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2만6,677명의 日帝경찰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약 40퍼센트인 1만619명이었다. 직급별로는 지금의 경무관급에 해당하는 道 경찰부장에 조선인이 1명, 경시급(지금의 총경)에 21명(日人 48명), 경부급(지금의 경정)에 105명(日人 433명), 경부보급(지금의 경감)에 220명(日人 790명)이었다. 나머지 조선인 경찰관 1만 272명(日人 1만4,775명)은 비간부급인 순사부장과 순사였다. 윤종화(尹鍾華, 당시 황해도 경찰부장)는 日帝통치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道경찰부장이었다.

충남 출신인 尹씨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경시로 출발했다. 그는 1944년에 경찰부장이 됐다. 당시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이던 야기 노부오는 『일본과 한국』이란 회고록에서 자신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신을 실천하는 뜻에서 조선인 경찰부장 임명을 총독에게 건의, 실현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윤종화는 해방 직후(당시 40세)소련군에 끌려간 뒤 生死를 알 수 없게 됐다. 야기 노부오는 “윤씨가 처음으로 경찰부장이 되자 한국인 고급관리들은 대환영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加害행위를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해서도 조선인의 경찰고위직 취임은 환영할 만하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고 썼다.
해방당시 한국인으로서 日帝경찰의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확인되는 이는 다음과 같다.
전봉덕(田鳳德, 당시 경기도 보안과장, 해방 뒤 육군헌병사령관)
이익흥(李益興, 당시 평북 박천서장, 해방 뒤 내무장관)
윤우경(尹宇景, 당시 황해도 송화서장, 해방 뒤 치안국장)
손석도(孫錫度, 당시 서울 성동서장, 해방 뒤 중부서장)
최연(崔燕, 당시 경기도 형사과장, 해방 뒤 수도경찰청 고문)
노덕술(盧德述, 당시 평남 보안과장, 해방 뒤 수도청 수사과장과 헌병중령)
최경진(崔慶進, 당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해방 뒤 수도청 차장)
노주봉(盧朱鳳, 당시 전남도 경시, 군정 때 전남 경찰부장)
마지막 정례회의
1945년 8월 8일 오전 경기도 경찰부(현재 정부 종합청사 건너편 치안본부 별관 건물)에서는 정례 과서장 회의가 열렸다. 경찰부장 오카는 “일본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경시급 조선인 간부 3명- 형사과장 최영(崔鈴, 해방 뒤 崔燕으로 개명), 보안과장 전봉덕(田鳳德, 육군헌병사령관 역임, 변호사), 성동서장 손석도(孫錫度, 뒤에 변호사)-이 참석하고 있었다. 오카는 이들을 둘러보면서 “조선은 불행해집니다”고 매우 예언적인 말을 했다. 오카는 그때 가장 정확한 정보 루트를 갖고 있었다.
성동경찰서 맞은편에는 조선지구 단파수신소가 있었다. 수신내용은 조선총독, 정무총감, 조선군사령관, 조선군참모장, 체신국장 등 6명에게만 전달되곤 했다. 손석도 서장은 관할서장이란 명목으로 은밀하게 수신보고서를 한부씩 얻어 살펴본 뒤 경기도 경찰부장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 단파수신을 통해 오카 경찰부장은 대본영의 지시사항이나 戰況보고를 알 수 있었고, 강화협상이 본격화한 것도 알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반도가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분할 점령될 것이라는 대본영의 예상도 수신했기 때문에 오카는 조선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투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1945년 4월 초 한반도가 戰線化할 것에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요시찰 조선인에 대한 처리방침을 극비리에 각 경찰서로 통보했다고 한다. 그때 황해도 송화(松禾)경찰서장이던 윤우경의 기억에 의하면 그 요지는 대강 이러했다.
①소련군이 한반도에 침입하면 공산계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
②미· 영군이 상륙하면 민족주의자를 예비검속하라.
③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와질 때는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겨라.
④후방으로 옮길 여유가 없을 때는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
윤우경은 “이 극비親展 봉투는 2중으로 되어 있었고, 서장만이 보고 보관하라고 적혀 있었다. ‘적당히 처치하라’는 대목은 살해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회고 했다.
조선인 경찰관에 집중된 보복
해방은 일제경찰에 대한 보복사태를 불렀다. 日帝 36년의 잔혹한 탄압을 생각한다면 그 보복의 정도는 만주나 중국에 비해 지극히 온건한 것이었다. 북한보다도 남한에서의 보복이 더욱 온건했다. 보복의 표적은 당연히 日帝경찰이었다.「조선총독부종정(終政)의 기록」(山名喜男)에 따르면 8월16일에서 23일 사이 조선에 있는 경찰관에 대한 폭행·협박 등 사건은 177건이 발생했다. 177건 가운데 조선인 경찰관에 대한 보복행위는 111건으로서 일본인 경찰관에 대한 보복 건수보다도 훨씬 많았을 뿐 아니라 조선인 일반 관리들에 대한 건수(109건)보다도 많았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말단들이었다. 따라서 怨聲(원성)을 많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인 경찰관들은 거의가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맞아죽는 이들도 생겼다. 충청북도에서 일본인 경찰관은 한 명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만 한국인 경찰관은 3명이 살해됐다. 전남 광주에선 한국인 경부가 맞아죽고 일본인 순사 한 명이 한국인으로부터 위협을 받자 자살했다. 경북에서도 한국인 경찰관 1명이 살해됐다. 일본인 관리 2명은 자결했다. 충남 공주에서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가 주민에게 얻어맞아 빈사상태에 빠졌다.
8월16일에서 25일까지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보복성 피살자는 28명, 그중 6명은 일본인(2명은 경찰관)이었다. 피살된 한국인의 과반수가 경찰관, 상해를 당한 67명의 조선인 가운데 40명이 경찰관, 구타당한 조선인 118명 가운데 경찰관이 67명이었다.
*呂運亨 노선에 의구심
呂運亨(여운형)은 8월15일 아침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경찰권의 지휘권 인수,
②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 및 수형자의 석방,
③집회의 자유보장 등 약속을 받아낸 뒤 즉시 치안의 확보에 나섰다.
그는 유도사범 장권(張權)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장에 임명했다. 張權의 주위엔 많은 武道人과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8월 25일까지 전국 140여 개소에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중앙의 建準본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된 것보다는 현지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더 많았다. 문제는 서울의 치안권이었다. 여운형은 정무총감 엔도가 당초 약속과는 달리 경찰권 이양을 거부하자 조선인 경찰관들을 동원, 경찰서 접수에 나섰다. 여운형에 호응한 종로서 보안주임 윤명운(尹明運) 경부 등 5,6명은 16일 오후 종로경찰서 등 4개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종로서 현판을 떼고 ‘한국경위대본부’란 큰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들은 日帝 경찰제복을 벗어 던지고 ‘경위대’란 완장을 찼다. 조선인 경찰관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간혹 경찰제복을 입은 조선인들이 군중에게 뭇매를 맞던 분위기였다.
8월17일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첫째 조선인 경찰간부들이 여운형 노선에 의구심을 갖고 윤명운(尹明運) 등의 親건준활동에 반발했다.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최연, 전봉덕 등 수십 명의 간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여기서“여운형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건준은 정부가 아니다”는 의견이 지배하여 “당분간 사태를 주시, 치안유지에만 전념한다”고 다짐하게 됐다. 일본의 경찰과 군대도 경위대에 접수된 경찰서 탈환에 나섰다. 19일엔 일본군대가 서울시내에 투입됐다. 총독부는 이날 “여전히 총독부가 치안권을 갖고 있다”면서 “建準은 행정기관을 접수할 자격이 없다”는 성명서를 냈다. 달아났던 조선인 경찰관들도 조금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경찰간부나 군수에게 경찰서장직을 넘겨주는 마지막 인사조처를 취했다.
귀환장병의 모임인 학병동맹과, 전문학교생이 중심인 조선학도대가 경찰서 재접수를 시도한다. 미군이 상륙한 직후인 9월9일 학병동맹은 종로서 접수에 성공했다. 이에 자극받은 조선학도대는 성북서로 몰려갔다. 성북서장은 그 며칠 전에 파주군수에서 전보 발령되어온 서재식(전 한일은행장)이었다. 경찰서의 경비를 책임진 이는 日軍 장교로 근무하던 중 해방뒤 달아난 일본인 경찰을 채우기 위해 경찰관으로 급히 임명된 이(李)모였다. 조선학도대와 일본경찰은 총격전을 벌여 학도대원 2명과 경찰측의 최(崔)모 순사가 숨졌다.
해방에서 미군 진주때까지 서울엔 세 갈래의 치안조직이 있었다.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있다가 해방 직후 종로서장이 된 최연은 ‘大조선경찰대’를 조직, 종로서에 본부를 두고 각 署의 조선인 경찰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경비대는 학생·청년들을 주축으로 하여 치안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미군 진주가 늦어지자 달아났던 일본인 경찰관들이 소속 경찰서로 귀환하여 나름대로의 직무를 수행했다.
