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專用이 祖國과 역사를 파괴하는 사례

한글專用으로 쓰여진 韓國史 관련 책이나 논문은 절대로 읽을 수가 없다. 키 워드인 國名, 人名, 地名, 官職名이 한글專用이니 완벽한 암호문이다.
한글專用으로 쓰여진 韓國史 관련 책이나 논문은 절대로 읽을 수가 없다. 키 워드인 國名, 人名, 地名, 官職名이 한글專用이니 완벽한 암호문이다. 이 바쁜 세상에 암호를 일일이 풀어가면서 文章을 해석해갈 사람이 있는가?

오늘도 그러하였다. 百濟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구글에 들어가 위키피디아 문서를 읽었다. 한글專用이고 가끔 괄호안에 漢字가 들어 있었다. 도저히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라고 썼는데 '십제'라는 한글어가 古代에 있었단 말인가?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에서 도대체 '양직공도'가 무슨 말인가? 冊인가, 官職인가?


그래서 日本語 구글로 들어가 '百濟'를 검색하였다. 나는 일본어를 알기 때문에 일본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百濟 관련 글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自國의 역사를 굳이 일본 자료를 통하여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한글專用에 의하여 한국어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母國語는 祖國이라고 한다. 母國語 파괴는 조국과 역사의 파괴이고 그 결과는 정체성과 自我상실에 의한 事大主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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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는 한국의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한다.[1]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2]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부의 소국들 및 한군현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근초고왕 때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으며,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목차 [숨기기]
1 역사
1.1 백제의 국가 성립
1.2 백제의 정치적 발전
1.3 백제의 흥성
1.4 멸망과 부흥운동
2 통치 기구
2.1 중앙 관제
2.2 행정 구역
3 경제
4 사회
5 문화
5.1 한학
5.2 국사편찬
5.3 시가
5.4 종교와 사상
5.5 건축
5.6 미술
5.7 국제적인 문화교류
6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7 요서 경략설
8 백제시대 주요 문화재
8.1 주요 국보
8.2 주요 보물
8.3 주요 사적
9 백제의 인물들
10 관련 페이지
11 주석
12 바깥 고리


역사 [편집]
백제의 국가 성립 [편집]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온조설화 외에 비류 혹은 구태, 도모가 건국 했다는 비류설화, 구태설화도 전해져 온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소금의 산지였던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3] 중국과의 무역로를 확보한 백제는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16관등과 공복제정함과 함께 6좌평과 상좌평까지 제정(260년)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백제의 정치적 발전 [편집]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흥성 [편집]

백제의 왕관 장식(무령왕)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371년)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일대 및 산둥 반도, 일본 큐슈에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송서, 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요동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어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개로왕전사와 함께 웅진성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이를 백제가 산둥 반도를 점유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551년)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에서 전사(554년)하고 말았다.

멸망과 부흥운동 [편집]

한국의 역사 (연표) v • d • e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신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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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제 태
봉
고려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왕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에서부터 936년 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통치 기구 [편집]
중앙 관제 [편집]
백제의 관서(官署)는 현저히 분화·발전하여 크게 내관(內官) 12부와 외관(外官) 10로 나누어져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部)[4]·외경부(外部)[5]·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거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행정 구역 [편집]
백제의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수도를 5부(五部)[6]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五方)[7]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方領)과 차관격인 방좌(方佐)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將)이 있어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처의 주요 읍(邑)에는 왕자·왕족을 분거케 하였으며, 이를 ‘담로(擔魯)’라 하였다. 이것은 군을 거점으로 하는 제도가 정비되기 전의 일이다.

경제 [편집]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와 수리시설이 발달하였고,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 ·금관 ·금은 장식품 ·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斗落制)를 썼으며 조세는 조(租)를 쌀로, 세(稅, 인두세)로 포목, 비단 실과 삼, 쌀을 내었고,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2월에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의 대외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 ·누에 ·직조법 ·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靈岩) 및 당항성(黨項城)이 크게 번성하였다.

사회 [편집]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8]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9]

문화 [편집]
한학 [편집]
오경박사(五經博士)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 472년(개로왕 18) 북위 (북조)[北魏]에 보낸 국서(國書)가 《위서(魏書)》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성왕 19) 양(梁)나라 사신 육허(陸詡)가 와서 <예론(禮論)>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阿直岐)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 때 단양이(段楊爾) ·고안무(高安茂) 등이 일본에 유학(儒學)을 전하였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의 금석문인 지석(誌石: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국사편찬 [편집]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국사를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시가 [편집]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井邑詞)》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해지며 《지리산가(智異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방등산가(方等山歌)》 《선운산가(禪雲山歌)》 등이 있다.

