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출신의 젊은 폴란드 대통령 인터뷰

"체제전환기에는 젊다는 것이 좋습니다."
크바니예프스키/체제전환기에는 젊다는 것이 좋습니다
-체제전환기에는 젊다는 것이 좋은 겁니다 - 폴란드의 40代기수 알렉산더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

42세인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민주투사 바웬사를 누르고 당선된 舊공산당 개혁 엘리트 출신의 지도자이다. 그는 민주투사들보다 더 개혁적이고 자본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면서 東歐의 개혁우등생인 폴란드를 유럽질서(EU 및 NATO)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국가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1996년 8월 월간조선>

비취색 눈동자

1996년 7월1일 오후3시 바르샤바 시내 大路변에 있는 대통령官 1층 접견실에서 기자 일행은 알렉산더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전관이 오더니 『회의가 안 끝났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3시10분쯤 사전 예고없이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를 했다. 기자는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라고 영어로 인사했다. 1m 75cm 정도의 키에 미들급 권투선수의 몸집처럼 군살이 빠진 대통령의 파란 비취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만42세인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응접실 의자에 가서 털썩 앉자마자 『자 시작합시다』라는 자세를 취했다. 대변인도 동행하지 않았다. 미리 질문요지를 냈으나 답변준비 서류 같은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오렌지 주스 한 잔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주권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원수한테서 느끼게 마련인 권위보다는 젊음이 주는 밝은 분위기, 친숙함, 그리고 편안함이 거기에 있었다. 듣던 바대로 美男인 이 40代 기수는 대화 중에 문득 케네디 대통령이나 위렌 비티라는 영화배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 항상 反共대열의 선두에 있던 나라

인터뷰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의 등장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것 같다. 東유럽 위성국가의 反共 민주화투쟁 전선에서 항상 선봉에 섰던 나라가 폴란드였다. 1956년 6월 포즈난 市에서 저임금 때문에 발생한 노동자들의 폭동은 그해 10월의 헝가리 민중봉기의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 1980년부터 그다니스크 조선소에서 바웬사의 지휘하에 시작된 자유노조(솔리테리티)의 反共 민주화운동은 東歐 공산주의 붕괴의 전주곡으로 80年代를 울려 퍼졌다. 검은 안경 낀 장군 야루젤스키가 1981년에 黨 서기장에 취임,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유노조 운동을 탄압한 행위는, 지금에 와서는 소련의 개입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선제조치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야루젤스키 서기장은 10년간 재임하면서 폴란드가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과도기의 사회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금도 야루젤스키는 자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바웬사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야루젤스키의 리더십에 의하여 폴란드 공산당은 東歐에서 가장 먼저 기득권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개혁하여 민주좌파연합(Democratic Left Alliance)이란 민주정당으로 거듭나는 「위대한」변신을 이루었다. 1989년 4월 헌법개정으로 민주화 수용, 6월의 자유선거에서 야루젤스키 대통령 당선, 8월에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와의 대타협으로 자유노조 주도의 聯政수립, 자유노조 출신 마조비에츠키 총리 임명, 1990년 공산당 자진해산, 9월 야루젤스키 사임, 12월 바웬사 대통령 당선. 이 기간에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1954년 11월 15일 출생인 그는 의사의 아들이었다. 그다니스크 大學을 중퇴한 뒤 ETC란 주간지와 「젊은이의 기치」라는 공산당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7년 33세의 나이에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참여하여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폴란드 공산당이 육성한 개혁파 엘리트 그룹을 대표하는 그는 1991년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3년 9월 총선에서 재선된 그는 30代 후반에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 좌파연합의 당수가 되었고, 한국-폴란드 의원연맹의 폴란드측 위원장으로서 지난해 大選 직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金泳三 대통령과도 만났다.

駐폴란드 정기옥(鄭基鈺) 대사와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단이 방문하자 크바스니예프스키 위원장이 주빈이 되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였다고 한다. 미리 양해를 구한 대로 크바스니예프스키 의원은 한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오늘 제 집사람이 외국여행에서 돌아오는데 제가 운전을 해서 마중나가야 하기 때문에 실례하겠습니다』라고 설명하더란 것이다. 「폴란드의 힐러리」란 별명을 가진 그의 부인은 변호사인데 부동산회사를 경영하다가 남편이 대통령이 된 뒤 손을 뗐다. 공식석상에 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날 만큼 몸매와 미모에 자신을 갖고 있다고 한다.