해방 뒤 조선인 경찰관 그룹의 지도자로 등장한 함경남도 출신의 최연은 당시 44세로서 가장 대표적인 고등계 형사였다. 혜산진경찰서의 고등게 형사로서 박달(朴達) 사건을 해결, 수백 명의 독립투사들을 잡아 가두고 그 공으로 경찰최고훈장을 받았던 그는 본명이 최영(崔鈴)인데, 다카야마(高山淸只)로 창씨개명했다가 해방 뒤엔 최연(崔燕)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북한의 사정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측의 행정권을 조선인민위원회에 넘기게 한 뒤 일본인 행정·사법관의 수뇌부 및 경찰관 등을 억류했다. 도에 따라서 사정은 약간씩 달랐지만 지사, 경찰부장, 경찰부의 각 과장은 공통적으로 억류되었다. 이들 중 범죄자로 분류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1945년말 만주의 연길로 보내져 수용되었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모두 현직에서 추방되었고, 간부들과 고등계 형사들 중엔 억류되었다가 재판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소련군과 북한공산당측이 일본인과 조선인 부역자들에 대해서 실시한 수사 및 재판에 대해선 이런 자료가 있다. ‘악질 전직의 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중 일찍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간 전 평안북도 내무부장 다카하시 히데오는 ‘억류개황보고서’를 작성, 일본정부에 제출했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1945년 9월 2일 평안북도 임시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은 소련군의 명령이라면서 신의주에 있는 일본인 官民 유력자 40여 명을 소환하여 보안부 유치장에 집어넣고, 그날 밤 야마지 지사 등 12명을 전범이라면서 평양으로 송치하고 다음날 나머지는 풀어주었음. 1946년 8월 8일 평안북도 검찰소는 타카하시(전 평안북도 내무부장)와 타케오(전 평안북도 관공부장)를 다시 불러“일본인의 유력관리를 불구속 상태로 조사하고 있는 데 대해서, 조선인측 친일반동분자를 구속수사하고 있는 것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 있으므로 할 수없이 구속하겠다”면서 두 사람에 대한 보석을 취소, 신의주 인민교화소에 수용시킴.… 그뒤 10월 11일 두 사람은 기소됨. 기소요지는 “다년간 조선에서 주요관직을 역임하면서 그 직무를 통하여 조선인민을 압박 착취한 것은 악질 前職의 죄를 구성한다”는 내용이었음.
10월 30일 평안북도 재판소는 타카하시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구형은 징역 2년). 12월 25일 타카하시 등 일본인 수형자 7명은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징역 2년 이하의 죄상이 가벼운 자는 석방한다”는 통보를 받고 석방되어 1947년 3월 일본으로 송환됨. …북한의 시·군·읍·면 인민위원회는 조선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해외망명가, 또는 한국내 형무소의 수형자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어 과거에 일본의 조선통치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사람은 모조리 반역자 또는 親日분자란 이름으로 제거하고 있음. …신의주형무소에선 마사다(전 평북 경무과장)등 네 명의 일본인 관리가 복역중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음. 지금 신의주형무소에는 야마시다(전 신의주지방법원장)가 징역 5년, 하타마(전 신의주 쌍엽국민학교 보도)가 징역 5년, 카시하라(전 정주경찰서 보안주임)가 징역 4년의 확정 선고를 받고 복역중임. 야마시타의 범죄사실은 ‘다년간 사법관으로서 조선인을 압박하고 특히 조선인 사상범(공산주의자·조선독립운동자)에 대하여 사형, 무기징역 등 가혹한 판결을 내린 악질전직의 죄’임. 하마타는 국민학교 補道시절 장난을 좋아하는 한국인 아동의 손에 달군 젓가락을 갖다대어 상해를 낸 혐의임. 이 범죄는 수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하마타는 그 잘못으로 퇴직했는데도 다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복수적인 처벌로 보임.

평양형무소엔 야마자와(전 평양복심검사장, 무기징역), 모리(전 평양복심 차석검사, 징역 15년), 모토하시(전 평양지방검사장, 징역 15년), 와타나베(전 평양지방 검사, 징역 3년), 쓰치(전 평양지방 판사, 불명), 아라타케(전 순천경찰서장), 고토(전 순천경찰서 고등주임), 사토(전 정주 헌병) 등이 복역중이거나 재판받는 도중에 있음. 사토는 삼일만세사건 때 정주에서 조선인 혁명가를 여러 명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중임. 20여 년 전의 행위에 대하여서까지 이를 추궁할 정도로 집요함. 신의주 경찰서의 경부, 순사부장 등은 소련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보내진 듯함. 일본의 조선통치시절 이에 협력했던 조선인은 조선인을 위하여 선의의 협력을 한 것인데도 북한에서는 그들을 반동분자니 반역자라고 부르면서 형무소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고향으로부터 추방하는 등 박해를 가하고 있으며, 이를 피해 남한으로 도망하는 사람도 늘고 있음. 이들에 대하여 장래 일본정부는 적당히 구제방법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도의상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됨.(모리타 요시오.『朝鮮終戰의 기록』자료편)
필자는 1984년에 일본에 가서 이 타카하시 노인(당시 75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07년부터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타카하시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중학시절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하면서 경성중학과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에 이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식날 가장 친했던 한국인 친구가 하던 이야기를 그는 잊지 못한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너는 아마 도지사까지는 하겠지. 그러나 네가 도지사가 되었을 땐 아마도 조선은 독립할 거야.”
타카하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선인이 언제까지나 일본 지배를 받고 있을 민족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미 軍政에 의하여 경찰간부로 중용
1945년 9월7일 美軍은 인천을 통해 상륙했다. 이날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문 제 1호를 발표, 38선 이남에 軍政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포고문은 또 종래의 행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선언, 공무원들이 직장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이 포고문은 숨어버린 조선인 경찰관들에게는 원대복귀 명령이 됐다. 당시 지방은 물론이고 경기도 경찰부에서도 조선인 경찰관의 출근율은 20퍼센트(日警 90퍼센트)선을 맴돌고 있었다. 지방에선 복귀한 조선인 경찰관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있던 주민자치적인 보안대원들에게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조선인 경찰관들의 복귀가 거의 마무리된 것은 미군 진주가 끝난 10월 중순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경찰권을 총독부로부터 인계받은 뒤 조선인 경찰관들을 중용했다.9월9일 조선 주재 日軍의 항복을 정식으로 받은 하지 사령부는 총독부 수뇌부를 해임한 뒤 14일엔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와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 등 경찰 간부들을 해임했다. 미군정 당국의 경찰행정 책임자는 헌병대장인 시크, 경기도 경찰부장에는 스털링 대위가 취임했다. 스털링 대위는 맨 처음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의 임명작업을 벌였다. 이때 人選작업에 깊게 관여한 것은 스털링 대위와, 해임된 뒤에도 한동안 보좌역으로 근무한 오카 전 경기도 경찰부장 및 종로서장 최연 등 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서울 시내 10개 서장으로 임명된 인사는 모두 일제 조선인 경찰관과 관료 출신이었다.
종로서장 이성실(李聖實), 중부서장 손석도, 동대문서장 김정제(金正濟), 성동서장 이희상(李熙祥), 성북서장 김일석(金一錫), 서대문서장 최운하(崔雲霞), 마포서장 박주식(朴朱植), 용산서장 김정채(金貞彩), 영등포서장 윤명운, 창덕궁서장 변종현(邊宗鉉).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내 21개 경찰서장들도 반이 신인, 반은 日帝 경찰출신으로 임명되었다. 경기도 경찰부의 과장으로 임명된 이들도 전부가 日帝 때 경찰 간부였다. 인사권을 쥔 경무과장에 최연을 비롯, 보안과장 전봉덕, 형사과장 홍병식, 정보과장 한승린(韓承麟), 건축과장 정덕현(鄭德鉉), 경제과장 문형식(文亨植), 소방과장에 김정배(金晶培)등이었다.
*한민당의 등장
미 軍政장관 아놀드 소장은 9월14일 “지금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혼합구성된 경찰관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조직하기 위해 유능한 한국인들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하고 사설 경찰조직의 해산을 명령, 경찰권을 조선인 경찰 출신들에 의해 장악된 軍政경찰로 一元化시켰다. 경기도 경찰부 경우 해방당시 경찰관은 日警 1,857명 조선인 1,293명 합계 3,150명이었다. 日警이 물러난 뒤인 1945년 10월경에는 경기도 경찰관 숫자가 4,819명으로 늘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3,500여 명의 새로운 조선인 경찰관들이 들어온 것이다. 숫자로만 본다면 경찰은 순수 조선인 경찰관들이 主流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부가 말단 순경이었고, 질 또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간부층을 거의 독점한 것은 일제하 조선인 경찰 출신자들이었다. 9월16일 軍政경찰은 처음으로 경찰관채용시험을 일제 때의 경찰강습소(옛 경제기획원 자리)에서 실시했다. 면접시험이었다. 면서기, 간수 등 日帝 관직 경험자는 무조건 합격판정을 받았다. 자기 이름을 써보게 해서 文盲者가 아닌 것이 드러나면 대충 합격시켜주었다. 첫날에 200명이 합격되었다. 교육기간은 3일이었으나 교재와 교관 요원이 부족했다. 日警제복을 나눠준 뒤 칼을 차는 방법, 경례 요령 등을 알려주고 잡담조의 경험담을 해주는 정도였다. 경찰관강습소는 10월 2일자로 경찰학교(Academy of Police)로 바뀌고 당분간 신규모집을 중단했다. 채용한 경찰관의 재교육에 힘쓰면서, 日軍·滿軍 출신자 26명을 교관요원으로 받아들여 교원진을 강화했다.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0월 21일 부민관에서 경무국 창설식을 가졌다. 당시의 경무국장은 아고 대령, 조병옥(趙炳玉)은 관방총무과장, 최능진(崔能鎭)은 수사과장이었다. 조병옥은 당시 미래의 경무국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조병옥이 군정경찰의 총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정세를 보는 미군정 고위층의 여러 갈래의 견해 가운데 조지 윌리엄스 고문의 견해가 하지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교사 아들로 태어나 당시 하지의 고문이던 윌리엄스는 1945년 10월17일에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불러 경무부장의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조병옥의 회고록에 따르면 윌리엄스는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하고 反共사상에 철저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조병옥은 한민당의 당적을 유지하면서 경무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윌리암스는 한국정치에 대하여 대단히 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윌리암스는 해방된 한국에서 중립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급진파(좌파)와 민주파(우파)밖에 없으므로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정치에 대해 보다 시야가 넓은 레오나드 버치는 박사학위를 가진 젊은 중위로서 하지의 부관이었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장 장권을 경무국장 후보로 하지에게 건의했으나 결국 윌리엄스의 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張澤相 등장
1945년 11월8일 군정경찰의 제복, 제모 등 복장이 새로 제정됐다. 뉴욕주 경찰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딴 것이었다. 압제경찰의 상징이던 帶劍(대검)은 경찰봉으로 바뀌었다. ‘봉사와 질서’가 경찰의 모토가 되었다. 1945년말까지 경무국장으로는 아고 대령, 참페니 대령, 매글린 대령 등 3명이 거쳐갔다. 이들은, 유창한 영어실력에 포용력과 설득력이 있고 호방한 조병옥(총무과장)을 신임하여 그에게 인사권을 많이 주었다. 조병옥이 정식으로 경무국장 발령을 받은 것은 1946년 1월4일이었다. 나중에 경무부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경무국 차장은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출신인 최경진(崔慶進), 수사국장은 최능진, 수사부국장은 김태선(金泰善, 뒤에 서울시장), 통신과장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 조응천(曺應天)이었다. 최경진을 제외하고은 뚜렷한 親日경력이 없는 이들이었다. 송진우(宋鎭禹)가 암살된 직후 불안해진 한민당에 의해 장택상은 경기도 경찰부장(뒤에 수도청장으로 명칭 변경)으로 추천되었고 미군정 당국은 1946년 1월 13일 그를 임명했다. 한민당은 군정경찰의 총수인 경무국장과 수도 일원의 치안책임자에 自派 인물을 앉힘으로써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유일하고도 강력한 권력의 실체를 장악한 셈이었다.
