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同族(동족)을 치기 위하여 外勢(스탈린과 毛澤東)를 끌어들이는 6.25 남침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고 약 300만 명이 죽게 하였다. 김정일은 개혁 개방을 거부함으로써 북한주민 300만 명을 사실상 굶겨죽였다. 그 사이 한 끼당 200만 원을 들인 밥상을 받아 먹었다. 이란産 철갑상어알, 곰발바닥 요리, 참치 뱃살, 매일 空輸(공수)되는 파리의 아이스크림, 상어지느러미 등.
그 어떤 독재자나 짐승보다도 흉악한 짓을 한 父子는 유태인 수용소보다 더 참혹한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약100만 명을 더 죽였다. 이 父子가 죽인 700만 명의 屍身(시신)을 한 줄로 깔아놓으면 평양에서 파리를 지나 마드리드까지 간다. 약 1만4000km의 屍身의 띠!
이 700만 명의 怨魂(원혼)들이 결국은 김정일을 죽일 것이다. 북한주민들이 김정일을 '위원장'이나 '친애하는 지도자'란 호칭 없이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들도 비로소 700만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서 나올 때가 있다. 인간 生命은 지구만큼 소중한 존재이므로 인간생명을 말살한 자들은 應報(응보)를 받는다는 원칙이 존재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 이렇게 규정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실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神聖(신성)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창조되었으며, 그런 평등한 창조로부터 빼앗길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받았는데 생명의 保全(보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거기에 속한다>
생존권, 자유권, 평등권, 행복추구권은 인간의 권리이고 의무이다. 700만 명의 생명으로부터 이런 자유와 행복을 배앗은 김정일 정권에 드디어 역사의 심판이 내리려 한다. 700만의 怨魂은 남한의 親北세력도 함께 파멸시킬 것이다. 대한민국 덕분에 배불리 먹고 살면서 대한민국을 욕하고 학살자 김정일을 동경해온 자들은 生前에 치욕을 맛볼 것이다. 물론 단말마의 최후 狂亂(광란)을 벌이려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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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長燁(황장엽) 선생 다음의 고위급 탈북자이지만 아직도 신원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C씨는 1997년의 김정일보다 2010년의 김정일이 훨씬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하였다.
“13년 전엔 아직도 사상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에 대한 反感(반감)도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북한 사람들, 심지어 안전원(경찰관)까지도 ‘김정일 위원장’ ‘친애하는 지도자’ ‘장군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김정일’이라고 부르면서 욕을 합니다. 수령지배체제에서 수령에 대한 존경심과 공포심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요사이 흥분상태에서 잠이 안 옵니다.”
그는 북한에서 최근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김정일에 대한 공공연한 비방이 확산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13년 전에 김정일을 그렇게 불렀다간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이다. C씨는 “이번 화폐개혁은 못 사는 사람이나 당 간부나 농민이나 기업소나 모든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했다.
“13년 전엔 그래도 출구가 있었습니다. 시장을 허용함으로써 주민들이 배급체제가 마비된 이후에도 생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出口(출구)가 없습니다. 화폐개혁으로 물가는 오르는데 물건을 구할 수 없고 시장마저 닫아버린 데다가 배급마저 끊기니 외부 지원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김정일이는 최근 탈북하였다가 잡히면 징역 20년 이상을 살리라고 엄명을 내렸다는데 이것도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13년 전과 가장 달라진 점은 김정일 정권을 지탱하는 黨軍政(당군정)의 중견 간부층이 동요하고 있는 점이라고 했다. 북한의 고위층의 최근 동향에 대하여도 밝은 그는 “김정일 한 사람만 빼고는 모두가 중국식 개혁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김정일이 생존한 상태에서도 이들이 김정일 無力化(무력화)를 위하여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C씨외 미국 장보기관에서 퇴직한 베테랑 對北(대북)공작 전문가 L씨를 초청하여 김정일 정권 붕괴 가능성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두 사람이 견해의 일치를 보인 점은, “김정은 후계설은 小說(소설)이다” “김정일 유고시 吳克烈(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實權(실권)을 잡을 것이다” “지금이 북한정권 붕괴 공작을 펼 適期(적기)이다”는 분석에서였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확정되었다면 북한노동당의 선전선동부가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후계자 확정에 즈음한 사상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김정은이 당의 요직에 앉았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습니다. 김정은이 의미 있는 활동을 한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김정은이란 이름 자체가 노동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함께 살고 있는데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작년에 국가원수格인 김영남이 일본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후계자설을 정면 부정하였습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확정했는데도 김영남이 이를 공식 부인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이때 후계자 문제를 부각시켜 1인 지배체제를 흔드는 자살적 행동을 김정일이 과연 하겠습니까? 앞으로 김정은이 후계자가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후계자로 결정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김정은 관련 보도는 조작된 정보에 의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 1년간 국내외 언론이 보도한 ‘김정은 후계자설’ 관련 기사는 거의 전부가 오보로 밝혀졌다. 올해 들어서서도 일부 언론은, 지난 1월8일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의 생일이라면서 북한정권이 '민족의 명절'로 경축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서해 도발 등 북한정권이 무슨 일만 내면 ‘후계구도 굳히기용’이라는 판박이 분석이 유행중이다.