민주투사의 퇴장

1993년 총선에서 舊공산당 세력인 민주좌파연합이 제1당이 돼 폴란드 농민당과 손잡고 연립정부를 수립, 농민당 당수 파블락이 수상에 취임했다.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 下에서 노선이 다른 바웬사 대통령과 내각이 갈등을 일으켜 정치불안이 계속되었으나 경제개혁 조치는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다. 바웬사 대통령은 거친 행동과 발언으로 해서 지식인을 비롯한 일부 계층에선 『나라 망신을 시킨다』느니 『폴란드의 평균적 수준에도 미달하는 사람』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위대한 민주투사에 대한 그런 인간 평가 때문에 11월 大選에서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었다.

크바스니예프스키 후보는 젊음을 내세워 미국 大選방식의 참신한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국회내의 여당인 민주좌파연합이 내각뿐 아니라 대통령직까지 장악함으로써 폴란드는 모처럼 정치적 安定을 맛보고 있다. 크바스니예프스키의 등장은 바웬사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의 퇴조를 의미한다. 폴란드의 가장 큰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의 지난 4월 6∼8일자 지면에는 아담 미슈니크라는 사람이 쓴, 민주화 세력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실려 있었다.

〈독재에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울 때의 논리와 민주국가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논리는 크게 다르다. 前者는 인간적 존엄성, 용기, 다소의 광신적 태도를 필요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직업적 전문능력, 영리함, 환경변화에 대한 기민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민주화 투쟁기에 도덕적 절대주의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민주체제 아래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민주주의는 항상 음모, 空約, 애매한 타협과 합종연횡(合從連횡)을 수반한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숭배했으나 막상 그것이 성취되자 그 속에서는 기분이 나쁜 것이다. 압제자와 배신자에 대한 경멸감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변하기 쉽다. 이런 경향 때문에 민주화 지도세력은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를 파괴했다. 영웅적 행동주의는 과대망상으로 변하고 과거의 도덕적 장점은 무례한 보상요구로 변질되었다〉

크바니예프스키 대통령은 최근 자유노조 운동의 성지(聖地)격인 그다니스크 조선소에 대한 파산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도록 했다. 적자누적, 노동자들의 생산성 저하로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유노조원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제는 공산당 출신 정치세력이 민주화 세력보다 더 자본주의적으로 변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

폴란드와 東歐가 얼마나 정신없이 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회원국이며 바르샤바라는 명칭을 빌려주었던 그 폴란드가 이제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코, 헝가리, 폴란드의 東歐 내 선진 3개국 중 여론조사에서 NATO 가입을 찬성하는 비율이 가장 높게 나온 것도 폴란드였다(81%찬성). 폴란드는 체제 전환의 진척도에서는 체코와 선두를 다투고 있다. 경제지표는 건실하다. 1992년부터 GNP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이래 2.6%(92%), 3.8%(93년), 5.2%(94년), 7.0%(95년)의 고속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폴란드는 지난해 유럽 전체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빨랐다. 물가상승률도 91년의 70%에서 95년엔 27.8%로 떨어졌다. 외환보유고는 1백50억 달러, 무역규모는 약 4백70억 달러(95년)에 18억 달러의 적자이다. 1인당 GNP는 2천2백27달러, 실업률은 15%. 폴란드의 성공적 체제 전환은 과감한 개혁정책 덕분으로 평가된다. 그런 급격한 정책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공산통치下에서도 시장 경제적 요소가 유지돼 온데다가 공산당內의 개혁파와 在野민주세력이 경쟁적으로 체제의 개선을 위해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축구시합엔 기적이 가능하나 국가발전엔 공짜도 기적도 없는 법이다. 폴란드와 한국과의 관계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대통령의 등장과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大宇의 FSO 자동차 공장 인수에 의하여 더욱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 鄭基鈺 대사의 평이었다. 대사로서 활동하기도 쉬워졌고 한국정부의 외교적 협조요청에 대해서는 WTO(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출 때를 제외하곤 모두 다 들어줄 정도라고 한다. 大宇가 12억 달러를 투자하게 될 FSO 자동차공장은 본공장이 바르샤바 도심에 있고 국민차인 플로네즈를 생산해온 폴란드 산업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한국과 폴란드의 관계를 특별한 사이로 오랫동안 묶어둘 수 있는 접착제 역할을 할 것이다.

