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서도 고향에 못 돌아오는 한국인 '전범들'의 혼백 일본군에 붙들린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받고 끌려간 한국인 군속 3000여 명. 日軍 만행의 하수인 노릇을 강요받은 그들은 戰後엔 '속죄양'으로 연합군의 법정에 바쳐진다. 사형을 당한 스물 세 명의 유족은 '친일부역자'라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 <1982년 5월 마당> '역시 죽고 싶지 않구나. 바둑을 둔 것이 잘못이었다. 바둑을 둔 직후에는 굳은 다짐이 해이해진다. 바둑을 둘 동안에는 거기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돌을 던진 순간에는 예전의 주저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죽으면 얼마나 목이 늘어질까. 별일은 없겠지. 몸이 축 늘어져 내려왔을 때(목을) 벗겨내면 원래대로 돌아갈거야.… 피부색이 약간 검게 변한 것 같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역시 조금은 허탈해지는구나. 그러나, 별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이니까. 다만 믿으며 가리라. 믿으려고 애쓰자. 하느님 모든 걸 용서하소서. 인생 최대의 고통이다. 이 방을 나서기까지가. 8분이나 지났다. 나야! 힘내라. 아홉 시의 弔鐘. 천천히 종이 울린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누이, 아우야 잘 있거라. 아직 2분 남았다. 1번 열차 출발! 드디어, 이것으로 기록을 끝낸다. 이승아 잘 있어라.'
교수형 집행 2분 전 까지 유서를 쓴 조문상은 그때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 호주머니 돈'이란 대단히 편리한 낱말이다. 액수나 지출이유를 장부에 적을 필요조차 없는 돈이다. 한반도 출신 戰犯의 유골 열 한 개가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다. 이것을 유족에 돌려줄 때의 주한일본 대사의 호주머니에서 부의금 조로 3000 원(圓)을 전달하게 되어 있다. 유족 보상은 한 푼도 없다. 과거 일본 육군이 고용한 '일본인'의 유골이다. 소화20년 8월15일을 기해 '외국인'이 되었다 해도 3천 원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존한 한국인 전범들과 사형된 전범들의 유족들도 이에 분개, 지금까지 유골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유골을 모아 온 것은 소화30년대. 그로부터 20년 동안 유골은 일본에 맡겨진 채다. 동경 판교(板橋)에 있는 생존 한국인 전범의 사무소를 찾아갔더니 '돈이 탐나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이 호주머니 돈으로 취급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처형된 동료들은 당시 20代였습니다. 조국의 戀人에게 유서를 남기고 사형대로 올라가기도 했죠. 남국의 밤 하늘에 꽝-하는 교수대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이 귀로 직접 들었던 우리들은 3000 원의 성의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요'라고 했다. 무리도 아니다. 여관에서도 팁으로 3000 원을 주면 인사를 못 받는다는데…>('일본 경제 신문' 1982년3월3일) 이 글을 쓴 것은 일본의 평론가 상판동자(上坂冬子)여사. 동자여사는 일본 여성 잡지사의 주선으로 미국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을 면담했다가 '1천 달러 사례비 스캔들'을 일으켜 유명해진 사람이다. 1982년 正初 '한국인의 일본인 妻' 문제를 취재하러 부산에 왔던 동자 여사는 필자에게, '그들도 이제는 보상 투쟁을 포기, 유골을 한국으로 갖고 오려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이 귀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못내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고 전했다. '이 기사가 나가면 아버님에게 되려 욕이 되지 않을까요? 아버님을 사람들이 정말 이해할까요? 동정할까요? 못난 사람이라고, 친일파라고 새삼 헐뜯지 않을까요? 저희 어머님이 겪은 수모가 잊혀지지 않는군요, 더구나 일제 시대를 모르는 학생들이 읽으면 뭐라 할까요?'
卞광수 씨(42세)는 학교로 그를 찾아간 필자 앞에서 머뭇머뭇했다. 1982년 4월7일 오후, 충북 청주농업고등학교에서였다. 卞씨는 축산과 교사다. 그는 결국 필자의 고집에 꺾여 자기 집으로 기자를 데리고 갔다. 卞교사는 15년 동안 수집, 정리해 두었던 기록뭉치를 풀어 제꼈다.
'이분이 아버집니다.'
그는 노란 공책의 첫 장에 붙여 놓은 사진을 가리켰다. 애된 청년이 일본 軍屬 복장을 하고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바다, 원목더미, 야자수가 보인다. 그 사진 바로 밑에는 아버지보다 더 늙은 아들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 얼굴도 못 봤고 아버지라 불러 본 적도 없어요. 지금도 아버지란 발음이 참 어색하게 느껴져요.'
