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화폐개혁의 실패와 교훈

市場을 죽이려 하는 김정일의 화폐개혁도 物價高와 주민의 自衛策으로 실패할 것이다.
*金正濂의 반론


1962년에 접어들면서 박정희는 全方位(전방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착수, 외자도입 추진, 울산공업센터 건설, 민정이양 준비, 제3공화국 헌법제정 준비, 공화당 事前(사전)조직, 한·일 회담, 월남파병 검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밀리에 추진하던 통화개혁 준비작업에 신경을 써야 했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연도표시가 檀紀(단기)에서 西紀(서기)로 바뀌고 미터법이 공식 단위로 쓰이게 되었다. 전해의 대풍작의 영향도 있고 해서 나라의 분위기는 밝았고 사회는 무언가를 향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란 경쾌한 유행가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한·미 관계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두 나라의 관계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뒤흔들어 위기로 몰아넣게 되는 화폐개혁 준비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의 실무자인 천병규 재무장관은 1961년 말 영국의 데라루社(사)와 새 화폐인쇄계약을 체결하고 귀국한 뒤, 정보부 연구실 요원의 신분으로 통화개혁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김정렴에게 비로소 진실을 털어놓았다. 한국전쟁 중의 통화개혁에 참여한 적이 있고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낸 금융전문가 김정렴은 펄쩍 뛰었다.

“천 선배! 어쩔려고 통화개혁을 하십니까? 이건 안 됩니다.”

김정렴이 반대한다고 통화개혁이 멈추어지기엔 일이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천병규 장관은 1953년 통화개혁 관련 문서를 한국은행에서 소문내지 않고 빼내오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김정렴은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자료 한 벌을 제가 소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쉽게 해결되었다. 김 씨는 ‘통화개혁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어차피 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겠으니 사람을 보충해 달라’고 했다.

1953년 통화개혁 때 김정렴은 한국은행 조사부 기획조사과장이었다. 그때 과장대리로 함께 일했던 裵秀坤(배수곤·뒤에 상업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역임)은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천병규 장관은 한국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배 차장을 정보부에 파견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김, 배 두 사람은 1953년 개혁 때 한국은행 발권국장으로서 새 화폐의 수송, 배정 등의 업무를 맡았던 金幷玉(김병옥·뒤에 조흥은행 전무)을 찾았다. 그는 한국은행을 퇴직하여 조흥은행 감사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도 불러들였다. 몇 달 뒤 한국은행 인사과장 대리 安鍾起(안종기·뒤에 신한은행 감사 역임)가 합류하여 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정보부 소유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보안을 위해 옮겨 다녔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 쓰였던 마포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네 사람은 왕년에 통화개혁에 관계했던 자신들이 같이 다니면 눈치를 챌 것 같아 차를 탈 때도 시간차를 뒀고 말조심을 한다고 술을 끊기도 했다. 통화개혁의 지휘자인 최고회의 유원식 재경위원이 김정렴을 주미참사관으로 임명하여 신문에 인사발령이 보도되도록 한 것도 보안을 위한 위장이었다.

김정렴 팀은 산업자금을 동원하기 위한 통화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런 의견을 강력히 상신하되 계획안은 만들어가기로 했다(김정렴 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

1962년 5월 17일 장충동 박정희 의장 공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박 의장을 비롯, 송요찬 내각수반, 유원식 위원, 천병규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렴은 계획안을 보고하면서 불가론을 건의했다.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해서는 통화개혁이란 비상수단보다는 전통적인 재정금융수단을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해야 한다면 충분한 사전준비가 필수적입니다.”

김정렴은 계획안을 보고한 뒤에도 다시 불가론을 개진했다고 한다. 다른 참석자들은 국가적 견지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박정희 의장 앞에서 김정렴은 미국과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비록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이지만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이상 사전협의를 통해서 원조물자의 사전비축과 사후의 원활한 도입을 기해야 합니다.”