본공장과 13개 부품공장의 부지가 87만 평, 건평이 27만 평에 이르고, 종업원이 2만5백명인 FSO를 인수할 때 金宇中 회장은 한명도 감원하지 않고 생산능력을 2002년까지 52만대(96년엔 12만 5천 대 생산계획)로 확대함으로써 人力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하여 GM을 제치고 인수에 성공했다. 대우의 FSO 인수는 작년에 폴란드의 10大 뉴스로 뽑힐 정도였다고 한다. 동아그룹의 大水路공사에 의해 리비아가 한국과 특수관계에 놓이게 된 것처럼 폴란드와 한국도 같은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공감대 위에 공통된 이해관계의 가교를 건설한 셈이다.

서울올림픽 때 修交협상

-저는 폴란드가 체제변화 시기에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이룩한 업적을 취재하기 위하여 貴國을 방문하였습니다. 아울러 폴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기업에 대해서도 보도할 예정입니다. 폴란드는 유명한 이름들을 통하여 한국인과 매우 친숙하게 돼 있습니다. 예컨대 프레데릭 쇼팽, 마리 퀴리, 코페르니쿠스, 셴케비치, 그리고 최근에는 대우-FSO란 이름이 등장하여 두 나라를 더욱 가깝게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본인은 청소년 체육부장관으로서 선수단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첫 한국 방문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서울 올림픽에의 참가를 계기로 하여 폴란드와 한국간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접촉이 진행되었는데 제가 실무책임자였습니다. 저의 정치경력에 있어서 그것은 특별한 과제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도 폴란드-한국 친선의원연맹의 회장으로서 아주 만족할 만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개인적으로도 한국과의 관계는 특별한 인연입니다.

한국과 폴란드는 비슷한 역사적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主權을 지키며 독립과 영토를 보존할 것인가 하는 숙명적 주제를 가지고 고뇌해 왔습니다. 한국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리적으로는 멀리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폴란드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폴란드의 역사적 이웃인 러시아·독일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에서 대우, 삼성, 현대, LG와 같은 기업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大宇의 金宇中 회장은 우리 두 나라를 가깝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주최할 때 한국인들은 이 행사를 현대사의 결정적인 계기로 만들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벽을 넘어서』라는 철학下에서 이념을 초월하여 全세계가 참여하는 온전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귀하께서는 서울올림픽이 東歐 공산주의의 붕괴에 기여하였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보이콧으로 망가졌으므로 서울올림픽까지 그렇게 되었다가는 올림픽 운동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이념을 초월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국제정치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때 고르바초프가 아니고 체르넨코 같은 대화 반대론자가 살아 있었다면 그런 변화는 불가능했었으리라는 점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알리면서 우리도 이제는 어려운 체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니까요』

* 『NATO에 가입해도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는 유지할 것』

-귀하의 정부는 폴란드의 장기적인 국가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계십니까.

『첫째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는 약 7%의 GNP 성장률을 기록하였습니다. 둘째로는 사회적 문제를 풀어 가는 일로서 失業문제와 소득계층간·세대간의 격차, 즉 현실적응 능력이 뛰어난 젊은 세대와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의 격차를 극복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세 번째 과제로서는 NATO와 EU(유럽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회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法治의 기반을 정비하여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목표를 매우 짧은 기간 內에 즉 5∼7년 안에 해낼 작정입니다』

-폴란드가 곧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러시아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방안이 있습니까.