그래도 두 사진의 얼굴들은 어김없이 '닮은꼴'이었다. 卞교사는 인쇄된 문서 한 장을 내놓는다. 일본어만을 한글로 번역하면 이런 글이 된다. 證明書 氏名 卞鐘尹
日本名 柏村欽信 生年月日 一九二○年九月二日 國籍 大韓民國 忠淸北道淸州郡北一面飛上里 二三五 身分 舊日本軍 陸軍軍屬 雇員 所屬 舊日本軍 捕虜收容所 上記의 者는 일본국(日本國)과의 평화조약(平和條約) 第十一條에 실린 재판(裁判)에 따라, 소화(昭和)二十二年四月九日 자바島 바타비아에 있는 화란국 재판(和蘭國裁判) 바타비아 군사법정(軍事法廷)에서 사형판결(死刑判決) 확정(確定), 同年九月五日 同島 바타비아市 구로도크 형무소(刑務所)에서 사형(死刑)이 집행(執行)된 것이다. 상기(上記)와 같이 증명(證明)한다. 1971년 10월12일 일본 후생성 원호국장이 보낸 문서다. 이 증명서는 卞鐘尹씨의 죽음만 증명했을 뿐 이 청년이 과연 연합군의 손에 죽임을 당할 만한 사람이었는지, 그의 아들이 지금도 걱정하는 바, 그런 '친일파'였던가를 증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 '戰犯'이었던가? 일본군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1942년 6월22일 300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일본 육군의 軍屬이 되기 위해 부산 서면 임시 군속 교육대에 입영했다. 그들에게 주어질 임무는 포로 감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군속 지원자였다. 그 해 5월 일본 육군성이 한국에서 군속 모집을 하기 시작할 때 내건 조건은 '2년 계약에 월급 50원'이었다. 면장 월급이 55원하던 때였다. '美英 숭배사상의 일소'를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붙들린 연합군 포로 천 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시가 행진시키던 때였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문'이 '조선징병제에 감격의 파도 드높아!' '한번 죽어 황은에 보답할 터!' '나가자 싸움터로, 학병이여! 無敵 皇軍의 정예가 되어 주렴!' 이라고 부르짖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면서기와 주재소 순사까지 동원된 지원자 끌어내기 바람이 일어났다. 어떤 郡에선 경쟁률이 10대1을 웃돌기도 했다. 전남 보성군 이학래씨(동경의 동진교통 전무)는 열 일곱의 나이에 자원을 했고 필기, 면접 시험에도 빼어난 성적으로 합격, 연령제한(20∼35세)에도 불구하고 채용됐다. 많은 곳에선 지원을 가장한 강제 동원이 실시되었다. 面 단위로 모집 인원이 할당되고 시험 면제의 지원자들이 양산되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만, 그이는 전쟁터에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아이가 앓고 있었고 시어머니도 편치 못한 데다가 장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관리들이 옆에서 부추기고 모범을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지원 아닌 지원을 하게 된 겁니다'
변종윤 씨의 미망인 홍칠봉 할머니(65세)의 말이다. 卞씨는 지원아닌 지원을 할 때 스물 두 살이었다. 홍씨는 남편보다 세 살 위, 변광수 씨는 돌을 막 지낸 젖먹이였다.
'아버지는 성격이 칼칼하였답니다. 검도 유단자였고 마을의 청년단장이었죠. 우리 집안은 농토도 넉넉하게 갖고 있어 주위의 강요가 없었더라면 장남이 전쟁터로 지원할 리가 없지요.'
변씨의 대쪽같은 성격과 아내 홍씨의 고집은 결혼초기에 잦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아들이 결혼 6년 뒤에 태어나게 된 것도 그런 갈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수씨를 임신하면서부터 부부 사이가 좋아져 卞씨가 군속으로 '지원'했을 때는 신혼생활처럼 단란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변종윤 씨 등 한국인 군속은 傭人(용인)자격이었다. 일본군의 군속은 문관, 雇員(고원), 용인으로 구분되었다. 傭人은 軍에 고용된 노동자인 셈인데 뒤에 雇員으로 승진되기도 했다. 군속이긴 했지만 서면 교육 부대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에게는 군인과 꼭 같은 의무와 책임이 강제되었고 혹독한 훈련을 강요받았다. 두달 간의 훈련이 끝난 1942년 8월15일 한국 근무자 70명을 제외한 군속 전원은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의 전송을 받으며 노랑별 하나 모표의 군모를 눌러쓰고 배낭을 걸머지고는 브리스벤 호 등 10여 척의 배에 차례로 올랐다. 목적지는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卞鐘尹씨를 비롯한 1400여 명의 군속을 태운 수송선 세 척이 자카르타 외항에 닿은 것은 부산 출항 25일 뒤. 이들은 자바 포로수용소에 배속된 것이었다. 당시 이 섬엔 8만2618명의 연합군 포로가 있었다. 화란-인도네시아 군이 6만6000 명으로 가장 많았고 호주, 영국, 미군도 끼여 있었다. 卞씨는 '파견 제3분소'에 배치되었다. 이 포로 수용소는 암본 섬, 세람 섬, 하루쿠 섬, 플로레스 섬을 관장했는데 그는 플로레스 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변씨와 함께 이 플로레스 분견소에서 근무한 사람으로 최기전 씨가 서울에 아직 생존해 있다. 이 섬은 충청남북도를 합친 면적으로 포르투칼 선교사들이 퍼뜨린 천주교의 敎勢(교세)가 왕성한 곳이었다. 기독교 재단의 전주 신흥 학교를 다닌 크리스찬인 최씨는 '교회가 많은 그 섬이 좋았다'고 한다. 이 섬의 포로 수용소엔 화란군이 거의 전부인 2000 명의 포로가 있었다. 소장은 일본군 대위, 그 밑에 하사관 4, 통역 1, 한국 군속 70명, 결국 포로를 직접 다루는 임무는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1943년에 접어들어 일본군이 守勢(수세)로 몰리면서 南洋의 연합군 포로들은 공사장으로 내몰렸다. 플로레스 섬에선 비행장 닦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기전 씨는 말했다. '포로들하고 늘 맞대는 것은 우리 한국 군속이었죠. 작업명령은 건설대로 부터 내려오는데 오늘 몇 미터 파는 데 포로 몇 명이 필요하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포로들의 대표에게 인원 차출을 지시합니다. 포로 대장은 환자가 많아서 그럴 수 없다고 버티지만 우린들 어떻게 합니까. 명령 핑계를 대어 우격다짐하는 수밖에 없지요. 작업 기준량을 다 못 채우면 일본 군인들로부터 우리만 들볶입니다. 할 수 없이 포로들을 혹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명령에 고분고분한 만큼 포로들이 고생하는 거죠… 각기병과 당뇨병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많을 땐 매일 열 명 이상이나 죽어 나갔습니다. 포로들은 동료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스스로 파야 했습니다. 구덩이 파는 포로들도 몸이 성치 못해 보기에도 딱했어요. 