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오늘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를 향하여 경찰이 발포, 10여 명이 죽었다. 3.15 義擧로 알려진 이 사태가 4.19의 도화선이 된다. 3.15 의거에서 李承晩 대통령이 下野한 4월26일까지 40여일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시위를 확산시킨 것은 당시 신문의 反정부적 보도였다. 4월19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이 발포, 100명 이상이 죽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출동한 軍은 시위 진압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李承晩 정부의 붕괴로 이어진다.
학생-신문-군대가 공조하여 정권을 뒤엎은 셈이다. 이 과정에 대하여 필자는 '朴正熙 傳記' 3권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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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투표일이 임박하자 군내 부정 선거를 지휘하던 방첩대 본부에서 군수기지사령부로 회식비를 내려 보냈다. 작전참모 김경옥 대령이 그 돈을 수령해서 박정희에게 주었더니 “몽땅 돌려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김경옥은 돈을 부산 지구 특무대장에게 갖다 주고는 “너희가 쓰고 보고할 때는 우리가 썼다고 하라”고 했다.
투표 며칠 전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부산에 왔다. 송 총장은 출입 기자들을 시내 중앙동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기자들이 ‘박 사령관은 근래 기자들과 접촉이 없다’고 불평했다.
“거, 잘 봐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 어디 박 장군도 바빠서 그렇지 기자 선생님들을 싫어해서 그랬겠소?”
이 자리에 있었던 부산일보 金鍾信(김종신) 기자는 1966년에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장군이 ‘× 같은 새끼!’라고 내뱉었다”고 《零時(영시)의 횃불》에서 썼다. 이 책을 읽은 박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 김종신을 부르더니 “내가 송 장군에게 그런 욕을 한 기억은 없어요”라고 했다. 김종신은 “맞습니다. 제가 실감을 주기 위해서 좀 과장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가 덧붙였다.
“그 말 지우면 책이 안 팔리나.”
“역시 그런 대목이 있어야 박력이 풍기고 판매에도 도움이 됩니다.”
“많이 팔린다면 할 수 없지.”
1960년 당시 문제의 술자리에 참석했던 국제신보 설영우 기자는 ‘송요찬이 이번 선거에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하자 박정희가 여러 기자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여 분위기가 어색해졌는데 송요찬은 그런 박정희 사령관을 상당히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송요찬 총장과 특무대가 주도한 군내의 부정 선거 공작에 반대한 장교들은 많았다. 이한림 육사교장은 “사관생도들에게 부정을 가르칠 수는 없다”면서 ‘투표장에 나가서 서 있어만 달라’는 특무대의 부탁도 거절했다고 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생기는 법. 2월 28일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부정 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당국이 일요일인 이날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등교를 시킨 데 반발한 것이다.
투표일인 3월 15일에는 자유당의 노골적인 투표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터졌다. 시민들이 파출소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경찰이 발포하여 10여 명이 죽었다. 마산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계지 역할을 한 곳은 부산의 언론과 고등학생들이었다. 1979년에 일어난 釜馬(부마)사태는 부산 시위가 마산으로 번졌다가 권력의 심장부로 옮겨 박 정권을 붕괴에 이르게 한 경우이고, 1960년엔 마산이 먼저 일어나고 부산이 응원하여 서울로 北上(북상)한 馬釜(마부)사태였다. 나중에 부산 지구 계엄분소장이 되는 박정희나 그의 대구사범 동기생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은 학생 시위를 지원하는 편에 섰다. 황씨의 증언.
<3월 15일 마산 주재 기자가 ‘북마산 파출소가 불타고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냈는데 경남 도경에서 보도관제를 해달라는 전화 연락을 해왔다. 저녁 때 부산일보와 자매 관계에 있던 부산 문화방송 아나운서가 부산일보 사장실에 와서 3·15 선거 발표 내용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마산 시위 기사를 적어 아나운서에게 전해주곤 ‘방금 들어온 특급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읽도록 했다.