C씨는 정보 브로커들이 김정은 관련 정보나 문서를 조작하여 수천 달러씩 부르면서 팔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는 “지금은 스무 살 남짓한 애숭이에 대한 관심을 끄고 북한정권을 이 기회에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김일성 시절 인민무력부장(한국의 국방장관) 오진우와 오극렬은 군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권력암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김정일은 오극렬을 감쌌다고 한다. 70대 후반인 오극렬은 공군사령관 출신인데 노동당 작전부장으로서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김정일은 “오극렬은 나의 별동대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작전부는 對南(대남)침투 공작이 전문인데, 자체적으로 무기를 제작하고, 수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 지대공 미사일, 잠수정, 고성능 폭약도 작전부 직할 군수공장에서 제작한다. 이란 등지에 수출도 한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張成澤(장성택)도 오극렬과 함께 유사시의 실력자 후보이긴 하지만 그동안 ‘곁가지’(김정일의 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친인척)라고 하여 견제를 많이 받아 人脈(인맥)이 약하다고 한다.
L씨는, 1997년 무렵에 정권 붕괴의 불안에 휩싸인 북한 정권 안에서 탈출자들이 잇따랐는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흐름이 逆轉(역전)되었다고 했다.
“내가 신문하였던 모 외국 주재 북한 공작부서 간부는 ‘김정일이 불안하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김정일의 망명 가능성을 연구한 적도 있습니다.”
1997년 체코 주재 미국 대사관에 브라질 여권과 도미니카 여권으로 세 명의 미국 입국 비자 신청이 들어왔다. 한 명은 여인, 두 사람은 남자였다. 사진 상 세 사람 모두 동양인이었다. 이름으로 보아 브라질인과 도미니카인으로 귀화한 한국인으로 추정되었다. 미국 대사관은 이 세 사람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입국 비자를 내어준 지 몇 달 뒤 미국 정보기관은 우연히 비자발급 대장에 붙은 사진을 조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 비자를 발급받은 한 남자는 김정일, 다른 남자는 비자금 담당 비서 박용무, 그리고 여자는 김정일의 애첩 정일선(마카오에 별장을 갖고 있다)으로 밝혀진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의 후속 조사결과 박과 정일선은 미국을 여러 번 들락날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위조여권으로써.
김정일은 진정으로 미국에 가려고 했을까. 이런 일이 있은 지 1년 뒤인 1998년 5월 김정일의 愛妻 고영희(사망)의 여동생 고영숙(46세)과 그의 남편 박모(40대 후반)가 스위스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고영숙 부부는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던 김정일의 아들들(김정철, 김정은)을 뒷바라지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스위스 은행에 약 40억 달러의 비자금을 예치하고 있으며, 레만 호숫가에 두 채의 빌라를 사두고 있었다.