너무나 보기에 언짢아 총검을 포로에게 맡기고는 우리가 달려들어 판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 군인들에게 들켜 혼이 났지만…' 최기전 씨는 같이 일한 卞씨가 '착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아들 광수씨도 '그때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군속들은 한결같이 아버님이 매사를 분명히 처리하고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는 분이었다고 전해 주더라'고 했다. 그런데 평상시엔 美德(미덕)인 그런 '착실'이나 '강한 책임감'이 비상시에는, 더구나 異民族의 앞잡이 역할을 부여받은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최씨는 '포로들을 우리가 혹독하게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본군과 포로들 사이에 끼여 양쪽으로부터 모두 욕을 먹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포로를 직접 죽인다든지 고문한 것은 아니었다. 구타 정도는 했지만 기합의 성격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군속은 어디까지나 일본 군인들의 명령을 실천에 옮기는 도구이자 하수인에 불과하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포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 그들을 몰아세우는 군속들이 일본군보다도 더 저주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학래 씨는 태국의 태면(泰緬) 철도 건설 현장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됐다. 이 철도는 태국과 버마 정글 지대를 잇는 길이 415 킬로미터의 철도로 1942년7월∼43년10월 사이에 건설되었다. 전인미답의 밀림을 하루 1킬로미터씩 뚫고 나간 '철도 사상 유례가 없는 세기적 기록'의 突貫(돌관) 공사였다. 이 공사는 일본군 천 명, 포로 1만3000명, 노무자 3만3000명 등 모두 4만7000명의 목숨을 삼켰다. 포로는 4명에 1명꼴, 노무자는 두 명에 한 명 꼴로 죽었다. 명화 '콰이강의 다리'의 배경(영화 줄거리는 가공. 철교는 폭파된 적이 없다)이 된 이 생지옥 공사장에서도 한국 군속은 하수인의 배역을 맡아야 했다. 李씨는 手記에서 이렇게 썼다. '…포로들의 숙사는 비가 새었고 옷은 단벌이었다. 식사는 돌과 뉘가 약간씩 섞인 싸라기 쌀밥에 간 절인 마른 물고기 한 토막이 전부였다. 포로들 사이엔 배탈,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가 만연했다. 우리는 포로를 관리했고 부리는 건 철도대가 했다. 철도대는 일본군 특별 부대였는데 매일 작업인원수를 우리에게 통보, 차출토록 했다. 給食(급식) 불량으로 대다수 포로들이 쇠약해 있었지만 머리 수를 맞추기 위해선 병약자들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도 그들은 일본 군인과 포로 사이에 끼여버린 것이다. 그들이 모두 예수나 공자가 아닌 바에야 포로들의 편을 들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움막 속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신음의 합창에 질겁했다. 이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회생의 희망이 없게 된 동료들은 땅바닥에 뉘어져 죽어 가고 있었다. 이미 싸늘하게 굳어버린 동료들도 있었다. 나는 변소에 데려다 달라는 병든 동료 한 사람을 내 어깨에 의지하게 하여 캠프 아래 밤길을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모닥불 재 속에 발을 헛놓고 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그럴 기력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그를 죽음 터에 남겨놓고 버마 쪽으로 모진 행군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朝日新聞이 펴낸 '일본戰史'의 포로 수기) 이런 포로들이 가슴속에서 복수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해도 하등 놀랄 일이 못된다. 한국 군속들은 2년 근무 계약으로 고용되었으니 1944년 6월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마땅했다. 태평양 戰線 도처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던 일본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 두게 되었다. 이것이 모든 재앙의 단초였다. 일본이 약속을 지켰던들 한국 군속들은 戰犯이란 가시관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卞씨의 아내 洪씨는 남편이 보내 주는 돈을 모아 논을 샀다. 洪씨의 시아버지, 곧 卞씨의 아버지는 卞씨가 군속이 되기 전에 별세했었다. 집안에는 卞씨의 할아버지가 생존하고 있었으나 농사는 두 여자(홍씨와 시어머니)가 맡아야 했다. 해방이 이 집안에 어떤 희망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때 여섯 살이던 아들 광수씨는 일장기를 들고 학교로 달려간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
'일장기를 가져오면 태극기로 고쳐 준다고 해서 내가 갖고 달려갔지요. 일장기의 원 속에 옆으로 누운 S자를 그리고 그 둘레에 괘를 그려 넣으니 금방 태극기로 변합디다. 나는 너무 좋아서 그걸 가슴에 꼭 품고 돌아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 깨졌죠. 그래도 태극기를 우리 집에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卞鐘尹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포로가 된 것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포로 수용소의 상황은 뒤집어졌다. 포로를 감시하던 사람들이 포로가 되고 포로였던 사람들이 고발자가 되었다. 조국에서는 함성으로 맞은 광복이 한국인 군속들에겐 재앙의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남양의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른바 '구비지켄'(수실험.首實驗)이 연일 연출되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과 군속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이 맞대면 심판대에 끌려나갔다. 그들은 줄을 서고 얼굴을 치켜들고 두근거리는 염통 소리를 들으며 포로 출신 연합국 군인들의 손가락질을 기다려야 했다. '저놈한테 매 맞았다' '저놈이 의약품과 식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포로들의 손가락질 고발을 받은 군속은 그때부터 피의자가 된다. 자바에선 한국인 군속들의 앞 및 옆얼굴 사진을 붙여 놓고, 그 밑에 신상 명세와 근무지를 기재하여 '이자에게 학대를 받은 자는 신고하라'는 公告(공고)를 몇 달 동안 하기도 했다. 