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다. 남자는 일단 뜻을 세웠으면 그 뜻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만을 생각하고 나아가야 하며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좌절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목적으로 가는 도중에서 죽어야만 한다. 생(生)과 사(死)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사(大事)를 성공 시키려면 하늘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이란 시국(時國)을 말하며 시운(時運)이라고도 한다. 시국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운을 타고 일을 진행시킬 때 대사(大事)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 하늘을 통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대사를 이루려고 하는 자가 우선적으로 구비해야 할 요소이다.”
“사나이답게 죽는 것도 좋다. 하지만 사나이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목적과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理想)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나이가 가야 할 길이자 취해야 할 행동이다.”
“남자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결코 '큰일 났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 매사에 있어 용의주도하게 생각한 후 행동에 옮겨야 하고 그래도 궁지에 몰렸을 경우 '큰일 났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큰일 났다'고 말하는 순간 인간은 이미 지혜도 사고도 분별도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역사를 이루어 가는 주체들이 위대한 점은 과연 무엇일까? 평범한 자들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자기희생과 진정한 용기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 바로 그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일컬어 영웅(英雄)이라 한다. 역사란 그러한 영웅들에 의해 변혁되어 지면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을 뿐 다시 태어난 일본에서 영달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런 심경이 아니고서는 대사업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 내가 평소 그런 심경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개 낭사에 지나지 않는 내 의견을 세상 사람들이 경청해 준 것이다. 또한 이렇게 큰일을 성취한 것도 그 덕분이다. 일이란 것은 전부 해 버리면 안 된다. 8할까지면 족하다. 그러나 8할까지가 어려운 것이다. 나머지 2할은 누구라도 다 할 수가 있다. 그 2할은 남에게 할 수 있도록 하여 완성의 공을 양도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사업을 이룩할 수 없다.”
사카모도 료마는 1835년 도사번(藩)의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료마는 열아홉 살의 나이인 1853년 에도로 올라와 검술 도장에 입문하여 검객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해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 네 척을 이끌고 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는 그 압력에 굴복하여 개국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외국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양이 운동이 거세지고, 개국으로 돌아선 막부를 옹호하는 쪽과 천황을 정권의 중심에 놓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존왕양이파로 갈려 일본 전역은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비록 막부의 통치 하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60여개에 달하는 번(藩)이 마치 하나의 독립된 국가처럼 독자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검술에 정진하여 젊은 나이에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에 필적할만한 최고 검객의 경지에 도달한 료마는 페리의 강압적인 개국 요구에 자극을 받아 도사 번의 하급무사들이 주축이 된 도사 근왕당에 참여하고 그 후 막부를 지지하는 도사 번의 정책에 반대하여 번에서 탈퇴한다. 이처럼 번을 탈퇴한 무사를 낭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료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는 동안 개국을 통한 근대화야말로 서구 열강으로부터 일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하고 점차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서게 된다. 료마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막부의 군함 사령관인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어 항해술을 배우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사설 함대를 창설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천한 하급무사 출신의 이 낭인은 정확한 정세 판단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마침내 사설함대의 꿈을 이루어 낸다. 그리고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죠슈 번과 사쓰마 번, 그리고 동시에 막부를 설득하여 마침내 쇼군으로 하여금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60여 번이 막부지지파와 근왕파로 갈려 최후까지 사투를 벌이게 될 유혈 사태를 막는다.
료마의 위대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무사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번의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료마는 통일된 하나의 일본을 생각하고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영국인과 네델란드인 그리고 외국 서적들을 통해 서구의 민주주의와 상하양원제 등 법적 제도 등을 접하고 왕정복고 이후 이를 일본에 도입함으로써 일본이 근대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 초석을 마련했다.
이러한 자신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영혼인 료마는 권력에는 일체 욕심이 없었다. 그는 정치가 안정되면 자신은 해상무역을 통해 일본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67년 11월 료마는 메이지 유신을 코앞에 두고 자객의 칼에 맞아 서른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일본 근대화에 온몸을 던진 사카모도 료마.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본의 100년을 바꿔놓은 영웅의 삶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