종교와 사상 [편집]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동진(東晋)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600년(법왕 2)에 착공해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謙益)이 대표적인 계율종(戒律宗)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山景紋塼)이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漢人)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 書記〉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건축 [편집]
동성왕 때의 임류각(臨流閣), 의자왕 때의 태자궁(太子宮)·망해정(望海亭)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시·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塼築墳)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梁)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古墳)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木造塔)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複葬)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玄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塼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그들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石村洞)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卒本)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積石塚)이며, 웅진(熊津)시대의 공주시 송산리(宋山里)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蓮花文)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석수(石獸) ·동자상(童子像) ·청동경 ·자기 ·지석(誌石) ·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梁)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은 물론이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고분은 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 ·운문(雲文), 사신도(四神圖)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音菩薩立像),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金製冠飾)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山水文塼) ·연화문전(蓮花文塼)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瓦當)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기와의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은 온화한 아름다움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조각가로서는 신라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건축한 아비지(阿非知)가 있다.

미술 [편집]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神宿圖)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를 그린 아좌태자(阿佐太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남긴 하성(河成)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誌石: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의 기록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鼓) ·각(角) ·공후(箜篌) ·쟁(箏)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오(吳)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국제적인 문화교류 [편집]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經書)와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백제의 사상과 문화는 왜에 전파되어 그들의 고대문화에 큰영향을 주었다. 한성시대에는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왜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縫女)·야공(冶工)·양주인(釀酒人)을 비롯해 와박사(瓦博士)·조사공(造寺工) 등의 건축기술자도 파견되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飛鳥)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편집]
한일 관계#삼국 시대와 조몬·야요이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왜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고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왜는 백제로 부터 불교와 한자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고 백제는 왜로 부터 군사인력을 제공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풍장(豊璋)의 남동생·선광(善光)의 자손은 왜 왕실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는 무령왕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和)씨의 출신이다. 현존하는 인물화상경은 백제의 무령왕이 게이타이(繼體)천황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로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또한 오늘날까지 당시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百濟池)가 남아 있다. 또한 백제(百濟)씨 일족이나 백제(百濟) 마을 등도 남아 있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오사카 시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 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10]

약 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11]"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13] 이처럼 벼농사는 오랫동안 조선을 경유한 것으로 얘기되어 왔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벼 유전자 연구와 각종 유적에서의 출토품, 수경재배 흔적의 증거등으로부터 남쪽의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전래되고,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학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의 주류가 되었다.[14] 따라서 일본의 각종 역사 교과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도 수정되고 있다.

문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 현에서 생산되었던 흑요석이 한반도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서 경략설 [편집]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15],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16]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과 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요서 경략 시기는 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요서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17]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백제시대 주요 문화재 [편집]
주요 국보 [편집]
9호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1호 : 미륵사지 석탑
154호~ 165호 : 무령왕릉 출토품 (금제 관식, 은제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지석, 두침 등)
247호 :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
287호 : 백제금동대향로
288호 :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293호 : 금동관세음보살입상
298호 : 갑사 삼신불괘불탱
299호 :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주요 보물 [편집]
148호 : 공주중동석조
149호 : 공주반죽동석조
194호 : 부여 석조
196호 : 금동석가여래입상
329호~330호 : 군수리석조여래좌상,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
주요 사적 [편집]
13호 : 공주송산리고분군
14호 : 부여능산리고분군
44호 : 부여군수리사지
87호 : 익산 쌍릉
99호 : 부여쌍북리요지
135호 : 궁남지
150호 : 익산미륵사지
301호 : 부여정림사지
373호 : 부여정암리와요지
420호 : 부여능안골고분군
425호 : 부여화지산일원유적
427호 : 부여왕흥사지
428호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434호 : 부여능산리사지
435호 : 부여금강사지
474호 : 공주정지산유적
산성 : 부여성흥산성(4호), 부소산성(5호), 공주공산성(12호), 부여청마산성(34호), 부여나성(58호), 부여청산성(59호), 부여석성산성(89호), 증산성(156호)


