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소녀가 겪은 敵 치하 3개월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폭격이 멎었다. 살아 있는 것조차 신기할 뿐, 가족들은 서로의 安危조차 묻지 않았다. 동네를 내려다 보니 어제까지 건재하던 곳이 사라져 버렸다
어른들의 아이들 단속
그날은 아침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그 해 무더운 여름 석 달 동안 비행기 폭격 소리, 기관총 소리, 또는 수시로 어느 집 누가 총살당했다는 소리를 매일 들어온 터였지만, 그날 아침부터 용산 쪽에서 울려오는 소리는 아주 기분 나쁜 소리였다고 생각한다.
앉아 있으면 땅 속으로부터 『웅웅웅』하고 들려오는 소리, 서 있으면 공기를 가르고 무엇인가 날아 다니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과 쥐 죽은 듯한 정적, 길거리의 사람들은 도망치듯 가고 있었다. 한낮이 지나자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서 들려 왔으며 길에는 꽤 많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진작부터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고 단속하기 시작했으며 어떤 일인지 며칠 전부터는 길에서 활보하던 인민군 내무서원, 또는 붉은 완장을 차고 아무 집이나 드나들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왜 아이들에게 입을 다물기를 강요했을까? 어른들의 이야기는 엿들어도 안되고 만에 하나 들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해도 안된다고 호통 치셨다. 오늘만 해도 어른들은 뭔가 알고 계실 텐데. 바로 앞집 2층 다락에는 「삼광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이 여름 내내 숨어 지내는 것이 우리집 변소(화장실)에서 정면으로 보였다. 손바닥만한 환기통으로 선생님의 덥수룩한 수염과 말라빠진 어깻죽지를 볼 수 있었고 가끔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약혼녀)가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그 쪽을 좀 자세히 볼라치면 엄마나, 하여간 누구한테든지 뒤통수를 얻어 맞기 일쑤였다. 그때는 내 입이 가장 위험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서울역 앞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바로 뒤였다. 동네 이름이 「도동 1가」 수복 후 「양동」이라는 요상한 동네가 되었다가 지금은 「남대문로 5가」로 되어 있는 줄로 안다.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어른들이 조그만 환기통 속의 선생님에게 조금 참으라고 눈짓을 한 것 같았는데 울고 싶을 만큼 기분 나쁜 분위기는 점점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초가을 오후가 거의 끝날 무렵 지붕을 뚫고 지나간다는 박격포 하나가 골목 건너 2층 집에 정확하게 내려 앉으면서 우리 동네는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길쭉한 방망이 같은 것이 바로 머리 위로 날아간 것 같았는데 그것이 「박격포」라는 것이다. 아주 멀리 날아간다고 「장거리포」라고 했으며, 또는 날아갈 때 북치는 듯 『둥둥』 소리가 난다고 「장구포」라고 아이들이 부른 것 같았는데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폭탄과 기관총 사격소리, 소위 함포사격이라 한 것을 남산 밑 民家(민가)에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은 어스름 저녁부터였다. 이미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 죽어가는 자와 부상자들의 흐느낌 소리가 공기 속으로 들려온다. 오히려 산 사람들은 너무 침착해서 누구의 지시라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빛 하나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주로 日人(일인)들이 살던 낡은 목조건물 2층인 우리집은 아래층에는 나(10세)와 동갑내기인 「행일」이라고 하는 사내아이가 살았다. 물론 부모님과 세 동생, 여섯 식구가 살았고, 우리는 이층에서 역시 부모님과 4남매가 살았다. 맏이인 언니가 17세였고 바로 위 오빠가 13세였다.
그때 애기 낳은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된 아래층 행일이 엄마, 행일이 어린 동생들, 우리 식구 도합 12명이 폭격을 피한 곳은 日本식 아궁이인 「함실아궁이」 속이였다. 아직 부은 몸으로 갓난 아기를 껴안은 행일 엄마, 즉 아래층 아주머니와 온 식구가 좁은 아궁이 앞에서 각자 가져온 이불을 쓰고 쪼그려 앉아서 다같이 하늘의 뜻에 맡기고 엎드려 있었다.
바로 이웃에서 신음 소리와 사람 살리라는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는데 바로 가까이서 들린 『작은 아버지,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하는 소리에 같이 이불을 쓰고 엎드려 있던 아저씨(행일이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다가 우리 아버지의 제지를 받고 도로 바락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즈 애빈 어디 갔나?』
아버지 물음에 아주머니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이미 초저녁에 혼자 도망갔다고 했다. 극심한 폭격이 그 지역을 완전히 아비규환,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미 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집들이 내려 앉기 시작하자 두 집의 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식구들을 이끌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때 아주머니의 비명 소리와 처절한 울음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그때 아저씨가 완강하게 꾸짖었다.
