기력한, 감동이 없는 연설이다. 네탄야후 같았으면 무엇이라고 연설하였을까? '여러분들은 부끄럼을 모릅니까, 예의를 모릅니까?'라는 직격탄은 북한정권 눈치를 보는 李明博 대통령을 향하여 한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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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임하에 명령했다. 엄숙한 主權 발동이었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李承晩-헌병사령관 談話文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에 명령하여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의 문을 강제로 열고,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북한군 反共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은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 또는 무장해제시키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은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反共포로 처리 문제였다. 미국측은 자유의사 송환, 공산측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면서 2년간 휴전협상을 끌었다. 그 사이 戰線에선 치열한 高地戰으로 엄청난 희생이 계속되었다.
李承晩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미국이 포로 문제에서 양보하고 적당히 공산군측과 합의를 본 뒤 서둘러 한국을 떠나려 한다면 한국군이 단독으로 北進하여 휴전협상을 깨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李承晩의 이 도발적 조치에 경악한 것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였다. 이들은 한때 李 대통령을 감금하는 쿠데타 계획까지 구상하지만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韓美상호방위협정-한국군 20개 사단 현대화-경제원조 등의 약속을 하고 李 대통령을 달랜다. 李 대통령의 세계를 향한 도박은 韓美동맹이란 한국의 생명줄로 結實되었다. 한국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침략자와의 싸움을 무승부로 끝낼 수 없다는 이승만의 고매한 理想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1953년 6월20일자 조선일보는 반공포로 석방을 보도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反共韓人捕虜釋放을 完了>
<내 責任下에 命令했다-李대통령, 重大談話를 發表>
한국군 헌병사령관도 '엄숙한 主權발동. 국민은 (반공포로들을) 愛護善導하라'는 발표를 하였다.
'내 책임하에 명령하였다'는 李 대통령의 선언이나 '主權발동'이란 헌병사령관의 소신은 미국의 도움으로 延命하던 국가 지휘부가 지녔던 생존에의 무서운 의지와 自主정신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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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南侵 否定罪라도 만들어야
-유럽 13개국은 유태인 학살 否定罪를 두고 있다.

유럽의 13개 국가들-독일, 프랑스,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은 '유태인 학살 否定罪'를 형법에 두고 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부인하거나, 나치를 옹호하거나,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공개발언, 집필 등을 한 자에 대하여는 最長 징역 5년까지 살리도록 규정했다. 피해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유태인 학살과 反인류적 만행을 부정하는 것뿐 아니라 인정하더라도 축소 표현을 하는 자도 처벌하도록 하였다. 나치에 의하여 희생된 유태인이 600만 명이 아니라 60만 명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쓰면 감옥에 간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으나 유엔 인권위원회, 유럽 인권위원회는 이런 주장을 배척하였다.
한국에서도 刑法에 '북한정권에 의한 학살 및 反인류적 행위를 부정하는 罪'를 신설할 만하다. 즉 김일성의 6.25 남침, 북한정권의 강제수용소 실태, 공개처형, 납치,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등을 부정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자들은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저지하려는 이런 법률이 언론과 양심의 자유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은 人權 선진국 유럽의 경우가 증명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특히 국정원 검찰 경찰은, 공동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보안법의 정당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행동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은 노예근성의 소유자이다. 좌익들이 그런 생각을 유도한다. 공동체의 자유를 파괴하는 첫 걸음은 6.25 남침과 같은 국가적 진실을 부정하여 국민의 기억을 말살하고 종국에 가서는 彼我식별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북한정권에 의한 학살 및 反인류적 행위 否定罪'를 신설하면 전교조 교사들은 反대한민국적 교육을 시킬 수 없다. 시키면 감옥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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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新羅의 決鬪정신을 되살리자



富者나라 宋은 왜 망하였는가?
경제와 문화가 체제를 지키지 못한다. 국민정신과 국가기강이 망가지면 잘 사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다.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 기마軍團이 文明세계를 정복하였을 때 몽골인구는 약 10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지배를 받은 중국, 이란 등 文明圈의 인구는 1억 명을 넘었다. 一當百(일당백)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중국 역사상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부유하였던 왕조는 서기 10~13세기의 宋이다. 경제적 풍요로 인구가 늘어 1억을 넘었다. 이 宋은 거란(遼)과 여진(金)의 침략을 받아 결국 망하고 양자강 남쪽으로 피난 가서 南宋을 세웠다. 거란과 여진족을 합쳐서 100만 명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宋은 130만 명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宋은 지폐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하고, 석탄을 사용하여 좋은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문학과 예술이 꽃피고, 생활 수준도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중국의 近世(근세)를 宋부터 잡기도 한다. 그런 宋이 인구수에서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거란과 금에 뜯어먹히다가 쿠빌라이의 元에 망해버렸다.
경제, 문화, 예술은 체제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다. 宋은 尙武(상무)정신과 自主국방 의지가 없었다. 지도층은 敵前(적전)분열을 되풀이하였다. 임금들은 우유부단하였다. 王安石의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살찐 돼지 宋은 '야윈 늑대'들에게 뜯어먹혀버렸다. 富者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먹힌 많은 예중의 하나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 宋을 닮아간다. 특히 敵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사려는 점에서 그렇다. 宋은 遼, 金, 西夏가 침략하면 막대한 金品을 매년 바치기로 하고 휴전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시작한 對北퍼주기와 비슷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약 100억 달러어치의 金品은 평화를 산 것처럼 보였지만 저들에게 체제유지비와 核무기를 선물하였다.
宋은 信義 없는 외교로 망하였다. 宋은 金과 동맹, 遼를 멸한 다음엔 遼의 잔존세력과 합쳐 金을 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金의 응징을 받아 망하였다(이때까지가 北宋). 오늘날 한국은 6·25 남침 전쟁 때 延인원으로 150만 명의 兵力을 파견하였던 미국을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300명을 보낼까 말까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한국은 경제, 문화, 예술 부문에서는 宋처럼 발전하였으나 오래 계속되는 평화와 번영에 취하여 自主정신과 尙武정신이 망가지고 있다. 북한政權은 遼 및 金과 같은 성격의 야윈 늑대이다. 대한민국이 宋과 같은 '살찐 돼지'가 되면 앞날이 어둡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만 달러, 북한은 그 100분의 1인 약 200달러이다. 宋이 인구수에서 100분의 1밖에 안되는 북방민족에게 당하였듯이 한국이 경제력에서 100분의 1도 안되는 북한에 당한다면 그것은 경제력과 문화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것이다. 애국심과 正義感과 鬪志(투지)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국민정신과 국가기강이 망가지면 잘 사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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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운명을 건 新羅의 對唐決戰
우리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 지배층의 정신력은 어디로 갔는가?


'羅唐戰爭史 硏究'(아세아문화사)란 책을 읽었다. '弱者가 선택한 전쟁'이란 부제가 인상적이었다. 弱者는 전쟁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하기 어렵다. 그런데 新羅 지도부(文武王-金庾信 등)는 당시 세계최강대국이던 唐을 기습하는 전쟁을 선택하였다. 著者인 徐榮敎(충남대 인문과학 연구소 연구원)씨는 <국제정세의 판을 읽고 唐과 전쟁을 결정했던 신라지배층의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唐과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唐이 신라마저 屬國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온갖 모욕을 참아냈던 것은 新羅지배층이었다. 著者는 <자신을 숨기면서 기상의 변화를 기다리는 능력은 신라인들의 本性이었다>고 평하였다.
新羅에 의한 三國통일 과정은 唐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평정 과정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한 후 그 新羅마저 屬國化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新羅는 서기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부터 唐의 이 戰略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은 663년에 신라영토에 계림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신라를 당의 한 州로 본 것이다. 백제는 멸망하였으나 그 땅의 지배권을 唐이 행사하고 있었다. 664년 唐은 4년 전에 끌고 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데리고 와서 舊백제땅을 관할하는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 이듬해 唐은 문무왕에게 부여융과 같은 자격으로 형제의 盟約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문무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서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항복한 부여융은 뒤에 문무왕이 되는 金法敏 앞에 끌려나왔다. 三國史記 태종무열왕條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法敏은 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를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내 손에 있다'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
당의 강요에 의하여 문무왕은 자신이 침을 뱉었던 그 부여융과 형제가 되어 사이 좋게 지내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당은 신라와 舊백제를 같은 점령지로 간주한 셈이다. '羅唐戰爭史 硏究'에서 서영교씨는 <하지만 신라는 당에 책을 잡히지 않고 여기에 철저히 순응하였으며, 唐의 어떠한 모욕에도 인내하고 시간을 기다렸다>고 썼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응시하던 신라인들은 폭풍이 西域 상공에 떠 있고, 토번이 그 폭풍의 눈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당에 순종적이었던 신라는 670년 3월 단숨에 태도를 돌변하였다. 당의 힘이 한반도에 미치지 못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사정 없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가장 힘 있고 노련한 세계제국 唐조차도 기만할 수 있는 신라의 인내의 탁월함은 무서울 정도이다>
670년 지금의 티벳에서 일어난 토번은 唐이 장악하고 있던 실크로드를 급습하였다. 唐은 大軍을 그쪽으로 보내야 했다. 신라는 이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켰다.
저자 徐榮敎씨는 세계제국 唐과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아 독립국가를 유지하였던 신라의 능력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련을 통하여 민족의 유전자로 양성된 결과라고 분석하였다.
신라는 초기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 신라는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南進 정책에 對抗하였다. 118년의 羅濟동맹 후 신라 진흥왕은 백제 聖王과 연합, 고구려를 쳐서 漢江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그 2년 뒤 신라는 태도를 표변하여 동맹국이던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下流지역까지 먹어버렸다. 聖王은 화가 나서 신라를 치려 하였으나 역습을 받아 戰死하였다.
<결정적 순간에는 동맹국을 배반하고 등에 칼로 변신하는 것이 신라였다. 경주분지의 조그만 城邑국가였던 신라가 이윽고 7세기 중반에 唐을 끌어들여 麗濟 兩國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괄목상대한 발전은 신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자기 변신을 대담하고 완전하게 해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對唐決戰으로 알려진 羅唐전쟁은 韓民族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이다.

1. 이 전쟁은 신라지배층이 선택한 전쟁이다.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처럼 강요된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을 결심하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民族은 생존할 자격을 갖게 된다.
2. 이 전쟁은 민족의 운명을 놓고 세계최대 强國을 상대로 싸운 정면승부였다.
3.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신라는 國力을 총동원하였다.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력, 정치력, 의지력, 그리고 하늘의 힘까지 빌리려고 하였다.
4. 이 전쟁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 遺民들을 신라軍에 편입시켜 唐을 상대로 같이 싸웠다. 여기서 同族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5. 신라지배층은 진행중인 토번과 唐의 전쟁에 완급을 맞추어 전쟁의 强度를 조정하여갔다. 놀라운 自主性과 국제감각, 그리고 현실주의의 종합이었다.
6. 신라가 이 전쟁에 승리한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7. 신라의 삼국통일은 韓民族을 만들어내는 씨를 뿌렸다. 신라가 보여준 決鬪정신은 한민족의 無意識에 남아 있고, 위기 때마다 나타난다.

弱者의 입장인데도 자존심과 自主性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최대강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던 신라의 후손들은 지금 역사상 가장 잘 막고 잘 살면서도 동맹국을 돕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1개 연대도 보낼 수 없는 흐리멍덩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1300년 전의 신라보다 물질적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이지만 정신력 부문에선 훨씬 퇴보하였다. 깽판세력에게 끌려다니는 李明博 정부와 唐제국과 승부한 文武王을 비교하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분명히 이런 신라정신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 지도층이 이 힘을 自覺하고 과감히 동원하느냐이다. 한국정부가 중국정부에 대하여 '당신들이 만약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신라의 對唐결전 자세를 취하겠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신라의 당돌함을 깊이 체험하였던 漢族은 그 뒤 한반도의 歷代 왕조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통일 이후 漢族이 만든 중국 왕조는 한번도 한반도를 공격한 적이 없다. 신라의 對唐결전은 漢民族에게 韓民族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다가오는 통일기에 신라의 對唐결전 의지를 한국의 對中결전 의지로 전환하여 준비한다면 전쟁 없이도 자유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671년 문무왕은 唐將 薛仁貴가 신라의 對唐결전 태세 대하여 문책하는 글을 보내오자 이에 답장을 쓴다. 삼국사기에 실린 答薛仁貴書는 천하의 名文이다. 유학자 强首가 썼다는 설이 있다. 문무왕은 신라가 백제 멸망 뒤 이곳에 주둔한 漢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절실하게 적고 있다.
<6월에 先王(태종무열왕)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총관은 저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敵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다하였으나 만약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만약 평양으로 향하게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老弱者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風雪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軍糧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大軍이 또 돌아가려하므로 신라의 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路上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人力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히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導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育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文武王의 이 절규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大業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絶頂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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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의 自主정신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이다'

오늘이 막히면 과거를 돌아보고 그 속에서 용기의 원천을 찾아 재충전한 뒤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 司馬遷의 史記정신이다. 7세기로 시계를 돌려놓는 이유이다.
서기 660년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 장군 階伯(계백)의 5000 결사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三國史記에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많이 소개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6·25 전쟁 후의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는 階伯, 官昌(관창)의 장렬한 죽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맛보았다. 아이들끼리 병정놀이를 할 때 '너는 階伯 장군, 나는 金庾信'式으로 별명을 붙여 일종의 연극을 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별명이 階伯이었다. 그런 별명을 갖고 나니 金庾信이 미워지고 백제軍을 동정하게 되어 주로 그런 성향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金庾信을 '삼국통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평가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의 彼我감정이 퍽 오래 갔던 기억이 있다.
황산벌에서 일어난 장면들은 三國史記의 기록 덕분에 영화처럼 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다. 소년기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이나 三國志, 또는 일본 戰國시대 武士 이야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황산벌 전투는 한국 군사문화의 絶頂(절정)을 보여 준다. 그 이후의 한국사에서 실종된 武士道와 男性美의 현장감이다.
階伯은 출정하기 전에 패배를 예감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三國史記 列傳).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大兵을 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妻子(처자)가 노비가 될까 두렵다'
그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정했다. 황산벌에서 階伯의 결사대는 10배나 많은 신라軍을 네 차례 격퇴했다. 金庾信은 여기서 신라軍도 決死특공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전 진덕여왕 시절 金庾信은 백제軍과 싸울 때 苦戰(고전)하자 충직한 부하 丕寧子(비령자)를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면서 부탁했다. 비령자는 '저를 알아 주시고 또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령자는 아들 擧眞(거진)을 데리고 출전했는데 걱정이 되어 종 合節(합절)을 불러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반드시 따라 죽으려 할 것인데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거두어 돌아가 어머니를 위로해 다오'
비령자가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아들도 뛰어들려고 했다. 종 합절이 말리니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다음 달려가 전사했다. 합절도 '상전이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엇하랴'면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軍이 분기탱천하여 일제히 돌격, 백제軍을 무찌르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階伯과 대결할 때 신라군 사령관 金庾信은 부사령관 둘을 데리고 있었다. 부사령관 金欽純은 金庾信의 동생이었다. 그는 아들 盤屈(반굴)을 불렀다.
'신하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은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忠孝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른 부사령관 品日(품일)은 아들 官昌을 데리고 출전했다. 品日도 아들을 백제軍으로 돌격시켰다. 階伯은 사로잡힌 관창의 갑옷을 벗겼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것을 보고는 살려보냈다. 관창은 신라軍으로 돌아와선 우물물을 들이켜 마시고는 다시 돌격을 감행하였다. 階伯은 생포한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옷소매로 피를 씻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의 面目(면목)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임금님의 일로 죽었으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신라軍은 이 두 소년 장군의 죽음을 보고는 흥분하여 북을 두들기면서 진격하여 백제軍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金庾信의 조카가 되는 盤屈의 아들이 있었다. 金令胤(김영윤)이라고 했다. 문무왕 다음이 神文王인데 이때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명령을 받은 장군 金令胤은 출전할 때 아버지 盤屈의 명성을 의식했음직한 발언을 한다.
'나는 이번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악평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과 대치할 때 金令胤의 동료 장수들은 '잠시 병력을 물렸다가 적이 피곤해진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金令胤은 그 건의를 거부하고 즉시 돌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從者(종자)가 말렸다.
'장군들이 저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예봉을 거두고 틈을 보자는 것인데 장군님만 홀로 나아가려고 하니 안 될 일입니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列傳).
'싸움에 임하여서는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있어선 안 된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衆意(중의)를 왜 따라야 하는가'
金令胤은 적진으로 쳐들어가 격투하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神文王은 비통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비가 없었으면 그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金令胤은 신라 사람들의 귀감이 된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여 좀 무모한, 일종의 자살 공격을 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金庾信의 위대성을 몰랐던 조선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신라의 武士들은 忠孝를 일치시킨 도덕률을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고서 생활했다. 화랑도는 東아시아에서 나타난 최초의 장교양성 교육기관이다. 이들의 행동윤리는 臨戰無退(임전무퇴)로만 단순화되지는 않았다. 圓光 법사가 만든 화랑 5戒에 의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란 인도적 배려가 따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되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3위1체로 통합된 것이 新羅武士 집단의 행동윤리이자 도덕률이었다. 화랑도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이자 신라 무사도의 化身인 金庾信에게도 後日譚(후일담)이 있다.
그의 둘째 아들 元述(원술)은 唐軍과 싸우다가 패했다. 다른 장군들은 전사했고 그도 죽으려 했으나 보좌관이 말리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 金庾信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을 생각하였음인지 문무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그러나 '원술한테만 중죄를 물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술은 시골로 도망해 있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나타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三從(삼종)의 義(의)가 있다.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 같은 자는 이미 남편의 자식 노릇을 못 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원술은 그 뒤 對唐결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매소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金庾信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고려 때까지는 매우 높았다. 三國史記를 쓴 金富軾은 삼국의 제1인물이 金庾信이고, 삼국통일의 제1元勳(원훈)도 金庾信이란 평가를 깔고서 임금도 아닌 그에게 가장 많은 紙面(지면)을 내주었다. 金庾信 列傳의 끝에서 金富軾은 이런 평을 하고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이 없었으며, 꾀를 행할 때 말을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치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삼국을 합쳐 한집안을 만들고 공명으로써 일생을 끝마쳤다. 유신에 대해서는 지금껏 잊지 않고 士大夫(사대부)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천한 사람들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국가와 장수가 삼국통일이란 목표를 두고 서로 믿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일했다는 표현이다. 국가(이 경우 왕이겠지만)와 신하 사이에 틈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신라와 통일주도층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다. 이는 국가와 공직자, 국가와 군대 사이의 이상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金庾信은 兵權을 잡고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네 왕을 모셨지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고, 왕들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역대 왕들은 金庾信의 욕심이 정권이 아니라 통일에 있음을 알고 그를 믿어 그가 하자는 대로 밀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金庾信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고려를 지나 文臣들이 정권을 잡는 朝鮮朝에 들어가면 잊혀지고 만다. 朝鮮王朝實錄 CD를 검색해 보면 金庾信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군사문화나 무사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金庾信의 위대성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국군이 세계적 强軍으로 성장한 지금도 희미하다. 기자는 군대나 예비역 장성들 앞에서 강연할 때 金庾信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강연에 대한 호평도 있었지만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충격적인 것은, 金庾信이 외세인 唐과 손잡고 사대주의적인 통일을 한 민족반역자쯤으로 알고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육사의 별명이 화랑대인데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대표 화랑 金庾信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육사의 역사 교육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이다.


蘇定方의 新羅 평가


삼국통일을 할 때 三國의 주민들은 비슷한 종족이었지만 민족은 아니었다. 민족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같은 언어, 풍습, 종교, 제도, 국토를 오랫동안 공유한 결과의 자연스런 産物이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는 唐도 백제, 고구려와 똑같은 외국이었다. 민족의 출현 이전에 있었던 일을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불평하는 꼴이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한때 군사문화라고 하면 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인은 군대 때문에 우리가 중국인이나 북한인으로 흡수되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삼국통일기에 신라가 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자주국방의 의지 덕분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친 뒤 신라마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金庾信 등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결단했기 때문에 민족통일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승부는 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선비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이 자주적 사대주의의 정신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민 윤리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덕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加減(가감) 없이 쓸모 있는 국가와 국민의 윤리이다. 국가와 지도층은 국민들을 어짐과 사랑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지도층을 섬긴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이상적인 「국가-국민」 관계이다. 화랑도의 武士道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국가윤리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근대성의 핵심은 자존심과 실용성이다. 金庾信의 말에서 잘 묻어 나온다.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주인이 그 존재를 무시하면 사생결단하여 싸워서 지킬 만한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야말로 아무리 힘센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만의, 우리만의 自我인 것이다. 신라 지도층의 위대성은 이런 집단적 自我를 발견하고 이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민족적 自我로 확대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족을 민족으로 만든 동족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金正日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唐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자주국방이란 말을 신라 이후 처음으로 되살려낸 朴正熙의 어록은 金庾信과 같은 맥락이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하게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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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들 이야기



싱가포르, 군대 안 갔다 오면 공무원 될 수 없다!
18세에 입대, 2년 근무 후 예비군 편입, 매년 40일간 소집근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 가야.


최근에 한 외교관 출신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싱가포르의 兵役(병역) 실태를 소개해주었다. 인구가 약 350만 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이스라엘을 닮은 국방제도를 유지한다. 국민총생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로서 한국의 두 배이고, 이스라엘의 반이다. 현역은, 직업군인이 3만2700명, 징병된 병력이 3만9800명, 합쳐서 7만이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한국은 100만(지금은 70만) 兵力을 유지해야 싱가포르와 같아진다는 계산이다.
싱가포르는 국민皆兵制(개병제)이다. 18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는데, 연기가 되지 않는다. 重病者(중병자)가 아니면 모두 입대한다. 兵役특혜는 없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에 가야 한다.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체육선수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훈련기간의 단축이다. 뚱보들에겐 훈련기간을 길게 한다. 제대한 이후에도 예비군에 편입되어 나이 50세(장교)나 40세(사병)가 되기까지 매년 40일간 소집된다. 30만 명이 넘는 예비군이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군대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싱가포르 군대는 1960년대 후반 이스라엘 장교들이 지도하여 만들었다. 이스라엘 고문단은 멕시코 사람으로 위장하여 建軍(건군)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가상 敵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이다. 싱가포르의 국민 구성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으로 복잡하다. 국민개병제는 다양한 출신성분을 초월하여 싱가포르 시민들을 하나의 국민집단으로 용해시키는 용광로 역할을 한다. 싱가포르는 한국보다도 더 평화스러운 안보환경에 있다. 그럼에도 自主국방정신은 한국보다 더 강하다. 싱가포르는 물론 운동선수에게 兵役면제의 특혜를 주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석사장교 제도가 생겨 특혜 논란을 불렀다. 석사 소지자 중 우수한 자를 시험으로 선발하여 6개월간 군사훈련과 전방 체험을 거친 후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轉役시켜주는 제도였다. 당시 군 복무기간이 3년에 육박한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그 뒤 兵役면제 특혜가 남발되었다. 스포츠, 예술, 과학계의 人材를 2, 3년간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주장이 일견 설득력이 있는 듯하나 이는 短見이다. 군대 복무중에도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 수 있다. 특혜는 한번 주어지면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군 복무를 충직하게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미국에서도 징집제 시절 병역특혜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테드 윌리엄즈와 같은 대타자도 2차대전과 한국전쟁 두 차례 징집, 戰線에 배치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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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號와 운명을 같이 한 8명의 樂士
-紳士道 실천으로 남자의 20%만 살아남았다.