백제의 인물들 [편집]
승려
겸익
관륵
현광
혜현



예술가
미마자
아비지
아좌태자



학자
아직기
왕인
고흥
단양이
고안무
장군
계백
복신
윤충
지수신



외교가
노리사치계
흥수, 성충
의직


관련 페이지 [편집]
삼국시대
백제금동대향로
나주 신촌리 고분출토금동관
백제의 역대 국왕
백제의 관직
나제동맹
주석 [편집]
↑ 538년에 백제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 진수(陳壽), 《삼국지》, 4세기
↑ 한 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역사 52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8년 9월
↑ 내름부 또는 내량부(內椋部)라고도 함
↑ 외름부 또는 외량부(外椋部) 라고도 함
↑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
↑ <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원제(元帝)인 소역(蕭繹, 505∼554)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재임시(526∼539)에 편찬한 도서(圖書) 이다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
↑ 홍윤기 교수.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6년 7월 25일 작성. 2009년 7월 8일 확인
↑ 홍윤기 교수.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6년 8월 1일 작성. 2009년 7월 19일 확인
↑ 《체계일본역사》,1967
↑ 홍윤기 교수.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1월 13일 작성. 2009년 7월 8일 확인
↑ 시즈오카 대학 농학부의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 조교수와 미국의 많은 바이오계 연구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과 한반도, 요동반도 등 극동아시아에 존재하는 벼는, 온대성 자포니카종 및 열대성 자포니카종으로 크게 2종류로 나뉘는데, 그 중 일부 유전자를 가지고 종묘군의 유전자를 확인하면 중국 동북부부터 한반도를 원산지로 하는 개량종에서는 해당 유전자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명확해졌다. 또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하여 분석해 보아도, 일본에서의 탄화된 쌀은 기원전 4천년정도까지 소급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증거들을 가지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벼농사가 전래되었다고 본다.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역으로 일본에서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설명이 일본에서는 유력시되고 있다. 佐藤洋一郎『稲のきた道』裳華房/『DNAが語る稲作文明』日本放送出版協会、松尾孝嶺『栽培稲の種生態学的研究』)
↑ 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
↑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
↑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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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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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

三国時代の地図、4世紀終わり頃
各種表記
ハングル: 백제
漢字: 百濟
平仮名:
(日本語読み仮名) くだら、ひゃくさい
片仮名:
(現地語読み仮名) ペクチェ
ラテン文字転写: Baekje
表・話・編・歴
朝鮮の歴史

先史時代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氏朝鮮 辰国 古朝鮮
高句麗 扶余 沃沮 濊 三韓 原三国
高句麗 伽耶 新羅 百済 三国
渤海 統一新羅 南北国
渤海 後高句麗 新羅 後百済 後三国
高麗
李氏朝鮮
大韓帝国
日本統治時代
連合軍軍政期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大韓民国
百済(くだら/ひゃくさい)は、古代の朝鮮半島南西部にあった扶余系民族による国家(346年[1] - 660年)。朝鮮史の枠組みでは、半島北部から満州地方にかけての高句麗、半島南東部の新羅、半島南部の伽耶諸国とあわせて百済の存在した時代を朝鮮半島における、三国時代という。新羅を支援した唐によって滅ぼされ、故地は最終的に新羅に組み入れられた。なお、日本語における呼称「くだら」の由来は不明であるが、古くは「くたら」と清んで発音していたらしい。[2]

目次 [非表示]
1 歴史
1.1 民族と言語
1.2 建国神話
1.3 前期、漢城時期( - 475年)
1.4 中期、熊津時代(475年 - 538年)
1.5 後期、泗沘時代(538年 - 660年)
1.6 百済復興運動
2 倭国との関係
3 王
4 官制
5 文化
6 百済遼西経略説
7 脚注
8 関連項目
9 参考文献と外部リンク


歴史 [編集]
百済は4世紀中頃に国際舞台に登場する(『晋書』「慕容載記」)。それ以前の歴史は同時代資料では明らかでない。

建国時期が書かれている『三国史記』(1143年執筆)では紀元前18年建国になっており、韓国・北朝鮮の国定教科書ではこれを引用している。歴史的な建国時期に関しては、韓国でも紀元前1世紀説から紀元後3世紀説まで様々な説があるが、三国史記自体に疑いがもたれるとされる。またその当時に書かれた中国・倭等の文献と後年になって書かれた三国史記の内容には隔たりがあるため、現在では大韓民国・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以外の国(中国や日本を含む)では、3~4世紀あたりに成立されたとみなされるのが一般的となっている。

