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건의 불법성과 全 대통령의 업적은 모순관계가 아니다”

趙甲濟 현대사강좌/ “政治史는 권력, 힘의 관계를 보아야… 도덕적 평가를 앞세우면 역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129회 趙甲濟 기자의 현대사 강좌가 12월14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홀에서 ‘12·12사건 30년의 재평가’라는 주제로 열렸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10·26 이후 여론의 민주화 요구 大勢 분위기에서 12·12사건이 돌발적으로 발생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민주화가 10년 늦춰졌다. 이것이 바로 12·12사건의 反역사성이다”라고 말했다.

趙甲濟 대표는 “사건에서 30년,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멀어지면 사건을 보는 시각이 투명해진다. 12·12사건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좋은 교육 자료이다. 역사를 절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역사를 정치 도구화하는 사람, 흑백구조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역사는 그때의 실제 상황이 어땠는가를 보아야 한다. 역사는 스토리(이야기)이다. 평가는 나중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다”라며 “이런 관점에서 12·12사건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趙기자는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재가없이 연행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러나 全斗煥(전두환) 정부가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 대하여 ‘12·12사건은 비판하면서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고 앞뒤가 맞지 않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역사를 일면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것이다. 역사는 총체적,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 특히 政治史(정치사)는 권력, 힘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도덕적 평가를 앞세우면 역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12·12는 절대 쿠데타가 아니었다. 본래는 단순한 연행계획에 불과했다. 연행과정에서 流血(유혈)사태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부대가 동원되어 국방부와 육군본부, 수경사를 점거해 결과론적으로 쿠데타가 된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전두환은 살기 위해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고 말했다.

趙대표는 “12·12에 가담했던 전두환 측 인사들은 12·12가 適法(적법)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鄭昇和(정승화) 씨를 연행했을 때 김재규와 손잡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죽였다는 자백을 받아냈어야 한다. 그러나 (연행 후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전두환의 가슴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먼저 김재규라는 패륜아에 대한 분노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의리감으로 지위高下를 막론하고 수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10·26 이후 軍 내부에서 정치성이 있는 장군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됨에 따라 자기 위치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12·12사건을 취재할 때 정승화 씨와 친분이 생겼습니다. 당시 제가 분노했던 것은 정승화 대장 연행 후에 있었던 물고문입니다. 정승화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심경을 자술했는데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장교는 포로가 되어도 예우를 해줍니다. 그런데 예편도 안한 현역 계엄사령관을 물고문합니까? ‘이런 일을 한 전두환측은 반드시 보복당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승화 씨는 권력을 잃은 후, 말년에 잘한 사람이다. 좌파정권 당시 星友會(성우회·전역 장군 모임) 회장으로 재직하며 金大中(김대중) 정권을 견제했다. 김대중 정부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할 때 군 元老를 초청해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 바로 옆에 앉아 ‘국보법 폐지 반대 의견서’를 낭독하고 온 사람이 정승화 씨다. 따라서 나는 정승화 씨를 기회주의자나 비겁한 사람으로 모는 류의 인신공격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승화 씨가 좋다고 전두환 대통령을 惡黨으로 몰 수 있습니까? 혹은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정승화 씨를 악당으로 몰 수 있습니까? 元均(원균)이 악당이 되어야 李舜臣(이순신)이 위인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한쪽을 영웅시하기 위해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죽입니다. 일본은 안 그렇죠. 양쪽을 모두 영웅으로 만듭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났으니까 거기서 활동한 사람들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평가해 주면서 한국 역사에서 하나의 재미 있었던 스토리로 편안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趙대표는 1995년 9월, 12·12사건 당시 李建榮(이건영) 3군사령관을 감청한 테이프를 월간조선이 입수해 특종을 했던 일화를 밝히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테이프’라고 소개했다. 테이프에는 등장인물이 40~50명 정도 나오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처세를 하고 판단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며 군사반란 현장을 중계한 세계에서 유일한 테이프라는 것이다.

그는 具昌會(구창회) 당시 9사단 참모장이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연대 출동하지 않는다’며 허위보고를 하는 통화내용을 들려주고 “이건영 장군은 자기가 명령하면 연대가 출동 안할 줄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격동기에는 명령이 자동적으로 먹히지는 않는다. 3군사령관에게 연대 출동하지 않는다고 보고하는 사이에 사실은 열심히 출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쿠데타다”고 말했다.

“구창회 씨는 그 뒤에 대장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이 12·12가 던지는 굉장한 고민거리죠. ‘저렇게 한 사람이 대장까지 승진한다?’ 그렇다면 부하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국 장교단에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겁니다.”

조갑제 대표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난폭하게 정리한 것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12·12에 가담했던 이들은 군사 반란자로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았고 개개인이 형도 살았다. 그 이후로는 군이 정치적으로 휩쓸리는 일은 비교적 줄었다. 그런데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군 장교들이 이번엔 좌파세력의 反헌법적 정책에 따라갔다. 어떻게 보면 이런 항명(12·12)과는 질적으로 더 문제가 있는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李明博(이명박) 정부 들어서 그대로 있고, 韓美(한미)연합사 해체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군이 또 다른 방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교단이 스스로 명예를 지켜야 된다. 한국 장교단이 오로지 憲法(헌법)과 국가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가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12.12 테이프 마지막에 수록된 신원불명의 대령급 장교들이 12·12사건 종료 후 통화하는 내용을 소개했다.

“이들은 지난 밤(12·12)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서로 정보교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정승화 걔 말이야’ 이렇게 나옵니다. ‘하소곤 어쩌고’하며 존칭을 다 생략합니다. 저 대화에 무슨 愛國心(애국심)이 느껴집니까? 나라 걱정하는 게 느껴집니까? 마지막이 걸작이죠. ‘출세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만두하고 소주 먹는 게 제일 편하다.’ 이 대화가 테이프의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어요. 이것이 1979년의 대한민국 軍 장교단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趙대표는 “군 장교단은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난 61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켜낸 가장 위대한 조직이나 미시적으로는 저런 면이 있다. 군사문화란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정착되는 것이다. 기사도, 사무라이, 화랑도가 그런 것이다. 장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국, 명예, 정직성이다. 장교가 거짓말하면 국가가 넘어간다. 이런 모랄을 2009년 오늘날의 국군 장교단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 1979년보다 나아진 것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막힌, 두 장교의 마지막 잡담이다”라고 평했다.

李知映(조갑제닷컴)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