1912년 4월14일 밤 세계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178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Women and children first)' 원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알려진 것은 1852년 영국 군함 빌켄헤드호가 침몰할 때 水兵들이 모범을 보인 이후이다. 타이타닉호 사고 때 이 원칙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한 선원들이 救命보트에 빈 자리가 있음에도 남자를 태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타이타닉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1178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706명만이 구조된 것은, 다 태우지 않고 출발한 보트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승객들은 큰 배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1등석에 있던 일곱 어린이들중 여섯 명, 2등석의 어린이들 전부가 구조되었으나 3등석의 어린이들중 34%만이 구조되었다.
영국 남자 승객들의 사망률이 미국남자들보다 훨신 높은 것은 '紳士道'를 실천한다고 救命보트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비겁자'라는 욕을 먹을까 봐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뉴욕항을 목표로 처녀항해를 시작한 이 배에는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生死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紳士道는 두 나라의 엘리트가 가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의 한 예일 것이다.
타이타닉호에 救命보트가 적었던 이유는 승객수가 아니라 톤수에 따라 구명보트의 의무적 보유척수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영하 2도의 바닷물에 노출된 후유증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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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트 연구: 1000명이 3억 인도를 다스린 비결
-청렴, 공평, 滋善이 행동기준

영국이 꽃을 피운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귀족들과 자본가들이 王權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거의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비겁한 富者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邊境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로써 多數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천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주요 언어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최근에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 달러)가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제국의 知的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선반 하나 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 길모어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된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慣行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죽여서 殉葬(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민중의 定評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慈善, 公平, 淸廉은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서도 필요한 국가엘리트의 행동규범이다. 영국의 인도통치의 예에서 보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자선, 공평, 청렴의 행동규범을 뒷받침한 것은 애국심과 자부심이었다.
국가, 전통,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국가엘리트가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은 언제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엘리트 집단을 양성할 국가적 교육기관은 또 어떻게 만들 것인가.
李承晩 대통령은 독립투사 엘리트의 대표였고,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는 군 장교단의 대표였다. 이들은 국가를 찾겠다고 싸우고, 국가를 지키려고 고민하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國益을 중심에 놓고 思考하는 습관을 길렀다. 그 뒤에 등장한 소위 민주투사 출신들은 당파, 지역, 계급의 이익을 국민과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시키면서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민주투사 출신들은 역대 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권과 국가를 혼동하였다. 그들은 정권에 대한 유감이 국가에 대한 유감으로 변질됨으로써 애국심의 근저를 이루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역사와 전통에 대한 존중심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정권을 잡고도 대한민국의 주인이란 의식보다는 손님의식, 또는 백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역사, 철학, 문학 등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국가 엘리트층의 再建이 바로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 再建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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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일곱 명이 죽어도 훈련을 계속한 사단장
-그러나 强風의 위험도를 알기 위하여 혼자만 낙하산 타고 뛰어내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였다. 국군은 앞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뒷받침해야 한다. 국군 장교단이야말로 지난 60년간 가장 많은 피, 땀, 눈물을 흘린 직업群이다. 군인은 국가가 부를 때 死地로 달려간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 미국 군인의 예를 든다.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몇 년 전 사망했다. 그는 '한 군인의 보고서'(A Soldier Reports)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와 언론이 월남전을 망쳤다고 분개하는 한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미군이 戰場에선 지지 않았는데 언론의 反戰보도와 여론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 국가 지도부가 전쟁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졌다고 말한다.
1968년 베트콩의 舊正공세는 그들의 大敗로 끝났지만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미국의 안방 여론을 反戰으로 움직였다. 존슨 미국 대통령부터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산당측과 협상을 제의했던 것이다. 자유월남이 망한 것은 그 7년 뒤였다. 웨스트모어랜드(별명이 웨스티) 장군은 이 책에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가장 공정한 보도를 했다고 평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군사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긴다.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958년 웨스티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101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켄터키주 포트 캠벨에 본부가 있었다. 부임한 직후 낙하훈련이 있었다. 낙하지점에 나간 장교가 풍향과 풍속을 잰 다음 녹색 연기를 뿜어 올렸다. 낙하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502 연대 장병들이 낙하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着地(착지)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강풍이 낙하산을 몰고 갔다. 그는 수백 미터를 끌려가다가 다른 장병들이 낙하산을 주저앉혀 다치지 않았다. 이 强風에 걸려 일곱 병사들이 사망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그러나 기상조건을 이유로 하여 훈련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전쟁은 원래가 악조건하에서 치러지는 것이므로. 다음날 그는 훈련 강행을 명령했다. 다만 낙하 훈련의 경우엔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바람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다른 사병들은 대기하도록 한 뒤 사단장이 혼자서 뛰어내렸다. 전날처럼 강풍이 불어 웨스트모어랜드는 착지한 뒤에도 한참 바람에 끌려가다가 설 수 있었다.
그는 낙하훈련을 중단시키고 육상훈련만 하도록 했다. 이 사고를 분석한 미군은 着地한 뒤 낙하산을 빨리 분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일곱 명이 낙하훈련중 죽는 사고가 한국군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단장은 조사받기에 바빴을 것이고, 훈련은 물론 중단되었을 것이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이 사고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판정된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피크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수년 전 이라크에서 미국의 여자 장교가 戰死했다. 미 육사 출신이었다. 그녀는 보병부대를 지휘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 장교가 戰車 교육부대에서 교관으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軍人정신은 국가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핵심으로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死生觀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戰力이다. 북한군은 몇 번의 간첩선과 잠수정 침투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잡히기 직전에 自爆, 自殺하는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작전을 연상시킨다. 물론 병사들이 굶주리는 북한군의 일반적 士氣는 높지 않다.
한국군 장교단은 좌파정권이 韓美동맹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韓美연합사 해체 공작을 강행해도 이에 순응했다. 연합사 해체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했던 국군이, 좌파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에 그 전의 소신을 간단하게 접어버렸다. 자리를 걸고 참말을 하는 장교가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감옥에 갈 일도 아니었다. 국가와 국군을 위한 충정의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고 싶다. 일본의 武士道를 定義할 때 '죽는 것에 대한 自覺'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직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自問自答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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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恩人 리지웨이 장군의 紳士道
-인간애와 교양, 그리고 애국심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참전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지금 북한동포들은 우리가 6.25 때 겪었던 그 추위를 거의 알몸으로 견디고 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은 남한에선 추억이 되었으나 북한동포들에게는 현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남한사람들도 몇 사람의 미국인이 아니었으면 지금 북한동포처럼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사망하였다.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릿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하여 고마워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릿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文明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일단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릿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릿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만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自主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릿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潰走(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릿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士氣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他國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릿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그때 미국 정부 일각에선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主力인 8군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士氣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50代의 이 猛將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전선을 누비면서 장병들의 軍心을 파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얼어붙은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미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全文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筆力을 잘 보여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知性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數週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 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軍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合憲的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布陣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不動産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지조와 용기가 전쟁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은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며 이 大義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他人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自衛행동이었다.
결론적 분석: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무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머지 않는 장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軍 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挑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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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사령관은 실종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수색을 중단시켰다.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海外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射手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戰線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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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선 이름 딴 賞 제정

알렌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兄인 알렌 덜레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工作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國務장관으로 일하였다.
알렌 덜레스는 獨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戰線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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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소장을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한국인
길을 헤매는 딘 24사단장을 북한군에 신고하고 3000원씩 받은 두 한국인.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死守하여 한국을 구한 제1공로자 워커 8군 사령관(중장)은 1951년 1월 의정부 근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이 몰던 트럭에 받혀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미군 장교 하우스맨이 말려서 재판을 받고 옥살이만 하도록 했다.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3년간 고생했다. 그는 휴전 때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그는 1950년 7월18일부터 3일간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大田을 방어했다. 이 3일은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었다. 戰史학자들은 이 3일간의 지연작전이 한국을 구했다고 말한다.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부하들의 앞장을 섰다. 그는 후퇴할 때도 부상자를 자신의 지프 차에 태우고 가는 등 끔찍이 아꼈다. 그는 혼란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때부터 35일간 딘 소장은 낯 선 한국 마을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딘 소장은 한국인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세 번 배신을 당했다. 첫번째 한국인은 그를 보호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이때는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두번째 배신은, 딘 소장이 한국인 형제가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 며칠간 보호를 받았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이 '떠나라'고 쫓아낸 일이다.
세번째는 딘 장군이 대구를 향해서 길을 걸을 때였다. 한, 최라는 두 한국인이 딘 장군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딘 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그 代價로 두 한국인은 3000원(5달러)씩의 현상금을 받았다.
한국을 구하러 와서 목숨을 바친 미국인이 있는가 하면 그 미국인을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돈을 번 한국인도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고마운 것은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군은 한국군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것도 양민을,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으로 오해한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에 흥분했던 한국인들중 과연 몇 사람이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이들이 한국인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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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戰死者가 많은 중학교 랭킹
<이 글은 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심층취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상흔 기자)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출신 1976명이 戰死한 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다.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씨는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를 당시 학적부와 대조해 확인한 결과 전쟁기념관 동판의 전사자 수보다는 적은 63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확인했다.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 '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씨는 '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경북中 32회 졸업생 중 學徒兵으로 나간 사람은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귀순 교장의 아들 조성환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풀려났다.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군도 참전하여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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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戰死者 2464명 확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우리 도련님이 정말 가여워요. 그래서 6·25만 다가오면 눈물이 나요.'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숨진 어느 소년병의 글에서)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1950년 낙동강 전투에서 숨진 소년병의 편지에서)
학도의용군 가운데 일부 포함되는 15~17세(1933~ 35년생)의 소년병들(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에 대해선, 戰史(전사)는 따로 소년병이라는 용어로 이들의 참전과 전투, 戰死(전사)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당시 국가비상동원령에 의한 징집대상 연령은 만 18~30세. 만 17세 이하의 소년지원병들이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조국을 구하겠다며 어른들의 전쟁에 참전하여 2464명이나 목숨을 바쳤다. 이는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회장 朴泰承)가 2000년에 국군 전사자 명단을 조사하여 처음으로 밝혀낸 숫자다. 군번도 없이 죽어간 숱한 소년병 전사자를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 10월 하순, 소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朴泰承씨는 육군본부 직할 수색대원으로 평북 박천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하던 중 어느 야산 골짜기에서 그날 처음 보는 다른 부대의 한 소년병과 함께 대오의 꽁무니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소년병은 열일곱 살인 朴씨보다 한두 살은 어려보였다. 잠시 인민군의 총소리가 뜸한 틈을 타서 말을 걸었다.
'너는 어디서 왔노?'
'청도에서 왔어예'
무거운 M1 소총과 탄띠를 어깨에 멘 소년병은,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몇 끼나 굶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군복은 물이 빠지고 해져서 너덜거렸고, 운동화는 다 떨어져서 그야말로 거지 행색이었다.
'는 진량에서 왔는데…' 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었던 소년병이 쓰러져 있었다. 복부에서는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소년병은 배를 움켜쥐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적병이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다시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아서 朴씨는 오금이 저렸다.
날도 점점 저물어 가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소년병이 朴씨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가려거든 나를 쏘고 가라'며 울기 시작했다. 복부에서는 창자가 삐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오면 어차피 자기는 죽을 목숨이니 제발 자기를 쏘고 가라고 애원했다.
朴씨는 순간적으로 소년병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M1 소총으로 소년병의 이마를 겨냥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년병은 '어매야'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朴씨는 눈물을 훔치면서 골짜기를 내려가 我軍의 뒤를 좇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 참전 4년 후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朴씨는 그때 이후 자기 손으로 총을 쏘아 눈을 감겨주었던 그 소년병을 잊을 수 없어 20년 전부터는 집안에 소년병의 冥福을 기리는 작은 法堂을 마련하고 이날 이때까지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연일 血戰이 벌어지고 兵力손실이 늘어나 戰力이 모자라게 된 국군은 충원을 위해 후방에서 募兵(모병)을 했다. 군은, 1950년 8월 초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신병모집 훈련소를 차렸다.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新編(신편)할 때는 병력이 모자라 거리에서 길을 막고 공모하기도 했다.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트럭에 스피커를 단 지원병 모집대를 각 마을과 학교로 보내 호소했다.
'사랑하는 학도 여러분. 지금 조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조국은 학생 여러분에게 총을 들고 나와 북한 괴뢰군을 무찔러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피끓는 애국학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공산 괴뢰군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공산도당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나가 괴뢰군을 물리칩시다.'
수업 중인 교실에까지 들려오는 지원병 모집대의 스피커 소리는 수많은 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자칫 온 나라가 북한 공산군에게 먹힐지 모른다며 은근히 軍입대를 권했다. 소년들은 책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교복 차림의 까까머리 그대로 戰線으로 나갔다. 많은 소년들이 집에도 알리지 않거나 부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전선으로 나갔다. 당시 중학교(6년제) 학생들은 일제치하를 조금이나마 겪은 세대여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선에 투입된 소년병들은 말이 지원병이지 거의가 '병사'라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격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나마 광목에 국방색 물감을 들인 군복을 지급받고 1~2주간 약식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나중에 8월 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부터는 훈련도 받지 못한 채 교모를 쓴 교복 차림 그대로 전선에 나가는 경우도 非一非再(비일비재)했다. 일반 학생과 구분하려고 교모에 흰 띠를 두른 것이 고작이었다.
나이 겨우 15~17세의 소년들은 한참 성장기에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지금의 10代들처럼 영양상태가 좋아 키가 1m 80㎝에 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들은 큰 키라고 해야 1m70㎝ 정도였고 대체로 1m60㎝를 조금 넘는 소년이 대부분이었다. 키 작은 소년병들이 M1 소총, 탄약과 수류탄 등 약 20kg에 달하는 무장을 하고 산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낑낑거리며 어른 군인들을 따라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몹시 힘드는 일이었다. 군복을 얻어 입은 소년병들일지라도 옷이 너무 커서 옷과 몸이 따로 놀았다. 어린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꼴이었다. 이런 소년병들은 절대 다수가 경북·대구 출신이었다.
소년병 權道文(당시 14세, 경북 군위중 2년)의 큰형수인 崔在彦(76)씨는 어린 시동생에 대한 기억을 어제일처럼 생생히 말한다.
'시동생은 내가 시집갔을 때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였는데, 얼마나 영특하고 인정이 넘쳤는지 모두들 우리 도련님을 칭찬했지요. 어린 나이에 군대 간다고 해서 온 식구들이 말리느라 난리가 났었어요. 그런데도 나라를 위해 싸워야 된다면서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아무도 붙들지 못했습니다.'
崔씨가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시동생이 치열한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北進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되었을 때 고향집에 왔었는데, 그때 눌러 있지 않고 몸이 회복되자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가 戰死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아주 잘했으니까 전쟁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공부를 계속해서 훌륭한 인생을 보냈을 터인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지만 아무도 어린 소년병의 죽음을 기억해 주지 않잖아요.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 나마저 죽고 나면 누가 우리 시동생을 기억이나 해주겠어요?'
눈가에 이슬을 반짝이며 큰형수 崔씨는 말을 더듬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우리 도련님이 정말 가여워요. 그래서 6·25만 다가오면 눈물이 나요.' <월간조선 2000년 11월호.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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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민국-가장 위대한 성공 스토리의 나라


*綜合國力 세계 13위

한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국방 등의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한 國力이 세계 13위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 서울대 교수)은 2009년 광복절을 맞아 조선일보와 공동으로 실시한 '대한민국의 종합국력'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세계 주요 선진국 및 산업화된 20개 국가들(G20)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미국(69.15점)과 중국(54.73점)이 각각 1·2위에 올라, 세계 종합국력에서 미·중 兩强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綜合國力 지수 48.56점으로 세계 13위에 오른 한국은 과학기술력(7위)·국방력(8위) 등 하드파워 부문에서는 세계 10위 이내의 좋은 성적을 기록한 반면, 정치력(14위)·사회자본력(15위) 등 소프트파워 부문에선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미국은 지난해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전체 13개 측정 부문 중 절반 이상인 7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다른 국가들과 압도적인 차이의 선두였다. 거대한 인구와 땅, 자원을 바탕으로 한 중국은 정치력·문화력·사회자본력 등의 부문에서 선두에 오르면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다음으로는 일본(53.45점), 영국(53.05점), 독일(52.92점), 프랑스(52.16점) 등이 100점 만점에 50점 이상을 기록하며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번 평가는 기초국력(국토, 인구 등)·국방력·경제력·과학기술력·교육력·정보력·환경관리력 등 7개 분야를 포함한 하드파워와 국정관리력·정치력·외교력·문화력·사회자본력·거시변화 대처력 등 6개 분야의 소프트파워에 대해 종합국력 지수를 개발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우리나라는 하드파워(9위)에 비해 소프트파워(12위)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나, 先進國 진입을 위해서는 소프트파워의 강화가 더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 自由국가, 북한은 세계 最惡의 不自由

미국의 人權연구소인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한 2009년도 세계 193개국 자유도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자유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은 86점으로서 일본(88), 이스라엘(84)과 같은 등급이고 프랑스, 영국, 호주 등보다는 한 등급이 낮다. 最惡의 인권억압국가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북한이다. 점수는 각 2점이었다. 북한의 점수는 체첸(7), 티벳(4), 짐바브웨(12), 우즈벡(3), 리비아(8), 아프가니스탄(32), 수단(14), 미얀마(5)보다 못하다.
북한이 인권면에선 最惡중의 最惡이란 이야기이다. 수단 대통령은 학살, 反인류범죄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이다. 그곳보다도 人權탄압이 더 심한 곳이 북한이라니 가히 지옥이다.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이다. 복잡한 內戰이 밑고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유국가로 분류된 숫자는 89개국인데, 세계 인구의 약46%인 30억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42개국은 不自由國인데, 세계 인구의 34%를 차지한다.


*해외여행 세계 10위

세계여행기구에 따라면 2007년 통계를 기준으로 할 때, 독일인들이 연간 829억 달러를 해외여행에 써 세계 1등이었다. 이어서 미국(762억 달러), 영국(723억 달러), 프랑스(367억 달러), 중국(298억 달러), 이탈리아(273억), 일본(265억 달러), 캐나다(248억), 러시아(223억), 한국(209억 달러)이었다. 인구비례로는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많이 여행을 하는 셈이다.

*삶의 질 세계 25위

유엔개발계획(UNDP)이 작년 12월에 발표한 179개국 삶의 질 랭킹에서 한국은 전년도보다 한 등이 오른 25위였다. 유럽권 국가를 바싹 따라붙은 거의 선진국 수준이다. '포린 폴리시'(미국의 정책 잡지)의 '실패국가, 성공국가 랭킹'에서도 한국은 성공국가群에 들어갔고 25위였다. 우리의 라이벌인 칠레는 40등, 중국은 94등, 북한은 등외이다.
삶의 질 랭킹은 壽命, 교육, 소득을 중심으로 계산하고 실패-성공국가 랭킹은 국가의 운영상태를 중심으로 조사한다.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그리고 분단된 나라중에서 최고 성적이다. 지난 60년간 한국의 기성세대가 이룩한 기적과 逆轉(역전)의 드라마가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기성세대가 인류역사상 최단 시간내에 최고의 업적을 남긴 가장 위대한 세대임을 통계가 입증한 것이다. 이런 한국의 현대사는 'The Greatest Story Ever Told'이다.
이 감동의 한국 현대사를 '正義가 실패한 역사'라고 매도하는 사람, 북한정권이 오히려 더 잘했다는 사람, 미래 세대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 이들은 세계적인 희귀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행적은 그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大明天地(대명천지)에서 살면서 조국에 반역하는 反대한민국, 親김정일 세력은 친일파보다 더 나쁘다.

*북한은 실패 국가

미국의 권위 있는 정책 잡지 ‘포린 폴리시’는 매년 ‘실패한 국가 랭킹’을 발표한다. 2008년에는 177개국을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실패국가 랭킹 1위는 소말리아였다. 실패국가로 분류된 30개 나라들을 소개한다.

1. 소말리아
2. 짐바브웨
3. 수단
4. 차드
5. 콩고민주공화국
6. 이라크
7. 아프가니스탄
8. 중앙아프리카공화국
9. 기니아
10. 파키스탄
11. 아이보리 코스트
12. 아이티
13. 버마
14. 케냐
15. 나이제리아
16. 이디오피아
17. 북한
18. 예멘
19. 방글라데시
20. 동티모르
21. 우간다
22. 스리랑카
23. 니제르
24. 부룬디
25. 네팔
26. 카메룬
27. 기니아-비사우
28. 말라위
29. 레바논
30. 콩고공화국

*성공국가 랭킹 25위

성공한 나라들은 177개국 중 끝 번호쪽이다. 성공국가 30개 명단을 싣는다.

1. 노르웨이
2. 핀란드
3. 스웨덴
4. 스위스
5. 아일랜드
6. 덴마크
7. 뉴질랜드
8. 호주
9. 네덜란드
10. 오스트리아
11. 룩셈부르크
12. 캐나다
13. 아이슬란드
14. 일본
15. 포르투갈
16. 벨기에
17. 영국
18. 싱가포르
19. 미국
20. 프랑스
21. 독일
22. 슬로베니아
23. 칠레
24. 우루과이
25. 한국
26. 체코
27. 스페인
28. 이탈리아
29. 모리샤스
30. 그리스

*균형개발과 인권은 超一流

실패국가, 성공국가를 가르는 12개 기준항목은 인구증가, 난민, 집단 핍박, 탈출, 불균형 개발, 경제쇠퇴, 국가의 법질서 붕괴, 公的 서비스, 인권, 안보기관, 지배층의 분파주의, 외부 개입이다.
分斷국가 또는 분쟁국가중에선 한국이 단연 1등이다. 이스라엘은 실패국가 랭킹 58위이다. 중국은 57위. 한국은 分斷상황에서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다른 항목이 뛰어나 스페인과 이탈리아보다 더 성공한 나라로 평가되었다.
예컨대 불균형개발 부문에서 한국은 2.4점(점수가 낮을수록 균형개발)으로서 일본(2.5)과 아이슬란드(2.5), 그리고 스위스(2.6) 및 호주(4.4)보다도 앞섰다. 노무현 정권이 한국을 양극화의 온상으로 표현한 것이 얼마나 악질적인 저주였나를 잘 알려준다.
한국의 인권부문 점수는 2.7로서 프랑스(2.9), 일본(3.4), 미국(4), 싱가포르(4.3), 포르투갈(3.7)보다 앞서 세계1류급이다.
외부개입 항목에선 북한의 존재로 6.5점이었다. 만약 통일이 되어 이 항목의 점수가 독일 수준(2.4)으로 낮아지면 한국은 21위인 독일과 같은 랭킹에 놓여진다. 한국이 독일과 맞먹다니!
성공국가의 대표가 한국이고 실패국가의 대표가 북한이다. 그런 북한의 김정일을 ‘見識 있는 지도자’라고 극찬하는 자는 세계 60억 인구중에서 김대중뿐일 것이다. 김정일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김정일은 자신을 ‘난쟁이 똥자루’라고 표현한다. 한국의 성공사례를 부정하는 세력도 세계에서 좌경세력-민노당, 전교조 등-뿐일 것이다.
포린 폴리시의 국제비교표를 읽고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불행해질 자격이 없다고.