모든 참석자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동감했고 통화개혁 작전의 지휘자 유원식 위원도 “염려말고 나한테 맡겨라”고 했다. 김정렴의 보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되었다”고 칭찬했다. 이때만 해도 김정렴은 언제 통화개혁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말하는데 영국에서 찍은 신화폐가 내일 부산항에 들어오고 6월 10일을 기해서 화폐개혁을 단행한다는 것이었다. 김정렴은 경악했다. 자신의 팀에 發券(발권)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신화폐 인쇄에 대해서는 당연히 자신들에게 검토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혁명정부가 외국에서 신화폐를 찍고 서둘러 날짜를 잡아 놓은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날(5월 18일) 김종필 정보부장, 이영근 차장, 그리고 김정렴은 용산 미군 비행장으로 가서 쌍발 소형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1시간 남짓 비행한 뒤에 水營(수영)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들은 부산항 제2 부두로 달렸다. 부두 끝에 있는 창고지역은 통행금지였다. 그곳에는 네덜란드 선적의 큰 화물선 한 척이 접안해 있고 차지철 대위 등 공수부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신은행권의 하역은 이영근 차장의 지휘하에 군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군인들은 사과상자 네 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상자를 내리면서도 속에 새 화폐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무기가 들어 있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에 조심조심하면서 상자를 옮겨 ‘소화기’, ‘경기관총’, ‘중기관총’, ‘곡사포’, ‘통신장비’, ‘화공약품’이라고 표시된 장소에 쌓기 시작했다. 한번은 크레인으로 옮겨지던 상자가 떨어졌다. 김정렴은 신화폐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으나 상자 속에 또 두꺼운 포장지가 들어 있었다.

이틀간의 하역 작업을 끝내고 네덜란드 선박이 출항하게 되었다. 이 배는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김정렴은 이 선원들이 기밀을 누설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화물을 싣고 온 영국 인쇄소 데라루社(사)의 대표는 화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선장, 그리고 사무장이며 명예를 걸고 보안을 책임진다고 약속했다.


*화폐개혁 충격



화폐개혁을 이틀 앞둔 6월 7일 재무부는 은행감독원에서 검사역 13명을 뽑아 부산 부두로 보냈다. 이들은 장교로 위장했다. 그들은 정보부 요원들과 함께 군인들을 지휘하여 새 화폐를 교환 장소로 인도하는 책임을 졌다. 군인들에겐 “이 안에 폭발물이 들어 있으니 잘못 다루면 큰 일 난다”고 이야기를 해두었다. 군인들은 상자를 들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이상한 냄새가 난다. 화공약품이 터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뛰어오곤 했다.

화폐 교환은 한국은행이 책임지고 교환소까지의 운반은 정보부와 군대가 맡았다. 보안은 완벽했다. 천병규 재무장관은 閔丙燾(민병도) 한국은행 총재에게까지 비밀을 유지했을 정도였다. 천병규의 생전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의장은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에게는 48시간 전에 통보했다고 한다.

최고회의 의장실에 불려온 버거 대사에게 통화개혁의 지휘자인 유원식 위원은 “선물을 하나 주겠는데 맞추어보시오”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버거 대사는 “내각 총사퇴인가?”라고 했다. 박정희 의장이 “통화개혁을 한다”고 했을 때 버거 대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잘하는 일’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순진한 유원식은 이런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나중에 기자들에게 “통화개혁에 미국 대사도 찬성했다”고 말했다.

버거 대사는 이때 속으로는 ‘어디 두고 보자’라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5·16이란 군사 쿠데타도 미리 탐지하지 못했던 미국 대사관으로서는 통화개혁이란 경제 쿠데타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액의 원조를 제공해 온 미국으로서는 受援國(수원국)의 ‘멋대로’에 배신감까지 느낄 만했다. 천병규 장관도 같은 시간에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을 방문하여 통화개혁을 통보했다.

1962년 6월 9일 저녁 7시가 지나자 조용하던 최고회의 청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최고회의 전 의원, 전 각료,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한은 총재가 불려왔다. 회의실의 문이 닫히고 박 의장이 짤막하게 비상소집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서 유원식이 전문 29조와 부칙으로 된 ‘긴급통화조치법’의 제안 설명을 했다. 극비작업팀의 책임자 김정렴은 세부사항을 보고했다. 법안은 오후 8시 35분 만장일치로 최고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즉석에서 소집된 閣議(각의)는 이 법에 따른 시행령과 세칙을 의결했다.