가해자를 찾는, 복수심에 불타는 연합군인들의 눈앞에서 맞대면을 당하는 군속들은 首實驗(수실험)이란 글자 그대로 목을 떼고 붙이는 실험대에 올려진 절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재판도 수사도 아니고 복수였다' 지난 4월8일 국제전화로 그때의 상황을 묻는 기자에게 이학래 씨는 동경에서 그렇게 말했다. 태국 수용소의 '목실험'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李씨는 곧 싱가포르의 창기 형무소로 보내어졌다. 포로들의 대우가 가혹했던 태면 철도 현장에서 戰犯이 많이 배출된 것은 인간의 복수심에 비추어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120명의 태면 철도 관계자가 기소되어 1백11명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형이 32명, 종신형이 16명. 이 가운데 한국인 군속이 33명(기소 35명)이나 끼여 있었다. 13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나중에 4명은 감형 받음). 이학래 씨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기소사실은 '포로들에 대해 식량 및 의약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앓는 포로를 일터로 보냈으며 부하가 포로를 학대하는 것을 방관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李씨는 '식량이나 의약품 보급에 군속인 우리가 어떻게 관여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재판은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를 포로수용소 분소장인 줄 잘못 알고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졸속 재판이었다. 일본인 변호사가 있긴 했지만 한국인에겐 관심도 없었다. 모든 절차가 형식에 불과했다. 李씨는 군사재판의 결과에 불복, 탄원서를 냈는데 그가 분소장이 아님이 밝혀져 중노동 20년으로 감형됐다는 것이다. 1946년 6월1일 화란령 인도네시아 부총독은 법령 공보 제44호로 '전쟁범죄의 개념'을 밝혔다.
①살인 및 집단 살인 ②조직적 폭력, 학대행위 ③인질의 살해 ④시민의 고문 ⑨비인도적 상태 아래에서의 시민억류 ⑮재산몰수 (30)부상자 또는 포로의 학대 (31)허용될 수 없는 방법으로 포로들에게 일을 시킨 행위
이 법에 따라 1946년 8월5일부터 인도네시아의 열두 군데 법정에서 戰犯재판이 시작되었다. 1038명의 戰犯 피의자가 기소되어 23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국인 군속은 68명이 기소되었는데 네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卞鐘尹씨도 이 네 명안에 끼여 있었다. 卞씨는 자바의 구로도크 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몇 차례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일이 잘 안 되어 간다'는 식으로 둘러 표현했는데도 그의 祖父는 '그 놈은 죽은 몸이다'고 탄식을 하더라고 한다. '그놈의 성격이 그렇게 칼날 같은데 이 時局에 어떻게 살아 남겠는가?'고 조부는 예단을 해버렸다.
'저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 봉투 속에 든 빨간 딱지가 기억에 남아 있죠. 아버지는 탄원서를 보내 달라면서 그 딱지를 동봉했는데 그건 아마도 연합국에 통용되는 우표였던 모양입니다.'
지금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바로 달려갔겠지만 그런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고 또 그런 시절이었다. 卞씨 가족은 탄원서도 보내지 않았다. '친일파'라는 눈총을 받아 가며 탄원서를 돌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기다리기만 했다.
필자가 卞씨의 감방동료들을 통해서 종합한 그의 최후는 이렇다. 변씨는 1947년 5월1일에 사형확정 선고를 받았다. 그는 행동적인 성격 탓인지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변씨는 손재주가 뛰어낫다. 어느 날 비누를 손바닥에 두껍게 발랐다. 그리고는 감방 자물통을 꽉 쥐어 본을 떴다. 그 본에 따라 그는 열쇠를 만들었다. 같은 감방에 있던 일본 군인들과 함께 그는 탈출을 꾀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따는 순간 감시원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지니고 있던 칼을 꺼냈다. 배를 세 번 가로로 그었다. 선혈이 튀었다. '불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다 아문 그해 9월6일 그는 총살형을 당했다.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아버님은 刑場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답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를 親日派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얘기를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변씨의 기소사실은 알 길이 없다. 같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된(군속에게 화란군사법정은 총살형, 다른 연합국 법정에선 교수형을 선고) 군속 박성근 씨(당시24세)의 판결문을 보면 사형에 값하는 범죄가 어떤 종류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겠다. 이판결문은 박씨의 친구 이상문 씨가 베낀 것. <…피고인은 억류소의 남자 및 부녀자들에게 전쟁법규에 어긋나는 일을 자행, 이들에게 조직적 폭력과 학대를 가함으로써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고의적으로 이들을 주먹, 혁대, 곤봉 등으로 장기간에 걸쳐 여러 번 구타했고 이들을 신발 신은 채로 차거나 며칠간씩 먹을 것을 주지 않은 등 통상적 집행의 한도를 현저하게 벗어난 방법으로써 학대를 가해 이들의 생명을 단축시킨 자임.> 피고인의 행위는 惡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死刑으로 벌할 만큼 나쁜 행위였던가? 아주 드물게 군속이 포로의 사형집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인의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겼거나 일본도를 휘둘렀거나 총검으로 찌른 '대리집행' 이었지 '自意에 의한 살인'은 있을 수 없었다. 卞鐘尹씨가 있던 글로덕 형무소에서 총살된 대만 출신의 일본군인 동장웅은 유서의 끝머리에서, '이 재판을 '正義'라고 부르지 않고 '보복이라고 부른다면 나의 사형에 불만이 없다. 그러나 때리고 차고 한 행위가 나쁘다 하더라도 과연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만한 죄인가. 그들은(필자 주:'화란인) 비전투원인 인도네시아인을 사살해도 3년 반의 징역형 만으로 끝난다.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는 인도네시아인을 두 명 쏴 죽이고 징역8년을 받은 화란인도 있다. 