*남북한의 차이: 천당과 지옥

1. 북한주민의 1인당 가처분 국민소득은 발표된 바 없으나 전문가들은 약300달러 정도로 보고 있다. 남한은 2만 달러에 육박했다. 인구 50만 명인 제주도의 GDP가 북한보다 많다.
2. 북한의 중간 간부 임금은 월 3000원인데, 암시장에서 1달러 가치이다. 북한에선 12 달러로 1년을 산다.
3. 북한의 한해 무역액은 약30억 달러, 한국은 그 200배. 구미시의 작년 수출액이 400억 달러를 넘었다.
4. 1996년의 북한사람들 생활수준은 日帝시절보다 못하고 조선조 시절 가장 열악했던 150여년 전 고종 철종 시절보다도 못하다는 통계가 있다.

5. 북한사람들의 평균 수명(66세)은 남한 사람들(80세)보다 14년이 짧고, 남자 평균 키는 13cm가 짧다. 해방 당시 한국남자 평균 키는 166cm였는데 남한은 173.5cm로 컸고 북한은 160cm로 줄었다. 김정일은 북한사람들의 생명과 신체를 갉아먹는 불가사리이다.
6. 북한사람들은 185개국 중 평균 IQ가 3등이다.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을 억압하니 그 재능은 무효가 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7. 김정일 父子는 700만 명을 학살했다. 김일성이 6.25 남침으로 300만 명, 김정일이 굶겨서 300만 명, 강제수용소에서 100만 명을 죽였다. 700만 명의 시신을 도로 위에 한 줄로 깔면 서울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 우랄산맥을 넘고 파리를 지나 마드리드까지 간다(약1만1400km).
8. 김정일은 1990년대 후반 스위스 은행 등에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숨겨놓고도 식량 구입에 한 푼도 쓰지 않아 300만 명이 굶어죽게 했다. 매년 3억 달러만 써서 옥수수 200만t씩 수입했더라면 한 사람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9. 김정일은 한 병에 2000달러 하는 프랑스 꼬냑 '타임레스'의 최대 수입자이다.
10. 김정일의 한 끼 밥상을 차리려면 300만원이 든다.
11.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간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간 金品은 약100억 달러 상당이다. 이 중 30억 달러만 식량구입에 썼더라면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식량난이 계속되는 것은 100억 달러의 거의 전부가 핵개발, 신무기 도입, 對南공작, 김정일과 측근의 致富에 쓰여졌다는 방증이다.
12. 이산가족회의 계산에 따르면 약1500 가족이 상봉했는데 이를 成事시키기 위해 정부가 직간접으로 북한에 제공한 金品이 약1조4000억 원이다. 한 가족이 한번 동물원 상봉식으로 만나는 데 9억 원이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13. 노무현 정권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200만kw를 공짜로 送電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드는 돈은 10년만 쳐도 약25조원이다. 이는 한국 대학생 전체의 1년 등록금이고, 국방예산보다 많으며, 신형 탱크를 2500대 살 수 있는 돈이다.
14.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 만나기 위하여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냈다. 김정일의 39호실 비자금은 주로 핵개발, 무기 수입, 對南공작 등에 쓰인다.
15. 노무현 정권은 對北 퍼주기 등으로 지난 5년간 국가 빚을 130조원에서 300조원으로 두 배 늘렸다.
16. 노무현 정권은 5년간 공무원 수를 약10만 명 늘렸다. 99만 명의 공무원들이 연간 20조원 이상을 월급으로 받고 있다.
17. 노무현 정권의 反헌법적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공무원은 단 1人이었다. 그는 직위해제되었다.
18. 노무현 정권은 한 여승이 도롱룡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억지 단식을 하자 경부고속전철 공사를 멋대로 중단시켜 약2조5000억 원의 손해를 국민들에게 끼쳤다. 이 돈은 건축비 1억짜리의 좋은 집을 2만5000채 지을 수 있는 액수이다.
19.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국 기업체 16개중 13개가 적자이다.
20. 6.25 남침전쟁 때 남한에서 북한군과 남로당 부역자들에 의해 피살된 사람은 5만9964명(1951년 통계, 실제론 이보다 많다)인데 약70%인 4만3511명이 全南에서 죽었다.
21. 김대중 정권은 나중에 일본경찰에 의해 국제수배된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까지 북송해주었으나 단 한 사람의 국군포로와 납북자도 데려오지 못했다. 月刊朝鮮 기자가 납북자 단체와 협조하여 3人의 납북 어부를 귀환시켰다.
22. 남북한이 같은 게 하나 있다. 185개국 국민 평균 IQ 랭킹에서 남북한을 합치면 세계 1위이다. 이스라엘, 독일인보다 앞선다. 이 머리 좋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장 못 사는 체제를 만든 김정일은 민족반역자이고 이 자를 증오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존재이다.

*대한민국이 잘될수록 화가 나는 사람들

국가 발전의 장애물인 전교조, 민노당, 민주당의 행태를 관찰하면 '대한민국이 잘되면 잘될수록 화를 내고 원한을 품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또 김정일이가 나쁜 짓을 하면 할수록 김정일 편을 든다. 미국 정책전문 잡지 포린 폴리시誌의 실패국가, 성공국가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170여개국 가운데 성공한 국가 순위 25위이다. 균형개발과 人權부문에서는 西유럽을 능가하는 超一流 수준이다. 그런데 저들은 李明博 정부를 독재로 몰고 한국이 兩極化의 지옥인 것처럼 惡선전한다. 조국이 잘 되면 배가 아픈 사람들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던 사람들'의 후손인 모양이다.

*주인공이 없는 한국의 드라마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인류역사상 最高의 성공작이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The Greatest Story Ever Told'이다. 평화롭게 이뤄진 성공이 아니라 더욱 값지다. 분열, 갈등, 戰亂, 쿠데타, 민중봉기, 암살, 반역이 점철된 대혼란을 딛고 일구어낸, 그래서 더 위대한 작품이 대한민국이다. 그야말로 기적과 逆轉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는 두 사람의 주인공과 두 惡黨과 여러 助演이 있다. 두 주인공은 李承晩, 朴正熙, 두 악당은 김일성과 김정일이다. 요사이는 이 드라마를 공짜로 선전해주는 오바마란 이름의 홍보대사도 등장하였다.
세계무대에만 나가면 엄청난 관객을 모으고 박수를 받는 드라마인데, 국내 공연에선 실패한다. 국내판 드라마는 주연과 조연을 바꿔치기 하기 때문이다. 主演을 李承晩, 朴正熙로 설정하지 않고 김구, 김일성, 김정일, 김대중으로 하니 손님이 들 리가 없다.
공연실패로 최근엔 감독이 바뀌었다. 새 감독은 李明博이란 사람인데, 이 분 또한 李承晩, 朴正熙를 主演으로 놓지 않는다. 이승만,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틀림 없이 흥행에 성공할 터인데, 조감독들이 엉뚱한 말을 하는 데 넘어가 시나리오를 이상하게 쓰는 바람에 세종대왕, 이순신, 신사임당까지 등장하니 일부 관객들은 조선조를 무대로 한 드라마로 誤認한다.
세계가 알아주는 한국의 드라마는 建國, 한국戰, 근대화, 민주화, 서울올림픽, 거대한 중화학공업, 力動的인 민주주의 같은 웅대한 파노라마인데, 한국의 감독들이 쓰는 드라마에는 암투, 깎아내리기, 흠집내기, 음모, 自殺, 선동, 변태적인 장면만 나온다. 이런 드라마를 본 젊은이들도 그 드라마를 닮아가니 교육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와 주연배우를 몽땅 바꿔야 한국의 드라마는 성공할 것이다. 세계 最高의 소재를 갖고 가서 最惡의 작품을 만들고 앉아 있는 이들이 일부 정치인, 일부 기자, 일부 지식인, 일부 사회단체, 그리고 多數의 좌익들이다.

*국가적 기억장치 회복이 彼我식별장치 회복의 길

이렇게 근사한 나라를 만들었는데도 청소년층에서 조국과 선배세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국가적 기억장치가 망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다. 李承晩 박사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대학 총장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6.25남침이 조선조에서 일어났고, 일본이 침략한 사건이라고 믿는 청년들도 있다. 경제적으론 잘 살지만 국가와 민족과 희생과 용기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적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나 나라는 ‘살찐 돼지’가 되어 북한정권과 같은 ‘야윈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是非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言論과 정치가 있는 한 한국은 自己방어에 실패할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 잘 살도록 만들려면 먼저 악당들이 못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국민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응징력을 가진 국민들이 되어야 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익세력을 정권 차원에서 퇴출시켰던 유권자들이 한 번 더 일어나야 한다. 敵과 동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是非를 가리지도 못하면서 국민교양의 파괴에는 앞장서는 언론. 대한민국 헌법, 애국시민, 미국을 敵으로 삼고 학살자 김정일 정권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이들을 斷罪하기 위해서는 애국시민들이 조직되어야 한다. 인구의 高齡化로 보수적인 노장층이 선거에선 威力을 발휘하나, 조직이 되지 않으면 평소의 행동력이 약해, 언론과 정당에 일상적으로 배신만 당한다. 국민들을 행동하는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장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彼我識別기능이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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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아직도 거꾸로 배우는 한국 현대사



自虐史觀의 극복
신라의 三國통일, 대한민국의 建國, 漢字문화를 부정하면 自我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이는 노예근성의 소유자가 되는 길이다


한국은 地政學的(지정학적) 조건에 의하여 攻勢(공세)로 나아가야 생존할 수 있는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공세적인 북한정권과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吸引力(흡인력)이 큰 중국을 상대로 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 나라가 수비 위주의 분위기로 흐르는 데는 自虐史觀(자학사관)이 한 몫을 하고 있다.

1. 新羅의 三國통일을 부정하면 韓民族의 탄생을 부정하게 된다. 三國통일에 의하여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한 民族집단이 되어 한반도에서 오래 살다가 同族의식을 갖게 되었다(통일 이전엔 民族도, 同族의식도 없었다.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주의를 기준으로 신라의 三國통일을 비난하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같다).
2. 대한민국의 建國(건국)을 부정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祖國(조국)을 부정한다. 애국심이 생기지 않고 필연적으로 북한정권을 조국보다 더 좋아하는 반역자가 된다.
3. 신라의 三國통일과 대한민국의 建國을 모두 부정하면 自我(자아)부정이 된다. 韓民族의 일원으로서 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를 스스로 폄하하게 된다. 이는 自虐사관이고, 정신적 自殺(자살) 행위이다.
4. 漢字(한자)를 부정하면 民族(민족)문화를 부정한다. 民族문화의 대부분이 漢字문화 속에서 꽃을 피웠고, 漢字의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民族魂(민족혼)이 담겨 있는 그릇이 漢字이다. 그 한자를 부정하면 無識者(무식자)가 된다. 무식자는 애국자가 될 수 없다.
5. 민족의 터전을 만든 신라의 삼국통일, 민족에게 자유를 선물한 대한민국 建國, 고급문화를 선물한 漢字 도입(語文一致를 이루게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과 함께)은 韓民族 역사상 길이 남을 쾌거이다. 민족사의 성취와 영광을 다 부정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존재의 근거, 자부심의 근거를 없애버리는 인간이 걷는 길은 노예의 길이다.
6. 新羅의 三國통일을 부정하는 고구려 정통론, 대한민국의 建國을 부정하는 북한정통론, 漢字를 부정하는 한글專用論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데, 反민족적이고, 사대주의적이고, 反과학적이고, 미신적이고, 反지성적이고, 무식하고, 자기파멸적이다. 뿌리 뽑힌 존재로 만드는 것이, 인간과 국가를 가장 빨리 망치는 방법이다. 浮萍草(부평초)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느티나무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선택은 자유이다.
지난 5월 서울 水雲회관에서 열린 漢字교육추진총연합회 주최 강연회에서 趙淳(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한글專用이 확산되어 反지성적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는 '한글專用으로 얻은 것은 경박함이고 잃은 것은 문화이다'고 말하였다. 趙 박사는 '한글전용으로는 知性(지성)을 만들지 못한다. 知性이 없으면 文化를 만들 수 없다. 문화를 만들 수 없는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그는 한글전용으로는 책도 제대로 번역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한글전용이 확산되면 인간의 생각과 사상과 행동이 유치해져 난장판의 文化밖에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趙 박사는 경제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語文(어문)정책이라고 강조하였다.
'語文정책이 제대로 되어 文化를 창조할 능력을 갖추면 경제, 정치, 지성의 바탕을 갖추게 되므로 일시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져도 문제가 안 된다'
경제학자인 趙 박사가 경제보다 語文정책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語文정책을 바로 세운다면 다른 정책에서 실패하더라도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민족의 행운: 金春秋, 文武王, 李承晩, 朴正熙
建國과 통일의 네 주인공은 一流국가를 見聞한 경험을 살린 自主的 개방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두 가지 대사건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이로 인한 民族의 탄생이고, 대한민국 建國에 의한 국민의 탄생이다. 국민은 민족이나 백성보다 더 進化한 존재 즉, 국가의 主權者이다. 국민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민족이라는 母胎에서 생겨난 개념이니 신라의 삼국통일아야말로 민족사 2000년의 최대 사건이다.

삼국통일을 주도한 신라의 태종무열왕(金春秋)과 文武王(金法敏), 그리고 대한민국의 建國과 근대화를 주도한 李承晩과 朴正熙의 공통점이 있다. 네 사람 모두 해외 경험을 가진 개방파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自主정신의 소유자였다. 개방과 자주는 實用정신으로 매개될 때 같은 뿌리를 이룬다.

金春秋는 왕이 되기 전에 고구려(642년), 일본(647년), 唐(648년)을 방문하여 최고 지도자들을 만나는, 목숨을 건 외교를 하였다. 당시에 바다를 건너는 것만도 위험한 여행인데, 敵陣으로 들어간 그였다. 그는 세 나라의 수도에 오래 머물면서 지도자들과 깊은 대화를 가졌다. 三國史記와 日本書記, 舊唐書엔 김춘추의 출중한 풍모가 일본과 唐의 지도층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적혀 있다.

김춘추는 이런 대화와 見聞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일본, 고구려, 唐의 지도부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그들의 장단점과 戰略전술,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예술 및 제도에 대한 배움도 컸으리라. 특히 당시 세계최대 도시인 唐의 長安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그 후 新羅의 내부 개혁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김춘추가 도착한 서기 648년의 長安은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唐의 전성기를 연 태종이 즉위한 지 22년, '정관의 治'로 불리는 태평聖代였다. 김춘추는 거대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장안으로 모여드는 외국인과 외국문물을 접하고 더 감탄하였을 것이다. 唐은 대외 개방적인 정책을 펴 장안엔 북방과 西域과 서양의 상품, 예술, 종교가 모여들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 접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장안에 적어도 여섯 달 이상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당 태종을 만나 羅唐동맹을 맺고 백제, 고구려를 치기로 약속한다. 삼국의 사신중 김춘추처럼 중국의 황제를 직접 만나 담판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신라뿐 아니라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頂上외교였다.

김춘추는, 중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한 사람인 唐太宗을 움직일 만한 人品과 교양의 소유자였다. 동양三國을 여행하면서 당대의 최고인물들과 오랜 대화를 나눈 경험이 그의 人格과 경륜으로 昇華되었을 것이다.

김춘추는 아들 세 사람, 즉 金法敏, 金仁問, 金文王까지 唐의 조정으로 파견하여 머물게 하였다. 宿衛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신라의 王族이 唐의 황제를 모신다는 명분으로 唐의 조정에 머물면서 선진된 문명을 배우고 동시에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했다.

西江大 총장인 李鍾旭 교수는 '春秋-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에서 이렇게 썼다.
<춘추의 세 아들이 당나라에 갔던 것은 또 다른 의미도 지닌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성은 국제도시로서 신라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것은 춘추 부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충격은 가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춘추는 신라의 중국화, 즉 세계화를 구상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과 더불어 이를 실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은 당대 최고의 정치와 제도와 문화를 見聞함으로써 높은 識見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런 實力이 삼국통일을 이끈 리더십이었다. 두 사람은 경력상 親唐派였으나 國益과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선 唐과의 전쟁도 불사하는 무서운 自主派였다. 진정한 自主정신은 북한식 폐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 같은 열린 정신에서 생긴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 羅唐동맹의 약속을 맺고 귀국한 후 중국의 年號, 衣冠을 채택한다. 좁게 보면 중국화이고, 요사이 말로 하면 세계화 개혁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주도하는 동양문명의 主流에 신라를 편승시킨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李承晩도 김춘추와 같은 국제적 교양인이었다. 그 또한 당대 최고의 문명을 뽐내는 미국의 워싱턴에 오래 머물면서 미국의 대통령 두 사람(시오도어 루스벨트, 윌슨)과 친교를 맺었다.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또한 김춘추처럼 국제적 감각을 자주정신으로 포장한 이였다.

그런 李承晩이 建國을 주도한 것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進路를 세계의 先進主流 세력과 연결시킨 행운이었다. 김춘추처럼 위대한 국제적 교양인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세계의 흐름을 응시하면서 다진 경륜을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펼 수 있었다는 것이 민족의 행운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대한 인물이 그 위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사적 찬스를 갖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승만을 이은 朴正熙 또한 김춘추를 이은 文武王처럼 개방적 자주파였다. 그는 滿軍, 日軍, 한국군을 두루 경험하면서 군사文化를 익히고 만주에서 야망을, 일본에서 국가주의를, 미국에서는 민주적 제도운영의 기술을 배운 국제파였다. 그 또한 이승만처럼 이런 국제성을 자주적 관점에서 흡수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특히 큰 조직을 만들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건설적 지도력을 군대와 외국경험에서 배웠다.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가 경험한 唐, 미국, 일본은 當代의 선진국이었다. 반면에 연개소문, 의자왕, 김일성, 김정일은 기본적으로 국내파였다. 김일성의 외국경험은 전체주의 체제인 중국과 소련 정도였는데, 이는 先進된 생각이 아니라 後進的 생각을 심었을 것이다. 自虐的 역사관을 정책화하여 대한민국을 自滅로 몰고가려 하였던 노무현씨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 여행을 한번도 하지 못하였던 이다. 인간은 어디서 무엇을 배고 배우느냐에 의하여 識見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우리가 韓民族이란 의식을 깔고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민족사의 두 쾌거는 신라의 삼국통일, 대한민국의 建國인데, 두 사건의 主役들이 모두 '세계적 한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인간만이 조국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

대한민국은 아직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를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을 지식인, 진보파로 대우하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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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刊 현대사 교과서의 수정실태: 중화학공업 폄하 부분만 일부 수정

李知映


조갑제닷컴은 2008년 11월 ‘거짓과 왜곡’이라는 책을 통해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 실태를 파헤친 바 있다. 趙甲濟(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거짓과 왜곡’의 머리말을 통해 ‘금성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은 ▲국가정통성 부정, ▲영광을 수치로 폄하, ▲북한정권의 失政(실정)과 惡政(악정) 비호 및 미화, ▲남한 내 좌익 비호, ▲북한정권과 남한좌익에 유리한 용어 사용, ▲햇볕정책 홍보, ▲북한의 핵실험 생략, ▲자료 인용의 편파성, ▲진실을 감추기 위한 말장난, ▲자의적 해석으로 쓰여졌다’고 지적했다.




조갑제닷컴은 이 책 발간과 동시에 신문에 무료배포 광고를 냈고 광고를 본 학부모, 현직교사, 학원강사, 군·경찰 교육관계자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까지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1만여 부를 배포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2009년 3월1일 발행한 제6판 교과서를 가지고 ‘거짓과 왜곡’에서 지적했던 부분을 찾아보았다.




‘거짓과 왜곡’에서 趙甲濟(조갑제) 기자가 ‘학생들에게 조국을 싫어하고,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誤解하고, 선배세대의 위대한 성취를 수치로 여기는 마음을 심어줄 것’을 우려하며 구체적으로 지적한 부분은 <①10월 공산폭동 美化, ②南北분단의 전적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인데 李承晩(이승만)에 떠넘김, ③‘대한민국의 建國(건국)을 국민과 정치세력들이 반대했다’고 記述, ④남한의 성공한 농지개혁 비방, 북한의 실패한 토지개혁을 美化(미화), ⑤북한군의 학살을 ‘反개혁분자 숙청’이라 美化, ⑥반공포로 송환 거부로 휴전이 지연된 것처럼 기술, ⑦‘한국적 민주주의’ 비판, ‘우리식 사회주의’ 美化, ⑧重化學공업 건설을 公害(공해)공장 건설로 폄하, ⑨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 폄하, ⑩금성출판사 현대사 교과서가 말살한 것들>의 총10개 항목으로 교과서 본문 중 13곳이 해당됐다.




①10월 공산폭동 美化

금성 출판사 교과서 260쪽

②南北분단의 전적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인데 李承晩(이승만)에 떠넘김

264~265쪽

③‘대한민국의 建國(건국)을 국민과 정치세력들이 반대했다’고 記述

264쪽

④남한의 성공한 농지개혁 비방, 북한의 실패한 토지개혁을 美化(미화)

322쪽

⑤북한군의 학살을 ‘反개혁분자 숙청’이라 美化

272쪽

⑥반공포로 송환 거부로 휴전이 지연된 것처럼 기술

271쪽

⑦‘한국적 민주주의’ 비판, ‘우리식 사회주의’ 美化

288쪽, 306~307쪽

⑧重化學공업 건설을 公害(공해)공장 건설로 폄하

328쪽

⑨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 폄하

295쪽, 337쪽, 349쪽

⑩금성출판사 현대사 교과서가 말살한 것들

307쪽




이 중 ‘重化學공업 건설을 公害(공해)공장 건설로 폄하’에 관한 부분에 약간이 수정이 있었다. <1970년대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농수산업은 더욱 침체되었다. 당시 중화학 공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공해 등의 문제로 선진국에서 쇠퇴하는 분야였다. 또한 각종 기계나 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고, 공장을 일본 자본으로 건설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자본과 기술에서 미국뿐아니라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갔다>는 부분이 <…공해 등의 문제를 일으켜, 당시 선진국에서는 구조 조정이 전개되던 분야였다…>로 변경되었다.