조선인 경찰을 중용한 조병옥과 장택상 중 장택상의 영향력이 더 컸다.
“조병옥은 그래도 아버지가 왜경 총에 맞아 그 후유증으로 죽고 자신도 감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 고통을 당해본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대지주 아들인 장택상은 아버지가 독립운동 요원에게 피살되었고 몇 번 왜경에 불려가 조사 받은 경험밖에 없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존경심과 친일경찰관에 대한 증오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광복 20년』의 저자 김교식(金敎植)은 평했다.
“『광복 20년』을 쓰면서 그에게 몇 번이나 왜 친일 경찰관들을 부렸냐고 물었지요. 그는 짜증스러운 듯 당시로서는 공산당을 때려잡는 기술자로서 그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장택상은 1938년 청구회 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잡혀간 일이 있었다. 가창현(價昶鉉)은 당시 고등계형사로서 그를 직접 취조했었다. 장택상은 수도청장으로 취임한 직후 가(價)씨가 아직도 경부보(경위에 해당)로 경찰에 몸담고 있음을 알고는 그를 불렀다. 지금 인천에서 생존해 있는 80노인 가씨에 따르면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가 그때 나를 마구 차고 때리고 했지만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하더군. 어디 1계급 특진시켜줄 테니 종로서장 하지 않겠나? 어느 시대나 자기 직책에 충실하기만 하면 높이 평가받는 거야.”
가창현은 서울시내 근무를 사양, 결국 수원서장으로 임명되었고, 정부수립 뒤에는 서울시경 사찰과장의 요직을 맡기도 했다(뒤에 도경국장까지 올랐다).
* 월남한 고등계 형사 출신 등용
1946년 1월12일자로 군정청 경무국은 경무부로, 각 과는 국으로 승격되었다. 조병옥과 장택상의 조선인 경찰 출신 중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그 직후(1월)에 있었던 서울시내 8서장 임명이었다. 서울시내의 8개 경찰서장자리는, 반탁운동 때 8개 경찰서 서장들이 동조하여 해임됨으로써 비어 있었다. 서장으로 새로 임명된 이들은 모두 전직 일제 경찰관들이었다.
중부서장으로 발령된 이구범(李九範)은 일제 때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로 있으면서 장택상의 편의를 보아준 적이 있는 이였다. 일제 경찰 경력이 20년이나 되는 이씨는 개성이 고향이고 개성서에서 오래 일했었다. 개성시민들은 해방 직후 이씨의 집에 몰려가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간신히 서울로 달아났던 그는 군정경찰로 변신, 중부서 경무주임이 되었다가 개성서장으로 발령받았으나 부임하자마자 다시 시민들의 배척운동을 겪고 되돌아와 중부서에 있다가 서장이 된 것이었다.
용산서장으로 임명된 김형진(金亨鎭)은 일제 경부보 출신이었다. 해방때 평북 박천서장이었던 이익흥은 해방 뒤 남쪽으로 피신했는데 동대문 서장으로 임명됐다.
일제 때 평남 영원서장을 지낸 이호우(李虎雨)는 마포서장으로,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였던 윤기병(尹箕炳)은 수원경찰서장에서 서대문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수도청은 조선인 경찰관 일색으로 되었다.
한편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는 해방때 평남경찰부 보안과장이던 노덕술을 임명했다. 이익흥(李益興)의 등용과 함께 이 인사는 중요한 흐름을 반영한다. 즉 북한에서 월남한 조선인 경찰 인맥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사였던 것이다. 해방 때 북한지역에 있었던 많은 경찰·헌병들이 남한으로 넘어와 경찰과 군 수사기관으로 많이 들어감으로써 이 양대 조직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공산당으로부터도 탄압을 받은 사람들로서 남하한 뒤에는 좌익과의 투쟁을 선도하게 된다. 노덕술은 해방 직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가 공산세력에게 붙들렸다. 몇 달간 구금되어 있다가 1945년 말에 풀려나 남쪽으로 왔다.
진남포경찰서 사법주임을 지낸 김종수(金宗洙)는 3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 있다가 월남하여 양주서장을 지냈다. 월남하여 군정 및 한국경찰에 중용된 조선인 경찰 출신자로서는 이밖에도 이하영(李夏榮, 군정 때 경기도 경찰국장), 윤우경(尹宇景, 치안국장 역임). 홍병희(洪炳熙, 서울시경 부국장 역임), 김태일(金泰日, 수도청 부청장 역임), 문석제(文錫濟, 평택서장 역임), 김원일(金元一, 가평서장 역임), 장영복(張永福, 경무부 공안부국장 역임), 홍택희(洪宅熹, 평안도에서 경부보로 근무, 고등경찰관, 서울시경 사찰과 부과장, 총경 역임), 박사일(朴士一, 평북에서 고등경찰관으로 근무, 경기도 경찰국장 역임) 등 수십 명에 이른다.
이 월남경찰관들을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주로 소개한 이는 경무부 차장으로 조병옥 부장을 보좌하던 최경진과 수도청 고문으로서 늘 장택상 청장 곁에 있던 최연이었다. 최경진은 평남 보안과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고(해방 당시엔 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최연은 북한에서 무장독립군을 붙드는 데 이름을 날린 최고참 고등경찰관이었으므로 북한에서 내려온 조선인 경찰관 출신들과 쉽게 맥이 닿았던 것이다. 노덕술 수사과장은 1946년 4월 6일 송진우 살해범들을 검거함으로써 수사 베테랑으로서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게 됐다.
* 최강의 집단이 된 경찰
미군정이 기존의 일제 경찰구조와 한국인 경찰관들을 재활용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해 커밍스는 “좌익에 철저히 대항할 만한 다른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했다.『주한 미군사』는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유일한 권력의 수단이었다”고도 했다. 한국경찰에 대한 미국측 감독관이었던 윌리암 매그린 대령은 “한국인 경찰들이 일본인을 위해 업무를 훌륭히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것이다”고 했다. 軍政 3년 동안 최대의 물리력을 가진, 잘 통제된 집단은 경찰이었다.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는 아직 체제를 굳히지 못했고 그 속에는 남로당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미군 장교 도널드 맥도널드는 “가장 철저히 중앙집권화된 것은 경찰이었다. 道 경찰국장은 도지사가 아니라 서울의 경무부에 책임을 졌다. 경찰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차량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소총, 기관단총 및 자체 통신망을 갖고 있었다”고 썼다(『2차대전중 군정에서의 미국인들의 경험』, 1948, 뉴욕).
무엇보다 경찰은 가장 치밀한 통신망과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1946년 중엽 軍政경찰은 39개소의 무선통신소와 2만2,700킬로미터의 전화선을 갖고 있었다. 군정경찰은 또 일제경찰의 비밀경찰 임무 즉 사상통제와 정보수집의 임무를 계승했다. 고등과는 사찰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기능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시위의 허가, 공연물에 대한 검열 등도 경찰이 관장했다.
*우익민족주의자 崔能鎭의 孤鬪
조선인 경찰 출신 일색의 軍政경찰에서 민족적 입장에서 고군분투한 사람도 있었다. 최능진. 그는 1899년 7월19일 평남 강서군에서 부유한 地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두 형은 반석(班石) 독립만세사건의 주모자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최능진의 형은 상해로 탈출, 폭탄을 비밀 제조하다가 폭발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는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뒤 중국을 거쳐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스프링필드대학 체육학과와 듀크대학원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1928년까지 워싱턴 YMCA의 체육간사로 재직하면서 흥사단에도 관게했다.