通説では『三国志』に見える馬韓諸国のなかの伯済国が前身であろうとされているが詳細は不明である。

民族と言語 [編集]
民族については、百済王・高句麗王(夫余)等に代表されるツングース系中国人の国家であったと言う説、また現在の朝鮮で提唱されるツングース系中国人の支配層(王族・臣・一部土民)と被支配層(土民中心)の朝鮮人であったとの2説がある。中国政府のシンクタンクである中国社会科学院は、公式研究書で百済に対して「(高句麗と)同様に古代中国の辺境にいた少数民族である夫余人の一部が興した政権」と主張している。

百済の言語についてはじめて記した史書は『梁書』である。

今言語服章略与高麗同

とあり、言語や服装などが高句麗とおおよそ同じであるとしている。なお新羅の言語は閉音節で発音が子音で終わるのに対して、高句麗と百済また倭では開音節で、母音で終わっていたとされる[3]。

『魏書』も『梁書』の記述を踏襲したが、『周書』は、百済王の姓は夫余氏であり、自ら「於羅瑕」と称していたこと、一方、民衆は「鞬吉支」と呼んでおり、どちらも王の意味であることを特記している。「臣と高句麗は源は夫余より出る」[4]との文より百済と高句麗は同族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た。

李基文は、この呼称の違いは王族をはじめとする支配層と民衆を中心とする被支配層とで言語が異なる二重言語国家であったことを示すものであり、この二重言語状態は高句麗と同じ夫余系言語を話す人々が韓系の言語を話す馬韓の住民を征服したことによって生じたと推定した。この推定に基づけば、『周書』以前の史書が百済の言語を高句麗とほぼ同じと記したのは、支配層の言語である夫余系百済語の方に注目した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

建国神話 [編集]
この節は執筆中です。加筆、訂正して下さる協力者を求めています。
百済の始祖については様々な系譜が伝えられているが、いずれも扶余につながるものとなっている。

『三国史記』百済本紀(逸失書がもととなっている部分であり朝鮮では正史とされるが編纂当時に偽書として扱われた経緯もある。朝鮮での説であり日本や中国などでは4世紀建国が一般)
前漢の鴻嘉3年(前18年)、高句麗の始祖である朱蒙の三子温祚によって建国されたとされる。温祚の母は卒本扶余の王女であり、北扶余出身の礼氏の子である孺留(高句麗の第2代瑠璃明王)が太子となったため、温祚は南方に逃れ「十済」を起こした。この時、兄である沸流も一緒に南下して海浜に国を起こしたが、のちに自分の国が弟の国より繁栄してないことを恥じて自決した。結局その国も温祚の下に帰属し、百姓を受け容れたので国号は「百済」になった。これは扶余から色んな勢力が南下し国を起こしたが、軍事・経済的に優れた温祚勢力によって統合され、その結果として百済という国が作られたことを意味してるのであろう[誰?]。

原三国時代の地図中国の史書
『後漢書』『宋書』[5]、『梁書』[6]、『南史』『隋書』などが採録した百済建国伝説をまとめると、百済は始めは高句麗と「ともに」遼東の東千里の地にあった扶余が王を立てて自立したものという。
また晋時(317?年)に高句麗が遼東を占領した頃(404年)に、百済もまた遼西・晋平の2郡を平定した(あるいは百済郡を置いた、またはその郡治は「晋平郡晋平県」ともいう)という(百済遼西経略説)。
前期、漢城時期( - 475年) [編集]
中国の史料で百済という国号が明らかになるのは4世紀の近肖古王からである(『古事記』では、応神天皇の治世に照古王の名が記されている)。 その頃の百済の都は現在のソウルの漢江南岸にあり、漢城と呼ばれた。紀元前1世紀から紀元後3世紀の間に作られたとされるソウルの風納土城、夢村土城がその遺跡と考えられている。


三国時代の地図、5世紀終わり頃漢城時代の百済は拡大を続ける北方の巨人・高句麗との死闘を繰り返した。近肖古王は371年に楽浪郡の故地である平壌を攻めて高句麗の故国原王を戦死させたこともあるが、その後は高句麗の広開土王や長寿王のために押され気味となり、高句麗に対抗するために倭国と結ぶようになった。この間の事情は広開土王碑文に記されている。高句麗の長寿王は平壌に遷都し、華北の北魏との関係が安定するとますます百済に対する圧力を加えた。これに対して百済は、この頃に高句麗の支配から逃れた新羅と同盟を結び、北魏にも高句麗攻撃を要請したが、475年にはかえって首都・漢城を落とされ、蓋鹵王が戦死した。