그 외에 ‘금성 출판사 현대사 교과서가 말살한 것들’로 지적했던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95~1998년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사건, 북한의 강제수용소 실태와 공개처형, 수십만의 탈북자 발생, 2006년 북한 핵실험 사건>은 여전히 교과서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다. 아웅산 폭탄 테러와 대한항공 폭파사건만 한국 근현대사 연대표에 ‘아웅산 사건’과 ‘KAL기 피격 참사’로 표기됐다.



李知映(조갑제닷컴)






[금성교과서 讀後記]

'대한민국의 얼굴에 침을 뱉고, 김정일의 얼굴에 화장을 해준 참 나쁜 책'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 금성교과서는 검정을 취소시켜야

-왜곡이 워낙 많아 부분적 수정으로는 문제해결이 안 된다.



금성출판사에서 낸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검정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조국을 싫어하고,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誤解하고, 선배세대의 위대한 성취를 ‘수치’로 여기는 마음을 심어줄 것이다. ‘대한민국의 얼굴엔 침을 뱉고,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얼굴엔 화장을 해준 교과서’이다.
좌편향된 관점에서 쓰여진 이 교과서로 공부하면 한국의 現代史뿐만 아니라 每事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교과서(2007년판 분석)의 現代史 부분은 이렇게 쓰여졌다.

1. 국가정통성 부정: 대한민국 건국 과정의 정당성과 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철저히 부정한다. 민주화의 물질적 토대를 놓은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정부의 산업화를 일방적으로 비방한다.
2. 영광을 수치로 폄하: 대한민국 60년의 대표적인 업적을 골라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건국, 농지개혁, 중화학공업 건설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한국의 생명줄인 韓美동맹을 생략하고 서울올림픽을 거의 무시했다.
3. 북한정권의 失政과 惡政 비호 및 미화: 북한정권의 남침, 도발, 핵개발, 테러, 학살을 축소, 은폐, 말살, 비호, 왜곡함으로써 독재성을 희석시킨다. 북한정권에 불리한 탈북자 사태, 大飢僅(대기근), 아웅산 테러, 외국인 납치, 대한항공기 폭파,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생략했다.
4. 남한 내 좌익 비호: 남한 좌익들이 일으킨 폭동을 민중봉기로 부르고 이들이 자행한 학살을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1980년대 주사파의 대두를 생략했다.
5. 북한정권과 남한좌익에 유리한 용어 사용: 공산폭동을 민중봉기, 양민학살을 ‘숙청’, 김일성 전체주의 독재를 ‘유일지도체제’라고 표현한다.
6. 햇볕정책 홍보: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면서, 金大中이 김정일에게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를 불법적으로 송금한 뒤 평양회담을 할 수 있었다는 점과 對北 퍼주기 및 6·15 선언의 反헌법성을 생략했다.
7. 북한의 핵실험 생략: 2007년판에서도 2006년 10월에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을 기술하지 않았다.
8. 자료 인용의 편파성: 북한정권에 유리하고 대한민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자료를 게재했다. 북한정권 비판은 형식적이고, 대한민국을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자료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소개했다.
9. 진실을 감추기 위한 말장난: “1970년대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농수산업은 더욱 침체되었다”(공업과 농수산업이 다 같이 발전했다), “북한은 지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소유권은 국가가 갖고 경작권만 주었다가 나중에 협동조합으로 이전)고 왜곡했다.
10. 자의적 해석: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개발과 반공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단정했다<박정희는 한번도 정권의 정당성에 懷疑(회의)를 가져본 적이 없다>.



▶결론: 이 책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심어 북한정권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 하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불온문서 수준의 이런 책이 교과서로 채택된 과정과 집필과정에 대해선 국가차원의 조사(필요하다면 수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관된 의도와 시각으로 쓰여진 이 책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해결할 수 없다. 국가는 교과서 검정을 취소하여야 한다. 집필자들이 敎科部의 수정권고를 거부했으므로 법에 따라 검정을 취소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





2.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10월 공산폭동 美化

-정당한 민중봉기를 武力으로 진압한 것처럼 역사 날조



<1946년 9월에는 미 군정의 사회·경제정책에 반발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들의 총파업은 다음 달 대구 등 여러 곳의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된 봉기는 경상도 일대로, 다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수십만 명의 민중들은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러한 봉기는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체들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260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교과서의 내용이 거의 전부 그러한 것처럼 위의 기술은 反국가적-反사실적 관점에 서 있다. 10월 폭동은 민중이 주동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세력이 일부 민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流血(유혈)사태였다.
‘민중봉기’란 표현은 폭동주동세력인 공산당을 美化하는 표현이다. ‘봉기’는 의로운 항거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10월 폭동 주도세력이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법질서 회복을 위하여 진압에 나섰던 경찰의 武力性(무력성)을 강조하였다. 마치 평화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한 것처럼 쓰고 있다.



恩人들을 미워하고 원수들을 동정하게 만들 교과서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며”라고 운운하여 공산당 세력의 요구가 정당하고 진실된 것인양 美化했다. 이런 요구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을 폭동에 끌어들이려 선동한 것이지, 진심으로 원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에서 공산당 세상이 되어 실시한 토지개혁은 地主의 땅을 빼앗아 국가가 독점하도록 한 것이었다. 토지개혁으로 민중은 자기 땅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10월 폭동에 가담했던 민중이 과연 이런 토지개혁을 원했을까?
따라서 위의 기술은 대한민국 建國과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던 공산당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이런 역사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미군과 경찰과 우익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경찰·우익은 대한민국이 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금성출판사 교과서로 공부하면 우리의 恩人들을 미워하고 원수들을 동정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主流가 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을 양산하는 교육이다. 反인간화 교육인 것이다.
이런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교육 공무원들을 가려내어 반드시 처벌해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이다.



[자료] 현장에서 본 대구폭동
金桂澈(김계철)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越北(월북)하여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4년에 44년 만에 귀향했다.
그는 대구사범 선배 박정희 형제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건의 내막을 소년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특별하게 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김 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 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 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담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 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흰 가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써먹은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음이 확실하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좌익 극렬 세력은 동족을 상대로 한 살육의 祭典(제전)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의 동족상잔의 과정에서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式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加虐(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해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 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타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 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50년’).”
이날(10월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박정희 一家가 한때 살았던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 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전신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1946년 10월 13일자).”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가 주동한 구미폭동은 위에 묘사된 살육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구시보>정치용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선산군 民戰(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조직) 사무국장이자 선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구미에 있는)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 서장에게 전 기능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金聖東(김성동·前 통일원 비상계획국장) 소년은 경찰서 옆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구경삼아 거리로 나왔다. 폭도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을 둘러메고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종술 경사가 경찰서 뒤편 철조망을 넘다가 곡괭이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日帝 때 기마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민전간부 김정수가 무기고를 열고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좌익폭도가 처음으로 쳐들어간 곳은 대성당 약방 주인 송대헌의 집이었다. 폭도들은 송씨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더니 기름통을 가져와 2층 건물 현관에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려는 찰라 “야, 이놈들아!”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송대헌의 아들 송재욱은 구미초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이 사건을 목격했다). 朴相熙였다.
“누가 이 집에 불 지르라카더노. 어느 놈이 시켰노. 앞으로 투쟁과업을 계속하다가 보면 부상자들도 나올낀데 약방을 태우면 느그들은 어데 가서 약 바를 거야.”
청년들은 호랑이 같은 박상희의 호통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약방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송재욱 선생은 학교에서 노래 가르치지 느그들한테 욕 가르치나. 이 할아부지(宋秉根 목사)는 독립 운동했는데 느그들한테 뭐 잘못한 거 있노. 그런데 왜 불 질러. 집에 안 가나.”
박상희는 청년들이 흩어지자 멍하니 서 있는 송재욱을 향해서 야단을 쳤다.
“조사부 차장은 여기서 뭘 하노. 신분도 안 밝히고.”
송재욱은 광복 직후 박상희의 지도하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의 조사부 차장이었다.





3. 南北분단의 전적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인데 李承晩에 떠넘겨



대한민국 건국과 북한정권 수립의 결정적 차이는 대한민국은 절대 다수 국민이 참여한 선거에 의하여 세워졌고, 북한에선 스탈린의 지령에 의하여 북한정권이 제조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民意에 의하여, 북한은 제국주의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법률적 정당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대한민국 헌법에 북한정권이 우리 영토의 일부인 북한지역을 不法점거한 反국가단체로 규정된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선거를 통하지 않고 멋대로 정권을 세운 행위 자체가 반란이다.
한국인은 李承晩의 지도하에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국가를 세웠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공산독재정권을 세웠다.
左편향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는 이런 본질적인 차이점을 무시하고 오히려 북한정권에 유리한 記述을 했다.
남북한의 분단을 가져온 최초의 결정적 조치는 스탈린이 1945년 9월20일 소련의 제1극동군 사령관에게 보낸 7개항의 비밀지령이었다. 이 문서는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에서 공개되었다. 비밀지령 제2항은 “북한에 反日的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이었다. 즉 북한에 단독 정권을 수립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로써 남북분단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남북분단은 소련과 김일성이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과 李承晩과 미국은 소련과 김일성이 북한에서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할 수 없이 建國을 결단하게 된다. 남북분단은 남한, 미국, 李承晩이 책임질 일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 남과 북이 공동으로 책임질 일도 아니며, 순전히 소련과 김일성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금성교과서는 분단의 책임을 李承晩쪽에 넘긴다.
이 교과서는 스탈린이 북한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한 날짜를 보여주는 이 중요한 문서를 묵살한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스탈린의 이 지령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1945년 10월 북한에선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성립되고,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위원회가 설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토지개혁을 강행한다. 토지를 地主로부터 무상으로 몰수하여 國有化한 다음 농민들에게 경작권만을 나눠주었다. 私有財産을 몰수했다는 것은 소련과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는 선언이었다. 남북분단은 이것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스탈린은 또 김일성,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출제를 하여 필기시험을 치르게 한 뒤 김일성을 정권의 대표로 선택했다. 스탈린은 북한정권의 헌법과 국호까지 지어주었다.
李承晩이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북한에서 이미 공산정권이 기능하고 있던 1946년 6월3일이었다. 이 정읍 발언을 트집 잡아 李承晩이 먼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좌익들의 터무니없는 선동이다. 금성교과서는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였다”고 기술하고, ‘이승만의 정읍 발언’과 ‘김구의 호소문’을 대치시켜 교묘히 李承晩에게 분단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이 책은 북한정권에 이런 면죄부를 준다.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명분을 쌓아가던 북한은 남쪽에 정부가 들어서자, 그 다음 달인 9월초 곧 바로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대의원 선거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유권자들의 95%가 투표에 참여하였던 총선거가 국민들의 반대 속에 치러진 것처럼 조작하고 사실상 기능하고 있었던 북한정권이 대한민국 建國에 대응하여 뒤에 세워진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유엔이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라고 결정한 데 대하여 소련과 김일성이 반대한 것도 대한민국의 建國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 교과서엔 이에 대한 책임추궁도 보이지 않는다.
금성교과서는 대한민국에 남북분단의 책임을 덮어씌움으로써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라는 헌법상의 정통성 규정을 부인한 셈이다. 이런 교과서가 국민세금으로, 국가에 의하여, 국민들에게 가르쳐져선 절대로 안 된다. 국가를 부정하는 교육을 국가가 시키는 것은 자살충동적 自滅(자멸)행위이다.





4. 대한민국 建國을 국민과 정치세력들이 반대했다고?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5·10 총선거).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다. (중략) 국회에선 3권분립과 대통령 중심제,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을 요지로 하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해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
금성출판사에서 낸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2002년 7월30일 교육인적자원부 검정)에 실린 建國 과정에 대한 記述이다. 反국가적이고 무엇보다도 사실과 맞지 않은 악랄한 편향과 왜곡이다.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고 함으로써 절대다수 국민들과 정치세력이 建國을 위한 총선거에 반대한 것처럼 쓰고 있다. 사실은, 절대 다수 국민들과 정치세력이 建國에 찬성하고 선거에 참여했다.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은 북한이 자유선거에 의한 建國을 반대하고 있으므로 우선 남한에서라도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현실적 결단으로 昇華(승화)되었던 것이다. 공산당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에서 투표율이 95.5%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위 교과서 기술의 허위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다”란 표현은 ‘중도세력만’의 ‘만’에서 이 교과서의 필진들이 가진 편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만’이란 용어선택을 통하여 이 선거에 출마한 정치세력이 극소수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은 무엇인가?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은 당시 국내 정치세력의 主流였다. 48개 정당과 단체가 후보를 내어 ‘亂立(난립)’이란 표현도 나왔다. 이들이 현실 정치를 대표하는 세력이었음으로 투표율이 90%를 넘었던 것이다. ‘민중’ 중심 시각으로 쓰여졌다는 이 교과서가 90% 민중의 결단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쓰는 ‘민중’은 진짜 민중이 아니라 ‘노동자 및 농민 계급’을 주축으로 하는 친공적인 세력을 ‘민중’으로 위장하기 위한 용어혼란 전술에서 나온 단어임을 알게 한다.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이 출마하였다>고 써야 할 것을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다>고 기술함으로써 이 교과서는 反대한민국적 관점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이 교과서는 유엔이 이 선거가 공정했음을 인정했다는 사실과 공산세력이 武力으로 방해하였다는 사실을 생략했다. 민족사상 최초로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가 자유민주적 헌법을 만들고 거기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역사적 의미도 생략했다. 자유로운 총선거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기초한다는 점도 물론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자유선거를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북한 정권을 민족사의 이단이자 영토를 불법강점한 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민족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민국가가 절대다수 국민과 정치인들의 반대 속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민족사의 가장 영광된 순간을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할 것이다. 국가정체성에 입각하여 정확한 역사를 배워야 할 학생들이 反국가적 이념에 입각한 편향된 史實(사실)을 배우고 있다.
이런 교과서를 인정해준 김대중 정부下 교육인적자원부는 국가의 의무인 ‘정확하고 긍정적인 역사관 교육’을 포기한 셈이다. 좌파정권에 영합한 이들 공무원이 지금도 정부 안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대해서도 학부모들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순진한 학생들의 미래를 가장 빨리 망치는 길은 부정적 역사관을 심는 것이다.

[자료]李承晩, 김일성을 매국노로 규정: 건국기의 3大 연설 분석
<공산당 韓人들에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이니 改過回心(개과회심)해서 全민족이 주장하는 국권회복에 우리와 같이 合心合力하면 우리는 前過(전과)를 잊어버리고 다같이 선량한 동포로서 대우할 것이요, 회개치 못하고 국가를 남의 나라에 附屬(부속)시키자는 主意로 살인, 방화, 파괴 등을 자행할진대 國法으로 준엄히 처단할 것이니 자기도 살고 남도 살아서 자유 권리를 같이 누리도록 法網(법망)에 복종해야 될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살려면 이러지 않고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李承晩의 국회 개회사)>
<以北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附屬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國權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全민족의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反逆의 행동을 버리고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賣國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초대 대통령 취임사)>
<거의 1000만의 동포가 우리와 민국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요(건국 기념식 축사)>
위에 인용한 李承晩의 연설에서 그의 對北觀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공산당과 북한동포를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공산당이 ‘全민족의 원수’인 이유는 이들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는 賣國주의자’이기 때문이다. 李承晩은 金日成 집단을 철저하게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고 있기 때문에 建國을 방해한 책임도 유엔대표단의 入北을 막아 남북한 총선거를 방해한 소련에 따지고 있다.
李承晩이 자신의 3대 연설에서 ‘소련의 꼭두각시’ 金日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소련을 질타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金日成의 생리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金日成이 서구의 좌파들처럼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말하자면 ‘애국적인 공산당’이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李承晩은 金日成이 남(소련)의 선동을 받아 조국을 소련에 附屬시킴으로써 제 나라를 결단내는 事大賣國(사대매국)세력이라고 正確無比(정확무비)하게 지적했다.
북한 공산당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통찰력이 李承晩을 자유세계의 대표적인 反共투사로 만든 것이다. 李承晩의 이 통찰은 그 뒤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다. 金日成은 스탈린의 세계전략에 노리개로 동원되어 제 조국을 피바다로 몰고 가 300만의 목숨을 끊었고, 그의 아들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란 남의 논리, 남의 선동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일신상 편의를 위해서 300만 명을 굶겨죽였다. 남(그것이 소련이든 外製 사상이든)을 위해서 조국과 國益을 판 金日成 부자는 事大賣國주의자인 것이다.

[자료] 李承晩 독립투사 내각, 김일성 非命橫死 내각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 副相 金武亭(처형), 최고회의 의장 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非命橫死(비명횡사) 내각인 셈이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가,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反共反日을 國是(국시)로 삼다시피 한 李承晩 대통령이 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 전체의 행복을 어느 체제가 발전시켰느냐로 판가름 낸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복지, 안전, 자유가 있어야 한다. 金日成 체제는 출발부터 피비린내를 내면서 민족의 재앙이 되었고 李承晩 대통령은 조국을 위하여 고투한 분들을 모았다. 그 차이가 오늘날의 남북한 차이인 것이다.





5. 남한의 성공한 농지개혁을 비방, 북한의 실패한 토지개혁을 美化

‘대한민국의 얼굴에 침을 뱉고, 북한정권의 얼굴을 화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과서’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왜곡·조작이 심한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는 李承晩의 역사적 업적인 농지개혁을 비방하고 북한정권의 역사적 대실패인 토지개혁을 미화했다. 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었다는데, 왜 300만 명이 굶어죽었지?”
이 교과서는 李承晩 대통령의 농지개혁을 일방적으로 비방한다.
<농지개혁으로 지주는 사라지고 상당수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일단 평가를 한 다음엔 말도 안 되는 비방을 가했다.
<그러나 개혁이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일부 지주들은 땅을 팔아치워 농지대상이 되는 토지는 크게 줄었다. 토지대금을 생산물로 납부해야 하는 제도는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하였다. 결국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팔고 소작을 하거나 도시로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설명하면서 <‘민주개혁’이란 이름 아래 ‘무상 몰수, 무상 분배’였다. 총독부, 일본인,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토지는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몰수했다. 몰수한 토지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은 월남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부작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책은 유달리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강조하는데 법치국가인 한국이 공산독재 정권처럼 하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이다. 월남한 사람들을 토지개혁과 연관시켜 마치 친일파들이나 지주들이 南下(남하)한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려 했다.
농지개혁 연구의 권위자인 金聖昊 씨(前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 연구원)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소작권만을 주었기 때문에 無償(무상)이었던 것이다>고 했다. 6·25 남침 전쟁 이후 북한정권은 농민들이 경작하던 농토를 전부 협동조합으로 집단화하였다.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 결과는 평화시에 300만 명이 굶어죽은 1990년대 중반의 대기근 사태였다. 북한이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면 집단화된 농토를 개인들에게 나눠주는 길이 있을 뿐이다. 중국은 그렇게 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李承晩의 농지개혁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
1. 地主계급을 없앴다.
2. 6·25 남침 때 농민들이 공산군 편으로 넘어가지 않게 했다.
3. 92%가 自作農化되었다. 생산성이 높아졌다.
4. 地主에게 지급된 地價증권을 헐값에 매입한 자본가들은 이 증권으로 정부가 拂下(불하)하는 산업시설을 인수하여 공장을 돌리게 되었다. 토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농지개혁을 북한의 실패한 토지개혁보다도 낮게 평가하고 전교조 교사들은 이 교과서로 그렇게 가르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법치체제에 앙심을 품지 않고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짓거리들이 학교에서 국민세금을 써 가면서 학생들을 향해서 자행되고 있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생실패자가 될 것이다. 금성교과서는 한국의 영광만 선택적으로 집중공격하여 수치로 만들려 하는 記述방향을 갖고 있다. 이는 좌익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려고 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자료] 李承晩의 농지개혁-金日成의 의표를 찌른 한판 승부
공산당이면 무조건 蛇蝎視(사갈시)하던 李대통령이 공산당 출신의 曺奉岩을 제1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바로 한민당을 제압하기 위한 말 없는 포석이었다. 이런 경우가 ‘人事는 곧 萬事’이다. 그리고 한민당측의 지연술책을 눈치 챈 李대통령은 6·25 발발 3개월 전에 농림부에 대해 비록 관계법령이 마련되지 않아 “추진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농지개혁지침’ 1950년 4월)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의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전인 3월24일에 이미 농지 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10일부터 농지분배 통지서(조선일보, 1950년 4월26일)가 발급되었다.
李대통령의 분명한 월권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金日成에게 인민혁명의 기회를 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李대통령의 초법적인 지령은 개혁을 지연시켜 온 한민당과 金日成의 의표를 찌른 한판 승부였다.
정부의 분배면적은 소작지 145만 町步(정보)의 절반도 못되는 60만 정보여서 농지개혁을 모두 실패라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未분배된 소작지는 지주들이 임의로 처분했으며 그 처분地價도 정부의 분배地價(평년 수확량의 1.5배)와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다. 결론적이지만 정부 분배에 의하든 지주의 임의처분에 의하든 自作化(자작화)되었음에는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이 결과 全농지의 92%가 自作化되었다. 이 성과는 일본과 대만의 개혁실적을 능가한다. 농민들이 “李대통령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고 좋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有償(유상)개혁이었더라도 소작 地主制는 철폐되었다. 남한 학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이 有償이었다는 이유에서 북한측 개혁보다 못한 것처럼 여겨 왔지만 실은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소작권만을 주었기 때문에 無償이었던 것이다. 진상을 알아야 한다.
6·25 남침으로 부산으로 피란간 정부가 피란地主의 생계대책으로 地價증권의 매매를 허용하자 부산 광복동 거리는 하루아침에 ‘증권거리’로 변모했다. “증권사려”를 외쳐대는 증권행상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하나뿐이던 증권회사가 14개로 늘었다. 생활난에 쪼들린 지주들의 증권투매로 그 값은 액면가액의 4분의 1로 폭락했다. 북한의 지주층은 金日成의 숙청으로 몰락했지만 남한의 지주층은 6·25로 몰락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귀속재산(각종 산업시설)의 拂下(불하)에 地價증권을 사용하면 액면가액 전부가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사업가들은 폭락한 地價증권을 차곡차곡 사 모았다. 地價증권은 地主들에게는 휴지에 불과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자금을 마련한 황금의 계란이었다. 이것이 바로 토지자본의 산업화였고 또한 일본인 소유의 귀속시설을 한국인 소유로 전환시킨 이전 과정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를 출범시킴에 필수불가결인 자본의 원시축적 과정이었다. 부산 광복동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제1번지였고 그 탄생지였다. 한국 자본주의는 식민지 경제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戰亂(전란)의 격동 속에서 自作農 체제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였다.<글/ 金聖昊(前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6. 북한군의 학살을 ‘反개혁분자 숙청’이라 美化

대한민국의 지난 60年史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는 6·25 때 있었던 학살에 대해서도 북한에 유리하게 적고 있다.
<전쟁 초 승리를 거둔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령의 개정과 같은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을 숙청했다는 뜻이다. 개혁은 좋은 의미를 띤다. 즉 좋은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숙청’은 肅淸으로서 ‘엄하게 다스리어 잘못이나 그릇된 일을 치워 없앰’(금성출판사 국어사전)이란 뜻이다. ‘감행’이란 표현은 좋은 일을 용감하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교과서는 결국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서 ‘북한군이 反개혁 분자들을 정리-응징한 좋은 일’로 기술한 셈이다. 실제로 학살은 북한군보다 남한 내 좌익분자들에 의하여 더 많이 이뤄졌다. 이 교과서는 북한군의 학살을 숙청이라 미화하여 기술하고, 남한 내 좌익에 의한 집단학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교과서는 국군에 대해선 어떻게 기술하나?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게 되자 반대로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잇따랐다>
북한군의 학살을 ‘숙청’이라고 미화한 이 교과서는 국군과 유엔군의 행동에 대해선 ‘처형’이라고 표현했다. 국군을 폄하하고 敵軍(적군)을 비호하고 있다. 구체적인 학살 건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이 교과서는 국군에 불리하게 기술했다. <남한에서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고,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고 하여 국군에 의한 처형에 대해서 더 자세히 길게 적었다. 학생들은 이 교과서를 읽고 남침 戰犯(전범)집단인 북한군에 대해서보다는 국군에 대해서 더 나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의 1차적인 책임자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이들에게 협조한 남한 좌익들이었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좌익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과 군인가족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명부로 확인되는 수치에 의하면 북한군과 남한 좌익은 8만661명을 납치해갔고 5만9964명을 학살했다.