『그런 걱정은 고정관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NATO는 과거에 러시아를 敵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敵으로 삼지 않고 유럽 전체의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러시아가 선거철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기에는 그곳의 분위기가 너무 뜨겁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도 유럽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下의 안보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보스니아에서는 이미 NATO군과 러시아軍, 그리고 우리 군대가 협조하면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NATO와 러시아가 서로 협력하고 친선하는, 새로운 개념의 유럽안보 체제가 양쪽에 모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전환기 때는 젊은 리더십이 적합』

-42세의 젊은 나이에 귀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지도층이 등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지금 폴란드를 이끌어가고 있는 엘리트 그룹은 30代, 40代의 젊은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도층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이신데 젊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저는 1973년에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다행이었던 것은 그 시대가 개방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외국에 대한 열등감이나 경계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戰前세대보다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이념보다는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개척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트層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현재 폴란드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국가에 유리하다고 봅니다. 폴란드는 짧은 시간 內에 西유럽의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지도층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지면 문제를 보수적으로 보게 되지 않습니까. 폴란드가 당면한 거대한 과제, 즉 영국·프랑스·독일과의 격차를 좁히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최적의 연령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40∼50세 사이의 연령층이 가장 좋다는 거지요』

* 『바웬사는 이미 역사적 역할을 확보한 인물』

-사람들이 귀하를 「前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지난 40∼50년 사이에 폴란드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폴란드의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東獨 공산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공산주의였습니다. 최근 러시아 선거에서 주가노프는 헝가리나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는 진짜가 아니고 사회민주주의자이며 자신이야말로 진짜라고 여러 번 발언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 안에서 개혁과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前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만 이제는 그런 비판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바웬사氏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만 우리는 자유시장경제와 그 효율성을 존중하고 민주적 절차를 지키려 합니다. 저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 중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에 害가 될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폴란드의 자유화 시기에 과도적 대통령이었던 야루젤스키와 前任 대통령 바웬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두 사람은 각자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를 이미 확보한 사람입니다. 저에게 개인적인 평가를 주문한다면 답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는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루젤스키는 非민주적인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등장했으나 퇴장할 때는 민주화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치하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웬사氏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투사였고 노벨상 수상자였으며 세계적인 有名인사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바웬사氏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데, 그 이유는 대통령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야루젤스키와 바웬사氏의 뒤를 이어받아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내 임무는 두 전임자를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이룬 업적을 딛고 21세기로 나아가고 있는 폴란드를 보다 강하고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패는 자본주의의 룰을 파괴하므로 敵이다』

-체제 전환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국민들이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참아낼 각오를 하도록 全국민적 공감대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하께선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며 이끌고 가십니까.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으로서 득을 보게 된다는 것을 실증해 주어야 하고 지지세력을 모아야 합니다. 개혁에 따른 피해자가 수혜자보다 많으면 개혁의 추진은 불가능해집니다. 다행히도 폴란드에서는 개혁의 수혜자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매년 10만∼15만의 일자리를 더 만들어가고 있으니 돌아왔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우리 군대가 바르샤바조약기구 속에서 활동하다가 나토(NATO)로 옮겨가게 돼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민감한 사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군대는 유럽기준으로 보아서도 확고한 文民통제를 받고 있으므로 큰 문제가 없을 것 입니다』 (이때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마지막 질문을 해주십시오. 룩셈부르크 외무장관이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 『그다니스크 조선소라도 이익을 내어야지요』

-그다니스크 조선소는 反共민주화 투쟁의 本山이고, 바웬사氏에 의한 솔리데리티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공장입니다. 최근 귀하의 정부는 이 조선소에 대한 파산신청을 법원에 냈습니다. 노동자들은 반대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무엇입니까.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조선소가 생존해갈 수는 없지요. 조선소는 정치적인 조직이 아니라 경제조직입니다. 좋은 배를 만들고 돈벌이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역할을 한 조선소다」는 식으로 고집을 부려선 안됩니다. 그들은 좋은 배, 경쟁력 있어 이익이 나는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치적인 경향에 너무 의존해서인지 그러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다니스크」라는 이름을 보존하고 싶고 한국과 같은 나라의 선진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우리 정부의 보증下에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선소로 탈바꿈시키고 싶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논의해선 안됩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십니까.

『있습니다. 한국이 분단과 관련하여 취하고 있는 평화적인 접근방식이 성공할 것을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런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한국은 강력한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 해결에도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년엔 貴國의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貴國의 총리께서도 최근에 다녀가셨습니다만 우리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또한 文化的으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친선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일어서면서 한국말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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