中期、熊津時代(475年 - 538年) [編集]
王都漢城を失った475年当時、新羅に滞在していて難を逃れた文周王は都を熊津(現・忠清南道公州市)に遷したが、百済は漢城失陥の衝撃からなかなか回復できなかった。東城王の時代になって中国・南朝や倭国との外交関係を強化するとともに、国内では王権の伸張を図り南方へ領土を拡大して、武寧王の時代にかけて一応の回復を見せた。しかし6世紀に入ると、新羅が大きく国力を伸張させ、高句麗南部へ領土を拡大させた。このような中で百済の聖王は538年都を熊津から泗沘(現・忠清南道扶余郡)へ南遷した。これは百済の領土が南方(全羅道方面)に拡大したためでもあると考えられる[誰?]。

ただ過去の百済の記録を多く採用している『日本書紀』の雄略紀によれば、高句麗に漢城を攻め落とされた時に百済は一度滅び(475年)、その後(477年)に雄略天皇が百済王に熊津の地を賜って国を再興させたとある。

後期、泗沘時代(538年 - 660年) [編集]

三国時代の地図、6世紀終わり頃聖王によって泗沘に都が移されると同時に、国号は南扶余としたが、その国号が国際的に定着することはなかった。この頃、かつての百済の都であった漢江流域も新羅の支配下に入り、高句麗からの脅威はなくなったものの、これまで同盟関係にあった新羅との対立関係が生じた。聖王は倭国との同盟を強固にすべく諸博士や仏像・経典などを送ったが、554年には新羅との戦いで戦死する。ここにおいて朝鮮半島の歴史は高句麗と百済の対立から百済と新羅の対立へ大きく旋回した。百済は次第に高句麗との同盟に傾き、共同して新羅を攻撃するようになった。新羅の女王はしきりに唐へ使節を送って救援を求め、高句麗と争っていた唐は日本からの遣唐使を黄海に面した領土を獲得した新羅経由で帰国させるようになるなど新羅の要請に応え、朝鮮半島は遠交近攻による「百済-高句麗」と「新羅-唐」の対立となり、どちらのブロックに与するかが倭国の古代東アジア外交の焦点となった。

660年、唐の蘇定方将軍の軍が山東半島から海を渡って百済に上陸し、百済王都を占領した。義慈王は熊津に逃れたが間もなく降伏して百済は滅亡した。

百済復興運動 [編集]
唐は百済の領域に都督府を設置して直接支配を図るが、唐軍の主力が帰国すると鬼室福信や黒歯常之などの百済遺臣の反乱を抑え切れなかった。また百済滅亡を知った倭国でも、百済復興を全面的に支援することを決定し、倭国に人質として滞在していた百済王子である扶余豊璋を急遽帰国させるとともに阿倍比羅夫らからなる救援軍を派遣し、斉明天皇は筑紫国朝倉宮に遷った。帰国した豊璋は百済王に推戴されたが、実権を握る鬼室福信と対立し、遂にこれを殺害するなどの内紛が起きた。やがて唐本国から劉仁軌の率いる唐の増援軍が到着し、663年倭国の水軍と白村江(白馬江)で決戦に及んだ(白村江の戦い)。

これに大敗した倭国は、各地を転戦する軍を集結させ、亡命を希望する多くの百済貴族を伴って帰国させた。豊璋は密かに高句麗に逃れたが、高句麗もまた668年に唐の軍門に降ることになる。唐は高句麗の都があった平壌に安東都護府を設置して朝鮮半島支配を目指し、百済の故地に熊津都督府をはじめとする5つの都督府を設置して熊津都督に全体の統轄を命じた。664年の劉仁軌の上表を受けて義慈王の太子であった扶余隆を熊津都督に任じた。その翌年の8月には就利山において扶余隆と新羅の文武王が劉仁起の立会の元に熊津都督府支配地域(旧百済)と新羅の国境画定の会盟を行わせた(『旧唐書』百済伝・『三国史記』新羅本紀)。後に扶余隆は百済の歴代国王が唐から与えられていた「帯方郡王」に任じられ、子孫に称号が継承されている。これは亡国である百済の太子が唐によって新羅王と同格と扱われたことを示すとともに高句麗最後の王宝"101王の遼東都督任命と対比することが可能である。そのため、扶余隆の熊津都督任命が単に百済遺民の慰撫を目的としているだけではなく、百済や高句麗(安東都護府・遼東郡王)を滅亡前の冊封国家ではなく羈縻国家として再建し、更に唐の軍事力を背景に残された新羅(鶏林都督府・楽浪郡王)をも強引に羈縻体制に組み入れて、将来的には「朝鮮半島全域の中華帝国への編入」を視野に入れていた可能性も指摘されている[7]。