[자료] 납북자 8만661명 피살자 5만9964명
<月刊朝鮮>金成東 기자가 2002년에 찾아낸 문서가 있다. ‘大韓民國 政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6·25事變 被拉致者(피납치자) 名簿(명부)>. 이는 李承晩 정부가 서울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拉北者(납북자) 명단을 작성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다. 이 문서가 밝히고 있는 전국의 拉北者 명단은 8만661명이다. 남자가 7만9145명, 여자가 1516명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만8330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1만5871명), 강원도(1만422명), 충청남도(9972명), 경상북도(7483명), 전라북도(7013명), 충청북도(6166명), 전라남도(3554명), 경상남도(1805명), 제주도(45명) 順이다.
납북자의 절반 이상이 서울, 경기, 강원 등 중부 이북 지역에 집중돼 있다. 全지역에서 납치된 남성의 숫자가 여성에 비해 월등히 많지만 가장 적은 인원이 납치된 제주지역만은 반대다. 총 45명의 被拉者(피랍자) 가운데 여자가 30명으로 남자 15명의 두 배다.
이 <6·25 事變 被拉者 名簿>가 작성된 시기는 1952년 10월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6·25 사변 중 被拉者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3년 발행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拉北者 수를 8만453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 統計年鑑은 休戰 이후에 발간된 것이다. 被拉者 名簿의 拉北者 수가 1952년 발행 統計年鑑에 기록된 숫자에 비교적 근접해 있고 休戰 이후에 발행된 統計年監의 拉北者 수가 증가한 점을 감안하면 1952년께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인정하는 6·25 事變 납북자 수는 8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6·25 事變 被拉者 名簿>는 현재 통계청 대전 청사內 <통계전시관>에 복사본이 전시돼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다. 2003년에 <月刊朝鮮>이 명부를 책으로 발간했다.
6·25 납북자 8만여 명 名簿(명부) 발견(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이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피살자 명단도 발견됐다. 6·25 피살자 名簿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가 납북자 名簿를 찾는 과정에서 함께 발견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名簿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번에 발견된 피살자 名簿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도 동일한 문건이 소장돼 있으며 통계청도 피살자 名簿의 일부인 서울시와 경기도 지역의 피살자 명단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표지에 적힌 이 名簿의 정식 명칭은 <6·25 事變 被殺者 名簿>이며 작성 주체는 공보처 통계국으로 돼 있다. 작성일은 1952년 3월31일이다.
名簿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名簿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市道별로 구분한 다음 郡이나 區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은 姓氏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凡例(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軍警(군경)을 제외한 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라남도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었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에 가까운 7914명이다.
靈光郡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최근 발견된 6·25 사변 납북자 전국 명단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견된 6·25 피살자 5만9964명의 명단이 실린 名簿 외에도 인원이 추가된 새로운 名簿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李錫圭·이석규)이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에 피살된 李哲承(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은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전주교도소 등에 문의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알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아버님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볼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6·25 당시 전남 영광군의 피살자 2만1225명의 명단은 A4 용지 772장 분량이었다. 피살자 명단을 꺼내 훑어보았다. 명단을 입수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한 살, 두 살, 세 살… 아이들의 죽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대략 수를 세어 보았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호남지역 향토사학자인 金井昊(김정호) 향토문화진흥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6·25 사변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 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九岫山(구수산·해발 351m) 주변 백수면과 염산면에서 민간인 피살자가 많았습니다. 영광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은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진영 모두 그로 인한 희생도 컸을 겁니다.”





7. 반공포로 송환 거부로 휴전 지연?

미국은 인도주의 원칙을 견지하였고 李承晩은 反共포로 석방이란 승부수로 韓美동맹을 만들었다.
금성출판사刊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휴전을 지연시킨 포로 송환 문제’라는 제목으로 유엔군측이 반공포로를 돌려보내려 하지 않은 것이 지연의 이유인 것처럼 썼다. “제네바 협약은 ‘자동송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고 쓴 이 교과서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기술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美 국부부 간부들은 이 前例(전례)를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 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기간 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 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發顯(발현)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몰래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 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李承晩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韓美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毛澤東, 金日成,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금성교과서는 반공포로 석방과 韓美상호방위조약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李대통령이 무모한 행동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은 李承晩 대통령이 韓美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던진 위대한 승부수였던 것이다.
수년 전 <毛澤東 秘話(비화)>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는 러시아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당시 불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 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은 약 40만 명이며 연 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공식발표로는 전사자가 15만2000명이지만 鄧小平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숫자가 40만이란 것이다.

[자료] 6·25 秘話/ 밴 플리트 장군 아들의 戰死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고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미력)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우리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 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 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 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 기지와 통화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 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자료]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김일성
일본에서 번역되어 나온 <조선전쟁의 수수께끼와 진실>(草思社)이란 책의 副題(부제)는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기밀電文에 의하다’이다. 著者는 러시아의 아나톨리 바시리에비치 토루코노포. 그는 모스크바 대학의 국제관계대학 학장이자 동양학과 교수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도쿄에 있는 法政대학 법학부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씨이다. 그는 해설을 통해서 6·25전쟁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다. 시모도마이 교수는 소련은 남침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金日成이 스탈린에 대해서 남침 계획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해도 냉담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미국과 합의하여 38도선을 기준하여 남북을 분할 점령한 사실을 중시했다고 한다.
1949년 9월24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북한이 남한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이런 방침을 바꾸게 된 계기는 毛澤東이 중국을 통일한 사건이었다. 소련은 모택동이 대만과 홍콩까지 병합하려고 무기 원조를 요청했을 때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이런 도발이 미국을 자극하여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걱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독일로부터 기습을 당해 겨우 逆轉勝(역전승)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2000만 명의 소련인들이 죽었다. 스탈린의 가장 큰 외교목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는 일이었다.
毛가 중국의 통일에 성공하여 공산중국이 등장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전쟁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김일성을 지원할 수 있는 튼튼한 배후기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남침 허가를 내려달라고 보채는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보증을 받아오면 허가해 주겠다고 했다.
모택동도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했다. 6·25전쟁을 일으킨 데는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 가장 중요한 원흉 역할을 했던 것이다. 6·25 남침 전쟁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판세가 뒤집어지면서 북한정권의 멸망으로 기울 때 김일성은 스탈린의 뒷받침을 받아 모택동의 중공군을 끌어들여 통일의 기회를 좌절시키는 민족반역적 행동을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戰線(전선)은 1951년 초부터 38선을 따라 교착된다. 그 뒤 2년 남짓 지리한 高地戰이 계속되었으나 전선은 거의 변하지 않고 人命 손실만 늘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일성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매달렸다. “우리쪽 피해가 너무 크니 빨리 휴전하게 해 달라”고. <조선전쟁의 수수께끼와 진실>을 읽어보면 스탈린이 모택동과 김일성의 호소를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하게 하여 막대한 出血을 유도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등장한다.
이 책의 번역자 시모도마이 노부오 교수는 “조선전쟁을 둘러싼 중국과 소련, 북한의 관계는 많은 경우 수직적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 모택동에게 지령을 내리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동지 필리포’의 가명을 써가면서 스탈린은 전투의 상세한 指導(지도)부터 휴전조건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깊게 간여했다”고 썼다.
<스탈린이 모택동과 김일성으로부터 停戰(정전)의 요구가 나오더라도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책이 확인한 중요 부분이다. 1952년 가을, 이 일 때문에 訪蘇(방소)한 周恩來에 대해서 스탈린이 답한 부분은, 파워 폴리틱스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이 될 만한 내용이다>
스탈린의 계산은 단순 명쾌했다. 미군을 주력으로 한 유엔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高地戰을 질질 끌어주는 것이 소련의 國益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전선에 붙들려 다른 데 신경을 덜 쓰는 사이에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 준비를 착실히 할 수 있고 다른 지역에서 미국의 예봉을 꺾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스탈린을 전쟁에 끌어들였지만 나중엔 스탈린이 그 김일성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 소모적인 高地戰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을 이용하려다가 이용당한 것이다. 이런 김일성의 바보짓으로 해서 한국, 미국, 중국인들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당했다. 6·25 전쟁 중 김일성은 스탈린의 완전한 꼭두각시였다는 이야기이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마자 소련 공산당은 종전의 스탈린의 방침을 바꾸어 한국전쟁을 조속히 휴전으로 가져간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 뒤 넉 달 만에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자료] 모택동에게 보낸 김일성의 애걸복걸 편지
중국 요녕성 단동에 있는 抗美援朝(항미원조) 전쟁 기념관에는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에게 보낸 자필편지가 있다. 인천상륙전쟁 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전면 붕괴의 위기에 처한 김일성은 편지 말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써는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갓치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이상과 갓튼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제이하게 되니 이에 대한 당신의 회답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1950. 10. 1. 평양시>




8.‘한국적 민주주의’는 비판, ‘우리식 사회주의’는 미화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북한정권을 감싸는 것을 집필의 주요한 방향으로 설정한 것 같다. 이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를 두들겨 패고, 反국가단체를 비호하는 짓이다. 자유민주체제를 비판하고, 전체주의 체제를 미화하는 짓이다. 이런 교육은 학생들의 善惡 구분 능력을 마비시킴으로써 장래에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생기도록 할 것이다.
예컨대 이 교과서는 1972년 등장한 유신체제에 대해서 朴正熙를 맹공격한다.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압적인 통치에 나섰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횟수의 제한도 없어져 영구 집권이 가능하였다. ‘긴급 조치’라는 초법적인 권리를 부여하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독재 체제로 나아간 것이 유신체제였다>
이 교과서는 유신체제보다 수백 배나 독재적인 김정일의 권력세습 과정 기술에 있어선 일체의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자연히 북한권력은 김정일에게 돌아왔다. 김정일은 이후 3년 동안 공식적인 직책을 이어받지 않은 채… 유훈통치를 시행하였다. 1997년 10월에 김정일은 조선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됨으로써, 권력승계를 공식화하였다>
권력세습이 공산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왕조체제에서나 있을 법한 전제적인 행태라는 지적도 하지 않았다. 이 교과서는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선 독재체제를 합리화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주체사상과 ‘우리 식 사회주의’에 대해선 전혀 비판하지 않고 북한의 입장에서 기술했다.
<대내적으로는 주체사상에 토대를 둔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하였다.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본적인 힘으로 ‘조선 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운 것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일어날지 모를 사회적 동요를 막고, 북한 내부의 단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교과서는, 북한사람들을 굶주림과 죽음의 길로 몰고 간 소위 주체사상을 사실상 미화하고 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였다”라고 써야 할 것을 “북한 내부의 단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둘러댄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기술할 때 선택했던 ‘독재, 강압, 구실, 영구집권, 초법적인, 탄압’ 등의 용어는 북한 정권 앞에선 사라진다. 이런 비열한 기술은 이 교과서 집필자들이 대한민국의 얼굴에 침을 뱉고 북한정권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기로 작심을 했다는 의심을 정당화한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체제는 언론, 정치자유를 다소 제약하긴 했으나 國力을 국가발전에 집중하게 하였다. 한국은 1970년대에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라는 구호 아래 중화학공업 건설, 自主국방력 건설, 새마을 사업을 통하여 강력한 물질적 기반을 구축했고, 이것이 1980년대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 힘이 되었다. 양심 있는 학자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反민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한편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은 그를 하나님과 같은 우상으로 만들어 내부 개혁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북한의 비극을 낳았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예에서 보듯이 우상숭배하에선 당과 지도자를 비판할 수 없으므로 자체 궤도수정이 불가능하다. 금성교과서는 역사의 쓰레기를 美化하고 한국이 후진국에서 선진국을 향하여 巨步(거보)를 내딛게 한 민족사상 가장 다이나믹했던 시대를 깎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자료] '나는 박정희란 이름 석자로 족하다'
김일성의 이름 앞엔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시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시며, 세계혁명의 위대한 영도자이시며, 절세의 영웅이시며,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시며,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朴正熙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金聖鎭 씨에 따르면 故박 전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고 한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金 당시 대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朴대통령은 호를 쓴 적이 없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無心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힌 대로 알려지는 바람에 한동안 생일이 아닌 날에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그는 허례허식도 싫어했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해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 朴正熙의 자연스런 眞面目이었다.


[자료] 유신시대에 대한 솔직한 증언
1970년대 유신시대에 기자와 판사로 근무했던 50대 두 분과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유신시대에 언론과 법조계가 朴대통령의 독재권력에 굴종했다느니 인권의 암흑시대였다느니 하는 것은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런 과장은 자신의 비겁을 은폐하기 위한 핑계이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했던 K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기자들은 매일 진실을 전하려고 싸웠다. 부장, 국장과 싸우고 정보부 직원들과 싸웠다. 아침마다 편집부에선 ‘야 이 새끼야, 그러면 니가 와서 편집해’하는 고성이 들렸다. 기사를 삭제 또는 축소해 달라는 정보부 직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문제성 기사를 실어주지 않는다고 기자가 부장, 국장들에게 대어드는 일들이 잦았다. 언론사 社主와 국장과 기자들이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해 진실을 전하려고 애썼다. 정치부에선 야당 정치인들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지명한 유정회 의원들을 홀대했다. 김영삼, 김대중 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야당이 전투적이었기 때문에 언론이 야당에 의지하여 쓰고 싶은 정권 비판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언론이 군대와 정보부·대통령 비판을 제대로 못했다뿐이지 그 이외의 행정부에 대한 비판은 가혹하게 했다. 지금 공무원보다도 당시 공무원들이 기자들을 더욱 두려워했을 것이다.
유신시대 언론자유가 제약된 것은 사실이지만 봉쇄되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당시 기자들이 권력에 굴종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언론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 기자들이 싸워서 얻은 것이다.”
한 전직 판사도 같은 말을 했다.
“정보부 조정관이 법원을 출입하면서 시국사건에 대해서 판사들에게 간섭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판사들이 소신을 갖고 밀고 나가면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배석판사 시절에 사형이 구형된 간첩혐의 피고인에 대해서 징역 8년에 간첩혐의는 무죄, 보안법 위반혐의만 유죄를 선고했는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시국사건 이외의 재판에 대해서는 정권으로부터의 압력이 없었다.”

[자료] 朴정권, 全정권 때도 인권 향상 지속
미국의 세계 인권 감시 관찰 기구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는 매년 세계 192개국의 인권상황을 세 등급으로 나눠 발표한다. 기준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자유의 합산이다. 평균 점수가 1에서 2.5점이면 ‘자유’(free), 3점에서 5.5점 사이는 ‘부분적으로 자유’(partly free), 5.5~7점 사이는 ‘자유롭지 못함’(not free)으로 분류한다.
2003년 한국은 ‘자유국가’ 중 3등급인 2점 국가인데 보츠와나, 크로아티아, 멕시코, 몽골, 루마니아, 사모아, 대만, 기아나, 이스라엘, 도미니카 공화국 등 11개국이 여기에 속한다. 무장대치 상황하에 있는 세 나라, 이스라엘, 대만, 한국이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세 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는 나라란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무장대치상황에선 인권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국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선 대단한 것이다.
북한은 이 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한번도 ‘자유롭지 못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유롭지 못한 국가들도 4등급이 있는데 북한은 최악중의 최악인 7점 국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은 1972~73년과 1976~77년 사이 두 번 ‘자유롭지 못한 국가’로 분류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기였다. 이 두 번을 뺀 朴正熙, 全斗煥 통치기간 내내 한국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은 盧泰愚 정권이 들어선 1988년에 처음 ‘자유로운 국가’로 승격했는데 정치적 자유에서 2점, 시민적 자유에선 3점이었다. 점수가 작을수록 자유롭다는 이야기이다.
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는 ‘자유국가’중 한 등급이 올라 2점 국가로 되었다. 위의 통계는 한국의 인권상황이 소위 군사정부 시절에도 말살된 적은 없었으며 부분적 자유는 항상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9. 重化學공업 건설을 公害공장 건설로 폄하

左편향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만 골라서 비방하는 記述(기술) 방식을 취한다. 朴正熙 대통령이 주도한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건설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오늘의 한국 경제는 이때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기반 위에서 기능하고 있다. 정부가 중점 육성한 핵심 업종은 자동차, 제철, 전자, 조선, 기계, 원자력 발전소, 석유화학 공업이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포항제철, 삼성전자, 구미공단, 울산공단, 창원공단, 고리 原電(원전), 여천석유화학공단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지금도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 朴正熙 대통령은 두 차례 석유위기 속에서도 국력을 총동원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어붙였다. 중화학공업 건설이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內實이 튼튼해지고 質的(질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1. 전문人力이 많아지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튼튼한 중산층이 생겼다. 이 중산층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主力이 된다.
2. 自主국방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위산업이 건설되었다.
3. 비싼 수출 품목이 만들어졌다.
4. 세계적 공업국으로 뻗어가는 기반을 만들었다. 工高, 工大를 확충하여 기능인력과 기술인력을 많이 확보했다.
5. 우리나라보다도 앞서 가던 태국, 말레이시사, 필리핀을 추월하는 國力을 갖추게 되었다.
6. 북한과의 대결에서 優位(우위)로 전환했다.
한국을 세계적 경제파워로 밀어올린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해서 금성교과서는 이렇게 폄하한다.
<1970년대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농수산업은 더욱 침체되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공해 등의 문제로 선진국에서 쇠퇴하는 분야였다. 각종 기계나 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고, 공장을 일본 자본으로 건설함에 따라 한국경제는 자본과 기술에서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 갔다>
완전히 생트집이다. 공업화로 인해 농수산업이 못 살게 된 것처럼 썼는데, 공업만 발전한 게 아니라 농수산업도 눈부신 발전을 했다. 공업과 도시의 발전 결과 농수산업 종사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과 같은 시기에 새마을 사업 등 농어촌 소득 증대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교과서는 이 점을 무시하고 “공업이 잘 되면 농수산업은 어려워진다”는 兩極化(양극화) 선동식 黑白 논리에 사로잡힌 기술을 하고 있다.
중화학 공업은 장치산업이지 노동집약산업이 아니다. 1970년대에 한국이 지은 중화학공장은 공해배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한 最新설비였다. 그때 지은 공장들, 예컨대 포항제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구미의 전자회사들이 환경을 보존해 가면서 지금도 잘 가동하고 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지은 浦鐵은 첫해부터 흑자를 보고 자체기술을 발전시켜 일본의 제철회사를 압도하게 되었다. 금성교과서는 ‘對外의존의 深化’라는 낡은 개념에 눈이 멀었는지 한국 기업인들의 위대한 저력을 무시하고 있다. 금성교과서가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성취들만 골라 집중공격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모든 성취를 무효화하려는 음모이다. 이런 反국가적 反교육적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켜 준 공무원들과 이 불온문서 수준의 글을 쓴 필자들에 대해선 반드시 법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10. 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도 폄하

-잘한 일일수록 먹칠하는 反교육적 교과서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全斗煥 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전면적인 부정을 하고 있다. 제목도 ‘전두환 정부의 강압 정치와 저항’, ‘전두환 정부의 국민 회유책’, ‘6월 민주 항쟁, 국민의 힘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로 긍정적인 게 없다. 全斗煥 대통령의 부정할 수 없는 공적인 單任약속 실천, 6·29 선언에 의한 직선제 개헌 수용, 세계최고의 경제성장률, 물가안정, 무역흑자, 서울올림픽 유치와 준비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盧泰愚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인 북방정책에 대해서도 악의적으로 썼다.
<1980년대 말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노태우 정부는 이들 국가와 적극적으로 수교하여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북방정책은 소련, 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졌다>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방정책을 편 것이 아니고 세계사의 전환점을 맞아 서울올림픽으로 다진 인맥과 지식을 활용하여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힌 것이 북방정책이었다. 1992년의 韓中수교를 계기로 중국시장이 한국경제의 생명줄로 변한 사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정적 평가를 교과서가 하고 있다. 수교 16년 만에 韓中무역액이 韓日, 韓美무역액을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 된 것도 관심이 없다. 학생들에겐 조국이 잘 된 것을 칭찬해 주어야 하는데 잘 한 것마다 골라내 먹칠을 하는 이 교과서는 지극히 反교육적인 책이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모든 국민들이 뜻을 모아 성공시킨 금자탑이었다. 서울올림픽은 국내의 민주화와 선진화에 기여했고, 韓民族의 새로운 활동공간을 연 북방정책의 기초를 놓았으며 동구공산권 붕괴의 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성공한 대목일수록 더욱 집요하게 비방한다는 원칙을 세웠는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
<국민을 하나로 묶어서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국제사회에서 정권의 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스포츠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무허가 가옥과 도시 노점을 대대적으로 철거하자 이에 저항하는 생존권 투쟁이 일어났다>