중간 중간 그런 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金智泰(김지태) 사장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도경국장이 와서 생방송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장과 도경국장 두 사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면서 아나운서에게 계속하라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고 나서 일본 방송을 틀어보았더니 ‘한국 부산 문화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하고 마산 시위가 보도되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문화방송 기자가 마산 시위 현장에 가서 경찰의 발포 銃聲(총성)까지 녹음해 가지고 와서 일종의 시위 중계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4월 11일 저녁 최루탄이 눈에 박힌 金朱烈(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부산일보 사진부 기자가 그 사진을 특종했다. 그때는 신문이 매일 조·석간을 내고 있었는데 ‘다음날 조간에 시체 사진을 낼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있었다. 옥신각신 끝에 ‘아침이고 지랄이고가 어딨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실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다른 신문에 轉載(전재)되면서 전국의 민심을 확 돌려놓았다>
개국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부산 문화방송은 거의 매일 총성과 구호, 비명과 노래가 들려오는 시위 현장 속에 기자를 들여보내 생생한 시위 중계방송을 했는데 이 때문에 시청률이 높아지고 광고가 몰려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방송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잡았다.
방송이 시위를 현장 중계한 것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승만 정부의 언론 통제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부산일보는 김주열 시신 사진이 나간 날 1면에 金泰洪(김태홍) 논설위원이 쓴 ‘馬山은!’이란 자극적인 시도 실었다.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 속에 괴면 / 눈동자에 彈丸(탄환)이 박힌 少年(소년)의 屍體(시체)가 / 대낮에 표류하는 / 학생과 학생과 시민이 / ‘戰友(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愛國歌(애국가)와 / 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埠頭(부두)인 것이다>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는 가운데 박정희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5월 8일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미국 방문을 위해 떠날 시점을 거사일로 잡아 놓고 동지들을 포섭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급박해져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3월 17일 부산으로 내려온 육본 戰史監(전사감) 崔周鍾(최주종) 준장은 박정희를 관사에서 만나 거사일을 4월 초순으로 앞당기는 문제를 의논했다. 육본의 柳元植(유원식)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로 휴양을 갈 때 납치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박정희가 이낙선에게 구술한 《증언록》에 따르면 당시 동원이 가능한 부대는 대강 이러했다.
<ㆍ부산 지역: 군수기지사령부 예하 부대, 홍종철 중령의 고사포부대, 포항 김동하 소장의 해병사단.
ㆍ서울 지역: 육본 전사감 최주종 준장, 육본 유원식 대령, 전두열 대령, 김종필 중령 외 영관급 약간명.
ㆍ대구 지역: 2군사령관 장도영 중장, 안동사단의 윤태일 준장, 이주일 2군 참모장.
ㆍ인천 지역: 고사포 대대장 정석윤 중령.
ㆍ진해: 陸大(육대) 재학생 공작 중>
위의 명단엔 장도영 중장과 같은 포섭 대상자도 들어 있고 아직 병력 동원의 세부 계획도 마련되지 않았다. 군사 혁명의 구상과 포섭 단계이지 행동 계획을 구체화시킬 수준으로 성숙되지는 않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낙선에게 구술한 《5·16 혁명사 증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4·19 학생 혁명 직전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에 들러 2군 사령관인 장도영 중장을 만났다.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함께 일하자고 했다. 장 장군은 그 취지엔 찬동하면서 그 시기, 방법을 더 연구하자고 답했다. 나는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쯤이 적당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장 장군은 “얼마 전 밴플리트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이 대통령을 보았는데 건강 상태가 아주 형편이 없으니 아마 금년에는 이기붕 씨가 집권하게 될 것 같다. 그때 군이 비상수단을 써서 군정을 하자”고 말했다. 눈치를 보니 생각은 있으나 결심은 못 하는 것 같으므로 나는 “그렇다면 이 계획은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와 손잡고 일하지 못할 바에야 하지 않는다고 말해 두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는 귀대하였다.
이때 서울, 부산, 전방 등의 조직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으며 2군은 사령관만 호응하면 거사는 쉽게 될 것으로 판단하여 장 장군을 포섭키로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 장군은 직접 행동에서는 제외키로 작정하였다. 그는 뜻은 있어도 결단은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 밑에서 인사참모로 있던 박태준 대령은 혁명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사령관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령관이 학생들에게 先手(선수)를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고 박 대령은 불안해졌다. 영국 기자가 썼던 대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쓰레기가 충분히 썩을 때는 장미를 피워 내는 거름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이란 쓰레기통은 모든 모순덩어리가 뒤죽박죽되어 뒤엉키고 발효하고 發熱(발열)하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꿈과 시대를 낳으려는 産痛(산통)이었다.