1929년에 귀국하여 숭실전문의 체육교수로 부임, 5년간 재직했다. 1937년엔 흥사단 계열의 국내단체인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살았다. 옥고를 치른 뒤 출감, 만주로 건너가 봉천 근교에서 정미소를 경영했다고 한다. 해방 뒤 평양에서 조직된 建準 평남지부(위원장 조만식.曺晩植, 부위원장 현준혁.玄俊赫)의 치안부장이 된 최능진은 수백 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日警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공산당의 활동이 강화되고 건준조직과 치안부가 해체된 뒤 좌우합작의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가 조직되자 최능진은 조만식과의 개인적 접촉은 취하면서도 인민위원회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의 정치노선은 철저한 右翼 민족주의였다. 9월 중순 현준혁이 암살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여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최능진은 9월15일 10여 명의 옛 부하들을 데리고 남하, 9월17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그를 따라온 나병덕(羅炳德, 군정 경무부의 특무과장 역임)의 증언에 따르면 최능진은 경찰관 강습소의 한국인 소장(미국인 소장은 헬자브 소령)으로 취임했다는 것이다. 反共·反日운동 경력과 미국유학 경력을 아울러 갖춘 최능진은, 미국인들의 눈에는 이상적인 ‘새 경찰인상’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미군 당무자를 통해 최능진은 10월5일에 신설된 경기도 경찰부 특무대에 평양에서 데리고 온 자기의 부하들을 집어넣었다. 특무대장으로 임명된 나병덕은 스털링 경찰부장의 特命사건을 전담 수사했다. 특무대는 조선총독부가 해방 직후 조선은행권을 불법으로 찍어 남발한 사건과 해방 후 기밀문서를 소각하고 기밀비를 남용한 사건 등을 취급했다. 특무대는 이 사건과 관련 군정청 고문으로 남아 있던 미즈다 전 재무국장, 니시히로 전 경무국장 등을 잡아들여 두들겨 패주기도 했다고 한다. 대원들은 거개가 독립투사들이거나 그 후예들이었고, 日帝 때 옥고를 치른 이들도 많았다.
*경찰특무대의 日警 암살사건
나병덕에 따르면 특무대는 공식 수사활동과는 별도로 이른바 악질왜경들에 대한 보복작전을 은밀히 추진했다고 한다. 3·1운동 당시의 총독부 경무국장 구니모토(國本), 경기도 경찰부장 하라다(原田大元), 악질 고등경찰관의 대표격인 사이가(齋賀)와 미와(三輪) 등 10여 명을 표적으로 삼아 암살을 꾀하게 됐다. 10월말부터 2,3명이 한 조가 되어 이들의 행방을 추적했다. 미와를 맡았던 조에서는 “해방되기 이틀 전에 미와(당시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시)는 부산으로 출장갔다가 그 길로 일본으로 달아나버렸다”고 보고했다. 현역에서 은퇴하여 서울에 살고 있던 구니모토는 해방이 되자 남산의 일본인 수용소로 들어가버려 저격이 어렵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사이가를 맡았던 충남 서천 사람인 이갑룡(李甲龍)이 “사이가는 가족들만 귀환시키고 서울 원남동 집에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보고해왔다. 특무대원들은 암살계획을 짰다. 사이가의 행동습관과 주변지리 등을 파악했다. 1945년 10월30일 나(羅)대장은 김혁(金革) 대원을 불러 사이가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해주고 소형 독일제 권총을 건네주었다. 김혁은 평양 광명서관 주인의 아들이었다.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들려 해방 때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었다고 한다. 11월2일 오후 6시쯤 사이가는 다른 일본인과 함께 이웃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사이가가 원남도 로터리를 건너 우편국 옆골목을 지나 친구의 집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김혁은 사이가의 앞을 가로막고 지근 거리에서 권총 세 발을 쐈다. 사이가는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한국에 건너와 경성방송국의 단파도청사건, 의혈단사건 등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많이 처리하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고문하고, 옥사케 했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사상경찰 흉괴의 최후’ ‘우리의 적에 천주(天誅)’등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사이가 피살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으로 돼버렸다. 그 혼란기에 경찰(당시 동대문경찰서 관할)이 제대로 수사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김혁도 1946년 1월에 지금의 성공회 앞길(『조선일보』뒷길)에서 염(廉)모의 저격을 받아 죽었다고 나병덕은 증언한다. 염모는 그때 다른 비밀단체에 들어 있었고, 김혁은 특무대가 해산된 뒤 경찰에서 물러나 있었다. 염모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김혁의 비방에 울컥해 있었다고 한다. 나병덕(당시 경무부 수사국 특무과장)은 염모를 범인으로 밝혀내고 그를 만났으나 이 사건은 덮어두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비밀단체간의 알력은 경찰의 힘을 빌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하는 게 보통이었다. 1945년 11월9일 오후엔 한 특무대원이 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내면서 악명을 떨쳤고 해방 당시엔 총독부 기획과장이던 하라다를 남산 아래 치요다생명보험 서울지점 앞길에서 저격했다. 배에 총을 맞은 하라다는 가까운 백인제(白麟濟) 외과병원(현재의 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11월15일 정오 무렵에는 특무대원 방우용(당시 26세)이 하라다를 문병하고 나오던 쓰보이(坪井岩松)를 백병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저격했다. 쓰보이는 해방 당시 평남경찰부 감찰관이었고, 상해에서는 많은 독립투사들을 체포케 한 인물이었다. 권총 두 발은 쓰보이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쓰보이는 백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고, 방은 현장에서 경찰관들에게 붙들렸다. 나병덕은 경기도경찰부 경무과장 최연에게 부탁하여 방우용의 신분을 숨기고 배후수사도 생략한 채 기소케 하여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했다고 한다. 특무대원들과 다른 수사과 형사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무대원들은 일반형사들을 친일파 출신이라고 못마땅해했으며, 조선인 경찰관 출신들은 수사의 경험이 없는 특무대원들을 업신여겼다. 그러던중 경기도경찰부 수사과(과장 홍병식, 日警 출신)가 어느 특무대원이 친일파 인사를 위협, 돈을 요구한 사실을 밝혀내 그를 구속했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특무대는 11월말에 해체되었다. 얼마 뒤 이들의 代父인 최능진이 경무부 수사국장이 되어 나병덕을 수사국 특무과장으로 임명하자 나병덕은 옛 특무대원 10여 명을 부하로 채용했다.
*10·1폭동
1946년 9월30일 제 3경무총감부(충북·전북·경남북 관할) 황옥 총감은 대구역전에서 파업중인 철도원들에게 파업중지를 설득했다. 군중들은 돌멩이을 던졌다. 군중 가운데서 “죽여라”는 소리가 나오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경비경찰관이 당황하여 발포를 했다. 앞에 섰던 철도원 한 명이 쓰러졌다.(『중앙일보』연재「남기고 싶은 이야기」 1178회, 당시 경무부 수사부 국장 김태선의 「국립경찰 창설」16회).
1946년 10·1 대구폭동은 좌익들이 주동하였다. 좌익들은 도처에서 경찰관과 가족들을 참살하였고,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보복하였다. 치안이 회복되자 경찰관들은 (대구)폭동에 앞장섰던 폭도들을 연행 고문하고, 가족이 학살당한 경찰관들은 폭도를 즉결처분으로 총살해버리는 보복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폭동이 진압된 지 4일 뒤 趙炳玉 미 군정청 경무부장을 찾아간 경무부 고문 매글린 대령은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라면서 엄중항의했다.(김태선의 「국립경찰 창설」17회)
대구의 10·1폭동 위 수습책을 토의하기 위한 관계자 회의에서 매그린 대령은 “남북한에 있던 한국인 경찰 8000 명 가운데 5000 명이 미 군정 경무부에 의해 재임용되었으며 그들이 경찰의 核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 軍政은 경력자를 우대했으므로 경사급 이상의 간부 가운데 약 80퍼센트가 日帝경찰 출신이었다. 관구장 8명 중 5명(63%), 도경국장 10명 중 8명(80%), 총경 30명중 25명(83%), 경감 139명 중 104명(73%), 경사 969명 중 806명(83%)이 그들이었다.
구미에선 朴正熙의 형 朴相熙가 폭동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나 그는 경찰관들을 보호하여 다치는 이들이 없게 하였다. 급파된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朴相熙를 사살하였고, 이것이 朴正熙로 하여금 남로당에 가입하게 하는 감정적 동기를 부여하였다.
미 군정하에서 경찰은 1945년 11월 중순까지 1만5000여명, 1946년말까지는 2만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군정청 정치고문이 미 국무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목표추구에 장애물은 좌익단체와 경찰인데, 좌익단체는 농민속으로 침투하여 미곡수매계획에 농민들이 반대하도록 활동하고 있고, 日帝경찰 출신자가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경찰은 일제경찰의 수법을 답습함으로써 이들의 야만성이 한국민의 정치적 사고를 좌익쪽으로 돌리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Foreign Relations 1946, p. 802)는 것이었다. (한용원.韓鎔源, 『창군』에서 재인용, 1984)
군정 때 경무부 수사국장이었던 김태선(뒤에 서울시경국장·내무장관)도 “해방후 좌익계의 경찰에 대한 파괴공작이 상당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경찰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과 반목을 일삼은 軍·警 관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국립경찰 창설」, 24회)
*최능진의 苦鬪
朝·美공동회의에서 경무부장 趙炳玉은 이렇게 말했다.
“경무부장인 내가 친일 경찰관들을 많이 등용하였기 때문에 民心이 이탈, 폭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일은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직업적인 친일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 관리가 된 경우입니다.”