[자료] 수치가 말하는 全斗煥 정권의 실적
오늘날 한국에서 識者(식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중에는 全斗煥 정권을 변호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주도한 소위 역사재판에 의하여 全斗煥 정권의 출범 과정은 反헌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 판결에 대한 異見도 많다. 全斗煥 정권의 출범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이 정권이 남긴 實積에 대해서는 異見이 적다. 수치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動機(동기)보다는 결과를 重視한다. 객관적 수치로 나타나는 全斗煥 정권의 실적이 역사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朴正熙 정권 마지막 해와 全斗煥 정권 마지막 해의 비교
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 개 국가 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對外자산 253억 달러. 1989년에 純(순)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19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의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강국을 예비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풍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反證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동시에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했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
그에게는 물론 12·12사태의 책임이 있고, 비자금 모집의 과오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년간 백담사 귀양,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 과오를 한쪽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경제적 성공과 튼튼한 안보, 그리고 단임실천 및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개헌이 핵심)과 서울올림픽 성공을 놓으면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


11. 금성출판사 역사 교과서가 말살한 것들

‘대한민국의 얼굴에 침을 뱉는 참 나쁜 교과서’라는 평을 듣는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의 현대사 기술에는 꼭 들어가야 할 사항들이 보이지 않는다. 1983년 10월9일 북한정권이 공작원을 미얀마 랭군으로 보내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는 全斗煥 대통령 일행을 노려 폭탄테러를 가한 사건을 빼먹었다. 이 사건으로 17명의 장차관급 인사들이 죽었다.
이 교과서는 이 사건뿐 아니라 1987년 11월29일의 대한항공 폭파 사건도 쓰지 않았다. 김정일의 친필 지시를 받은 김현희-김승일組가 귀국길의 중동근무근로자들이 탄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를 폭파시켜 115명을 죽게 한 사건이었다. 이 테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자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북한정권은 미국에 의하여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어 경제제재를 당했다.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 폭파는 김정일 정권의 反민족적, 反인류적 본질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서 그 역사적 파장을 생각할 때 現代史 기술에서 절대로 뺄 수 없다. 이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 연표에서도 대한항공 폭파 사건을 빼버렸다. 아웅산 사건은 들어갔지만 누가 저질렀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이 교과서는 또 1995~98년 사이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사건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의 심각한 경제난과 그에 따른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생존전략 차원에서 점차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개혁 개방을 거부하고 핵개발을 계속하고 군사력 증강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수백만 명을 사실상 굶겨죽였다. 이 떼죽음은 한민족 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참 나쁜 교과서’는 이 민족적 비극을 ‘심각한 경제난’이라고만 하고 넘어간다. 탈북자가 수십만 명 발생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강제수용소에서 20만 명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생략했다. 공개처형이 이뤄지고 있는 점도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가짜 단군릉에 대해선 사진을 곁들여가면서 그럴 듯하게 소개했다. 실패한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대해선 ‘주변국가가 참가한 대규모 개발사업’이라고 과장했다.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있던 시기에 대한 이 교과서의 章(장) 제목은 ‘변화를 모색하는 북한’이다. 변화를 거부하여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정권이 변화를 모색했다니? 이건 완전히 코미디 수준이다.
이 교과서는 왜곡, 날조, 과장한 것도 문제이지만 말살한 부분이 더 문제이다. 북한정권에 불리한 사안들을 묵살한 것이다. 역사왜곡보다 더 나쁜 역사말살을 해놓은 것이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이 전체의 50%나 된다고 한다.


[자료] 고교 교과서의 이상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記述
고등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잘못한 부분은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축소, 왜곡, 비호하는 내용이 많다. 1987년11월29일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서 귀국 중이던 중동파견 노동자 등 115명이 사망한 사건인데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주)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그래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과 아웅산 테러를 다루었으니 나은 편이다. 문제는 記述 태도이다.
<남북한의 관계는 1983년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였을 때, 수도 랭군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폭발사고로 각료를 포함한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 역시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웅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북한정권이 저지른 것임을 애써 감춘 記述이다. 이 내용만 읽어선 누가 범인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사건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쓰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터졌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늘의 고교생들이 이 글을 읽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아웅산 폭파사건’이라고 해야 테러라는 느낌이 들 터인데, ‘폭발사고’라 표현하니 가스폭발사고처럼 들린다. 말장난이 지나치다. 고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진들의 이념적 편향성이 정확한 사실 記錄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론 학생들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심고 있다. 역사관이 잘못되면 국가관과 인생관이 비뚤어져 인생실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료] 金正日이 일으킨 餓死살인-계급살인
북한의 飢餓(기아)사태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종합적인 분석과 자료를 담고 있는 것은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앤드류 S. 나치오스(Andrew S. Natsios)가 쓴 <북한의 대기근>(The Great North Korean Famine: Famine, Politics, and Foreign Policy. 2001.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1994~98년의 대기근 때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북한 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의 구호활동가들은 “우리는 굶어죽은 시체도 보지 못했고 꽃제비도 보지 못했다”면서 언론의 보도를 부인하였다고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연구자들이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조선족 사람은 1998년 5월 북한을 여행했을 때 본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거리는 이상하게도 깨끗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향해 나오지 말고 건물 속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교통경찰관들이 행인들을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느라고 바빴습니다. 내가 왜 저러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적십자 표시가 붙은 자동차가 지나갔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한 노점상 아주머니가 어린이를 구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말리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내 아이 다섯 중 둘이 굶어 죽었습니다. 내가 팔고 있는 이 옥수수는 나에겐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걸 훔치려고 했습니다. 무의식중에 너무 화가 나서 두들겨 패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 구호 단체가 방문하는 날이면 시민들은 건물 안에 있어야 하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외국인에겐 절대로 말을 해선 안 된다는 지시를 당국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대기근 사태 초기에 솔직하게 참상을 알리고 국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필자는 20세기의 5대 기근은 모두 전체주의 국가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1930~33년의 소련 우크라이나 대기근, 1958~62년 중공 대기근, 1984~85년 이디오피아 대기근, 1975년의 캄보디아 대기근, 1990년대 말 북한의 대기근이 그것이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는 대기근이 발생했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를 중시하여 신속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아를 해결하는 자유까지 속박했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 손실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著者 나치오스 씨는 의미심장한 통계표를 하나 제시했다. 북한의 계층구조와 영양불량 상태와의 상관관계이다. 金日成 시절 북한의 계층은 충성분자들인 핵심계층이 전체 인구의 25%, 동요계층 55%, 불만 계층 20%로 분류되었다. 유엔이 1998년에 조사한 북한인구의 영양상태를 보면 약 32%는 영양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 62%는 중간 정도의 영양부족이었다. 약 16%는 극심한 영양 부족이었다.
이 통계는 25%(핵심 계층) 對 32%(영양양호), 55%(동요계층) 대 62%(중간정도의 영양불량), 20%(불만계층) 대 16%(극심한 영양불량)의 대응을 보인다.
이 통계를 보고 하기와라 료(前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 평양특파원. ‘조선전쟁’의 著者) 같은 일부 인사들은 金正日이 불만계층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하여 대기근 사태를 이용했다는 견해를 보였다.
우선 金正日은 핵심계층만이 사는 평양주민들과 당 간부 및 군인들한테는 식량을 공급했고 농민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한테는 식량 공급을 해주지 않았다. 식량배급이 끊겨버린 사람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백성들이었다. 餓死者는 주로 정치적 배경이 약한 이 계층에서 발생했다. 결국 金正日 정권의 계급차별이 힘 약한 사람들을 집단적 餓死(아사)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집안에서도 힘이 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弱肉强食의 정글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지옥의 세월이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와라 료 씨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차별 사회에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힘 있는 사람은 식량을 많이 차지하고 힘 약한 사람은 몫이 작아져 굶든지 죽게 된다. 여기에 지배층이 이들을 고의로 내팽개쳐버리면 敵對(적대)계층에서 집중적인 아사자가 발생한다. 함경남북도와 자강도에서는 적대계층 사람들이 많이 살고 운송수단도 취약했다. 여러 가지가 겹쳐 아사자가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체제의 구조적 생리와 金正日의 의도가 합쳐서 발생한 餓死살인으로 봐야 한다.”
더구나 김정일은 자신의 비자금과 남한에서 올라간 100억 달러로 추정되는 金品을 식량수입에 쓰지 않았다. 국가통치자가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 떼죽음을 몰고 왔다면 학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거짓과 왜곡'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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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민국 無禮之國



사이공 최후의 날에 무너진 한국인들
결정적 순간에 헬리콥터 탑승 줄을 무너뜨린 한국인들의 운명.

월남敗亡 하루 전인 1975년 4월29일 월남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선 철수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美軍 헬리콥터가 미국인, 한국인, 월남인들을 태워 항공모함으로 날랐다. 마당에서 한국인들이 탑승을 대기하고 있었다. 李大鎔 공사가 이들을 통제하였다. 헬기의 활동이 너무 늦어 이러다가는 한국인들이 타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李 공사는 미군 통제관에게 부탁하여 동맹국인 한국인들을 먼저 태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통제관은 우선권을 주겠다고 하면서 '조용히 기다려야지 절대로 뛰어선 안된다'고 신신 당부하였다.
李 공사도 한국 민간인들에게 이를 단단히 부탁하였다.
<한국인 100여 명이 줄 지어 나갈 때까지는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한국인 4열 종대의 선두는 개찰구 약8 미터 지점에 도달하였으며 계속 전진하고 있어서 헬리콥터 탑승은 눈앞에 다가 왔다. 이때 한국인 집결 대기 장소에 남아 있는 인원은 약70명이었다. 이들이 조용히 일어서서 줄을 형성하면서 뒤에 따른다면 한국인과 월남부인 및 자녀들 全員은 안전하게 헬리콥터를 타고, 美 7함대로 후송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 시기에 사고가 발생하였다. 한국 민간인들 일부가 보따리를 들고 일어서더니 뛰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앉아 있던 한국인 약60명이 일제히 일어서서 뛰어나왔다. 미국 통제관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우선순위를 주기 위하여) 4열종대도 와르르 무너지면서 뛰어나왔다. 줄은 삽시간에 모두 없어지고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미 해병들은 헬리콥터 탑승을 중단시켰다>(李大鎔, '사이공 억류기'에서)
이렇게 하여 李 공사 등 세 명의 외교관이 5년간 공산월남에 억류되어 옥살이를 하였고 수십 명의 한국인들도 出國하지 못하였다.
오늘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밤늦게 소음으로 이웃의 잠을 방해하고, 술을 마시고 소란 피우고,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고, 거리에서 소변 보는 사람. 이런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지 않아 작년에 경범죄로 처벌된 숫자가 일본의 44.4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드러나는 한국인의 無禮는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 수가 있다. 북한군이 기습하여 서울을 포위하였을 때, 決死抗戰이 필요한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사이공에서처럼 무질서해지면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다. 무례한 사람들은 법도 지키지 않는다. 무례한 사람들이 많으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국회에서 명패를 던진 의원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들이다. 영국과 미국인들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도 질서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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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禮가 일상이 된 나라에서 살기
대통령이 나서서 무례를 시범하는 나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汎사회적으로 사라진 곳, 無禮가 국가경쟁력을 깎아먹는 나라.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 인간집단이 一流국가를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래 중에 일어서 나가는 관중들


2008년 4월5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내 체육경기장에서 「심수봉 콘서트」가 열렸다. 두 시간 동안 熱唱(열창)한 심수봉씨가 『마지막 노래를 보내드리겠습니다』고 말하고 노래를 부르자 수백 명이 일어나 出口(출구)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출구가 많고 주차장이 넓어 빨리 나갈 이유가 없었다.

심수봉씨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저들이 내 노래를 지루하게 느끼면서 들었다」고 오해했을지 모른다. 그날 심씨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그때 그 사람」, 「나는 여자이니까」 등을 정말 잘 불렀고 관중의 반응도 좋았다. 마지막 노래가 끝나자 앵콜 요청이 나왔고, 심씨는 두 곡을 더 불렀다. 마지막 노래인 줄 알고 먼저 일어서 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앵콜 송을 들었다.

20년 전 파바로티가 이곳에서 공연했을 때는 노래를 부르는 그를 향해서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았다. 주최 측에서 『제발 사진을 찍지 말아 주세요』라고 호소했고, 노래가 잠시 중단되었다.

2008년 2월25일 국회 앞에서 있었던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한 기업인은 이런 불평을 했다.

『李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연주될 때 청중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면서 「야, 가자!」 하니까 주변 사람들의 3분의 1이 나가버렸다. 유세장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연설을 한 뒤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단상에서 각국의 축하사절들이 이걸 보고 한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李대통령은 선진화를 강조했지만 지도층의 예절이 이 정도라면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 없는 국민들이 一流국가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KTX 특실에서 만난 네 사람

2008년 2월23일 밤 9시30분에 부산역을 출발한 KTX 특실에 올랐다. 출발하자마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실내에선 전화를 걸지 맙시다』고 호소하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동대구역에서 20세 전후의 여자 두 사람이 올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 여자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전역까지 가는 동안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친구한테 『좀 조용히 하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전화 말소리는 다소 약해졌지만 통화는 끊지 않았다. 열차에서는 객실 바깥으로 나가서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저 나이에 특실을 탈 정도면 수입이 많은 직장에 다니든지 父母(부모)가 부자일 것이다.

다행히 두 여자는 대전역에서 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0代 후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여성 두 사람이 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실내가 쩡쩡 울렸다. 그 큰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걸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완전히 교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聲帶(성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작게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 번도 경고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야간열차여서 승객들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었다. 두 여성의 목소리는 열차 객실 끝에서 끝까지 들렸다. 충고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저 수준이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 다행히 두 여성은 천안역에서 내렸다.

이날의 문제적 인물 네 사람은 남한테 폐를 끼치고도 폐를 끼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런 어머니는 그런 20代 딸을 만들 것이다.

지난해 6월 후쿠오카의 하카타역에서 신칸센(新幹線)을 타고 혼슈의 남쪽 야마구치縣(현)의 아사에서 내려 나가토로 가는 支線(지선) 기차로 갈아탔다. 운전사 한 사람이 움직이는 한 輛(량)짜리 원맨 카였다. 승객은 거의가 통학하는 중학생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들을 한 시간 동안 관찰해 보았다. 12명 중 책 읽는 학생이 8명, 조는 학생이 3명, 한두 명은 휴대전화기를 열고 이리저리 누르기만 했다. 한 시간 동안 지켜보아도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야기도 조용조용하게 했다.

잠을 자는 학생도 단정하게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본식 예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불법주차

2007년 12월 말 일요일 오후 경기도 안성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한남대교와 1호 터널을 지나 을지로로 진입하는 데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을지로로 들어섰으나 시청광장을 지나는 데 30분을 더 停滯(정체)했다.

교통체증의 원인은 서울시청 광장 주변의 不法(불법)주차였다. 광장에 마련된 스케이트장을 찾는 청소년들을 태우고 온 차들이 광장을 삥 둘러 두 車線(차선)을 차지한 채 서 있었다.

경찰이 이런 不法주차를 일시적으로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집단 不法에 경찰이 손을 들고 말았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한심한 시민이고 경찰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 자녀들에게만 즐거움과 편안함을 선사하겠다는 마음 아닌가?

지난여름에 일본 시모노세키의 뒷골목을 한 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한국의 거리풍경과 다른 모습이 하나 있었다. 거리에 자동차를 세워놓은 모습이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모든 집이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마당이나 건물 속을 주차장으로 내어놓고 있었다. 좁은 길임에도 마음 놓고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남대문시장 앞 도로의 불법주차 차량들.


『화장실에서 구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오피스텔 빌딩 복도 벽엔 이런 요지의 告知文(고지문)이 붙어 있다.

<밤중에 술에 취해서 고층의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구토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토물이 강한 酸性(산성)이고, 벽을 타고 내리면서 더럽힌 것은 청소하기도 어렵습니다. 부디 화장실에서 구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오피스빌딩 엘리베이터 안 스크린에는 이런 당부의 말씀이 나온다.

<문을 열고 깡통이나 병을 바깥으로 던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층에서 아래로 물건을 던지는 것을 자제해 달라니? 금지해 달라고 해야 할 것을 어중간하게 표현한다. 교통방송을 들어보면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데도 「통제」라고 말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분명히 하는 것을 죄송스러워하는 당무자가 있는 한 행패 전문가를 막을 순 없다.

2007년 6월 일본의 혼슈 남단 야마구치縣의 新야마구치역에서 하카타(후쿠오카)로 가는 新幹線 열차를 타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다.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깨끗했다. 종착역에 가까이 왔으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 지저분할 텐테 출발역인 것처럼 청결했다.

나는 KTX 열차를 자주 탄다. 특실 화장실도 출발해서 몇 정거장 지나면 지저분해진다. 승객들도 함부로 화장실을 이용하고 열차 관리자들도 청소를 소홀히 한다. 화장실이 그 모양이니 KTX 전체가 불결해 보인다.

일본의 新幹線보다 40년 늦게 개통했으면 모든 면에서 더 좋아야 한다. 定時 출발률이 더 높아야 하고 더 깨끗하고 더 편해야 한다. KTX는 7~10분 연발착이 보통이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같지 않다. 新幹線은 全구간의 1년분 연발착 시간을 다 모아도 한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화장실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종업원들의 정성, 서비스 정신의 문제다. 그러니 더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할 수 있는 일을 게을러서 안하는 것이니 더 문제인 것이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KTX 특실을 이용하는 이들은 한국의 지도층일 것이다. 그들이 화장실을 깨끗이 이용할 줄 모른다면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까지 올라도 一流국가가 될 수 없다.

여행을 많이 해보니 一流국가의 특징이 이렇게 잡힌다.

1. 화장실이 깨끗하다.
2.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다(일본의 경우 텔레비전 뉴스 앵커들의 목소리가 특히 낮다).
3. 인물을 기리는 銅像(동상)과 기념관이 많다.
4. 사람들이 친절하면서도 절도가 있다.
5. 옷차림이 간소하다.
6. 일을 하는 모습이 즐겁게 보인다.
7. 보통국민들도 글을 잘 쓴다.
8. 경찰에 대드는 사람이 없고, 경찰도 듬직하고 친절하다.

선진국일수록 목소리가 낮다. 만원인 식당이 조용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댄다.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제 몫을 찾아먹는 경우가 많다. 銃器(총기) 소지가 허용되는 미국에서 한국식으로 고함을 치다가는 총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의 유적지에 가 보면 幕府(막부) 시절의 무사가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는 領主(영주)한테 보고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再現(재현)한 것을 보게 된다. 부하도 칼을 차고 보고하고 영주도 칼을 차고 보고받는다.

「이런 관계에선 허위보고가 어렵겠구나, 상관이라도 부하에게 함부로 인간적 모독을 주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수와 같은 公衆(공중) 예절의 상당부분은 무장한 사회에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몸짓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영국·독일·일본 등 무사, 騎士(기사) 지배, 즉 군사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에서 공중도덕이 성숙해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일본 택시 기사

1975년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을 혼자서 여행하던 나는 유명한 해안 휴양지 아다미(熱海)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근처 여관에 들었다.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는데 「아차」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명함이나 성냥갑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 탔다.

『아다미에 여관이 몇 개 있습니까』

『400개입니다』

택시로 400개를 전부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 운전자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오면서 골목을 누볐다. 여관마다 들렀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 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 기사도 『야, 참 잘 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 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그 택시 기사가 나에게 베풀어 준 好意(호의)는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회사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한 기업인은 『나는 일본이라면 세 단어가 생각 난다』고 말했다. 정직, 청결, 친절. 평소 생활이 청결하니 정직하고 친절한 것이다. 청결은 남에 대한 배려다. 친절의 표현이 청결이다. 청결하지 않은 음식점이 친절할 수는 없다. 청결은 형식이고 정직은 내용이다.

지난 1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 근방의 新치도세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4박5일 동안 尙美會(상미회) 여행단을 태우고 다녔던 관광버스 운전기사는 30代의 말없는 사나이였다. 눈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그렇게 부드럽게 달릴 수 없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暴雪(폭설)과 한파 속 장거리 운전을 해준 것이 고마워 여행객들이 헤어질 때 박수를 쳤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헤어졌던 운전사가 뛰어오더니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尙美會 여행단을 찾았다.

버스를 주차장으로 몰고 가서 정리하다가 손님이 놓고 내린 물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운전사는 한 30분간 차를 몰고 가 車內(차내) 청소를 하다가 분실물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달려온 듯했다. 그가 내어놓은 것은 돋보기 안경이었다.

그때까지도 안경 주인은 버스에 놓고 내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2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한 여성이 버스 안에 막 구입한 화장품 세트를 놓고 내렸다. 버스 회사에 연락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한 평범한 일본인 운전기사의 정직과 친절은 수십 명의 한국인을 감동시켰다. 이런 친절이 국가경쟁력이다. 안경을 찾은 한국인은 자주 일본을 찾을 것이고, 화장품을 잃은 한국인은 이탈리아에 대한 險談(험담)을 열심히 하고 다닐 것이다.


일본 교수 부부의 친절

2004년 5월22일 나는 일행 19명과 함께 일본 가고시마에 있었다. 현직 일본인 교수 부부가 하루 종일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오후 늦게 그는 우리 일행을 가고시마 시내에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전세 버스에서 내리면서 두 시간 후에 버스가 그곳으로 오게 한 뒤 시내 구경에 나섰다. 일본인 교수 부부와는 작별 인사를 했다.

오후 6시 우리는 내렸던 장소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두 시간 전에 헤어졌던 교수 부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교수 부부는 우리 일행이 시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빠짐없이 재집합 장소에 모였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歸家(귀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교수 부부는 일부러 두 시간 동안 시내에 머물러 있다가 점검차 다시 들른 것이었다. 부부는 다시 헤어지면서 과자가 든 봉투를 선물로 주었다. 車中(차중)에서 이 과자를 나눴더니 1인당 하나씩 정확하게 스무 개였다.

생전 처음 만난 사이이고 다시 볼 일 없는 외국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습관화한 일본사람들이다. 알수록 무서워지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온천탕에 들어가면 시설이 간단한 데 놀란다. 샤워기가 앉은키와 같은 높이에 붙어 있어 서서 할 수 없다. 쪼그리고 앉아 몸에 먼저 비누칠을 한 다음 옆사람에게 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기 물을 머리에 뿌린다.

욕탕으로 들어올 때는 호텔방에서 가져온 얇은 수건 하나만 휴대할 수 있다. 이 수건이 특이하다. 때를 미는 데도 쓰고 몸을 닦는 데도 쓴다. 아주 얇은 데도 흡수성이 좋고 빨리 마른다. 한국의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보면 한 사람이 평균 석 장 이상의 수건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일본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하나에 200엔 하는 일본 목욕탕 수건을 몇 장 선물로 사와서 나눠 준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 집 목욕탕의 많은 수건들 가운데 일본 수건이 끝까지 남게 된다.