이 모순의 극치를 경험하면서 현실 타파의 방법으로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두 조직된 젊은 집단─약 10만의 대학생들과 약 70만의 군대였다. 이들은 20대의 순진한 정의감과 30대의 정열과 40대의 야망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었다. 20대 장정과 30, 40대 장교들로 구성된 이들은 광복 후 민주주의 교육과 미국식 조직관리술을 배운 新(신)한국인이었다.
이들을 다스리고 있던 정치인들은 이승만 같은 독립투사, 張暻根(장경근) 같은 일제시대 관료 출신, 많은 민주당 의원 같은 地主(지주) 출신들이었다. 나이도 80대에서 60대에 걸쳐 있었다. 1960년 현재 이승만이 85세, 장면이 61세, 尹潽善(윤보선)이 63세, 허정이 64세였던 데 비해 박정희는 43세, 송요찬은 42세, 장도영은 37세, 김종필은 36세였다. 이들 젊은 집단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면서도 노쇠한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싸잡아 ‘무능하고 부패한 사대적·봉건적·당파적 정치 세력’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 金一榮(김일영) 교수는 자유당·민주당 세력을 전통사회에 기반한 전통 엘리트로, 5·16 이후에 새로 등장한 군부 세력을 국가 엘리트로 분류한다. 통상적으로 전통 엘리트는 파당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반면, 국가 엘리트는 국익과 국가 발전의 추구에 힘쓴다는 것으로 정의된다.
1960년 봄, 학생들은 民主(민주)에 관심이 많았고 장교들은 民生(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이 구세대에 대한 절망을 시위로써 표현하고 있을 때 젊은 장교들은 혁명모의로써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여러 갈래로 움직이던 군내의 혁신 세력 중 한 갈래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병대, 송요찬, 族靑系(족청계) 장교들도 정치적인 뜻을 키워가고 있었다. 군대를 정치에 이용해 온 정권은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던 셈이다. ‘처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고 먹여 살린 장교들은 모두 도둑놈이다’란 자조적인 말이 나오는 군대에서 ‘군 본연의 임무는 오로지 국방’이란 원칙론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육대 교관 李錫濟(이석제) 중령은 월급으로는 15일간만 식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며칠째 양식이 떨어져 식구들이 穀氣(곡기)를 끊을 때 그도 일어설 힘이 없어 출근을 포기하고 누워서 맹물로 허기를 달래는 판이었다.
<참다못한 집사람이 양식을 구해 보겠다며 나서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디 가서 보리쌀이라도 구해다가 식구들 허기를 채워 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졸장부로 전락한 것이다. 고급 장교가 부대 보급품에서 빼낸 쌀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귀가하는 모습이 군대 사회의 일반적 풍속도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양식을 얻으러 나갔다가 눈물을 훔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는 장교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이러한 군대에 더 이상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이석제는 그 뒤 낮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考試(고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법률 공부를 하면서 놀란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官報(관보)에 실렸던 일본법과 미 군정 시대에 공포된 영어로 된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글 전용법이 만들어진 것이 1948년인데 아직도 식민지, 군정 시대 법률을 번역도 하지 않고 일본어, 영어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자유당, 민주당의 국회의원과 각료, 공무원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석제 중령은 考試 공부의 경험을 살려 5·16 뒤에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 법령 정비 및 한글화 작업을 하게 된다. 그 뒤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으로 약 14년간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의 개혁과 현대화를 주도했다.
이석제가 1년 반 동안 계속하던 考試 공부를 포기하고 군사 혁명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3·15 의거와 4·19로 이어지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였다.
이석제는 민간 정치인들이 나라를 맡고 있는 한 국민들은 ‘꿈도 없는 자포자기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육사 8특기 출신인 그는 ‘강의 자료 수집’이란 명목으로 육본과 야전군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동기생들을 설득했다.
“정신 못 차린 정치 모리배들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은데 우리 같이 나라를 뒤집어보세.”
이석제 중령은 그러다가 김종필 그룹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박정희와 연결된다.
1960년 4월 18일 저녁,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이 종로 4가에서 쇠뭉치, 쇠사슬, 곤봉을 휘두르는 정치깡패들로부터 습격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1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피투성이 대학생들의 특종 사진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아침 대통령 경호책임자 郭永周(곽영주)는 서울 지구를 관할하는 육군 6관구 사령관 嚴鴻燮(엄홍섭) 소장에게 병력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엄 사령관은 鄭雨湜(정우식) 헌병부장 겸 헌병 5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청와대로 갔다.