조병옥은 ‘직업적 친일’(PRO-JOB)은 추방해야지만 生計를 위한 친일(PRO-JOB)은 용서하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12월2일 조병옥은 조·미공동회의에서 자기를 비방한 수사국장 최능진에게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국립경찰의 협화와 명령계통의 확보에 유해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최능진은 사직한 뒤 조병옥을 비난하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이 공개장에서 최능진은 조병옥이 “민족운동자를 잡아주던 인간을 고관대작에 채용하고 순수한 독립운동자를 무경험자라고 배척한” 사람이라고 공격하고 “해방 전의 조병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최능진 수사국장은 재직중 휘하의 이종호(李宗昊) 정보과장에게 명령, 은밀하게 친일인사 카드를 작성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이를 지켜봤던 나병덕은 그 카드는 수백 명분이었고 카드마다 친일비행 기록이 올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 국장이 경무부를 퇴직한 직후 李 과장도 사표를 던졌다. 李 과장은 친일기록 카드를 자기 집으로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이종호는 6·25 때 공산군에게 총살됐다고 한다. 李 과장은 8명의 부하직원들을 지휘, 근 1년간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는 것이다. 崔 국장은 언젠가는 친일파 인사들에 대한 斷罪의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거기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최 국장의 사임과 함께 나병덕, 이종호 등 그의 측근도 물러나 경무부의 반대 세력은 완전히 거세되었다. 나병덕은 가까이에서 본 일본경찰 출신자들의 나쁜 습관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아부하기 위해 학정도 서슴지 않는 점.
둘째, 强者에게는 절대복종하고 弱者에게는 군림하는 점.
세째, 실적을 올리기 위해 범인이나 사건을 조작하고, 조작하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
이에 반해 최능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하들에게, 고문하지 말 것과,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 것, 그리고 끈질기게 수사할 것을 당부하곤 했다는 것이다.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해방 뒤 서장이 됐던 가창현은 “노덕술과 최연은 같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이었지만 사람은 달랐다”고 했다. “노덕술은 조서를 잘 만들고 고문도 잘하고 조작에도 능한 사람이었으나 최연은 원칙주의자로서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는 함경도 출신 일제경찰들을 많이 썼고, 나중에는 김태선이 내무장관이 되자 다시 그의 고문이 되어 함경도 사람들을 많이 소개한 것으로 안다. 이들은 日帝시대엔 일본사람이 뒤를 받쳐주고, 해방 뒤엔 권력자가 배경이 되어주어야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군에 좌익침투
軍政 3년간 최강의 정치권력집단은 군이 아니라 정치력을 가진 한민당과 물리력을 가진 경찰이었다. 군·경간 충돌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국군의 前身인 국방경비대는 1946∼47년간 사실상 경찰의 예비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입대시 신원조사를 안했기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입대한 좌익불순자나 범법자들이 섞여, 이들은 경비대원들이 경찰에 대해 敵對감정을 가지도록 자극하였다. 당시 경찰관들은 고급간부의 경우,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으로 경비대 요원보다는 학력이 높은 편이었고, (경찰)간부의 53퍼센트와 하급자의 25퍼센트가 일제시대 경찰관이었다는 데서 일부 경비대 요원은 질투와 증오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더우기 일제하의 군대는 군국주의적이고 戰時下에서는 이등병만 되어도 경찰관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는 데다가 日帝치하에서 경찰이 동포들에게 자행한 무자비한 職權행사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미군정은 경찰에게는 창설 때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소총을 지급하면서도 경비대에게는 일본 군복과 日帝 소총을 지급해서 불만이 컸고, 특히 수도청장 장택상 같은 일부 권위주위적인 경찰간부가 경비대원을 경시한 데서 그 영향이 하급경찰에 미쳐 양자간 충돌이 발생케 되었다. 경비대는 과거 私設군사단체 요원들로 구성되어 정치철학이 보수적인 경찰과 비교할 때 상당히 진보적인 데도 반목의 원인이 있었다.> (『創軍』, p. 133)
<경찰은 군정기간중 좌익과의 투쟁을 통해 정치화되었다. 현실적 정치감각이 뛰어난 고등경찰 출신들은 독립한국의 경찰의 전통을 정치권력과 직결시켰다. 군정기간의 무질서는 다른 신생국 같았으면 군 엘리트가 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게끔 자극했던 상황과 유사했었지만, 그때 조선경비대는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人的자원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1947년초 경찰은 2만5000여 명인 데 반해 경비대는 7개 연대를 겨우 편성해서 7000여 명에 불과했으므로 경비대보다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행사할 수 있었으며, 경찰은 일제시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상대로 사용한 정치적 통제수단에도 익숙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신상정보자료도 확보하고 있어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했다면 경비대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創軍』, pp. 140∼41)
이승만 무투표당선공작 주동한 일제경찰 출신들
경찰이 특정정치집단의 도구화하여 政敵을 파멸시키는 데 이용된 첫 사례는 최능진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 사건이었다. 崔能鎭은 1948년 5·10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입후보, 李承晩과 대결하려 하였다. 당시 최능진의 선거사무장이었던 강원식(姜元植)은 “이승만 추종자들이 벌인 방해공작은 악랄했다. 후보추천인 도장을 받아 동 선거위원회에 가면 선거위원이 자리에 없다는 이유로 추천인의 자격인준을 기피했다. 폭력배들이 인준을 받으러 가는 우리쪽 사람들을 습격, 추천서를 빼앗아가는 사건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정경문화』 1983년 10월호「李承晩의 정적 崔能鎭의 비극」)
최능진의 추천서를 탈취해간 것은 서북청년회 사람들이었다. 이 단체의 지도자였던 문봉제(文鳳濟)는 35년 뒤 이렇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李 박사 무투표당선작전은 이화장을 李 박사에게 기증한 백성욱(白性郁)의 요청에 의해 감행됐다. 서북청년단의 성북지부장 계호순(桂琥淳) 등 2명의 행동대가 최능진을 그림자처럼 미행, 등록마감 전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나오는 최를 기습, 추천서를 비롯한 등록서류 일체를 몽땅 날치기해 등록을 실력으로 막았다.”
최능진은 딘 군정장관에게 항의, 등록마감일을 두 차례나 연기받은 끝에 1948년 4월21일에야 겨우 동대문 갑구 선거위원회에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최능진 후보는 미군 CIC와도 긴밀한 연락을 해가면서 금지된 호별방문도 대담하게 하는 등 놀라울 만큼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펴 그 기세가 대단했다. 최씨는 좌익세포를 주로 이용하며 하지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尹箕炳, 일제경찰 출신)은 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李 박사를 당선시키도록 하라”는 극비지령을 받고 있었다. 유권자의 지지도가 최능진에게로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 윤 서장은 최병용(崔秉用) 사찰주임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던 끝에 최능진의 추천인을 내사해보기로 했다. 당시 입후보등록은 유권자 200명의 추천을 받도록 돼 있었다. 윤 서장은 사찰계 형사 전원을 동원, 최 후보의 추천인 배후와 추천경위를 확인토록 했다. 확인한 결과 최 후보의 추천서에 서명날인한 200명 가운데 50여 명이 부정한 방법으로 서명을 받은 것이 드러났다. 이들 가운데 30명은 동회직원을 가장한 사람이 배급을 준다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으며, 나머지 20명은 도장이 날조된 것이었다. 윤 서장은 사찰주임과 함께 추천인 확인결과 서류를 가지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노진설(盧鎭卨) 대법관을 찾아갔다. 최 후보의 등록을 무효화시켜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노진설 대법관은 “서울지구는 서울지구 선거관리위원자의 관할이니 내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고 했다. 윤 서장은 다시 서울지구 선거관리위원자이던 장경근씨(당시 서울지방법원장, 일제 때 서울복심법원 판사)를 찾아갔다. 張씨는 최 후보의 등록무효선고를 내렸다. 崔씨는 다시 추천을 받으려고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200명의 서명날인을 받지 못하고 입후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박사는 무투표 당선됐다.>(김태선,「국립경찰 창설」 27회)
* 최능진, 끝내 사형되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으로 초대 치안국장엔 日帝 검사출신 이호, 수도청장(뒤에 서울시경국장으로 개칭)엔 이승만 추종자인 김태선이 임명되었다. 일제 경찰 출신 간부들은 그대로 남았다. 수도경찰이 맨 처음 터뜨린 사건의 희생자는 최능진이었다. 1948년 10월1일 오후 3시 수도청 형사대는 최능진을 체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徐世忠), 광복군 출신인 여수주둔 14연대장 오동기(吳東起)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오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 음모를 했다는 것이었다. 최능진이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서울구치소로 넘어간 것은 10월19일. 바로 다음날에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반란사태가 확대되고 있을 때인 10월22일 군정경찰 시절 崔의 직속부하였던 김태선 수도경찰청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혁명의용군사건’의 전모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최능진 등이 남북노동당과 결탁, 국군내 自派 조직을 동원하는 쿠데타를 꾀하다가 일망타진되었다는 것이다. 김태선은 “그런데 검거자 이외의 지도자가 선동했던지 금번 여수반란사건을 야기한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표가 진실이라면 이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쿠데타 음모 사건이다. 조작이라면 이것은 한국경찰에 의한 최초의 官製빨갱이 사건이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後者의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이 사건이 발표된 타이밍, 그리고 연루자 오동기가 반란을 일으킨 여수 14연대의 바로 전임 연대장이었다는 사실이 당시엔 이들을 진짜쿠데타 모의 집단으로 믿게 할 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던 강석복(姜錫福)은 “조작의 냄새가 나 이 박사가 재임하는 동안만이라도 고생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최능진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지금 시점에서 볼 때 그는 아키노 같은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회고했다(『정경문화』 1983년 10월호 「李承晩의 정적 崔能鎭의 비극」). 1심에서 최능진은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경무대측의 압력에 의해 징역 5년형으로 무거워졌다. 최씨는 대법원에 상고를 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6·25가 터져 공산군이 형무소의 문을 열어 젖히는 바람에 출옥했다. 최능진은 敵치하의 서울에서 ‘정전·평화호소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원세훈(元世勳)등 잔류 중도파 인사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측근이었던 강원식(姜元植)에 따르면 최능진은 이 대회 개최에 있어서 공산당측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고 풀려난 뒤 9·28수복 때까지 숨어다녔다고 한다. 9·28수복 뒤 관동군헌병 출신 김창룡(金昌龍)이 이끌던 군·경·검 합동수사본부가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 최능진은 계속 숨어다녔다. 그 사이 최씨는 미군이나 이기붕 등을 통해서 신상문제의 수습을 부탁했으나 1950년 10월초 합동수사본부에 구속되었다. 1951년 1월 20일 대구에서 열렸던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그는 利敵罪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은 “피고인이 김일성 지시하에 유엔에 대해 즉시 정전을 요구하고 우익·좌익·중간파를 망라한 연합정부 수립을 획책하기 위한 소위 평화호소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진행중 괴뢰측의 반대로 流會에 이른 사실은 명백하다. 피고인은 조국통일 완수와 동족상장의 회피를 원한 것이라고 하나, 피고인의 이같은 행위는 유엔군의 실력행사를 무의미하게 하며 대한민국 정부의 부인 내지 전복을 기도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결국 피고인의 행위는 敵을 구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고 했다. 강원식은 “당시의 戰況은 중공군의 공세로 불안했고 그런 상황에서 재판도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죽음은 이승만측과 대결했던 점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李承晩의 정적 崔能鎭의 비극」).