2003년 말 일본의 시고쿠(四國: 막부 시대에 네 개의 藩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다)에 있는 古都(고도) 高知(고치)의 400년 된 淸酒(청주) 공장을 방문했을 때다. 우리 여행단은 공장 구경을 끝내고 공장 간부와 인사를 한 뒤 골목에 세워 둔 버스에 올랐다.

인사를 끝낸 공장 간부가 갑자기 버스 앞을 지나 골목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다른 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 주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차내에서 우리는 『한국 같으면 인사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을 터인데』라고 감탄했다.


보수가 먼저 깨끗해져야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 차관으로 승진한 K씨와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식사 중에 『車가 있느냐』고 했더니 『공무원 생활 중에 처음으로 車가 나온다』고 했다. K차관은 강북의 허름한 빌라에서 약 20년째 살고 있다. 한 끼당 1만원 이상인 식사는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후 8시30분쯤 청진동 골목으로 나와서 헤어졌는데, K씨는 모범택시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일반택시를 기다렸다가 타고 갔다. 자신의 관용차는 식사 전에 먼저 보냈다는 것이었다.

기업인들과 고관들 가운데는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자가용 운전기사를 대기시켰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식당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운전사들도 고역일 것이다.

80세를 훨씬 넘은 롯데의 辛格浩(신격호) 회장은 일본에 머물 때는 저녁 식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보내고 자신이 차를 몰고 歸家(귀가)한다고 한다.

보수세력이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보수가 먼저 겸손해지고, 깨끗해지고, 그래야 용감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저녁에 운전기사를 일찍 퇴근시켜 주는 것도 작은 自淨(자정) 노력의 하나가 아닐까? 공자는 論語(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갖지 않는 것보다는 부자가 겸손해지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


일본 총리의 전화 예절


일본 前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明)가 현직 때 일본 월간지 「文藝春秋(문예춘추)」와 인터뷰한 자리에서 자신의 전화 거는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비서를 통해서 전화를 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내가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요. 가끔 비서가 전화번호를 대신 눌러 주지만 상대방이 나오기 직전에 내가 전화기를 듭니다. 「총리께서 전화를 겁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제가 「모리입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이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어느 모리 말씀입니까」하고 反問(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총리대신 모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해서 「모리라고 하면 알 겁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회사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환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이러지요.

「회사 이름에 따라 연결해 줄 수도 있고 연결 안 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따지면 그쪽이 당황하지요. 「어쨌든 연결시켜 준다면 귀하가 곤란할 일은 없을 거요」라고 달래지요. 「총리 모리입니다」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집도 가끔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번호를 착각한 경우가 많다. 『번호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해 주면 『어이쿠,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끊는 사람이 10명 중 한두 사람이다.


『나는 피시를 먹어야 해』

태국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식사 시간, 50代 남자가 스튜어디스를 향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는 피시(fish)를 먹어야 해』

스튜어디스는 울상이 되어 사과했다.

『손님, 피시는 다 나가고 치킨만 남았습니다』

『그건 당신네들 사정이야 나는 꼭 피시를 먹어야 해』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정말 죄송해요』

『난 무조건 피시를 먹어야 해. 치킨은 싫단 말이야』

그는 골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피시를 달라』는 투정이 계속되자 옆자리에 앉았던 한 60代 남자가 말했다.

『저하고 바꿉시다. 제가 치킨을 먹을테니 이걸 드세요』

그는 아직 숟가락을 대지 않은 피시를 건네주었다. 그 50代는 인사 한마디 없이 피시를 받아 열심히 먹고 있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한 장관이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싱가포르行 여객기 1등석을 탔다. 싱가포르 항공이었다. 곧 눈에 익은 사람이 올랐다. 李光耀(이광요) 당시 싱가포르 총리였다. 그는 1등석 맨 앞자리에 앉았다. 1등석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로 친다. 그는 다른 승객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李총리 비서관이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았을 뿐이다. 총리는 비행 도중 일어나 몸을 푸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식사 시간에 승무원들은 李光耀 총리를 맨 나중에 대접했다. 後食(후식)으로 케이크가 나왔다. 李光耀 총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남은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먹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한국 장관이 승무원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의 총리를 그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승무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총리께서 그렇게 해주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李 총리가 주인인데, 주인이 맨 나중에 대접을 받아야지요』

1988년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李光耀 총리는 싱가포르가 청결한 것은 시민 덕분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치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고, 학생들에게도 철저히 교육을 했지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싱가포르 화폐로 500달러(미화 200달러 상당)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광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내는 사람은 없고, 단지 명목적인 액수만 납부하게 되지만 단속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환경청 장관이 청소부들에게 거리 청소를 중단시켜 보았더니 온 거리가 하루 만에 지저분해졌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싱가포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고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기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졌지요』


『감시자가 많아야 예절이 선다』


일본은 그렇지 않지만 독일·영국에선 시민들의 고발정신이 나라를 질서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국인들은 불법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공범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독일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했던 P씨의 경험담이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한 승용차가 계속 따라왔다. 호텔 앞에 택시가 멈추니 그 승용차도 멈췄다. 운전사가 내려 다가오더니 택시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횡단보도 신호를 위반했어요. 주의를 주려 했는데, 손님이 타고 있어 내릴 때까지 따라 온 거예요』

한국인들은 아는 사람들한테는 매우 친절하다. 친절이 지나쳐 過恭非禮(과공비례)일 경우가 허다하다. 집회에 참석해 보면 사회자가 內賓(내빈)을 소개하는 데 30분이 걸리기도 한다. 참석자의 반이 내빈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참석자로 소개 받은 뒤엔 곧 자리를 뜨는 이들도 많다.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례와 아는 사람들끼리의 過恭非禮가 한국식 예절의 이중성이다. 주자학은 예절을 강조했지만 家門(가문)을 떠난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에 대해선 의외로 관심이 적었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나서서 국민예절을 강조하면 「그건 維新(유신)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예절 강조는 사소한 것이거나 민주주의에 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1년 취임사에서 예절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예절이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세력은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므로 자연히 예절을 중시한다.

<우리를 단결시켜 온 것은 혈통이나 가문이나 토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단결시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출신 배경과 이해관계를 초월하게 하며, 미국 시민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理想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국민은 이 원칙들을 존중해야 하며 모든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이 이상들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덜 미국적이 아니라 더 미국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절과 용기와 동포애와 인격을 가지고 국민적 약속을 지켜나갈 것임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예절을 지키면서 원칙을 지키는 나라가 이상적인 미국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선의와 존경, 공정함과 용서를 가지고 대할 때 예절 바른 사회가 이룩됩니다>

한국에선 문민, 좌파 대통령들이 앞장서서 예절감각을 파괴했다. 대통령들의 의리 없고, 무식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언행들과 일상적으로 접해 온 국민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닮아 갔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언행을 자연스럽게 행동의 한 기준으로 삼게 되는 젊은이들은 敎養語(교양어)와 예절 바른 행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인간의 집단 무의식은 그 사회의 담론이다. 한 사회가 쏟아 내는 말들, 대통령과 언론의 말들, 정치인과 지식인의 말들, 식탁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인간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이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잔소리가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한국적 예절감각이 가장 투철했던 이가 李承晩·朴正熙였고, 가장 무례했던 이가 盧武鉉이었다. 朴正熙는 청와대 보일러공한테도 존칭을 썼다. 약속한 이발 시간이 늦을 것 같으면 회의 도중 이발사한테 달려와 『미안하다. 좀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이였다. 私信에선 절대로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朴正熙 拜」라고만 썼다. 盧武鉉 의원은 1989년 12월31일 국회에서 증언하러 나온 全斗煥 前 대통령 쪽을 향해서 명패를 던졌다.

한국인의 비뚤어진 예절감각은 이런 만행을 「민주화의 義擧」 정도로 귀엽게 보아 주었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런 나라에서 교양과 예절을 강조하는 것은 激流(격류)에 돌멩이를 던져 둑을 쌓으려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무례한 자는 응징을 당하고 교양인이 출세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잔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 戰國시대의 管仲(관중)이 말했듯이 「곳간이 차면 사람은 결국 염치를 알게 된다」. 잔소리는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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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무례한 노인 규탄대회'
'지하철을 타 보면 노인들이 더 무례한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어요.'


'요사이 젊은 것들이 버릇이 없다'는 말은 주로 老人들 입에서 나온다. 며칠 전 64세의 교수가 反論을 제기하였다.
'지하철을 타 보면 무례한 노인들도 많습니다. 젊은이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어요.'
그 후 40代 초반의 한 여성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체험을 털어놓는 것을 듣고는 그 교수의 말이 생각 났다.
1. 가까이 오면 냄새가 나는 노인들이 많다.
2. 노인들끼리 잘 싸운다.
3. 젊은이들이 자리를 잘 양보하지 않으니 빈 자리가 생기면 먼저 앉으려고 뛰는 이들도 있다.

오늘 20代 여성들이 모인 자리에 갔더니 '무례한 노인 규탄 대회'가 벌어졌다.
1. 지하철안에서 학생이 앉아 있으면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앉아버리는 노인들도 있다. 앉아서 조는 젊은이가 있으면 자신이 앉으려고 깨우는 노인도 있다.
2. 주로 정치문제로 高聲을 지르면서 싸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젊은이들을 타이를 때도 공개적으로 야단을 친다.
3. 그런 노인네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선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줌마들에 대한 규탄도 이어졌다. 지하철 열차의 문만 열리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서 빈 자리를 향하여 핸드 백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젊은이의 무례를, 젊은이들은 노인과 아줌마들의 무례를 흉본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男女老少가 모두 무례하다는 이야기인가? 물론 아니다. 무례하게 보이는 이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다만 무례한 행동은 눈에 뜨이기 쉬우므로 많은 것처럼 보인다.
좌파정권 10년간은 완전한 한글專用이 실시된 10년간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국민들의 교양과 예절도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좌편향 이념과 한글專用의 공통점은 전통의 파괴이다. 효도, 애국심, 예절, 교양, 역사, 家門으로 상징되는 전통을 부정하는 이들은 성격상 무례하고 無法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교양의 再建은 국가의 再建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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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母, 夫人, 아내
'사모님'이란 말이 남발된다.

師母(사모)는 師父(사부ㆍ스승)의 부인이다. 王朝(왕조)시대엔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라고 하여 임금, 스승, 아버지는 同格(동격)으로 섬겨야 하는 존재였다. 거기서 「아버지같은 스승」이라는 의미로 師父라는 호칭이 생겨났다. 스승이 별세하면 직접 상복은 입지 않지만 「心喪(심상)」을 치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특히 집을 떠나 스승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학문이나 기술, 무술 등을 배울 경우, 스승의 부인은 제자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호칭도 당연히 「師母」였다. 친어머니가 아닌 「어머님」이다. 같이 배우는 동료들은 마찬가지 이유에서 師兄(사형), 또는 師弟(사제)였고, 스승과 同行(동항)의 선배는 師叔(사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師母님이 잘못 쓰이고 있다. 직장의 상사 부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인을 대개 「師母님」이라고 부른다. 社長(사장)의 부인을 師母님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 「社母님」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사모님께서는 무엇하는 분이시냐』는 투로 말한다.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 사람에게는 결코 써서는 안되는 말이듯, 師母님도 스승의 부인 외에는 절대 써서는 안되는 호칭이자, 지칭이다.
말이 나온 김에 「夫人」과 「아내」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
夫人은 본래 임금이 外命婦(외명부ㆍ왕의 여자친척 또는 문무관의 처)에 내린 직첩의 이름이었다. 貞敬夫人(정경부인), 淑夫人(숙부인)처럼 말이다. 어머니 제사때 지방에 쓰는 「顯妣孺人(현비유인)」의 孺人도 정9품의 外命婦다.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예컨대 『여보, 부인』처럼 부인은 호칭으로도 쓰였다. 그러다 오늘날 와서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로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의 아내를 직접 부를 때, 『여보, 부인』처럼 호칭으로 쓸 수 있다.
아내는 남편과 대응하는 일반명사이며 남에게 자신의 부인을 가리켜 『내 아내가』라고 말할 때 쓰는 지칭이다.
그럼 남의 부인을 지칭할 때는 어떤 말을 써야 할까. 높여서 부를 때는 반드시 「夫人」이라고 해야 한다. 낮춰 불러도 괜찮은 상대,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아들, 스승이 제자, 선배가 「너」라고 불러도 되는 후배의 부인을 지칭할 때, 「네 아내가」라는 식으로 써도 된다. 妻(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남의 부인을 「아내」, 또는 「妻」라고 쓰거나 부르는 것은 실례다. 망발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예의에는 어긋난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당신의 아내(당신의 妻)가 이렇더라』라는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趙南俊(전 月刊朝鮮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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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者는 베풀고 권력자는 淸貧해야
論語: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는 富者가 겸손해지기가 더 쉽다'


논어에 孔子의 유명한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는 富者가 겸손해지기가 더 쉽다'는 요지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무례와 떼쓰기를 욕하기 전에 기업인들과 富者들과 권력자들은 자신이 충분하게 겸손한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富者는 베풀어야 하고 권력자는 淸貧해야 한다.
논어에는 또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서로 달라도 和合하고 소인배들은 서로 같아도 不和한다는 의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 시민들의 행동윤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사도바울은 골린도前書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고 내 몸마저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느니라.'
正義를 내걸고 분신자살을 하더라도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없다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사랑이 없는 진보, 사랑이 없는 평화, 사랑이 없는 正義, 사랑이 없는 통일, 사랑이 없는 개혁은 다 가짜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12절 이하에서 이렇게 和合을 강조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라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것은 어디뇨.'
우리는 무슨 조직을 만들 때마다 모두 몸이 되겠다, 머리가 되겠다고 싸운다. 손과 발이 되어 땀 흘리겠다는 사람들이 귀하다. 그렇게 되면 몸과 머리만 있고 손과 발, 눈과 귀가 없는 조직이 되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린다. 大同단결하고 백의종군하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화합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을 소수의 좌익집단에 넘겨준 적도 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충고한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支體가 도리어 더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더 요구할 것이 없으니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李承晩 대통령은 갈라디아서 5장1절을 자주 인용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라.'
사도바울은 이 갈라디아書에서 '모든 율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이 된다고 했다. 북한동포들을 나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정도는 아니라도 맞아죽고 굶어죽어가는 북한동포를 同族으로 여길 수 있는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핵심은 인간생명 하나 하나를 神聖視하는 개인주의이다. 자유를 잃지 않으려면 자유의 本性인 생명에 대한 확고한 행동논리를 가져야 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700만 학살집단인 북한노동당 정권에 대하여 한국의 지도층이 도덕적, 역사적 판단을 회피함으로써 正義로운 행동을 포기한 점이다.
巨惡과 친구가 되었는데, 小惡을 응징할 수 있겠는가?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안다면, 즉 사탄의 세력에 속지 않는다면 자유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진실과 거짓을 알아보고 속지 않을 것인가? 사도바울이 말한대로 너의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할 줄 알아야 진실을 알아보는 눈이 떠진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알게 되면 진실을 알게 된다고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단편적으로 예언하지만 穩全한 것이 올 때는 단편적인 것이 사라지고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내가 穩全히 알리라.'
사랑이 있어야 사물을 穩全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穩全이란 말은 본바탕대로 드러난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온전한 것은 완전한 것이기도 하다. 진실은 조용하고 평온한 平常心을 가질 때 보이는 것이다. 진실을 보도록 하는 교육이 바로 美學 교육이다. 美를 알아보는 이가 진실과 허위를 가려 본다고 한다.
人文學은 바로 그런 교양을 키우는 학문이다. 역사를 통하여 민족과 국가의 발자취를,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철학을 통하여 事物의 원리를 알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人文學은 어휘력이 성패를 가른다. 漢字가 말살되면 人文도 죽는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仁義, 기독교의 사랑이 다 들어간 문서가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다. 우리 헌법은 사랑, 진실, 正義, 자유를 최고 가치로 품고 있다. 敬天愛人이란 말이 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늘은 神, 역사, 국가, 민족, 부모 같은 우월적 존재를 가리킨다. 모든 고급종교에 공통된 마음이 敬天愛人하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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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現代史 바로알기




50大 사건으로 본 한국 現代史의 핵심과 흐름





*대한민국은 嫡子로 태어났다

1. 미국은 해방자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켰으므로 光復이 왔다.
2. 남북분단의 책임자는 소련과 김일성이다. 38선은 군사주둔지의 경계선이었지 分斷線이 아니었다. 자유왕래를 금지시켜 이를 分斷線으로 만든 것은 소련과 김일성 집단이었다.
3. 스탈린은 북한을 점령한 직후인 1945년 가을에 북한지역을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어 소련의 衛星國化한다는 방침을 확정, 정권 수립에 착수하였다. 李承晩이 남한지역에서라도 우선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 1년 뒤였다.
4. 공산당 路線은 민족반역이었다. 李承晩-金九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한 것은 민족자결 선언이자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꼭두각시임을 폭로한 결단이었다. 이로써 反共자유 노선과 反민족-事大 노선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5.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하여 탄생하여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총선, 국회구성, 헌법제정, 정부 구성의 절차에 대하여 구성원의 同意가 있었으므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갖게 되었다. 선거를 감시한 유엔의 公認도 받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이념으로 선택하였다.

*농지개혁으로 인구의 반 이상을 自由民으로 만들다

6. 李承晩 초대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고 김일성 초대 내각은 非命橫死 내각이다. 李承晩은 左右합작을 추진하는 미 軍政과 맞서 나라를 세웠고, 김일성은 스탈린한테 불려가 시험을 쳐서 합격됨으로써 지도자로 지명되었다.
7. 李承晩 정부는 反民특위를 통하여 親日派를 斷罪하였으나 북한정권은 정권편의 친일파는 보호하고 반대하는 친일파만 처단하였다.
8. 李承晩 정부는 농지개혁으로 인구의 반 이상을 自由民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농지개혁으로 압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國有化함으로써 농민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다. 북한은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세습 봉건체제이다.
9. 李承晩 정부는 국민 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시설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며 戰時에도 대학생을 징집대상에서 면제시켜주었다.
10. 1949년 6월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하였다. 이것이 6.25 남침의 초대장이 되었다.


미군 150만 명을 한국으로 보낸 트루먼의 결단

11. 6.25 남침은 민족반역의 전쟁범죄 행위였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락과 지원, 모택동의 保證下에 同族을 치는 전쟁을 일으켰다.
12.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參戰 결정은 군부의 판단과는 관계없는 개인적 결단이었다.
13. 미국의 젊은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의 부름에 응하였다. 미군 150만 명이 參戰, 10%인 15만 명이 죽고 다쳤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던 8군 사령관도, 후임 8군 사령관의 아들도 戰死하였다.
14. 유엔군의 기치 하에 16개국이 實兵을 보냈고 5개국이 의료 등의 지원을 하였다.
15. 김일성은 북으로 도주하면서 모택동의 중공군을 끌어들여 민족통일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國際戰場으로 만들었다. 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말한 이가 노무현이었다. 총퇴각하는 유엔군에 대하여 한국 死守를 명령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한국을 두 번 구한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소수이다.

反共포로 석방으로 韓美동맹 쟁취

16. 李承晩 정부는 戰時中에도 국회 문을 열고, 선거를 하였고,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통화개혁을 할 때도 개인의 예금 동결에 반대하였다. 이런 사람을 독재자로 매도할 수 있는가?
17. 미국은 휴전협상 때 敵軍 포로의 人權(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하여 자유의사 확인 후의 송환 원칙을 견지하였다. 회담은 2년을 끌었다. 이 기간에 수십 만 명이 戰死하였다.
18.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휴전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 李承晩의 反共포로 석방(1953년 6월18일)이 아이젠하워 정부를 압박, 韓美동맹을 만들어냈다.
20. 李承晩은 休戰에 동의해주는 代價로 한국군 20개 사단의 현대화, 대규모 경제원조, 미군 주둔 등의 약속을 얻어냈다.

國軍이 最强의 先進조직으로 등장

21. 6.25 전쟁으로 70만 국군이 最强의 先進조직으로 등장하였다.
22. 李承晩은 전쟁중에도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 獨島를 지켜내고 어업자원을 보호하였다.
23. 李承晩은 戰後 복구를 추진하면서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 원자력원을 설립하고 대학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는 등 장기적 안목의 人才양성을 꾀하였다.
24. 이승만의 老齡化와 자유당의 부패가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하였다.
25. 1960년 4.19 학생의거 때도 주된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였지 李 대통령 퇴진이 아니었다. 李 대통령은 시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스스로 사임하였다.

朴正熙, 개방적 근대화 노선 선택

26. 李承晩 하야 후 야당이던 민주당은 내각제로 改憲하고 집권하였으나 내부 분열로 사회 혼란을 불렀다. 좌익세력이 행동을 개시하여 군인들과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27. 1961년 5.16 군사혁명에 대하여 서울시민 약60%가 찬성, 20%가 반대하였다(미군의 가두 여론조사).
28. 주체세력인 장교단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교육된 先進집단이었다. 10%는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 군사혁명의 지휘자인 朴正熙-金鍾泌 콤비는 知的, 인격적, 실천력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29. 박정희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직수입을 거부하였으나 폐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누르고 對外개방적인 근대화 전략과 수출입국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독창적인 방식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30. 한국인들은 1963년 10월 선거에서 16만 표차로 朴正熙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강력한 근대화 노선을 선택하였으나 야당과 언론 및 학생세력을 민주적 견제장치로 부렸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31. 1960년대 한국은 경공업을 발전시키고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면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수출진흥, 韓日국교 정상화, 월남파병으로 한국인의 활동 무대가 넓어졌다.
32. 4대 군사노선을 걷고 있던 북한은 1967~69년 사이 특공대와 게릴라들을 서울과 후방에 침투시켜 사회교란을 획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3. 朴正熙는 이에 應戰하여 예비군 창설, 自主국방력 건설에 착수하였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시대였다.
34. 1963~1972년 유신선포까지 박정희 정권은 선거의 자유, 야당활동의 자유, 언론의 자유, 私有재산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보장하였다. 이 기간을 독재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35. 1970년을 계기로 朴正熙 정부는 굶주림의 문제를 대충 해결하여 人權 향상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36. 여성 및 농촌 人力이 도시와 공장으로 몰리고 軍人들의 뒷받침을 받는 기업인들과 공무원들 및 과학기술자들이 언론인, 교수, 정치인들을 누르고 한국 사회의 主力세력으로 浮上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분 혁명적 시대상을 반영하여 서울대학교에서 화공과와 경제학과의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다.
37.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90만 표차로 이긴 朴正熙는 과도한 정치비용이 근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확신, 이듬해 유신선포를 斷行하여 정치적 자유를 축소하고 행정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장기집권 체제로 국가구조를 변경하였다.
38.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실천하기 시작한 維新체제는 1차 석유파동을 잘 극복하고 중동건설 시장 진출, 새마을 운동,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하였다. 한국은 드디어 종합국력면에서 북한을 능가하기 시작하였고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갔으며 마이카와 아파트가 상징물로 등장하였다. 유신체제는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였으나, 세계가 석유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위기 때 한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國格을 드높였다.
39. 1977년 의료보험 도입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사라졌다.
40. 李厚洛 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1974년의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이어지고, 민주화 운동의 격화는 권력층 내부의 분열과 韓美동맹의 균열을 초래하였다.