これに反発した新羅は百済・高句麗を名目的に復興させて反唐戦争に動員し、倭国とも友好関係を結んだ。西方で国力をつけた吐蕃の侵入で都長安さえ危険な状態になった唐は、地理的にも遠方であり紛争続きで経営の困難な朝鮮半島の権益を放棄し、百済の故地は新羅の支配下に入った。新羅は百済故地に残留した百済の支配層を新羅の貴族階層へ取りこんでいくことで新羅支配の実効性を確保していった。ただし、前述のように扶余隆の子孫への帯方郡王任命は継続されており、唐は表向きは百済への支配権を主張する体裁を採っていた(『旧唐書』百済伝)。

倭国との関係 [編集]
倭国との外交関係は、高句麗・新羅に比べて友好的であった。百済の中期には、高句麗の軍事的圧力に対抗するために和通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日本書紀』の中には、領土を奪われた百済に任那の一部を割譲した記録や援軍を供出した記録、さらには倭朝廷に朝貢したり、王族を人質として差し出した記録などが数多く残っている。また中国の『隋書』にも、新羅・百濟は、みな倭を以て大国にして珍物多しとなし、並びにこれを敬い仰ぎて、恒に使いを通わせ往来す。(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という記述があり朝貢関係があったことをうかがわせる。さらに、広開土王碑でも倭について、百済■■新羅を破り以って臣民と為す(「倭ロ<耒卯年来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という部分があり百済が辛卯年(391年)に倭によって支配を受けていたことも明らかとなっており主従関係が存在しており、倭の重臣と百済との間で家臣上下に関わる席順の取り合いのエピソードも残されている[要出典]。 また王族については、百済の王族は倭によってその婚姻が決められており中国ーツングース系と倭人との混血が繰り返された[要出典]。基本的に百済王の后が倭人の中から選ばれ、その王子が王位に付くまでの間、倭が王子を人質として扱った[要出典]。

『日本書紀』には百済の歴史書が多く引用され(『百済記』『百済新撰』などが引用されているが遺失した歴史書である)、百済から輸入された文物は多い。有名な文化財には、軍事的援助の礼として、中国より伝来したとの説もあるが、百済から倭に送られた奈良県の石上神宮に伝わる七支刀がある。

百済滅亡により、百済王と王族・貴族を含む百済人が倭国に亡命し一部が朝廷に仕えた。豊璋の弟・善光(または禅広)の子孫は朝廷から百済王(くだらのこにきし)の姓を賜った。百済王氏は8世紀に敬福(きょうふく)が陸奥守として黄金を発見し東大寺大仏造立に貢献するなど日本の貴族として活躍した。大阪府枚方市の百済王神社は百済王氏の氏神を祭る神社である。この他にも、5世紀に渡来した昆伎王を祀る延喜式内社飛鳥戸神社など百済にまつわる延喜式内社がある。また奈良県北葛城郡広陵町には百済の地名が集落名として現存し、百済寺三重塔が残る。また兵庫県神戸市には扶余系にちなんで唐柩の地名が残る。なお百済王氏ではないが、光仁天皇の妻の一人であり、桓武天皇の生母である高野新笠は百済武寧王を遠祖とする渡来人和氏の出身という記述が『続日本紀』にあるものの、定かではない。

王 [編集]
『周書』百済伝によれば、王を表す固有の呼称として「於羅瑕(支配層=扶余系百済語における呼称)」と「鞬吉支(被支配層=韓系百済語における呼称)」の二種があり、王妃は「於陸」と呼ばれていたという。「鞬吉支」については『日本書紀』古訓に見える「百済王」の「王」の和訓のコニキシ/コキシに相当すると考えられる。なお、百済王家の子孫で日本の朝廷に仕えた者に与えられた氏姓である「百済王」も「くだらのこにきし」と呼ばれていた。