1951년 2월11일 최능진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총살되었다. 이 총살에 입회한 것은 최경록(崔慶祿) 헌병사령관과 日帝 서장 출신인 윤우경(尹宇景) 헌병중령이었다. 1986년 9월 윤우경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혼자서 처형되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가슴에 까만 표적을 달아놓고 사격을 시작하려는데 최씨가 갑자기 헌병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합디다. 최 사령관이 저를 보고 대신 만나라고 해요. 제가 다가가니까 최씨는 ‘저는 억울합니다’고 해요. 제가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고 했더니 단념한 듯, ‘내 처자식을 돌봐주시오’라고 하더군요. 걱정 말고 안심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날 아침 최능진은 가족 앞으로 유언을 남겼다.
< 부(父)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됨인데, 너희들은 조금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도 말고 또한 父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말고, 오직 너희 5남매는 父가 있을 때보다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국가가 이 모양으로 간다면 너희 등 생명도 안전치는 못할 것이다.… 생각할 점 몇 가지.
1.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는 없다.
2. 정치, 경제, 기타 문화는 인격을 조성치는 못하는 법이고, 오직 내적, 즉 양심적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종교이다. 기독교를 신봉하기 바란다.
3. 동생들끼리 상조하고 국가·민족에 충성해라.
1951년 2월11일 대구형무소에서 부 능진(能鎭) 서(書)>
일제 때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방 뒤에는 민족주의 노선을 따랐다가 북한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월남하여 軍政경찰에 투신, 친일경찰들로 둘러싸여 고도처럼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친일경찰의 제거를 꾀했고, 이 때문에 쫓겨난 다음에 5·10선거에서 이승만에게 정면도전했다가 등록방해를 당하여 중도하차했고, 그 몇 달 뒤엔 다시 경찰의 사건조작에 말려 쿠데타 음모의 주동자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6·26를 만나 출옥했으나 敵치하의 서울에 남아 평화운동을 꾀하다가 공산군측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9·28수복 뒤에는 김창룡의 합동수사반에 체포된 뒤 利敵罪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최후를 마친 것이 최능진이었다.
『육군전사』가 밝힌 오동기의 결백
최능진 쿠데타 음모 사건에서 군부책임자로 기소된 이는 여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1968년에 나온 『육군戰史』는 이례적으로 吳 소령의 무고함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배정하고 있다. 그 전에 나온 『6·25사변 육군전사』1권 및 『공비토벌사』가 “吳東起는 반란을 획책중 체포되었고, 이에 따른 검거 선풍에 겁을 집어먹은 그의 조직이 최후 발악한 것이 본(여수)반란사건의 동기라고 볼 수 있다”고 썼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수정은 대단한 결단이며, 사건의 조작성이 워낙 명백했다는 反證이기도 하다. 오동기의 비극은 최능진처럼 그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軍內의 비판세력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01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낙양군관학교의 前身인 강무당에 입교했고 그 뒤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중국군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中日전쟁이 터지자 산동지구에서 한국인 2개 대대를 조직,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했었다고『육군전사』는 그의 독립투쟁경력을 소개하고 있다. 해방 이후 吳씨는 중국군 산동지구 군정부 교재국 組長으로 일했다. 1946년 2월에 귀국, 경비사관학교 3기 특별로 임관했다. 그가 여수 14연대장으로 부임하여 한 일들은 쿠데타 음모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게 『육군戰史』의 주장이다. 부식납품제도를 개혁, 권력층과 관련 있는 업자를 바꾸고 공개입찰제도를 시행했다. 장교들에게 편중되었던 부식비를 장병 균등으로 바꾸었다. 뒤에 여수반란사건의 지휘자가 된 김지회(金智會) 중위가 연대 작전주임보좌관으로 있는 것을 위험하다고 판단, 對전차포 중대장으로 전보시키고, 서울로 올라가 정일권(丁一權)참모부장과 송호성(宋虎聲)육군총사령관에게 金 중위의 구속건의까지 했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1948년 9월 28일 오동기 연대장은 육군본부로 소환되어 정보국장실에 구금되어 있다가 10월1일 정식으로 구속되어 軍警합동수사반에서 최능진과의 관련 여부를 추궁당했다. 이때의 수사책임자는 김창룡이었다.『육군전사』에 따르면 “吳소령은 최능진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였다가 수도청 사찰과 정보주임 박일원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박은 박헌영(朴憲永)의 비서였으나 전향한 사람인데 그뒤 남로당원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吳 소령이 신원보증을 서준 두 사람이 군대에 들어갔는데, 이들이 현역으로 최능진의 선거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를 가지고 오씨와 최씨를 관련시켜 사건을 만든 것이었다고 『육군戰史』는 주장했다.
吳씨는 1950년 2월 9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있던 중 6·25를 만나 출옥했으나 공산당의 고위관직 제의를 뿌리치고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국군의 두 장교와 경찰관 두 명이 피신해온 것을 숨겨준 뒤 탈출시켜주기도 했다. 공산당에 협력하지 않는다고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생도 했다. 9·28수복 뒤 그는 경찰에 자수했으나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라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육군戰史』는 쓰고 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에서는 오동기가 북한으로 가지 않은 사실 등을 참작, 징역 5년으로 감형시키고 곧 출옥시켰다. 『육군戰史』는 “그가 무고하게 역적의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판단할 수가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광복 20년』의 著者 金敎植에 따르면 1970년에 『광복 20년』이 동양방송 라디오 드라마로 나가고 있을 때 한 늙은이가 찾아왔더라고 한다. 그는 70을 넘긴 吳東起였다. 吳씨는 “모든 게 김창룡의 조작이었습니다. 내가 죄가 있다면 독립운동을 한 죄뿐입니다. 내가 공산주의자라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남한에 남아 있었겠읍니까. 내가 관동군이나 일본육사 출신이었다면 그런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검사를 총살한 막강한 경찰
정부수립 무렵에서 6·25 남침전쟁까지 남한에선 공산당에 의한 폭동과 반란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공산세력은 이런 사건 때마다 일제 경찰 출신들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심을 부채질하였다. 국회를 중심으로 일제 경찰 출신 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어진 것도 이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한의 좌익들로부터 국가 안보가 가장 위협받고 있을 때, 그 안보의 중추인 경찰의 개혁요구를 동시에 받고 있었으니 고민이었다. 정권안보와 숙청요구, 이 두 가지 상충되는 명제 가운데서 李承晩은 안보를 선택하게 된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은 일제 고등계 형사와 일제헌병 출신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게 됐다.
<순천교 둑에 배치됐던 순천경찰서의 主力은 공산叛軍에게 밀리게 되자 당시 순천 청년단장이던 김경호(金景鎬)씨(순천 남국민학교 교장)를 시청 주변에 배치돼 있던 군부대로 보내 응원을 요청했다. 군인들은 “우리는 군인끼리 전투하러 온 것은 아니다. 상관의 명령이 없어 싸울 수 없다”고 경찰의 응원요청을 외면했다. 군과 경찰은 손발이 맞지 않았다.… 반군점령지역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서 赤色행정이 실시됐다. 제 1차로, 반군에 체포됐던 경찰관들은 무조건 총살됐다. 나중에 체포된 70여 명의 경찰관들은 순천서 앞마당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집단 학살됐다. 반도들은 체포된 경찰관을 산 채로 모래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기도 했다. 모래구덩이에 묻힌 뒤 미처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경찰관은 위에서 죽창으로 쿡쿡 질러 죽였다. 진압대가 출동했을 때 모래 위로 치솟은 핏자국을 보고 학살당한 경찰관의 시체를 찾아낸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김태선,「국립경찰 창설」33회)
순천이 수복되자 경찰은 폭동에 가담했던 주민들과 민간폭도들을 색출, 모조리 구속했다. 경찰은 이들 가운데 악질적이었던 12명을 그해 10월25일 순천농업학교 교정에서 끌어내다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해 버렸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즉결처분이었다.(김태선,「국립경찰 창설」35회)
총살된 12명 속에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창길(朴昌吉)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태선은 “반란사건 당시 반군들은 경찰관은 물론, 공무원 및 우익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나 朴 검사만은 반군의 살해대상에서 빠졌을 뿐 아니라 반란중에도 大路를 활보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같은 점으로 미뤄 朴 검사가 반군들과 내통했다고 추정, 수복되자마자 관사에 있던 朴 검사를 끌어내다가 민간폭도들과 함께 처형했던 것이다. 경찰은 또 당시 순천출신 국회의원 황두연(黃斗淵)씨도 평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다 하여 총살하려고 했으나 黃 의원은 재빨리 몸을 피해 총살을 모면했다”고 썼다. 박 검사 가족은 박검사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공산당에 쫓겨 월남한 反共인사라는 점을 지적, 이 사건은 검찰에 사감을 가진 경찰의 보복행위라고 주장, 탄원서를 냈다. 당시 법무부 검찰과장 선우종원(鮮于宗源)도 朴 검사는 성격이 강직한 데다가 순천에 부임한 뒤 경찰관 독직사건을 철저히 다루어 반란사건 전에도 이미 몇 차례 마찰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정부는 검·경·군 합동조사반을 파견했다. 검찰은 총살을 지휘했던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崔天)에게 형사책임을 묻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경찰이 이에 반발, 결국 검사총살사건은 책임자의 문책도 없이 끝나버렸다. 당시 합동조사반의 경찰대표는 朴 검사가 평소 사찰경찰이 잡아 송치한 사상범들을 대부분 불기소처분하거나 기소유예처분했다는 자료를 이호 치안국장에게 제출했었다고 한다.(김태선,「국립경찰 창설」36회).