『조용히 해』
사람 소리가 들리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때다. 우리는 거의 맨발에 불타는 집더미, 깨진유리, 파편들을 밟고 또 밟고 뛰었다. 이미 밤은 깊었고, 뒤돌아 본 집은 이미 무너져 내렸으며 밤하늘에서 내려 비치는 둥그런 보름달은 많은 사람들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보름달인지 지옥의 불인지 지금도 나는 구별 못하고 있다.
죽은(?)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와 함께 양쪽 식구 12명이 길거리로 뛰어 나온 장소는 삼천동 고개라 불리는 남산과 그전병무청 쪽으로 가는 삼거리였다.
널려 있는 시체,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날아다니는 유탄과 파편,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남산 입구의 그들이 파놓은 방공호였다(지금 힐튼 호텔 근처가 아닌가 싶다). 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아이 여덟 명을 데리고 나올 때, 맨발에 팬티 하나씩 걸친 아이들이 상처 하나 없는 것을 보고 불가사의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다. 순간적으로 어른들은 아이들 몇은 희생되지 않을까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신 것 같다.
피신용으로 파놓은 방공호는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조금씩 자리를 비켜 주었다. 굴 안은 깊고 꽤 넓었는데 입구에만 사람들이 있을 뿐 더 깊이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이미 안쪽은 악취와 오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애기가 울었어』
그때 들릴락 말락 아주 가냘픈 모기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순간 행일이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애기가 울었어』
어른들이 행일이의 큰 소리에 질겁을 하고 질겁을 한다. 어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애기 목숨 정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애기를 끌어안고 울었다. 조용히 하라는 아저씨의 나무람에도 우리는 새벽 밝아 오는 여명에 애기의 울음이 우리에게 큰 희망과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폭격이 멎고 새벽은 오는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조차 신기할 뿐 구태여 서로의 가족들의 安危조차 묻지 않는다. 날이 밝아 동네를 내려다 보니 어제까지 건재하던 동네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군데군데 부서진 서울역 건물만 겨우 보이고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지역(동자동 일부, 남산동, 도동 全지역)에서는 몇 사람이 죽었느냐가 아니고 누가 살았느냐가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오늘이 추석이다. 엊그제 양식을 조금 구해다 차례 준비를 해놨는데』
그런 중에도 큰 아이들은 신문을 팔러 다니고 김밥과 주먹밥을 팔러 다녔다.
『호외! 유엔군이 용산까지 왔습니다』
『조간신문, 호외, 호외, 유엔군이 용산까지 들어왔습니다. 국군이 들어옵니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곳곳에 나타났다.
『큰 길로 나갑시다. 태극기를 들고 유엔군을 맞으러 나갑시다』
그 시기에 내가 국군과 유엔군과 인민군의 차이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만 그 여름 석 달 동안 서울에서 저지른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만행은 열 살 먹은 내가 보기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좌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내 기억만으로도 失笑를 금하지 못했다.
좌익들의 행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행동이라고 막연히 느꼈을 때 『우리에게도 국군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조그만 태극기를 받아 들고 폐허가 된 집터를 지나 갈월동 굴다리 입구 큰 길가로 나갔을 때 우리들의 모양새는 어땠을까? 그때의 아버지는 이미 40 중반에 들어 선 여섯 식구의 家長(가장)이셨다. 그때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
탱크 소리가 나고, 탱크 양쪽에 미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걸어가는데 나는 코큰 미군, 특히 흑인들이 너무 낯설어 쳐다 보고 있는데 (국군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그중 미군 한 명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나중에는 주저앉아 거의 소리나게 우셨는데 미군은 아버지의 어깨를 몇번 쓰다듬어 주고 곧 지나가 버렸다. 아래층 아저씨가 다가와서 두 분은 쪼그리고 한참을 계셨다. 그리고 아저씨는 내 머리를 한 번 만지고 곧 등을 돌려 떠나가셨다.
그렇게 하룻밤, 아니 석 달 동안 지옥의 여름을 같이 보낸 행일이네 집과는 영원히 헤어졌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삼광초등학교 선생님은 그날 밤 약혼녀와 노모를 양쪽에 모시고 나오다가 오른쪽에 있던 약혼녀가 고개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폭격 속에서 맞은 추석
- 趙惠蘭 서울 관악구 봉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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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4, 1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