扶余族の東明伝説に因んで、百済の王族は姓を扶余(ブヨ)と名乗った。だが、5世紀後半からは中国風に一字姓の余(ヨ)も名乗るようになっており、扶余姓と余姓を併用するようになっている。この併用の習慣は百済の滅亡まで続く事となる。

歴代の王については

「朝鮮国王の一覧#百済」も参照

官制 [編集]
『三国史記』によれば、始祖温祚王の時代から左輔・右輔の官名が見られる。これは高句麗における最高官位と同名であるが、高句麗では新大王のときから国相が最高官位となった。百済では第8代の古尓王の27年(260年)のこととして、一品官の六佐平(各種事務の担当長官)とそれに続く15段階の官とあわせて16等からなる官制が整備されたとしているが、実際に佐平制の雛形が整ったのは第15代枕流王(在位:384年 - 385年)の頃と考えられている。第18代の腆支王の4年(407年)には佐平の上に上佐平の官位を置いている。

『周書』百済伝には、佐平(左平)は五人とし、各官職の帯の色(七品は紫帯、八品は皂帯、九品は赤帯、十品は青帯、十一品・十二品は黄帯、十三品以下は白帯)とし、三品以下は定員がなかったと伝えている。

官位
佐平(さへい) - 一品官。その担当する職務によって、6種類に規定される。
内臣佐平(ないしんさへい) - 宣納(王命の伝達)の担当
内頭佐平(ないとうさへい) - 庫"101(財政)の担当
内法佐平(ないほうさへい) - 礼儀(儀式)の担当
衛士佐平(えいしさへい) - 宿衛兵(王の禁軍、近衛兵)の担当
朝廷佐平(ちょうていさへい) - 刑獄(司法)の担当
兵官佐平(へいかんさへい) - 外兵馬(対外軍事)の担当
達率(たつそつ) - 二品官
恩率(おんそつ) - 三品官
徳率(とくそつ) - 四品官
扞率(かんそつ) - 五品官
奈率(なそつ) - 六品官
将徳(しょうとく) - 七品官
施徳(しとく) - 八品官
固徳(ことく) - 九品官
季徳(きとく) - 十品官
対徳(たいとく) - 十一品官
文督(ぶんとく) - 十二品官
武督(ぶとく) - 十三品官
佐軍(さぐん) - 十四品官
振武(しんぶ) - 十五品官
克虞(こくぐ) - 十六品官
官庁
内官 - 前内部、穀内部、内ケイ部(ケイはまだれ[广]に京)、外ケイ部、馬部、刀部、功徳部、"220部、木部、法部、後宮部
外官 - 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點口部、外舎部、綢部、日官部、市部



文化 [編集]
漢城時代の墳墓は、旧以前からある土壙墓・石槨墳に対して支配者層の積石塚が見られる。積石塚は高句麗に良く見られ高句麗とのつながりが確認できる。熊津時代には支配者層の墓は、積石塚に代わって石室墳や塼築墳が採用されるようになった。1971年に発見された武寧王陵は横穴式石室墓の典型のものである。泗沘時代には長方形の石室墓が広く流行し、山の中腹に墳墓が設けられるようになった。

王都とは離れた全羅南道では、百済の勢力が及んだ5世紀末から6世紀初頭のことであり、それ以前には甕棺墓を基本とする文化圏が広がっている。これらは馬韓の勢力の名残と推定され、日本で見られる前方後円墳型の封土墳も多く見られ、倭の影響も確認できる。

仏教の受容については、高句麗に遅れること10年、枕流王の元年(384年)に東晋から胡僧の摩羅難陀を迎えたこと、翌年には漢山に寺を創建したことを伝えているが、4世紀末の仏教遺跡は見つかってはいない。百済の寺名がはっきりと現れるのは熊津時代の大通寺であり、聖王の時代の建立と考えられている。他に熊津時代の寺としては、公州市には水源寺址、西穴寺址、南寺址などが残っている。聖王は泗沘に遷都した後に、梁から『涅槃経』などの経典、工匠・絵師などを下賜され、積極的に仏寺の造営をすすめた。王興寺・定林寺・軍守里廃寺などの寺址が扶余郡で発見されており、泗沘時代の仏教が盛んであった様子が『隋書』百済伝に「有僧尼多寺塔」と記されていることを裏付けている。