그리고 이 형무소 안에서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학대했던가. 무엇이 정의냐! 이게 무슨 재판이야!' 이학래 씨는 '선고가 내리기 전에 우리는 형량을 미리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증거 채택 같은 건 아예 없었다'고 했다. 변호사와 검사 사이에 불을 튕기는 공방전이 오간 뉴렌베르크 재판이나 동경 재판 같은 절차는 거물 戰犯에게만 적용될 뿐 이들 초개같은 목숨들에게는 어림없는 꿈이었다. 더구나 군인도 아닌 말단 고용인으로 남의 나라 戰場에 끌려와 가당찮은 짐을 지게 된 이들 한국인에게는 新生 조국의 힘도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옛 의리를 못 잊어 이들을 변호해 줄 일본이 아니었다. 南洋의 형무소 곳곳에서 하나 둘씩 고립된 채 '正義의 칼과 저울'이 어떻게 재단을 할지 통 모르는 상황에서 나날을 보낸 한국인 軍屬들의 마음은 이제는 짐작으로만 알 뿐이다. 卞씨는 2년의 형무소 생활 끝에 사형을 받았다. 사형 자체보다 몇 배나 더 지긋지긋한 그 기다림은 또 어떠했을까? 卞씨는 부산 서면에서 군속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광수를 데리고 면회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고한 변씨의 할아버지가 손자며느리의 부산行을 '광수의 건강에 해롭다'는 말로 막고는 자신이 손자를 면회 갔다.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돌아와선 혀를 끌끌 차시면서 말씀하시더랍니다. '종윤이 그 놈이 나를 보자마자 왜 아이 어미가 안 왔느냐고 서운해하더란 말야, 그놈이…' 어머니는 그때 면회 못 간 것을 평생 한으로 여겼습니다' 자바의 외딴 감방에서 변씨도 그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며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세기의 유서'란 책에는 일본의 B, C급 전범들이 처형 전에 남긴 유서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머리에 올린 개성 사람 조씨의 유서도 이 책에 실려 있다. 처형 당일에 쓴 그의 유서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자, 국가를 봉창 합시다'고 하자 모두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격렬한 감동을 되씹으며 노래를 부른다. 가슴에 스며드는 건 결코 슬픔이 아니다. 회한도 아니다. 저 대풍에 생명을 던지며 살아온 사람만이 아는 그런 감격이다. '저승에는 정말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라는 구별은 없겠죠'라고 김장록(필자 주:조씨와 같이 처형된 군산 출신 군속)이 안타깝게 말했다. 이 바쁜 세상에서 왜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인도 조선인도 없다. 모두 동양인이 아닌가. 아니 서양인도 같은 동포다.… 감방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올드 랭 사인'이 들려온다.…'이런 세상엔 미련이 없다'는 말도 했지만 본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역시 이 세상이 그립다. 물론 이로써 끝장이 나겠지 그래도 내 영혼만은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안 된다면 누군가의 추억속에라도 남고 싶다. 나는 아직 인간이다. 죽기까지는 인간이다. 인간다운 욕심이 아직 남아 있으니, 서울 북한산 백운대의 암벽에 새겨 둔 내 이름은 아직 남아 있는 걸까> 조문상 씨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 군속 사형수들은 일본 國歌나 軍歌를 부르며 죽어갔다. '천황만세!'를 외친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이들을 친일파라고 단죄할 것인가. 그들은 日帝 36년밖에 체험하지 못한 순수 '일제 세대'였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서 목놓아 부를 '우리의 노래'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형 직전에 내뱉은 독백이 '저승에는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하는 구별은 없겠지요?'였다. 한국인 군속의 숙명적인 상황을 그는 이 한마디로 절절하게 설명한 것이다. 자신들이 민족사의 속죄양이며 민족 차별의 희생물임을 그들은 몸 전체로 부서져 가며 알아버린 것이었다. 卞鐘尹 씨 집안에 使者가 도착한 것은 卞씨가 처형된 이듬해 봄이었다. 이웃 마을에서 卞씨와 함께 군속으로 자바에 끌려갔던 이은업 씨가 변씨의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어둑할 무렵 그는 사랑방의 등잔불 밑에서 주저주저했다. 할아버지는 달래듯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네, 그 애는 죽었지? 응? 이렇게 찾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서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하게.' 그제야 李씨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卞씨의 손톱과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사랑방 앞에선 얼씬도 못하고 옆방에서 눈치만 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지요. 친척들이 몰려왔고 나는 누군가에게 업혀서 바깥으로 나갔지요. 놀란다고 나를 피신시킨 거죠.' 그때 아홉 살 났던 광수씨의 기억이다. 변씨의 유품으로 그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유골 아닌 유품을 비상리의 先山에 묻었다. 아내 홍씨는 3년 상을 치르었다. 광수씨의 증조부는 곧 홧병에 걸렸다. 그는 그 다음해에 죽었다. 연합군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일본군인 및 제3국인 군속은 모두 908명이었다. 가장 많은 처형자를 배출한 것은 화란 법정으로 275명, 두 번째가 영국(255명), 이어서 중국(175명), 미국(167명), 호주(136명), 프랑스(33명), 필리핀(17명), 연합국 군사재판(14명) 차례. 이밖에 64명이 자결하거나 옥중에서 病死했다. 처형된 사람들 가운데 한국인이 23명, 대만인이 26명이었다. 한국인 23명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뺀 나머지는 모두 군속들. 有期刑을 선고받은 125명의 한국인 군속들의 운명도 순탄치 못했다. 그들은 1950∼51년 사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의 감옥에서 일본 동경의 소압(巢鴨)형무소로 옮겨져 수용되었다. 對日 강화조약이 발효된 직후인 1952년 6월 한국인 및 대만인 전범 29명(대만인 1명)은 '인신보호법에 의한 석방 청구소송'을 동경 지방 재판소에 제기했다. '강화조약의 발효로 우리의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또는 중국)으로 바뀌었는데도 계속 일본국에 의해 구속상태에 놓여 있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 청구의 요지였다. 57년7월9일에 열린 공판에서 피구속자 대표 홍기성 씨는 그들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저는 늘 더듬거리며 발음해야 하는 일본식 이름으론 풍산기성(豊山起聖). 