*反民特委
1948년 9월7일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했고,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고등관 3등급 이상 5훈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와 헌병·헌병보·고등경찰의 직(職)에 있었던 자는 이 법의 공소시효(2년)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게 했다. 재판은 단심제였고, 특위는 사법경찰관을 지휘할 수 있으며, 특별검찰부(특검)를 두는 등 서슬이 퍼런 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여론의 지지를 받고 법 또한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물리력을 장악한 쪽의 동의를 얻지 못한, 세력판도를 거스르는 숙청작업은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교훈만이 남게 될 것이었다.
당시 수도청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熹)에 따르면 수도청 사찰과엔 약 60명의 형사가 있었고 각 경찰서 사찰계에는 2,30명의 형사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가 日帝 고등계형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는 日帝 때 총독부 경무국과 종로경찰서 등에서 줄곧 고등계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를 수사하는 자리에 있었다. 당시의 경찰 사찰과는 공안기능을 장악한 막강한 권력센터였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수사에 경험이 있어 李承晩 정부는 우선 반공이 급하므로 前過를 따지지 말고 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해방 때는 경부로서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었다. 反民特委는 1949년 1월8일부터 反民法 해당자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전국적으로 검거선풍이 불었다.
1949년 1월31일까지 反民特委에 체포, 구속된 사람은 21명. 김덕기(金悳基), 이성근(李聖根), 노덕술, 하판락(河判洛), 이원보(李源甫), 유철(劉徹), 노기주, 김태석(金泰錫), 최연 등 고등경찰 및 헌병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 때 경남도 보안과장이었던 노기주는 해방 뒤에도 경남도 경찰부장을 지냈고 체포 당시에는 부산 영도의 조선경질탄도기회사의 관리인이었다. 김덕기(당시 60세)는 평안북도 고등과장으로 있을 때 오동진(吳東振)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 옥사시킨 혐의로 구속되었다. 황해도 형사과장이었던 김극일(金克一, 당시 62세)도 같은 날 구속됐다.
이성근은 황해도 해주경찰서 순경으로 시작하여 평북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고 지사로 영전했으며, 해방 때는 매일신보 사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반민특재 공판에서 “평북 고등과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동안 매년 약 100건(연루자 약 300명)의 사상사건을 취급했으며 만주 안동에서 독립단 간부 12명을 체포, 압송하여 처단케 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엔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로 잠입, 치안을 교란시키려는 자는 내란죄로 처단했다”고 실토했고 “압록강 일대에서 활동한 오동진 의사의 독립군을 진압했다”고 시인했다.
유철은 함경도에서 헌병으로 근무했고 해방 뒤엔 성동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군정청 식량행정처 책임자로 공모하여 캔디 사건을 일으킨 자이며, 반민자 이종영(李鍾榮)밑에서 대한일보의 총무국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보도됐다.
김태석의 공소장은 일제 때의 고등형사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기소장에 따르면 김태석은 1912년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출발, 함북 웅기경찰서, 평남 광양만 경찰서, 평양경찰서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로 전직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게 되었다. 1919년 8월 경기도 고등경찰과 경부로 전임한 김태석은 그해 9월17일 서울역전에서 사이토 신임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체포, 결국 사형을 받도록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허형(許炯), 최자남(崔子南), 오태영(吳泰泳) 등 애국투사들도 김이 검거, 투옥시켰다. 그 이듬해 7월 20일엔 밀정 김진규(金珍奎)를 이용, 밀양폭탄사건의 주동자인 이성재(李成宰), 윤소룡(尹小龍) 등을 체포하거나 혹독하게 고문하여 사건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1921년 10월엔 조선의용단사건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1923년 김태석은 한국인으로는 최고경찰직인 경시(지금의 총경급)로 승진, 경기도경 형사과장으로 임명됐다가 곧 군수로 나갔다. 연천, 부천군수 등을 거쳐 1938년엔 경남도 산업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지원병모병 시험관을 겸무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케 했다고 한다.
*고등계 형사 출신 집중공략
갓 쓴 노인이 멀리 대전에서 “이런 놈들이 아직껏 행세를 하고 있으니 속히 처단해주시오”하고 특위중앙 사무국을 찾아왔다는 기사도 실렸다. 송덕인(宋德仁, 당시 64세)이라는 이 노인은 “왜정 때 독립운동가로 지목 받아 왜놈 헌병대에 끌려가 여러 차례 지긋지긋한 곤경을 당하였는데 친일파놈들을 우리의 민족정기로 처단하는 이 마당에 자손들에게 산 교훈을 주어야 한다”면서 참고서류 한 보따리를 풀어 젖혔다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의 유명한 고등계형사였던 김태석에게 붙들려 고문을 당했던 의열단원 김재수(金載洙, 59세)도 반민특위에 나타나 고문 받던 상황을 생생하게 진술했다. 2월21일 특위 사무실에는 김금이(金今伊, 당시 62세)라는 일제 때 경남도 고등과 경부로 근무하면서, 지하독립운동을 하던 장남인 여경수를 붙들어 머리카락을 뽑고 물을 먹이는 고문을 하여 그 후유증으로 34세에 옥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일제 고등경찰 출신자들에게 수사력이 집중되자 겁을 먹고 자수해오는 이들도 생겼다. 2월4일 특위청사에 자수해온 김우영(金宇泳)은 일제 때 전주경찰처 고등계 주임이었다. 김은 해방되기 6일 전에 전주 모 중학생을 체포, 고문 끝에 혀를 뽑아 죽게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2월24일엔 조동선(趙東善)이란 사람이 “일제 때 강계에서 고등계 형사를 8년간 했으니 처벌해달라”면서 반민특위에 자진 출두했다. 경부도경의 고등계 형사였던 배만수(裵萬壽, 당시 45세)는 경북 반민특위에 자수,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일제 때 약 100명의 애국동포를 검거, 고문한 자란 것이었다.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 양병일(楊秉一, 당시 40세)도 전북도경에 자수했다. 그는 李太朝가 왜구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죽인 것을 기리는 斥倭碑를 부수었고 충렬사의 제사를 금지시킨 자라고 보도됐다.
3월23일엔 악질 고등계 형사 김영호(金永浩, 당시 45세), 오세준(吳世俊, 당시 45세), 정병칠(鄭炳七, 당시 47세)을 체포했다. ‘고문왕’이란 별명을 신문으로부터 얻은 김영호는 종로서, 서대문서에서 20여년간 일하면서 노덕술, 이구범(李九範)과 함께 ‘악질 3총사’로 꼽혔다는 것이었다. 오세준은 3·1운동 때 해남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있었는데 100여 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했고, 광주서 고등계 형사로 있을 때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수십 명의 학생들을 체포, 고문하여 죽게 한 일도 있다는 것이었다. 정병칠은 3·1운동 때 목포지역의 지도자인 배치문(裵致文)을 경찰에 밀고, 옥사케 했었다고 보도되었다.
* 노덕술 체포되다
반민자 체포 개시와 함께 사회에서는 일제잔재의 청산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번져나갔다. 『조선일보』의 1949년 1월14일자 기사는 “일제유물 아직도 많다”“친일파 숙청, 가두로부터”란 기사를 실어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日帝의 유산을 정리하자고 촉구했다.