4世紀後半の近肖古王の時代に博士高興(こうこう)を得て初めて漢字に触れ、その後には王仁が倭に『論語』や千字文をもたらしたと伝えられるように、百済では早くから漢文・古典に習熟していたとみられている。聖王の時代に梁から下賜されたものには、仏教経典とならんで毛詩博士が記されているように、中国からの文物の受容に熱心であったことが伺える。

百済遼西経略説 [編集]
百済が中国の遼西地方に進出したという、いわゆる「百済遼西経略説」は、『宋書』、『梁書』などの南朝系史書から始まったものであるが、実際に遼西地方を支配していた北朝系史書には関連記録が全く見られず、韓国・北朝鮮以外の学界では主要な学説とは認められていない。

韓国の学界においても一般的には百済の遼西進出については否定的な見方が大勢であるが[8]、近年もなお百済の遼西進出を事実とする説は提起されている[9]。韓国の国史編纂委員会で編纂する『国史』教科書では、1990年までは百済が遼西を攻撃したと敍述していたが、1990年以降は進出という表現を使って曖昧に表現している。

一方、韓国の在野史学系では、百済の遼西経略を認める方向である。中でも大陸史観を唱える人々は、百済の位置を朝鮮半島西南部ではなく黄河と長江の間に比定して、百済の遼西経略が事実だと主張する。

百済遼西経略説においては、韓国ではその時期についても争点となっている。『宋書』、『梁書』などの記録によれば、遼西経略時期は晋末期で、高句麗が遼東を占領した以後とされるが、高句麗が遼東を明白に占領した時期は広開土王の時(391年~413年)のことであり、この時期の百済は高句麗との戦争に敗北して58個の城を奪われるなど遼西に進出する余力はなかったと見られるため、それ以前の高句麗が385年に一時的に遼東を占有した時に百済の遼西進出があったと見る学者もいる[9]。これ以外にも、申采浩は近仇首王の時、鄭寅普は責稽王・汾西王の時、金庠基・金哲埈は近肖古王の時と見るなど、多様な主張が存在する。

脚注 [編集]
^ なお、韓国の国定教科書では建国神話にもとづいた前18年説を採用している。
^ 上古の用例は不詳であるが、『図書寮本類聚名義抄』(1081年)にある用例・久太良の訓は清音である。
^ 犬飼隆「古代の言葉から探る文字の道」『古代日本 文字の来た道』大修館書店,2005年,PP.74-77
^
魏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其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 長史餘禮 龍'524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上表自通 云 臣與高麗 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鄰好 陵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 『北史』列伝第82(百済伝)

読み下し:魏の延興二年(472年)、その王、餘慶は初めて、そこの冠軍將軍駙馬都尉の弗斯侯、長史の餘禮、龍'524將軍帯方太守の司馬張茂らを遣わして上表し自ら通じた、言うには「臣は高句麗の源流である扶余より出る、先世の時代、旧款を尊ぶことに篤く。高句麗の祖の釗は、近隣の友好を廃して軽んじ、臣の国境を侵し、陵墓を踏み荒らす。臣の祖の須は、軍旅を整え電撃し、釗の首を斬って晒した。爾来、敢えて南を顧みる(南下を試みる)ことなし)
^
百濟國本与高驪 倶在遼東之東千里余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都晋平県

– 『宋書』卷97・列傳第57(百済国条)

<
^
其國(百済)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 句麗既略有遼東 百濟亦拠有遼西 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梁書』卷54・列傳第48(百済条)

^ 筧敏生「百済王姓の成立と日本古代帝国」『古代王権と律令国家』校倉書房、2002年、P16-27
^ 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 (ユウォンジェ、「"百済略有遼西" 記事の分析」、『百済史の理解』、ハギョン文化社、1991)
^ a b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 (カンジョンフン、「4世紀百済の遼西地域進出とその背景」、『韓国古代史研究』30、韓国古代史学会、2003)
関連項目 [編集]
百済史年表
百済考古遺跡
古代朝鮮半島関連の中国文献
飛鳥時代
参考文献と外部リンク [編集]
『朝鮮史』 武田幸男編、山川出版社<新版世界各国史2>、2000 ISBN 4-634-41320-5
『三国史記』第2巻 金富軾撰 井上秀雄訳注、平凡社〈東洋文庫425〉、1983 ISBN 4-582-80425-X
『三国史記』第3巻 金富軾撰 井上秀雄訳注、平凡社〈東洋文庫454〉、1986 ISBN 4-582-80454-3
「http://ja.wikipedia.org/wiki/%E7%99%BE%E6%B8%88」より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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