거침없이 발음할 수 있는 본명은 홍기성이라는 사람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본군대에 들어간 이래 지금까지 약 10년간의 우리들의 생애올시다. …포로수용소에 배치된 저희들에게는 직접 포로에 대한 감시업무로부터 위병소 근무, 소내 작업의 직접 지휘, 급양계의 조수, 노무의 할당, 서무, 통역 등 여러 가지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들 수용소에는 일본인이라고는 장교와 하사관밖에 없었으므로 직접 포로들과 접촉하는 것은 우리들이었습니다. 포로들 가운데는 난폭한 자들도 있고 수가 원체 많아 이들을 규율 있게 지휘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타행위도 때로는 있었으나 그럴 경우에는 포로들이 품고 있던 불만이 우리들에게만 집중되어 평소 그들의 편의를 보아 준 효과는 온데간데 없어지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주체할 수 없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그 결과로 해서 우리는 모두 戰犯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戰犯이란 말에 혹해 우리를 악학무도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씌어진 추상적인 罪名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잔학 행위의 정체는 크게 잡아도 구타 정도였습니다. 그런 군대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결코 도가 지나친 구타는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환경이 좋았던 도회지 수용소 근무자들은 從戰 후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으나 우리처럼 극악한 환경 속의 공사장에 있었던 군속들은 戰犯으로 문책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극악한 환경의 포로들이 가장 무거운 고통을 겪었으며 따라서 그만큼 불만도 많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처한 情況도 그만큼 절박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 것은 우리들의 성격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 정황이며 이런 정황에서 내려진 군대의 명령이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재판 과정에서 충분한 변호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군대에선 가장 말단이고 변호인은 일본인이었으며 우리들 가운데는 일본어를 잘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戰犯의 경우에는 아무리 비난을 받아도 최후에는 '누가 뭐래도 우리는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위안을 가질 수 있었으나 우리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장래를 잃어버렸다 해도 과거만이라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장래도, 과거도 한꺼번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미덥게 생각한 것은 해방과 함께 독립한 조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스스로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고 동포가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를 상상하면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교수대 위에 매달린 동료를 상기하면 그들의 영혼도 공중에서 저처럼 방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암담한 절망 상황에서 우리가 목숨을 이어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生에 대한 본능적 집착 이외에 우리는 조국에 대한 염원과 부모 妻子에 대한 애착으로 스스로를 지탱하였습니다. 1950년 6월에 터진 조국의 동란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또 다른 타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大國 사이에 낀 약소 민족의 운명을, 우리 조국에 지워진 역사적 숙명의 비애를 통절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연합군의 손을 떠나 일본 정부의 직접 구금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국의 배신자라는 욕까지 먹으면서 봉사해준 일본에 의해 구금되고 있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끝까지 우리가 지녀 온 信義라는 것에 대한 신뢰를 무정하게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석방 청구는 기각되었다. 기각의 논거가 된 것은 강화 조약 11조. 이 조문은 이미 연합군 법정에서 刑이 확정된 사람을 사면, 감형, 가출옥시킬 권한은 그 刑을 부과한 정부의 결정 및 일본국의 권고가 있어야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요컨대 일본은 연합국이 선고한 刑量의 집행을 위탁받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인 전범들은 일본인 戰犯들과 함께 그 뒤 6년 동안 더 구금생활을 보내면서 차례로 석방되었다. 그것도 형기만료 이전에 내보내 준다 해서 공식으로는 가석방이었다. 석방도 이들에게는 크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반겨주는 사람도, 갈곳도 없었다. 가석방 기간 중에는 조국에의 귀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출소를 거부하는 한국인도 나타났다. 충남 부여 사람 허영 씨는 출소 뒤의 생활고를 비관, 기옥(崎玉)현의 어느 절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향년 38세. 전남 담양 사람 양월성 씨는 전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는 출소 뒤 폐병에 걸려 요양소에서 입원생활을 했다가 퇴원, 먼 친척에 의탁했으나 홀대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향년 33세. 박태성 씨(전주 출신)는 감옥에서 정신병을 얻어 출소, 천엽(千葉)현의 정신요양소에 줄곧 입원해 있다가 죽었다. 이 요양소에는 67세의 이영길 씨가 1982년 현재 입원해 있었다. 평안북도 영변군 용산면이 고향인 그는 자카르타 형무소에서 9년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정신병 발작으로 1951년에 출소, 그 뒤 줄곧 정신요양소 신세를 지고 있다. 