김정철-김정운 형제가 살았던 빌라는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외교관 정일선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고영숙은 「정일선」이란 이름의 외교관 여권을 갖고 다녔다. 마카오에 별장을 가진 김정일의 첩도 이름이 정일선이다. 여러 명의 정일선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일 망명 주선하겠다』
고영숙의 남편 박모는 미국에서 정보기관의 관리 하에 살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했다. 김정일이 뉴욕 證市에 투자한 사실을 제보하여 이를 동결시키도록 했고, 스위스 은행에 예치한 金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고 한다. 高의 남편 박은 엉뚱하게 들리는 제안도 했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있다. 내가 나서서 그를 미국으로 망명하도록 주선할 용의가 있다』
북한의 對南공작부서 출신 한 탈북자는 『고영숙이 미국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김정일이 일부러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미국 측의 반응도 보고 자신의 망명 연습 삼아 말이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 미국 정보기관은 북한의 조선민항 여객기가 뚜렷한 목적도 없이, 손님도 태우지 않고 취리히 공항에 자주 오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잠정적인 결론은 김정일이 스위스로 망명할 때를 대비하여 연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도 몇 달 간이나 유럽으로 나가 안 들어온 적이 있었다. 김정일은 권총을 곁에 두고 자다가 고영희가 치운 적도 있다고 한다(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증언). 김정일에 대한 암살, 쿠데타 모의가 잇따라 적발되던 시기였다.
1997년 11월엔 노동당의 대외정보 조사부(한국 국정원의 해외부서에 해당) 부장을 지냈던 권희경이 러시아 KGB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 몇 달 전엔 농업담당 비서 서관희가 안기부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청진 주둔 제6군단 장교들이 쿠데타 모의를 했다고 하여 집단 처형되었다. 김정일은 인민보안성(사회안전부의 후신)에 특명을 내려 ‘심화조’를 조직, 당군정민(黨軍政民)에 걸친 일대 숙청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약 3만 명이 적발되어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갔다. 매년 50만 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을 때였고 황장엽 비서가 북한체제의 붕괴를 예감하고 한국으로 탈출했을 때였다.
이런 시기 김정일이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한 것이다.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망명 연습일 수도 있고, 김정일의 부하가 미리 받아놓은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김정일의 친족들은 위조여권으로 해외를 여행 다니는 것을 즐긴다. 호기심이나, 특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1997년 前後에 미국 정보기관도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예감하고 김에 대한 망명공작을 검토했다고 한다. 망명 후보지는 스위스와 러시아, 그리고 미국이었다고 한다.
1997년 무렵엔 북한정권 내부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 안에서도 “김정일 정권이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핵문제도 그때 해결될 터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남북 회담장에서 만난 북한 요인들이 잘 아는 남측 인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가족을 잘 부탁한다”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에 급급하였고 노동당 간부층에선 아직도 김정일에 대한 신뢰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과 미국이 ‘무너져 주기’를 바랄 뿐 붕괴공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찾아가 만나면서부터 김정일 정권은 위기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좌파정권 10년간 100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과 물자가 북한정권에 제공되었다. 김정일은 이 돈으로 핵폭탄과 미사일을 개발하였고, 6𑦳 선언을 이용하여 남한내에 거대한 친북세력을 구축, 韓美(한미)동맹 관계를 이간질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2007년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정세는 다시 한번 逆轉(역전)되었다. 對北(대북) 퍼주기가 중단되고 韓美日 협조체제가 재가동되면서 북한정권은 다시 봉쇄망 속에 갇혔다. 두 번째 위기가 김정일에게 찾아온 것이다. 김정일은 그 사이 나이가 더 들었고 건강도 나빠졌다.
무엇보다도 북한주민들이 시장을 통하여 먹고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이에 覺醒(각성)하기 시작하였다. 300만의 떼죽음이 인민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김정일 때문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방법도 터득하였다. 이번 수탈식 화폐교환 조치는 각성된 주민들에게 김정일에 대한 怨恨(원한)을 심어주었다. 이 원한이 불씨가 되어 들불로 번지고 김정일 정권을 불태울 것인가의 與否(여부)는 상당 부분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의지에 달렸다.
C씨와 L씨는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김대중식 회담으로 김정일을 살려주지 않을까를 가장 걱정하였다. 고위 탈북자 C씨는 “李 대통령이 또 평양에 가서 만나면 김정일의 권위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되고 변화를 바라는 북한주민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고 단정하였다. L씨는 “李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고싶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정권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작전을 짜야 한다”고 했다.