박정희 의장은 “극히 제한된 몇 사람들 외에는 사전에 협의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각료와 최고위원 전원은 밤 10시 10분 전까지는 일절 외부와 연락을 끊고 연금 상태에 있어 달라”고 지시했다. 이 순간 이 장소를 빠져나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였다. 회의실 출입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민 총재를 제지했다. 이 모습이 기자들의 눈에 띄였다. 어느 기자가 “통화개혁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오후 8시 40분쯤 최고회의 기자실에 뛰어 들어온 李厚洛 공보실장은 흥분된 표정이었다. 기자들에게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이 자료는 밤 10시 정각까지 일절 외부에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한국은행에 당도한 민병도는 금융통화위원회를 소집하고 임직원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통화개혁에 관한 비밀계획을 수립해온 김정렴은 문서 보따리를 총재에게 넘겨주었다. 긴급통화조치에 관한 법령, 해설, 기구 편성, 지시사항들이 들어 있는 보따리였다.

“李相德(이상덕) 이사를 통화조치대책위원장에 임명하고 이 보따리를 주면 제1차 통화개혁 때의 경험이 있으니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1962년 6월 9일 밤 10시에 공표된 통화개혁(10일 0시부터 발효)에 즈음한 담화에서 ‘부정부패 등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해 있으나 이는 산업자금화나 장기저축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서 ‘누증된 통화량은 언제든지 투기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악성 인플레의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박 의장은 이어서 ‘음성자금과 과잉구매력을 진정한 장기 저축으로 유도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인플레를 방지하는 조치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이 통화개혁은 화폐단위인 ‘환’을 ‘원’으로 바꾸면서 화폐가치만 10 대 1로 평가절하한 것이 아니었다. 박 의장의 담화는 이 화폐개혁의 진정한 목적이 화폐교환 때 노출되는 음성자금을 은행에 장기저축 형식으로 붙들어둔 뒤 이를 투자재원으로 동원한다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의 침해인 것은 물론이고 보는 이들에 따라선 국가자본주의적인 발상이란 비난을 들을 만 했다.

박정희 의장은 6월 10일 아침 李秉喆 삼성 사장을 불렀다.

“어젯밤 방송 들었지요?”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는 이 길밖에 없다고 하여 단행한 것입니다. 극비리에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최고회의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새 지폐는 천병규 장관이 영국에서 인쇄했습니다.”

“신화폐의 교환을 위해서 날마다 수백만 명이 은행창구에 줄을 서야 하므로 그 원성이 모두 정부에 돌아갈 것이고 국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에너지의 낭비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화개혁은 해만 남겼지 성공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워낙 인플레가 심해 그 수습책으로 통화개혁을 단행했었지만 한국의 사정은 다릅니다. 큰 돈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경제인의 의견도 사전에 들을 걸 그랬군요.”

대화 중에도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개혁에 대한 각계의 반응들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데 무슨 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이병철은 “전면 해제가 어려우면 기술적으로 풀어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뒤 물러 나왔다.



*미국의 저지 工作




최근 비밀등급에서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를 보면 새뮤얼 버거 미국대사는 1962년 6월 7일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통화개혁에 대한 통보를 받은 바로 그날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국무부에 올렸음을 알 수 있다.

‘통화개혁은 부정축재에 대한 징벌적 처리의 성격을 갖고 있고 정부에 대한 기업의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도 지장을 줄 것이다’는 분석이었다. 미 국무부의 인식도 같았다. 생산공장에서 사업자금을 상당 기간 빼내 동결시키는 것은 위험하고 기업인들에게 무거운 자본과세를 하는 것으로 비쳐져 외자 도입에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시각이었다. 이미 때가 늦어 통화개혁을 중단시킬 수는 없으니 통화개혁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동결예금을 빨리 해제시키도록 하라는 것이 버거 대사에게 떨어진 워싱턴의 지침이었다.

6월 10일을 기해 단행된 통화개혁은 과격한 조치들을 담고 있었다. 당장 첫날부터 100환 이상의 구화폐 유통을 금지시켰다. 50환 이하의 소액 화폐는 7월 10일까지 신화폐와 병용하도록 했다.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금융기관의 예금 등 금전채무의 지불을 6월 17일까지 전면 금지시키고 구권을 예입한 세대에 한해서 1인당 500원씩만 신권으로 바꾸어 주고 나머지는 강제 저축시킨 조치였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그 유통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기 때문에 사회가 대혼란에 빠졌고 경제활동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6월 10일 한국은행에서는 한·미 간 대책회의가 열렸다.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하비브 정치참사관, 파파노 경제참사관, 킬렌 유솜(USOM·對韓 원조기관) 처장, 유솜의 호이저 박사를 데리고 왔다. 한국 측에선 유원식 최고회의 재경위원, 천병규 재무장관, 민병도 한은 총재, 통화개혁 준비팀의 실무책임자 김정렴이 참석했다.

