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공감터' 표석(標石)의 무성의한 설명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나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표석이라면 더 상세하게 기록했어야 한다.
서울 시내를 걷다 보면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비석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원각사터, 필운대터, 돈의문터…’ 등이 새겨져 있는 이 비석들은 서울시가 설치한 ‘문화 유적지터 표석(標石)’이다.

‘문화 유적지터 표석’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나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각 구청에서 민원을 접수하면 서울시에서 구성된 표석자문위원회가 설치 여부를 결정한다. 서울시는 1985년 종로구와 중구를 중심으로 표석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2009년 4월 기준 361곳에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 190개가 종로구에 있다.

1999년 11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169번지에 설치된 ‘선공감터’ 표석도 그 중 하나이다. 표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선공감터(繕工監址) 조선시대 토목과 영선(營繕)을 관장하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이 있었던 자리> 가로, 세로 각 63cm의 넓은 돌판 위에 세 줄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다.

선공감은 조선시대에 한양의 여러 토목공사의 수행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나무, 철, 숯, 대나무 등의 공급, 장인들을 관리·양성하고 궁궐후원을 비롯한 궁궐부속 원유(苑囿: 대궐 안에 있는 동산)에 대한 각종 공사와 보수를 중심으로 한 관리도 맡았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시설물을 건설하고 그에 대한 유지관리를 수행한 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원유(苑囿)의 조성이나 개보수, 왕실의 사당이나 제사시설 내 정원의 조성 등이 영조(營造)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행정제도를 통해 공사가 이루어졌다. 궁궐조성처럼 사안이 중대하거나 규모가 큰 공사일 경우 임시기관인 도감(都監)이 설치되어 수행하였으며, 공조(工曹) 소속의 시공 부서인 선공감이 이를 지원했다. 일반적인 토목, 건축, 조경공사와 그 유지 관리에는 공조의 영조사(營造司)와 선공감이 맡았다. 영조사는 궁실과 성곽의 점검에 치중하였고 신축이나 보수공사는 선공감에서 맡아 실시했다.

<조선시대 토목과 영선(營繕)을 관장하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이 있었던 자리>라고 성의 없이 기록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면 ‘문화 유적지터 표석’의 목적에 더 부합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토목(土木)·영선(營繕: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이 있던 자리이다. '선공(繕工)'의 繕은 깁다·고치다·보수하다는 의미이고 工은 장인·기교·기능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繕工監이라 하면 '보수하는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시설물을 건설하고 그에 대한 유지·관리를 수행한 기관으로 건설부(建設部)의 기능과 유사하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관청으로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24(1298)년에 장작감(將作監)을 선공감으로 개칭했다. 그 뒤 선공사(繕工司), 선공시(繕工寺), 장작감(將作監) 등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太祖) 1(1392)년 7월 다시 선공감이 설치되었으며 26대 고종(高宗) 31(1894)년에 폐지되었다.
선공감은 한양 내 토목공사의 수행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나무, 철, 숯, 대나무 등의 공급, 장인들의 관리와 양성, 궁궐후원을 비롯한 궁궐부속 원유(苑囿)에 대한 각종 공사와 보수를 중심으로 한 관리를 맡았다.》

표석 상의 공간이 허락한다면 첨가해도 좋을 이야기로 선공감에 속해 있던 장인(匠人)들에 관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木造)였다. 따라서 목수의 위치도 상당했는데 세종(世宗, 1418~1450) 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조는 60명의 목장(木匠)을 선공감에 두었고 대목장(大木匠)은 정 5품의 벼슬을 받았다. 1497년 숭례문 개축공사 때는 대목장이 정 3품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대목장(大木匠)은 목조 건물 건축에서 집 지을 나무를 선별하고 이를 마름질하는 것은 물론 설계·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대의 건축가나 다름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도채공(塗彩工)이라는 단청(丹靑) 화공은 궁전을 비롯한 객사(客舍), 관아, 사묘(祠廟), 누정(樓亭) 등의 단청을 도맡아 색칠하였다. 지붕을 덮는 기와를 굽거나 기와나 이엉을 잇는 일을 담당했던 개장(蓋匠), 온돌(溫突) 만드는 일을 맡았던 돌장(돌匠), 벽돌 만드는 전장(磚匠), 울타리를 만드는 파자장(把子匠), 잔칫상을 꾸미는 조화를 담는 꽃바구니나 덮개를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상화롱장(床花籠匠), 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내는 죽장(竹匠), 조각 일을 맡았던 조각장(彫刻匠) 등도 선공감 소속이었다.

우리가 현재 보고 감탄하는 당시의 건축물의 기와 한 장, 단청 하나에도 그들의 손길이 닿아있다. 이런 기관을 단 세 줄로 설명한 것은 너무 무성의한 일이 아닐까? 더욱이 ‘문화 유적지터 표석’을 설치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나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면 그에 걸맞는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 마땅하다.


李知映(조갑제닷컴)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