본인은 한국에 딸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이학래 씨 등 戰犯 동지들은 해마다 두 번씩 그를 면회 간다고 한다. '아직도 기억력은 생생합디다. 남을 해치는 정신병은 아니고 오히려 남을 무서워하는 병이에요. 특히 불을 겁내요. 불꽃놀이를 보면 '함포 사격한다!'고 비명을 지르지요. 사회복귀는 영영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석방 뒤에도 한국인 戰犯 출신들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인 전범 처형자 유족 등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보상금 지급에 나섰으나 한국인들은 외국인이란 이유로 여기서 제외되었다. 한국인 66명은 1956년 8월14일 수상관저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하며 '처형자에겐 1인당 500만원(圓)씩, 전범 석방자에게는 복역기간 1일에 500원씩 지급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묵묵부답과는 달리 그들은 동경의 開業醫 금정(今井)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금정 씨는 오랫동안 전범 수형자들에게 책 등을 차입해 준 인연으로 이학래 씨 등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는 300만 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이씨 등에게 주어 자립자금으로 삼게 했다. 그들은 이 돈으로 1960년에 동진교통(주)이란 택시회사를 만들어 운영해 오고 있다. 지금도 주주는 대부분 한국戰犯 출신. 한편 변광수씨는 편모 슬하에서도 꿋꿋하게 자랐다. 집안은 두 과부, 곧 할머니와 어머니가 꾸려갔다. 홍씨는 처형된 남편의 두 동생까지도 뒷바라지하며 집안을 이끌어갔다. 광수 씨는 청주대학 축산과를 고학으로 졸업, 교사가 되었다. 지난 1966년 8월5일 그는 '한국일보' 기사에서 아버지 卞씨 등 한국인 처형자 열 네 명의 유골이 후생성 창고와 일본동경의 조영원(照榮院)에 보존돼 있음을 알게 됐다. 이들 유골은 일본 유골 수집단이 갖고 온 일본 전범자 유골 속에 섞여 있었으나 주인을 찾지 못하고 10년 동안 他國에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열 네 개의 유골은 싱가포르에서 처형된 10명과 자카르타에서 처형된 4명의 것이었다. 홍사익 장군의 유골이나 중국에서 처형된 사람들의 유골은 찾을 길이 없었다. 싱가포르에서 처형된 김귀호씨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유품인 안경만 돌아왔다. 광수 씨는 2년 뒤인 1968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아버지의 몸'과 상면하게 됐다. 한국인 戰犯 처형자 위령비 제막식이 일본인 소산견(小山見)씨의 주관으로 경도의 영산관음사에서 열렸고 광수 씨는 유족대표로 초대받아 갔다. 그는 아버지의 유골이 담긴 작은 나무 상자를 정신없이 열고는 주머니에 든 잿빛 뼛가루를 움켜잡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광수씨는 그러나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오지는 않았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전범 석방자들의 모임인 동진회가 이 유골들을 놓고 일본 정부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나선 때문이었다. 동진회 회원들은 '한국출신 전범 형사자들의 유골송환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등 여러 갈래로 일종의 처형자 복권운동을 펴고 있다. 그들은 '일본이 兵役 의무가 없었던 한국인을 강제 징용하고 군속 계약기간 2년을 지키지 않았으며 강화조약 발효 뒤에도 계속해서 한국인을 구금해 왔음을 인정, 여기에 걸 맞는 성의와 예의로써 유골을 송환시켜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B, C급 전범 처형자 유족에게는 적어도 해마다 백만 원씩 지급되고 있다. 동진회 회원들의 이 운동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학래 씨는 '돈은 2차 문제고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취급하는 저들의 태도이다'고 단언하고 있다. 광수씨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처형자 유족 가운데 연락이 닿는 이는 자신을 포함, 일곱 명뿐, 스물 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은 북한에 살던 사람들인데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연고자가 없는지 혈육을 찾을 방도가 없다고 한다. 남한 거주자 열 여섯 명 가운데에서도 연락이 닿는 일곱 명과 홍사익 중장을 빼면 여덟 명의 유족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집안의 기둥이던 청년들의 죽음으로 아내가 改嫁(개가)했든지 집안 전체가 몰락, 이산된 때문이 아닌가 보여진다고 광수씨는 말하고 있었다. 광수씨는 전범 처형자 유족관계 일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수집, 잃어버린 뿌리를 애써 찾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동진회 회원들이나 광수씨의 솔직한 심정은 일본 정부로부터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는 사과의 말을 공식적으로 한 번 들어보자는 것인 듯하다. 광수씨의 어머니 홍씨는 2년 전 일본여류 평론가 상판동자 씨가 취재 차 왔을 때 '유골도 필요 없다, 동정도 필요 없다. 돈도 소용없다, 남편을 돌려다오'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용서를 비는 말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내기가 쉬울 까닭이 없다. 더구나 1965년에 발표된 한일 협정은 이들 戰犯들에 대한 두 나라의 차디찬 외면의 자세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이 되었다. 對日 청구권 자금에 대한 유족 보상으로 日帝에 끌려 가 戰死한 한국인 유족들은 30만원씩 받았으나 戰犯 처형자들에겐 이 보상도 적용되지 않았다. 韓日협정은 1945년8월15일 이전에 발생한 청구권에 대해서만 보상을 한다고 규정, 해방 뒤 처형된 戰犯들에 대한 보상의 길을 제도적으로 봉쇄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청구권에 대한 두 나라의 문제는 이로써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다.'고 명시, 장래의 희망이나 가능성까지도 근절시켜버렸다. 이것도 모르고 광수씨는 1975년에 보상 신청을 재무부에 냈으나 신청서는 수리 거부되었다. 이 韓日 협정은 일본 정부에 좋은 구실을 주었다. 거듭되는 동진회의 보상 요구에도 그들은 '보상을 해 주고 싶어도 韓日 협정으로 이미 끝난 문제이다. 보상을 우리가 멋대로 해 주면 한국에 대한 內政간섭이 된다. 