버거 대사는 “사전에 우리 쪽에 아무런 통보나 협의가 없었던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통화개혁 조치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을 평가한다”고 했다. 유원식 위원은 “보안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딴 뜻은 없었다”면서 “6월 16일부터 실시하게 될 긴급 통화조치에 대해서는 미국 측과 충분히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버거 대사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이 자리에 있었던 김정렴은 1953년 통화개혁을 할 때 참여한 경험에서 미국 원조당국과의 사전협의가 성공의 한 요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의장에게 통화개혁계획을 보고할 때도 이 점을 강조했고 유원식 위원도 “알았다”고 긍정했는데 사태가 이렇게 된 데 대해 놀랐다고 한다(회고록 《한국경제정책30년사》).

6월 16일 오후 최고회의는 본회의를 열고 화폐교환 때 은행에 예입된 동결자금의 처리기준을 담은 ‘긴급통화조치법’을 통과시켰다. 법은 통과되었지만 최고위원들은 사전에 아무 협의를 받지 못한 데 대해서 유원식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재경위원장 김동하조차도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원식은 미국 측과도 미리 약속해둔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원식은 생전에 펴낸 회고록에서 ‘미국 대사관에서 나에게 수없이 면담을 요청해왔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이날의 긴급통화조치법에 따라 화폐교환 때 은행에 예탁된 돈과 그 이전의 예금에 대하여 일부를 봉쇄계정으로 돌려 정부가 강제로 산업자금으로 동원하게 되었다. 봉쇄율은 6개월 이상 1년 미만의 저축성 예·적금일 경우 예입금의 100분의 35, 기타 예금일 경우 1,000만 원 이상은 전액을 봉쇄계정으로 돌려 동결하는 식으로 예금의 성격과 기간에 따라 일정한 비율을 정해놓았다.

동결된 봉쇄계정의 자금은 6개월 이내에 설립될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으로 대체된다. 이 돈은 또 한국은행의 특별지불준비금으로 예치되고 예금주에게 연 15%의 이자를 지급하기로 했다. 문제는 봉쇄대상이 된 자금이 약 970억 환으로서 예상보다도 적었다는 점이다. 유원식이 이런 식의 통화개혁을 발상하여 박정희 의장을 설득시킬 때 그는 “통화량의 약 3분의 1은 화교들이 가지고 있고 그 규모는 1,000억 환에 이를 것이다”고 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음성자금도 화교 자금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 되었다.

정부는 봉쇄금액의 50%까지는 예금주에게 융자해주기로 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했으나 이 강제조치의 충격은 너무 컸다. 자금의 흐름이 막힌 관계로 가장 빨리 타격을 받은 것은 중소기업이었다. 약 1만 7,000개의 업체를 거느린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집계한 가동률에 따르면 통화개혁이 실시된 6월 10일의 가동률을 100으로 했을 때 6월 20일의 그것은 42.5% 에 불과했다. ‘한두 달 내 완전휴업위기’, ‘작을수록 큰 타격… 원료마저 고갈’이란 제목의 기사가 <조선일보> 6월 22일자 경제면에 등장했다. 6월 21일 대한상공회의소와 서울상공회의소는 ‘통화개혁 이전의 예금에 대해서는 전액을 동결조치에서 해제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나왔다.

미국은 단호하게 나왔다. 한 번도 통화개혁을 해본 적이 없고 사유재산권을 신성시하는 미국인에겐 국가에 의한 민간 자금의 강제동원이란 발상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박히게 되어 있었다. 먼저 미국정부는 버거 대사를 통해서 기한 1년 미만짜리 예금의 일부를 동결한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를 박정희 의장에게 전달했다.

김정렴은 서독 통화개혁의 비슷한 사례를 정리하여 미국 측에 설명했으나 미국 측은 “서독의 경우는 국제금융기관과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면서 납득하지 않았다. 박정희 의장은 김정렴에게 “전체 봉쇄계정의 15%를 차지하는 1년 미만 예금에 대한 봉쇄는 해제해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의 압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모든 봉쇄계정의 해제를 요구해왔다.

킬렌 유솜 처장은 온건파인 상공부 정래혁 장관을 만나 이념적인 관점에서 통화개혁을 비판했다.