<그들에 아부 협력했던 친일군상은 속속 검거되어 이제 그들도 정의의 심판을 받을 날이 멀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모든 일제의 유물을 완전 소탕하는 것이 긴급사라 하겠다. 장차 우리 국토에 빈번히 왕래할 일본 상인들에게 그네들의 식민지연한 감을 주고도 남을 형편에 있는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어 친일파의 처단과 함께 가두에서, 또는 일상생활에서 일제잔재를 깨끗이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백범 金九도 기자회견에서 “친일반역분자들에게 생명까지 빼앗긴 수맣은 선열들의 영령과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아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반민자들을 단호히 처단하려는 특위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며 인민들도 이를 찬양할 것이다”고 말했다. 1월26일 반민특위는 수도청 전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법 해당자 및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 피의자로 체포했다. 친일경찰의 간판격이면서 軍政경찰에서 좌익색출에 공이 많았던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와 일제 경찰 출신자의 대결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현직에 있는 친일경찰 출신들의 처리에 하나의 기준이 될 만한 일이었다. 노덕술은 1948년 9월 장택상이 물러나고 김태선이 새 수도청장이 되자 사직했다. 장택상이란 비호세력이 없어지자 그동안 덮어졌던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이 다시 제기됐다. 검찰은 그해 11월 노덕술에 대한 구속영장을 받아내 경찰에 대하여 체포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대한 당시 경찰의 반응을 김태선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시 경찰에서는 공산당 타도에 수많은 공을 세운 선배를 경찰의 손으로 체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수도청 수사과에서도 盧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서울지방법원에 되돌려 보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盧씨가 궁정동 자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수도청에서는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관 4명까지 파견해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낮에도 저격사건이 예사로 일어나고, 전차를 타려는 경찰관을 뒤쫓아가 등에 칼을 꽂고 달아나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있던 때인만큼 盧씨의 신변에도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를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하들이 盧씨 집에 경호경찰관을 당분간 배치해야겠다고 건의해왔을 때 즉석에서 응락했던 것이다. 盧씨가 反民特委에 체포되어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나는 盧씨 집에 있던 경찰관 1명은 그의 가족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배치했지만 나머지 3명은 盧씨의 후배로서 놀러갔던 사람이라고 둘러대고 盧씨는 해방후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가족들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이같은 해명은 지금 생각해도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盧씨는 그뒤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국립경찰 창설」51회)
* 고문치사
수도청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 재판은 8회 공판까지 끌었다. 최연(당시 수도청장 고문) 등 당시의 수도청 수뇌급 인사들은 증인으로 나와 한결같이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증언을 했다. 즉, 장택상 저격 용의자 임화는 고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달아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사건이 경무부 사람들이 수도청 사람들을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조병설(趙炳설) 당시 경무부 수사국장은 이런 증언을 했다.
“작년(1948년) 1월 하순경 수도청에 근무한다는 조규섭(趙奎燮) 경관이 나를 찾아와 임화는 도주한 것이 아니라 고문치사된 것이며 그 지휘자는 노덕술, 최운하 두 사람이라고 말했다. 조를 구속 취조하려 했더니 수도청에 구속되어 있었기에 경무부로 이관시키게 하여 다시 문초했던바, 역시 앞에 한 진술을 되풀이했다. 고문치사의 하수인 수사를 위해 다른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던 전 중부서 현을성(玄乙成) 주임을 불러 문초하였다. 그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진술을 했고, 이에 따라 노덕술과 최운하도 불러 문초, 자백을 받아냈다. 수도청에서는 이 사건이 알려지면 국립경찰의 수치가 된다고 사정하여 비밀리에 조사한 것이지 조작설은 말도 안된다.”
2월7일 8회 공판에서 윤두식(尹斗植) 검사는 고문치사의 하수인으로 기소된, 일제 고등형사 출신인 박사일(朴士一), 김유하(金留夏), 김재곤(金在坤) 등 3명 (노덕술은 별도심리)에서 상해치사 및 독직죄를 적용, 징역 2년을 구형했다.
*노덕술의 죄상
반민특위의 기소장에 따르면 노덕술은 울산에서 나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의 고용인을 거쳐 경찰관을 지원했다. 경남경찰부 보안과를 거쳐 순사부장으로서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했다. 警部補로 승진한 뒤로는 의령·김해·거창 경찰서 등에서 사법주임을 지냈다. 다시 경부로 승진한 뒤에는 인천, 개성, 서울 종로·중부 경찰서의 사법주임으로 있었다. 해방 때엔 平南 보안과장. 27년간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고등계 사무에 속하는 사상사건도 다루어 일본정부로부터 훈 7등종 7위의 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노덕술은 거의 사법계에 근무했다. 사법계는 일반수사업무를 맡은 부서인데, 盧는 상관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그랬는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고등계 업무에까지 손을 뻗쳤다. 동래서 사법주임 시절 盧는 비밀독립운동조직인 혁조회(革潮會) 사건을 취급, 관련자들을 검거 고문하여 유진흥(兪鎭興), 김규진(金圭鎭) 등 두 주동자는 옥사했다.
동래고등학교 동맹휴학 사건에도 개입하여 애국학생들을 체포했다. 통영경찰서에 있을 때는 사법주임으로서 고등계 사무도 겸하여 보면서 1932년 메이 데이(5월 1일) 시위에 참가했던 김재학(金在學)을 검거, 고문을 했다. 평안경찰부의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화물자동차 등을 징발해 일본의 전쟁수행을 지원했다는 것이 기소장에 나타난 그의 罪狀이었다. 해방된 이 나라에 ‘고문치사’란 낱말을 소개한 것은 일제경찰과 일제헌병 출신 수사관이었다. 노덕술이 고문치사사건 등으로 구속되어 있던 때인 1949년 9월 육본 정보국 특무과에선 김창룡 과장의 지시로 동대문 민보단장 고희두(高羲斗)를 조사하고 있던 日警 출신의 중사 도진희(都晋熙)가 고씨를 고문치사케 했다고 하여 큰 말썽이 되었다. 물론 高씨도 공산당이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김창룡이 암살된 직후 유가족들은 누명이었다고 다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
노덕술의 체포 이후 반민특위는 日警 및 헌병 출신자들을 잡아들이는 데 더욱 힘을 썼다. 이들은 거의가 경찰 안의 핵심현직에 앉아 있었으므로 잇단 체포의 충격은 대단했다. 군정 때 日警 출신자의 우산 노릇을 했던 최연을 비롯, 전북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李顔淳), 성동서장 유철, 경주경찰서장 서영출(徐永出),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 등 해방 뒤에도 일선에서 일했던 일경 출신자들은 물론, 은거하고 있던 김덕기 등 30여 명의 일경 및 헌병 출신들도 붙들려왔다. 이 무렵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이 시작된다. 노덕술이 체포된 이틀 뒤 그는 특위위원들을 불러 盧의 석방을 요청하고 2월2일과 15일엔 특위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월2일자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은 특히 일경 출신자의 처벌에 관해서 많이 언급했다.
<치안에 관계되는 일을 중대히 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금 반란분자와 파괴분자가 처처에서 살인방화하여 인명이 위태하여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때에 기왕에 죄가 있는 자라도 아직 보류하고 목하의 위기를 정돈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정책일까 하는 바이다. 만일 지난 일을 먼저 징계하기 위하여 目前의 난국을 만든다고 한다면 민중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경찰의 기술자들을 아직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기왕에 反共투쟁이 격렬할 때에 경찰기술자들이 직책을 다하여 치안에 공효(功效)가 많을 때에는 장공속죄(將功贖罪)한다는 성명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정부의 위신상으로 보나, 인심수습책으로 보나 조사위원들은 신중히 조처하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반민특위는 2월17일 「반민법을 방해하는 대통령담화를 박함」이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치안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우려를 조목조목 따져갔다.
<치안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고 하였는데 특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의 치안은 반민자가 담당해야만 된다는 말인가. 제주도, 여수, 순천, 38선 사건 등이 악질 반민자를 처단함으로써 발생한 것인가. 대통령은 항상 반민법 운영과 치안의 책임을 특위에 전가시키려는 듯하나 국민은 속지 않는다. 反民法이 공포된 뒤에도 윤 내무장관 재직시에 악질경관을 요직에 등용하였음은 대통령의 지시였던가. 진정한 애국애족으로 불타는 경찰관은 반민자 처단으로 인하여 더욱 단결되고 치안을 확보할 수 있다. 2, 3인의 자의로 사람을 잡아다가 난타고문을 운운하였으니 이야말로 언어도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비심이 많아서 이같은 담화발표로 덕망을 얻고자 하는가. …민족의 분을 볼 때에는 과거 수십년간에 걸쳐 독립군을 죽이고 애국자를 악형으로 고문하여 허위의 문서로써 투옥시키던 악질 반역죄인을 약간 고문하였다 한들 이것이 또한 무엇이 큰 실수이며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릴까. 살인 고문치사사건의 파의장본인 노덕술을 체포하도록 발령하고도 보호하지 않았는가. 특위에서 체포한즉 요로 당국에서 노의 석방을 간청하지 않았는가. 이러함에도 亂打고문 운운을 언급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수십 명이 특위를 방문하여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님, 내 동생, 내 자식, 내 민족의 원수를 최고형으로 단죄하여달라는 피눈물 섞인 호소를 대통령은 듣고 있는가. 대통령은 권력으로 정의를 억압하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신성한 헌법과 3천만의 지지가 있다는 것을 부언하는 바이다.>
1949년 2월17일 국회에서는 李 대통령의 담화발표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성토가 있었다. 18일자 『조선일보』는 “독재적이다에 옳소 연발, 꽉 찬 방청석, 노(盧) 내놔라 말에 아연”이란 제목의 머리기사로 李 대통령을 비판했다.
<어느 날 반민특위 간부 몇 사람이 이대통령 관저로 초청을 받아 갔더니 천만 뜻밖에도 ‘노덕술을 내놔주시오’라고 하였다 한다. 그 이유로 ‘노는 경찰의 기술자니 그가 없으면 치안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간부가 ‘그럼 각하, 盧를 놔주라는 청원을 국회에 해주시면 그럴 수도 있으리다’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면서 ‘난 나대로 할 테야’라고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조선일보』기사)
2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노덕술을 내놓으라”고 한 것을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친일경찰 처단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경찰관들을 잡아가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친일파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산 사람 목을 자를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기왕 죽을 바에야 하고 무슨 짓을 저지르고 나자빠지면 결과는 어떨 것인가. 여순사건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2월 24일 이승만측이 제출한 반민법 수정안이 국회에서 폐기되자 신문들은 ‘민족정기는 드디어 승리하다’‘박수와 환성으로 뒤덮인 의사당’이란 제목의 기사로 이를 환영하였다. 일본을 그토록 미워하였던 위대한 독립투사가 나서서 당면한 공산당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하여 反共 기술자들인 日警 출신자들의 斷罪를 미루자고 하여도 政界와 언론은 따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