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親日派는 김정일, 진짜 克日派는 이승만, 박정희, 이건희

평화선으로 독도를 지켜낸 이승만, 경제발전으로 일본을 따라잡은 박정희, 소니를 누른 삼성의 이건희 회장.
김정일은 한국에 대하여는 못되게 굴면서 일본에 대하여는 그지 없이 비굴하다. 고이즈미 수상이 압박을 가하자 납치해간 일본인들도 돌려주었다. 국군포로와 납치해간 同族은 수십년간 억류한 자가 일본사람들을 상전처럼 우대한다. 이 자야말로 뼈속 깊이 親日사대주의자이다. 북한정권은 일본정부에 잘 보여 배상금을 받아 쓰려고 별별 추태를 다 부려 韓民族의 체면을 구기고 있다. 북한정권은 조총련을 시켜 일본에서 돈을 뜯어가는데, 그 숫법이 너무나 치사하여 한민족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가면 김정일 때문에 얼굴이 붉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김정일을 야쿠자 두목 정도로 취급하고, 북한을 거지국가로 여긴다.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인이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다니도록 해준 사람, 즉 克日의 영웅은 세 사람이다. 평화선을 그어 獨島를 지켜낸 李承晩, 경제발전으로 일본을 따라잡은 朴正熙, 일본인의 자존심 소니를 누른 삼성의 李健熙 회장이다.

이완용은 죽은 친일파, 김정일은 살아 있는 親日派요 李承晩, 朴正熙, 李健熙는 克日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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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평화선'을 검색해 보았다. 이런 기록이 나타났다.


<발생배경

1945년 9월27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일본점령과 함께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일정 水域으로 한정하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하였다. 이 맥아더 라인에 대해서 미국은 일본에 일본을 방위하는 군사경계선이라고 선전하였고, 한국에 대하여는 한국의 主權이 미치는 水域경계선이라고 통고하였다.
이후 1951년 9월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 및 캐나다와의 〈어업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한·일 예비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어업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간만 끌었는데,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하여 한국은 일본이 맥아더 라인의 철폐를 기대하여 그 후에 회담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 일본이 〈어업회담〉을 거절한 지 2주 만에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였다. 한국은 이 선언이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소위 ‘평화선(平和線)’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선포된 평화선의 배경에는 韓日 간 어선수와 어업기술의 심한 격차, 그에 따른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 보호의 필요성, 임박한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대한 보완,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專管化) 추세 등의 상황에 대한 대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용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하여 ‘이승만 라인’ 또는 ‘이 라인(Lee Line)’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안에서부터 평균 60海里에 달하며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인접해역과 연해안의 上下에 현존하거나 혹은 장래에 발견될 광물, 해산물 등 모든 자연자원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국가의 주권을 보전하며 또 행사한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는 멸종될 우려가 있는 자원이 남획·감소·황폐되어 한국과 그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 水域 내의 모든 자원과 이에 관련된 수산물을 정부의 감독·관리 하에 둔다.
셋째, 대한민국은 새로운 발견, 연구 혹은 이익 등 장래에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보호水域의 경계선을 수정할 수 있다.
넷째, 이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해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반응을 보인 것이 일본이었으며, 그 밖의 미국·영국·대만 등의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일본은 평화선이 어업 및 어선에 대한 규제뿐만 아니라 獨島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 고등어 성수기가 다가옴으로써 수산청의 감시선뿐만 아니라 보안청의 함정까지 출동시켜 호위出漁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호위에 의한 출어를 감행하기 직전인 1952년 9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M. W. 클라크 대장은 북한의 잠입을 막고, 전시(戰時) 밀수출입품의 해상침투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한반도 주변에 평화선과 거의 비슷한 범위의 해상방위水域을 설정하였다. 클라크 라인으로 불린 이 수역이 설정된 것은 한국전쟁이 격렬하던 당시, 한일 간의 충돌은 전쟁수행에 좋지 않다는 미국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미국은 일단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국의 평화선에 대한 묵시적인 옹호 때문에 일본은 평화선에 대하여 강력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평화선이 선포된 후 일본은 즉각 〈어업회담〉의 재개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선을 사용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어업회담〉은 일본의 평화선 철폐요구와 한국의 평화선 고수의 입장이 대립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원조의 감소와 이로 인한 한국경제의 불황이라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일본자본의 도입에 의한 경제 불황의 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화선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작년 광우병 촛불 반대 시위를 했던 젊은이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獨島를 지켜낸 사람은 李承晩 대통령이다'고 말하자 모두가 놀라는 것이었다. 촛불시위를 반대할 정도로 깨어 있는 젊은이들이었지만 半 이상이 李承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李承晩 건국 대통령을 '매국노' 비슷한 인물이라고 배웠다는 이들이 많았다. 다수가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이라고 배웠는데 그 사람이 독도를 지켜냈다니?'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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