<이번 통화개혁은 한국경제를 국유화, 통제경제의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미국의 원조가 쓰이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생산 활동은 위축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6월 21일 미 국무부의 에드워드 라이스 차관보는 丁一權(정일권) 주미 한국 대사를 불러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존중해왔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미국도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전제한 다음 “만약 (한국을 돕고자 하는) 미국의 노력이 무효화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對韓(대한) 원조정책을 재고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통화개혁을 통해 강제 동결시킨 예금을 풀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는 뜻이었다. 정부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던 혁명정부로서는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김정렴은 모든 봉쇄예금액의 3분의 1을 자유계정으로 풀고 나머지 3분의 2는 기한 1년의 정기예금계정으로 전환한다는 특별조치법안을 기안하여 최고회의에 올렸다. 7월 13일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강제 동결된 자금을 기반으로 하여 산업개발공사를 설립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매진한다는 통화개혁의 목적은 사라졌고,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바꾸는 데 그치게 되었다.

최고회의는 통화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동하 재경위원장을 외무국방위원장으로 돌리고 통화개혁의 발상자인 유원식 위원을 사임시켰다. 그 전에 송요찬 내각수반과 천병규 재무장관은 증권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었다. 이로써 통화개혁에 관계했던 요인들이 모두 거세된 것이다. 그러나 통화개혁에 반대했던 김정렴은 그 뒤 중용된다.

통화개혁의 실패는 박정희가 집권한 뒤 처음으로 겪은 위기였다. 많은 위기가 그렇듯 그 속에는 호기가 숨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 실패의 교훈을 오랫동안 기억했기 때문이다. 통화개혁 실패를 통해서 박정희는 내자동원에 의한 민족주의적 경제개발 전략을 단념해야 했다. 동원할 만한 자본축적이 아예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통화개혁은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민족자본에 의한 기간산업 건설과 수입대체산업 건설 같은 발상은 힘을 잃게 되었다. 이후부터 외자도입, 보세 가공무역, 수출입국 같은 對外(대외)개방 노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혁명정부가 통화개혁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구정권 시절의 부정축재자금 등 음성자금을 양성화한다는 것이었다. 도덕적 명분을 앞세운 박정희의 통화개혁 실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사정 차원에서 추진하다가 실패한 것과 비슷하다. 경제를 섣불리 도덕적으로 다룰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는 체험을 한 박정희는 그 뒤로는 경제에 대해서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이즈음 박정희 의장은 상공부 차관·장관을 지낸 박충훈과 지방 시찰 중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봉건적인 직업관인 士農工商(사농공상) 의식에 대해서 박충훈은 工(공), 즉 제조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商工農士(상공농사)를 주장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수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기업인들을 앞세우고 士(사)로 상징되는 지식인들을 뒤로 밀어버리는 정책을 추진한다. 오랜 文民(문민)정치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이단이었고 학생, 언론인, 학자 등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첫 저서를 펴냈다. 1962년 3월 1일에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 277쪽에 이르는 이 책은 몇 사람의 학자들이 代筆(대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머리말은 박정희의 글이다. 이 글은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전략과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헌이다.

<고달픈 몸이 한밤중 눈을 감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다난한 歷程(역정)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짊어진 유산들은 몹시 무겁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더욱이 8·15 해방 후의 민족수난사는 뼈아픈 바가 있었다. 과거 17년史(사)는 두 정권의 부패, 부정으로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는 오늘의 危局(위국)을 결과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更生(갱생)의 길이 없을까. 이지러진 민족성을 고치고 건전한 복지 민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없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無事主義(무사주의), 安逸主意(안일주의)의 생활태도를 청산하여 근면한 생활인으로 ‘인간혁명’을 기하고 사회개혁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혁명이라는 수술만으로 환자가 元氣(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며 病因(병인)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건강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이 다시 오지 않도록 恒久的(항구적)인 方略(방략)과 기초공사를 해놓아야 한다.

이 길이 어디 있을까. 꼭 있을 것이다. 이 민족의 걸어온 길과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에 내키는 대로 몇 줄씩 메모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 되어 나왔다. 敍述(서술)은 무디고 서투르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단편적이나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난날 우리 民族史上(민족사상)의 惡遺産(악유산)을 반성하고 李朝(이조) 당쟁사, 일제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國民道(국민도)를 확립하는 일이다. 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社會再建(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농민들의 기나긴 빈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 재건을 위해 있는 힘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누적된 빈곤을 하나씩 추방하고 공업화된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經濟自立(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勝共(승공)의 길이다.

북한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하여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創發性(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中道而廢(중도이폐)하는 ‘토끼’보다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북이의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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