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가 바라본 남조선’시간 진행을 맡은 김춘애입니다. 오늘도 전 시간에 이어서 '눈 오는 날 동물원에서의 아련한 추억‘이라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아침. 빈틈없는 등산 준비를 갖춘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머리,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 눈을 자주 쓸어내리며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청계산으로 갔습니다.
이날은 아침부터 내린 눈이 하루 온 종일 내렸습니다. 미끄러움을 잡아 가며 한 걸음 한걸음 산악회원들의 뒤를 따라 때로는 급강하의 경사지를 굵은 밧줄을 잡고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미끄러운 바위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오르기도 하며 한 치 한 치 올랐습니다.
산 아래 보이는 풍경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소복이 쌓인 눈 사각사각 밟노라니 마치도 하느님께서 뿌려 주시는 하얀 꽃보라 속에 등산 배낭이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듯했습니다.
청계산은 여름에는 산새가 수려하고 계곡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흘러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기도 합니다. 관악산과 함께 서울을 지켜 주는 좌청룡 우백호의 명산이며 주봉인 망경대를 비롯해 옥류봉 청계봉 이수봉 등의 봉우리들의 울타리 속에는 서울에서 제일 큰 서울 대공원이 있습니다.
눈발이 커져 도저히 한 치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지만 저는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등산객들도 많았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에서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눈 위에 벌렁 누워 친구의 손에 카메라를 쥐어 주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도 했습니다.
등산객들은 너도 나도 한 장씩 찍어 달라며 손전화기를 내밀어 갑자기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매봉까지 오른 우리는 가지고 간 따스한 물에 커피 한 잔씩 풀어 마시고는 더는 올라갈 수 없다고 단념을 하고는 산을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고는 서울 대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겨울이라 무슨 관광객이 있겠냐 하며 들어간 공원이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공원이라 하여 그저 놀이기구만 있는 줄로 알았는데 동물원이 있었습니다. 공원 내에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코끼리 전차도 있었고 하늘 높이 나는 索道(삭도)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동물원까지 온 우리는 당장 매표소로 가 표를 끊었습니다.
덥고 더운 나라에서 산다는 화려한 뱀들과 춥고 추운 시베리아에서만 산다는 범들과 백곰과 코끼리, 물개, 기린…다 큰 어른이어도 아이들마냥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많은 동물들을 구경했습니다. 제 고향, 평양 동물원에서 가져 왔다는 개승냥이를 보면서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고향에도 이곳 대공원처럼 대성산에 큰 평양 동물원이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10월이면 간단한 점심 도시락을 해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동물원을 찾아갔습니다. 아이들은 백두산 호랑이와 사자를 보고는 무서워 놀라기도 하고 재롱을 부리는 엉덩이가 빨간 원숭이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기도 했습니다.
이 평양 동물원의 앵무새와 기관조새는 '작업반장 만세' ' 8·15 만세'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이 새삼 기억이 나서 웃어봅니다. 저는 고향 평양에서 진달래 꽃 피는 화창한 4월이면 만경대 유희장을 찾았고 울긋불긋 단풍지는 가을이면 대성산 동물원을 찾던 지난날의 저의 가족과 오늘 이곳 남한에서의 저의 가족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았습니다.
지나간 세월의 행복은 잠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몇 장의 그림으로 어렴풋하지만 이곳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은 그때 느껴 보지 못했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듯 아주 진한 추억으로 남을 듯합니다.
저는 친구들과 함께 백두산에서만 산다는 호랑이와 사자. 황금색의 두꺼비와 물개를 손 전화기의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기념으로 남기려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대공원을 다 돌고나니 오후 5시가 넘었지만 눈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쌀쌀한 저녁 기운을 소주와 연포탕으로 날려 보내고 다음 등산 약속을 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내 고향 같으면 이렇게 눈 오는 겨울 등산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등산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들놀이는 봄과 가을에만 하는 줄로 알고 동물원에도 가을에만 가는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철 차창 밖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눈송이를 보면서 탈북하여 중국의 어느 산간 마을에 숨어 살았던 기억이 새삼 안겨 왔습니다. 그때에도 함박눈이 펑펑 쉴 새 없이 내렸습니다. 어린 딸과 함께 산 속으로 소달구지를 끌고 나무를 하러 갔었습니다.
제가 찍어 놓은 나무를 산 밑으로 끌어내리러 가던 어린 딸이 한참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저는 급하게 300m나 되는 산 밑으로 달려갔습니다. 글쎄 작은 삵을 보고 무서워 눈더미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딸을 달래며 말 모르는 타향에서의 서러움으로 딸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복 속에 지난 추억으로 마음이 저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 또 기다려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눈오는 날의 동물원 구경
- 김춘애(자유북한방송)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10-01-21, 22: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