보수층 사이에선 “김정일에게 갖다 줄 돈이 있으면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든지 대통령이 김정일을 꼭 만나야 한다면 그 자리에서 망명을 권유하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폴란드 反共봉기의 원인은 物價폭등
수탈식 화폐개혁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생필품의 品貴(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북한에선 주민들의 70% 이상이 시장경제에 의존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런 경제악화는 소요사태를 부를 수도 있다. 북한엔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은 보이지 않으나 物價(물가)에 민감한 시장세력은 있다. 이 세력이 소요를 일으킬 힘이 있는가? 진압군으로 동원된 부대가 진압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가가 관찰의 요점이다.
東歐(동구) 공산주의를 뒤흔든 폴란드의 세 차례 소요사태의 원인은 물가폭등과 생필품의 부족이었다. 1956년 6월 폴란드의 포즈난市(시)에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생필품과 식료품의 부족, 주택사정의 악화, 물가고로 인한 실질 임금소득의 감소, 이런 가운데서도 소련으로 상품을 보내는 것에 항의하는 騷擾(소요)였다. 폴란드 정부는 保安軍(보안군)을 투입, 발포하여 상당수 시위자들을 죽였다. 정부는 이들을 ‘제국주의 세력의 조종을 받는 反혁명분자’라고 규정하였다. 시위가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폴란드 공산당은 이들을 ‘고통 받는 정직한 노동자들’로 재규정하면서 임금을 50%나 올리고, 정치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정부는 한때 실각하였던 黨內(당내) 개혁파 고물카를 당 제1서기로 추대하여 이런 개혁을 主導(주도)하도록 하였다.
자유유럽방송(RFE)은 이 소요사태를 집중적으로 보도, 1956년 10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학생들이 反共(반공)봉기를 일으키도록 불을 질렀다. 헝가리 학생들은 처음엔 고물카식 개혁을 요구하다가 나중엔 공산체제 타도를 부르짖었다. 한때 공산정부를 대체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소련군이 개입하여 反共(반공)시위대를 流血(유혈)진압하였다.
1970년 12월에도 폴란드의 공업도시 그단스크 일대에서 식품 값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가 발생하였다. 고물카가 이끄는 폴란드 공산정권은 군대와 민병대를 투입, 발포하였다. 40명이 죽고 천 명이 다쳤으며 3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소요가 전국적으로 번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물카를 물러나게 한 뒤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승낙을 받고 에드워드 기에레크를 제1서기로 추대하였다.
기에레크 정권은 외자도입으로 경제난을 극복하려 하였으나 外債(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하게 되고 다시 경제난이 찾아왔다. 1980년 6월 쇠고기 값과 기름값, 담배값 등 생필품의 가격을 인상한다는 발표가 있자 루블린과 바르샤바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였다. 철도노조원 5만 명이 加勢(가세)하고 8월엔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에서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의 파업이 이어졌다. 폴란드 정부는 진압군의 투입을 포기하고 자유노조의 설립을 허가하는 양보를 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국제공산주의 역사상 비공산계 노조(솔리데리티)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이 세력이 폴란드 출신 교황(요한 바오로 2세)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응원을 받아가면서 反共(반공)민주화 운동을 주도, 1989년에 폴란드를 비롯한 東歐(동구)공산체제가 붕괴되는 계기를 만든다. 1980년 시위에 책임을 진 기에레크 제1서기는 물러나고 스타니슬라브 카니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1981년 12월 야루젤스키 국방장관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아류젤스키는 강경책으로 소련군의 개입 가능성을 제거한 뒤 자유노조와 서서히 타협하면서 민주화의 과정을 슬기롭게 관리하였다.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가폭등과 품귀현상이 주민 소요로 번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동원되어 流血(유혈)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진압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북한정권은 타격을 받게 된다. 북한에선 시장을 통하여 돈을 벌고 먹고 사는 ‘시장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소요사태를 겪으면 ‘체제개혁 세력’, 즉 민주화 투사들로 질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드디어 700만의 怨魂(원혼)들이 일어난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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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04, 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