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4년 2월 16일 밤 8시경 압록강을 건너 탈북 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강이 얼어있던 상태였습니다. 저는 양강도 혜산에서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강을 건넜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다가 심천(深圳, 홍콩 부근)으로 옮겼습니다. 혼자서 중국에서 지도 한 장 들고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은 철조망 같은 것이 없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베트남군에 체포가 돼 중국으로 넘겨졌지만, 운이 좋게도 중국 깡패의 도움을 받아 차를 타고 베트남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중국 깡패는 저를 공안으로 착각했지만, 제 사정을 듣고 중국 돈 7000원을 주면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깡패들은 돈이 필요했고, 저는 베트남으로 가야 했기에 서로에게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베트남으로 가는 길엔 검문, 검색도 많지만 서로 협조가 잘 돼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 후 베트남을 통해 캄보디아로 이동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부터 한국 당국이 개입을 했습니다. 교민들이 호텔 등을 이용하여 탈북자들을 보호하였고, 캄보디아에서부턴 한국 당국이 탈북자들을 관리했습니다. 제가 당시 탈북해서 그곳으로 갔을 땐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보호를 요청하고 한국행을 원했지만 잘 안 받아줬습니다.
북한에서 대기업소는 배급과 월급을 주지만 소기업소는 직원들이 이름만 걸어 놓고 출근을 하지 않고 돈벌이를 하여 일정액을 기업소에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공무원은 배급과 월급을 줍니다. 평양은 2009년 올해 배급을 주지 못해 6·7·8월엔 감자를 줬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의 약 70%가 당에 의존하지 않고 시장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이렇기에 현재 북한의 시장은 점점 커져가는 추세입니다. 북한 당국은 시장을 축소하기 위해 연령제한, 농촌지원 기간에는 시장 폐쇄(시간제한)와 같은 조치를 하지만 그 효과는 없습니다. 북한 시장에는 웬만한 것이 다 있습니다. 라디오와 TV도 있습니다. 다만 家電제품의 경우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할 수 없습니다. 구하고 싶으면 家戰제품을 파는 상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구할 수 있습니다. 유리와 같은 건축자재(自製) 역시 구할 수 있습니다. 물건은 큰 리어카를 이용해 나릅니다. 북한 시장에는 일당을 받는 전문 리어카꾼이 있습니다. 시장이 형성되니 주변에 술집도 있습니다. 시장에서 술은 대놓고 팔진 못하고 음식과 함께 숨겨 좌판에서 판매합니다. 안전원이 단속할 때는 술을 숨깁니다. 술집은 당의 공식 허가가 있어야 음식점 형태로 차릴 수 있습니다. 시장의 질서는 안전원들과 시장단속반(관리소 - 인민행정위원회 산하)이 잡습니다.
평양은 구역마다 시장이 있는데, 당에서 허가한 합법 시장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주민들이 하는 골목장 마당이 있습니다. 시장이 커질수록 김정일에 대한 반감은 높아집니다. 북한 주민이 시장에서 돈을 벌어 돈맛을 알게 돼 하루라도 나가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노력동원을 할 경우 이에 대한 반감이 많습니다. 욕을 하며 “이 XX들이 우리한테는 주지도 않으면서 돈도 못 벌게 한다”, “왜 내가 나가야 하느냐”며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할 수 없게 되면 남이 내 돈을 다 버는 것 같아합니다. 예전엔 반장이 노력동원에 나오라고 하면 모두 나왔지만 시장이 확대된 이후 노력동원 요구에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시장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시장을 없애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시장을 막으면 당이 배급을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구권이 무너질 때도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구권은 굶어 죽지는 않았습니다.
북한도 1992년까지는 체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무조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도에 임수경이 방북했을 때, 우리(북한)의 국력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통일이 금방 올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해외로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북한 엘리트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고 러시아가 개방하는 등 당시 정세를 알았지만 일반 주민들은 그러한 내용을 모르기에 우리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한 주민들의 생각이 변했습니다. 지금 북한 사람들은 1990년대 후반 식량난 당시 굶어죽은 사람들을 ‘고지식’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당에서 하라는 대로 했기 때문에 굶어 죽었고,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과 거꾸로 가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살고 싶으면 당에서 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북한에서 남한당국에서 보내는‘인민의 소리방송’을 들었습니다. 외부(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내부(북한)로 자극을 주어야 변합니다. 저 역시 북한에서 라디오를 듣고 자극을 받아 민주화 운동을 하려고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사상총화(자기비판)는 주민총회라고 하여 한 달에 한 번 합니다. 한 주 한 번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느슨해졌습니다. 이것은 黨의 통제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선 돈만 있으면 남한 비디오도 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미국 영화도 보고 한국 드라마(겨울연가)와 영화(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장군의 아들)를 보았습니다. 저는 '장군의 아들'이 가장 재미 있었습니다. 역사도 조금 나오고 액션 영화이다 보니 북한 주민들도 좋아했습니다.(계속)
정리 - 조갑제닷컴 李庚勳 인턴기자
"주민의 70%가 스스로 생계 개척”
- 김대성(NK지식인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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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27, 1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