인간적으로는 동정이 가나 법률상 불가능하다'고 초지일관 버티고 있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죽었단 말인가' '아버지는 정말 개죽음한 것인가'란 호소는 '협정'과 '법령'이란 제도적 장치에 의해 묵살되었다. 답답한 동진호 회원들(그들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귀화하지도 않고 있다)은 故 朴正熙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낸 적도 있다. 그 답은 '일본 정부가 인도적 견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망할 것을 주일 대사에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일본국과 '인도적 견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낱말인데도 상판동자 씨의 계산에 따르면 유족들이 요구하는 한국 전범 처형자들에 대한 '성의'와 '예절'에는 300만 원(圓)이면 족할 것이라 한다. 일본정부 예산의 지출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알 수 없으나 또 日帝 군국의 책임을 민주 일본국이 그대로 상속받아야 한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해도 3000 한국 군속들이 겪은 수난, 울분, 원통, 억울의 양에 비추어 300만 원을 아끼는 경제大國의 논리는 무엇일까? 그들 일본인은 2차 대전 때 미국 정부가 在美 일본인들을 강제 수용시킨 것을 새삼 트집잡아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두 해 전에 어느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의 서울 특파원과 이 문제로 회견을 한 적이 있는데 출연비로 한화 5만원을 주더군요. 갑자기 일본 정부의 소행이 생각나서 그 돈을 면전에서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광수씨는 '이제는 저나 동진회 사람들도 이 문제에 매듭을 짓기로 하였습니다'고 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성의촉구를 포기하고 일본국의 양심을 재는 하나의 계량기로 그곳에 지금껏 남겨 두었던 유골들을 올해 안으로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당초 열 네 명의 유골 가운데 셋은 유족의 개인적 의사에 따라 오래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열 한 명의 유골이 지금 동경의 우천사(祐天寺)에 봉안되어 있다. 卞씨는 유골의 귀환을 위해 유족들을 찾고 있는데 아직 6명의 유족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6명 가운데 네 명은 일제 시대에 북한에 살던 사람들이다. 자칫하면 이 6명의 유골은 죽어서도 고향에 못 가는 형편에 놓이게 될 것 같다. 광수씨는 이미 비상리의 先山에 터를 보아 놓고 있다. 아버지의 유골이 돌아오면 손톱과 머리카락을 묻은 지금의 묘지에서 새 무덤 터로 이장시킬 계획이다. '그 동안 아이들한테도 아버지의 죽음을 떳떳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오셔서 조상들 곁에 편히 잠드시도록 한 다음에 터놓고 얘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생각하면 아버님의 죽음과 그 뒤의 일들이 모두 우리 민족사의 단면처럼 여겨집니다.' 35년 동안 남양과 일본에서 방황하던 변종윤 씨의 원혼이 고향 땅으로 돌아와 영면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누가 그에게 친일파라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던 조국은 이제 그를 편히 잠재워 주기나 해야 할 것이다. [필자 注] 이 글을 쓰는데 귀중한 자료와 증언을 제공해 주신 변광수, 이학래, 상판동자, 최기전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상판동자씨는 자기가 쓴 <소압(巢鴨)형무소 13호 철비(鐵扉>의 인용을 허락해 주었다. 이밖에 이 글에는 내해애자(內海愛子) 촌정길경(村井吉敬) 씨가 함께 쓴 <적도에 지다>(백남철 번역)에서 인용된 부분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통칭대로 '戰犯'이란 표현을 썼으나 한국인 군속들의 경우 이 낱말의 뜻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유족 못 찾는 6명의 유골 이 름 나 이 원적 처형장소 최창선(崔昌善) 32 함북 명천군 서남 용산동(함북 명천군 서남용산동) 자카르타 장수업(張水業) 31 평남 진남포 비석포동 75(평남 진남포 비석포동) 싱가포르 조문상(趙文相) 26 개성부 고려정 267(개성부 고려정) 자카르타 박준식(朴俊植) 31 개성부 지정 만월리 (개성부 지정 만월리) 자카르타 김장록(金長錄) 30 전북 군산부 해망정(전북 군산부 해망정) 싱가포르 김택진(金澤振) 26 경남 고성읍 서외동 26(경남 고성읍 서외동) 싱가포르 * 위의 사람과 연고가 있는 사람은 충북 청주시 청주농업고등학교 변광수 교사에게 연락바랍니다. 청주 3-8298(집) 2-4901(학교) *後記: 충북인뉴스는 2005년 1월 이렇게 보도하였다. <1986년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변광수씨의 어머니는 '변선생 어머니’라는 호칭을 들으며 젊은 시절의 고생을 스스로 위로받았다는 것. 변 지부장은 33년간 교사생활을 하다 2000년 정년퇴직했다. 그의 인생은 교사로 살아온 것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으로 요약된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번 돈의 많은 부분이 일제에 의한 피해를 진상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그의 집은 그가 주도해서 만든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 사무실이 돼버렸다. 회원은 현재 300명쯤 되지만, 당시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사람들의 생활이 뻔해 대부분의 경비를 卞 지부장이 내고 있어 사무실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희생자로 일본에 눌러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동진회 관계자들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26회에 걸쳐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의 국가보상 등 청구사건’을 진행했다. 지난 96년 시작된 재판은 99년 동경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판결을 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卞 지부장은 “재판부는 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양국간의 보상의무는 종결됐고, 외국 국적자에 대한 보상은 근거법이 없으니 입법해서 보상하라는 주문을 달았다. 변호인단은 4000만원을 보상 요구했으나 보상법이 현재 일본 국회에 계류중”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