경제안정이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

41.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과 物價高, 김영삼 총재의 등장, 민주화 세력의 강경투쟁과 정권측의 강경대응, 그리고 중산층의 離反과 釜馬사태가 10.26 사건을 불렀다.
42. 1979년의 10.26 사건은 18년간의 박정희 정권을 종식시키고 13년간의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열었다. 30년간의 現代史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43. 全斗煥의 신군부는 流血사태로 집권하였으나 경제관리에 성공하여 안정속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물가도 잡고 무역흑자도 이뤘다. 1980년대 한국은 연평균 10.1%의 경제성장으로 세계 1위였다. 중산층이 70%에 이르고 이들이 민주화의 지지세력으로 변하였다.
44. 1987년 전두환-노태우 합작의 6.29 선언으로 한국은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민주화의 길을 선택하였다. 북한은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로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서울올림픽을 좌절시키려 하였으나 스스로 고립의 함정을 팠다.
45. 김대중, 김영삼의 同時 출마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軍人출신 대통령이 민주주의 실천 시대를 열고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사회적 욕구를 민주적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經濟戰에선 이겼으나 思想戰에선 밀리는 한국


46. 노태우 정부는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민주화와 북방정책이란 國家大戰略으로 민족의 活路를 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딛고 중국, 소련, 東歐와 수교하여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하였다. 유리한 국제정세를 활용, 남북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았다.
47. 노태우는, 與小野大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3당 합당으로 보수연합 구도를 만들고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48.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좌파 참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고 불법화하였던 전교조의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키는 등 사실상 左派宿主가 되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정권에 대하여 미국이 강경책을 쓰려 하자 이를 말린 것도 김영삼 정부였다.
49. 김영삼 대통령의 反보수적 정책은, 金鍾泌 세력의 탈당과 자민련 창당, 대구 경북세력의 離反 등 보수분열을 불렀다. 외환위기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가不渡 위기로 몰리면서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50. 이후 계속된 2期에 걸친 좌파정권은 학살자 김정일에 굴종하여 100억 달러의 金品을 건네고 핵무장을 도왔으며 반역적 6.15-10.4 선언으로 從北세력의 득세를 뒷받침하였다. 이에 반발한 보수층이 2007년 대통령 선거, 2008년 총선을 통하여 좌파진영을 참패시키고 李明博 대통령과 한나라당 정권을 만들어냈으나, 李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이념포기를 선언, 좌파와 동거상태에 들어갔다.

**한국은 경제, 군사, 과학기술력에선 세계 10大 강국이 되었으나 정치와 언론 및 교육 부문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經濟戰에선 북한에 이겼으나 思想戰에서 밀리고 있다.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엔 성공하였으나 法治확립-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이란 과제를 주도할 국가엘리트층이 붕괴되었고 국민교양 또한 무너지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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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번영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한국인의 행동윤리: 狂信집단과 싸워 이기는 데는 合理와 과학과 민주주의만으론 안 된다. 또 다른 종교적 신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기적과 逆轉의 드라마였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위기를 好機로 바꾸고 逆轉勝을 거듭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민국가 건설 61년 만에 富國强兵하는 민주국가를 만들어 민족사 최고의 번영을 謳歌(구가)하고 있다.
네 가지 성공요인은 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 李承晩-朴正熙-李秉喆로 대표되는 自主-실용적인 지도세력(기업인, 장교단, 과학기술자 포함)의 성장, 그리고 근면 성실한 국민들이다. 한국은 이런 성공조건들을 만들고 수많은 도전을 극복해가면서 헌법상 가치인 진실, 正義, 자유를 확장하고 지켜내었다.
세계가 公認한 한국의 성공은 그러나 미완성이다. 네 가지 성공조건을 위협하는 네 가지 실패조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통에 內在된 뿌리 깊은 봉건적 殘滓, 北韓發 좌경이념의 침투, 여기에 노출되고 寄生하는 僞善的 지식인과 정치인 및 守舊的 관료층의 존재, 그리고 한글전용과 좌익선동에 넘어가 교양의 바탕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국민, 특히 彼我識別 기능이 마비된 젊은 세대의 존재가 그것이다.
한국은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네 단계를 거쳐 法治확립-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의 세 단계를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역사의 발전을 거스르는 북한정권과 남한의 從北세력은 그 속성이 봉건적 守舊 반동 세력으로서 조국의 先進化를 방해하는 主敵이다. 조국 근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던 네 가지 성공 조건-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 自主-실용적인 지도세력의 성장, 그리고 근면 성실한 국민들의 존재를 보장하여야 조국 선진화를 성공시킬 수 있다.
한국은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나라이다. 對北경제전에서 이긴 한국은 핵무기와 광신적 이념으로 무장한 북한정권 및 從北세력을 상대로 한 思想戰에서도 승리하여야 아직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60년 전쟁을 자유세력의 최종승리로 마감할 수 있다.
넘어야 할 절벽과 건너야 할 강이 있다. 좌경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국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국가와 사회가 惡黨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국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 최고의 德目으로 존중되는가? 지도층이 대한민국의 걸어온 길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을 共有하는가? 韓美동맹을 자유통일 이후까지 우리의 생명줄로 지켜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직도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樣式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狂信집단과 싸워 이기는 데는 合理와 과학과 민주주의만으론 안 된다. 또 다른 종교적 신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만으로는 안 된다.

1. 反共자유민주주의라야 한다.
2.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유일한 正統국가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라는 국가 정체성의 근본을 절대로 포기하여선 안 된다.
3. 한반도의 미래가 ‘번영하고 통일되고 강력하고 자유로운 나라여야 한다’는 데 同意하는 美國은 '영원한 친구'이다.

헌법 1, 3, 4조는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라'는 명령을 국가와 국민들에게 내리고 있다. 대통령부터 어린이까지 이를 국가意志와 國家목표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경쟁과 투쟁을 자신의 행동윤리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룰 힘이 있는 민족은 행복하다. 문제는 용기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이고 좋은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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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 60년, 열명의 대통령 이야기
두 위대한 대통령, 두 부지런한 대통령, 두 반역적 대통령, 두 과도기 대통령,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 그리고 또 한 명의 미지수.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두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열번째 대통령(李明博)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李承晩 건국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세우고 6.25 휴전기에 미국을 압박하여 韓美동맹이란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그는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좌익의 공격목표를 사전에 소멸시키고 민주주의 교육으로써 '不義와 不正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 젊은 세대가 4.19 학생혁명으로써 李대통령을 몰아냈으니 그는 자기성공의 희생자였다.
미국의 名門 프린세턴 대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된 그는 동서양의 교양을 한 몸에 통합한 카리스마와 세계大勢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으로 한국을 해양세력권에 묶어놓고 세계사의 主流 속에 집어넣었다. 1948년 건국 당시 한국인중 知的 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속으로 들어와 건국이념이 된 것이다. 2008년의 한국이 세계 10大 경제력, 26위의 삶의 질을 가진 거의 선진국 수준의 나라가 된 데는 李 대통령이 만든 자유와 동맹의 울타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역사상 800년만에 처음으로 효율적인 군사문화를 도입하여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린 '근대화의 旗手'이자 '시스템 운영의 鬼才'였던 朴正熙는 6.25 전쟁의 産物이다. 이 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最强집단이 된 국군장교단이 무능한 文民지배층을 교체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다. 朴 대통령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면서 민주주의를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진정한 주체사상가였다. 그는 富國强兵策으로써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계급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른바 유신독재로써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해갔던 1970년대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했고 이것이 성공하여 한국을 重量級 국가로 올려세웠다. 1979년에 들어서서 朴正熙式 근대화의 産物인 도시중산층이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끼고 지식인 및 학생들과 손잡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고(釜馬사태), 이것이 朴정권의 실력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변심시켜 대통령을 사살하게 만들었으니 朴正熙 또한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약5000명의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였을 때 張勉 총리는 달아나 연락이 두절되었다. 군통수권자이던 尹潽善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군 동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內戰을 막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보장했다. 朴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全斗煥 장군이 12.12 군사변란을 일으키자 崔圭夏 대통령도 流血사태를 걱정하여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尹, 崔 두 대통령은 이 조치로 해서 비판을 받았으나 북한군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군을 동원하여 국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은 장교 시절부터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인연과 인맥으로 혼란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12.12사건, 광주사태 등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민주화 약속을 지켰고 세계1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盧泰愚와 함께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으로써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는 金泳三-金大中의 분열을 틈타서 당선되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공산권 붕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소련, 동구국가들과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후방에서 고립시켰고 신도시 건설, 인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盧대통령은 또 3당 合黨을 통해서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만들고 金泳三씨를 후계자로 밀었다.

안정적인 보수연합구도의 지원하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金泳三 대통령은 좌파적 영향하에 들어가 보수연합구도를 깨고 한국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하여 좌파득세로 가는 카피트를 깔았다. 그는 보수를 자칭했으나 사실상 좌파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의 분열적 정책이 金鍾泌의 충청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民自黨에서 이탈시켰고 外換위기를 불렀다. 이런 정책실패와 보수분열 구도하에서 金大中이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익활동가 출신 金大中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좌경화의 길로 내몰았다. 金大中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盧武鉉은 金大中의 反헌법-反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위선적 평화론의 전도사가 되었고, 金正日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을 북한 정권의 인질로 전락시킨 끝에 北의 戰犯집단이 핵무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金日成이 일으킨 민족반역적 6.25 전쟁으로 약300만, 金正日의 사회주의 실패로 약300만 명이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본성을 보여주었는데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서 민주투사로 위장한 親김정일 세력을 정권담당자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히틀러를 뽑은 것과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金泳三 이후 14년간 한국정치는 조선조의 朋黨정치 시대로 회귀했다. 국가엘리트層이 약해지고 지역, 계급적 이해관계로 國論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다행히 民間부문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여 기우는 나라를 버티어냈다.

좌파세상 10년을 겪으면서 각성한 다수 유권자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반역적 좌파정권을 평화적으로 종식시켰다. 열번째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업인 출신이다. 유권자들은 李明博 대통령이 일하기 편하게 해주기 위하여 지난 4월 총선에선 국회에서도 親北의원들을 거의 일소해주고 집권여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만들어주었다.
李 대통령은 그러나 취임 직후부터 '한반도에선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 '나는 보수가 아니다'고 말하는 등 배신의 신호탄을 올리더니 그를 만만하게 본 좌익들의 촛불난동을 부르고 말았다. 李 대통령은 법집행을 포기하고, 거의 석달간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좌익의 해방구로 내어주었다. 건전한 국민들과 민간부문이 공권력의 도움 없이 체제수호를 위해 반격에 나서는 바람에 거짓의 촛불을 끄긴 했으나 배신감을 느낀 보수층이 이탈하여 李 대통령의 지지율은 폭락했다.

2008년 8월1일 그는 갈림길에 서 있다. 김영삼類의 좌파宿主 대통령이 될 것인지, 대처나 레이건 같은 反共자유민주 투사로 거듭 태어날 것인지, 선택은 그의 몫이다. 李明博 대통령에게 역사가 부과한 책무는 '法治주의를 정착시킴으로써 어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그가 '법대로'를 선언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 한국도 그도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대로'의 길은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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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였던 이승만, 박정희
두 아들의 추억


<아버님은 자연을 몹시도 사랑하셨다. 오후에는 뒤뜰에 나가셔서 화초에 물을 주시고 가꾸시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가꾸시는 솜씨가 전문가 이상으로 능숙하시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며칠 돌보지 않았더니 시든 잎이 생겼어’ 하시며 몇 개의 화초를 가리키시고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우리가 갈 때 가져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일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나는 어른께서 타고 나신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때는 아버님을 뫼시고 한국에 돌아갈 계획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저녁때 나는 어머님께 저 화초들을 정말 가져갈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았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아버님은 좋은 것은 다 한국에 가져간다고 하시는 어른이야’ 하고 웃어넘기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게으른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에 깨달은바 있어 정원의 낙엽과 쓰레기를 치우기는 일 등 내가 할 수 있는 집안의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하였다.>(李承晩의 양자 이인수 증언)

몇년 전 故朴正熙 대통령의 아들 志晩씨를 만났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생명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나무 꽃 강아지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글이 없더군요'

그 말을 듣고보니 朴正熙 일기가 생각났다. 그의 일기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이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일기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朴대통령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소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한 것은 모를 때 이야기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알고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을 다 들여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李 대통령이 쓴 漢詩에도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많다. 건국, 근대화 대통령 두 분은 조국의 풀 한 포기까지 사랑한 사람이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연장선상에서 두 사람은 民族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5장14절엔 '모든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이승만, 박정희의 생명사랑-민족사랑-나라사랑과 민족사 最惡의 학살자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명말살이 대조된다. 그런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이승만, 박정희를 미워하는 인간들이 죄값을 받지 않는다면 正義가 없다.

朴대통령이 나무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1975년 8월 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다. 그곳에 있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집에 별 일 없지요”라고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전에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산들이 모두 기계충에 걸린 것처럼 흙이 많이 보여서 마음이 삭막했었는데, 요즈음은 모두 푸르게 변해 마음도 시원해요.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입산 금지시키는 것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삼성의 이병철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입산 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 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 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총독부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시험해 보니 그게 진리더라고 이병철 씨가 나에게 얘기했어요. 그 후 그 교수를 찾아가서 사의를 표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나에게 지금은 장작을 때지 않으니까 산을 자연 그대로 두고 해충약이나 뿌려 주고 비료를 주면 우리 나라도 산림대국이 될 수 있다고 권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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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應烈 장군 증언: '日軍출신 조종사들이 북한공군 창설에 대거 참여'


'6·25 때 한국 공습한 야크기 조종사들은 거의가 일군 조종사 출신들'


1951년 6·25 전쟁 때 미군이 한국 공군에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李承晩 대통령은 불복한 한국군 장교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張志良(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내용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 사람은 張 총장의 후배이기도 한 尹應烈(윤응렬) 전 공군작전사령관이다. 그의 이런 노력은 공군으로 하여금 미군과 李承晩 대통령이 해인사 폭격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폭격 요청은 경찰이 한 것이며, 金英煥(김영환) 편대장이 스스로 폭격 회피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확인하도록 하였다.

올해 82세인 尹 장군은 일본군, 북한군, 한국 공군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日帝 시대인 1943년 평양3中 재학중 일본의 소년항공병학교에 들어가 조종훈련을 받고 이듬해 자바 戰線에 배치되었다. 소년항공병학교 제15기 졸업생인데, 수십 명의 한국인이 동기생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해방 뒤에 북한과 한국 공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尹應烈씨는 1945년 8·15 해방을 프놈펜에서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북한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李活(이활).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自費를 들여 조종술을 배운 뒤 일본 해군에 촉탁신분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았다. 소년항공병학교 출신으로는 이흥부, 박경옥씨 등이 참여하였다. 나중에 인민군 9사단장으로 가는 허민국은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공군사단장까지 오른 서주필은 윤흥렬씨의 항공병학교 동기생인데, 6.25 전쟁 때 美軍 B-29기도 격추시킨 사람이다.

尹應烈씨는 북한공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상검열을 받아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하자 월남하여 1948년에 육사 7기로 들어갔다가 졸업 후 육군항공대(공군의 전신)를 거쳐 공군이 창설될 때 옮겼다.
6·25 남침 당일 尹씨는 여의도 비행장의 당직사관이었다. 그날 소련제 야크기를 몰고 서울 등지를 폭격한 북한 공군조종사들은 거의가 일본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윤씨의 동기생인 박경옥은 야크기가 격추되면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가 사살되었다. 또 다른 동기생인 이흥부는 낙하산을 타고 着地(착지)하였으나 복부에 총상을 당하였다. 한국 공군이 그를 인수하자 李씨는 동기생인 윤응렬씨를 찾다가 숨졌다고 한다.

인천 상륙 이후 國軍이 北進하여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윤응렬씨는 평양에 가서 이흥부의 부모를 만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차마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왔다고 한다.

위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도 日帝시대의 군대 경험자를 소중한 자원으로 생각하여 重用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親北세력이 대한민국을 만든 主流세력을 공격하기 위하여 박정희 같은 滿軍장교들까지 親日派로 몰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한때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인데, 일제 시대에 일본군의 보조원으로 근무했던 이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日帝下 도의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삼촌이다.

李承晩이 짠 대한민국 초대 내각엔 친일파가 한 사람도 없었으나 김일성의 初期 정권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금강산에서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을 때 북한의 한 고위간부가 私席에서 한국측 모 인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남한에서 친일파를 새삼 거론하던데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김일성 주석님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뉘우치면 다 받아들여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산당에 협조한 친일파는 重用하고 반대한 친일파는 숙청하였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철부지 친북파들은 북한정권이 친일파를 숙청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하지 못하였으므로 북한정권이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무식한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25 남침 직후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은 한국 공군의 창설 멤버인 李英茂 대령(육군항공대장 역임. 당시 민간인)을 납치하여 갔다. 그는 장개석의 중국군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이다. 李 대령을 납치해간 북한군은 협력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李씨가 거부하자 그를 투옥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협조적인 친일파를 重用하고 반대하는 독립파를 탄압한 셈이다. 이게 북한정권의 친일파 숙청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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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은 非命橫死 내각, 南은 독립투사 내각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했다는 미신에 대해서.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이외에 김영주(노동당 조직부장, 김일성의 동생), 홍명희(북한 부수상), 이승엽(남로당 제2인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도 日帝 때 부역하였던 親日派였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反共反日을 國是로 삼다시피한 李承晩 대통령이 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 전체의 행복을 어느 체제가 발전시켰느냐로 판가름 낸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복지, 안전, 자유가 있어야 한다.

金日成 체제는 출발부터 피비린내를 내면서 민족의 재앙이 되었고 李承晩 대통령은 조국을 위하여 고투한 분들을 모았다. 그 차이가 오늘날의 남북한 차이인 것이다.





*양동안
*무초
*대통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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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韓日관계


'신라는 나쁘게 백제는 좋게 배우는 일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盧泰敦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신라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한국의 자유통일을 지원한다는 의미는 이런 부정적 한반도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가 韓日간의 증오로 변질


日本書紀(일본서기)와 이 책에 쓰여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惡(악)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사 출신의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79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지금도 자민당 정부에 전략적 助言(조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태돈 교수가 쓴 ‘呪術(주술)’과 비슷한 의미로서 ‘백제의 亡靈(망령)’이란 표현을 했다.
<일본과 신라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증오심)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근친)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혐오 속에는 백제계 遺民(유민)의 영향이 짙은 일본 조정의 新羅(신라)혐오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전전)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문자와 불교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서기)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百濟記(백제기),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백제본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고기)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문체)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란 說(설)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신라에 대한 저주를 위해 쓰여진 日本書紀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주적) 내지 屬國(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왜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왜)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왜)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신라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영국과 유럽대륙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영국은 원주민에다가 독일에서 건너간 앵글로와 색슨족, 덴마크에서 건너간 바이킹족, 그리고 프랑스의 노르만디 지방에서 건너간 노르만족이 섞여서 만들어낸 나라이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족, 신라족, 가야족, 백제족이 각축하고 협력하여 만든 나라이다.
지금 경남지방에 있었던 가야족은 일찍부터 현해탄을 건너 北(북)규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한때는 韓日(한일) 양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지방으로 많이 건너갔다. 북규슈에서 힘을 기른 가야족은 세토나이카이라는 內海(내해)와 연안지방을 경유하여 나라, 교토 지방으로 진출, 여기에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大和)를 세운다. 이 가야세력은 天皇家(천황가)를 이루는데, 한반도의 本家(본가), 즉 가야 잔존세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다가 보니 가야에 위협적인 신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의 지식인들이 우호국인 倭로 많이 몰려가 가야계 천황가를 떠받치는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문자와 불교를 전하여 倭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히 왜-가야-백제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항하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서 독립,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결전에서 가야+왜+백제 연합군을 혼자서 섬멸하여 100년 뒤의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신형식)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의 記事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정치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치란 권력승계를 평화적으로 하는 기술이고 지배층 내부 및 백성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신라는 왕위 계승이 가장 안정적으로 된 나라이다.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도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승리 이전에 정치와 외교의 승리이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전기)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대당)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대외)전쟁을 민족적 自覺(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남북통일이 요행수나 공짜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親신라 정권 天武천황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황극)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효덕)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정변)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대화)의 改新(개신)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공지)와 公民(공민)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연호)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전토)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대회개신)의 주도세력은 親百濟(친백제)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나카노오오에는 羅唐(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오오츠(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무)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대당)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상호 존중


일본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천무천황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신라 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문무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점,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다.
후히토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지)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성)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의 역사와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도 傳承(전승)되어 反韓(반한)감정으로 고착된 것이다.
新羅(신라)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왜인)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주술)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고대사)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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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나타는 대한민국



이제는 너희들의 대한민국이다
(장진성)




애들아! 이제는
너희들의 대한민국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아
가난한 자들의 후손들아

알고 있느냐
너희들이 먹다 남긴 그 우유는
너희 부모들이 먹고 싶던
우유였음을

너희들에겐 가장 쉬운
커피 한잔이
너희 부모들에겐
사치였음을

태어날 때부터
다 있는 너희들과 달리
배고팠던 목숨이었다
못 입었던 젊음이었다

식민지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진 것은 나라뿐인
궁핍한 국민이었다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풍요한 나라는
아느냐 너희 아버지, 어머니들이
간호사로 전쟁의 상처를
씻어낸 대한민국이다

머리채 잘라 가발로 만든
대한민국이다
외국에서 탄을 캐 모은
대한민국이다
새마을을 새 나라로 넓힌
대한민국이다

한강의 기적은
신이 준 선물이 아니다

가난할 땐 태어나선
안 될 너희들을 위해
가난을 이긴
너희 부모들의 기적이다
너희들께 선물한 그들의 대한민국이다

이제는 너희들의 몫이다
지금도 다 못 준 미안함에
남은 세월 주름 깊은
너희 부모들 앞에

그리고 오늘을 추억 할
너희 후손들 앞에

한 세대의 양심과 자부로
새롭게 써야 할
애들아!

이제는 너희들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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