이들은 총은 들고 갔지만 실탄은 휴대하지 않았다. 경무대에 간 엄 사령관이 김재춘 참모장에게 “서울의 요소를 지키는 병력에 실탄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은 군인이 실탄을 지니게 되면 격앙된 상황에서 시위대에 발포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시위대 때문에 길이 막혔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탄 지급을 회피했다. 육본에서도 독촉이 내려왔다. 엄 사령관은 질책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김재춘은 지연작전을 벌이다가 넉 달 전까지 직속상관으로 모시던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생각났다. 부산으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김 대령, 요즘 어때요. 잘 되어 갑니까. 서울도 상당히 불안한 모양이던데.”
“서울은 지금 야단입니다. 전 시민이 궐기해서 모든 차량의 통행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것보다 각하….”
김재춘으로부터 실탄 지급 명령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이제는 완전히 돌았군 그래. 우리도 못 하는 救國(구국)운동을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겠다는데 뒤에서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실탄 사격을 하겠다니…. 실탄 공급은 참모장이 막아야 합니다. 이 기회에 아주 바로잡아야지, 나라가 위태로워요.”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정오 무렵부터 경무대 앞에서 발포가 있었다. 1960년도 육군연감은 ‘이 발포에는 경무대로 파견된 헌병들이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50명의 헌병들은 M1소총과 공포탄만 가지고 출동했기 때문에 경찰이 쓰는 카빈 실탄을 받아서 쏠래야 쏠 수가 없었다. 군의 不發砲(불발포) 방침은 사실상 이때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당시 발포 사진에는 경찰관들이 M1소총을 쏘는 장면이 찍혀 있고 헌병들도 발포에 가담했다는 주장도 있다.)
4월 19일 경무대에서 있었던 국무회의는 오전 11시에 끝났다. 김정렬 국방장관이 프랑스 주재 武官(무관)의 외화 사용건에 대한 대통령 결재를 받고 나오니 경무대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시위 군중의 함성과 空砲(공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오를 넘기자 탕 탕 탕 하는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이건 實砲(실포) 소린데, 아니 진짜 발포를 하나.”
옆에 있던 洪璡基(홍진기) 법무장관이 물었다.
“아니, 실포가 뭐요?”
“진짜 탄환 말이오. 공포가 아닌 진짜 탄환!”
홍 장관은 부산하게 연락을 취해 보더니 김 장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계엄령을 걸어야겠소. 경찰의 능력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아니 경찰이 책임지고 막아야지 군대가 어떻게 시위 군중을 해산시킵니까.”
경찰 발포로 약 100명 사망, 경찰관도 광화문에서 시위 군중에게 맞아 죽음,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 방화, 파출소들이 불타고 있음. 이런 보고에 이어 광화문에 있는 경찰 중앙 무기고가 습격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정렬 장관은 ‘정말 경찰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하는 판단을 했다. 홍 장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상황을 보고하니 이승만은 놀라면서 反問(반문)했다.
“뭐, 부정선거? 아니 후보자가 나 혼자였는데 무슨 부정선거야?”
“사실은 부통령 선거에서 경찰이 잘못 생각을 해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김정렬은 회고록에서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났는데도 부정선거란 말조차 들어 보지 못하신 것 같았다’고 썼다. 아마도 人(인)의 장막을 친 비서들과 자유당 강경파가 老(노)대통령의 심기에 지장을 줄 만한 신문과 정보를 차단한 때문이라고 김 장관은 생각했다.
육군연감은 4·19 계엄 부분을 서술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은 공보실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 <코리언 리퍼블릭>밖에 읽지 않았다. 외국 신문, 통신도 관계 각료나 비서들이 스크랩해 주는 정도만 읽었다. 외교나 군사 문제를 제외하고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이 틈을 이용해서 자유당 간부 몇몇 사람들이 권세를 휘둘렀다>
“아니, 그런데 데모 군중이 그렇게 많이 죽었나?”
“예, 사태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네들, 계엄령이 무엇인지 아나?”
홍진기 장관이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나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하면서 法典(법전)을 외우듯이 대답하자 대통령은 “아니, 학생이 적인가?”하고 질책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계엄령이야. 계엄령은 그런 데 내는 게 아니야.”
김, 홍 두 장관은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오후 1시로 소급하여 서울 지구에만 경비계엄을 선포하기로 하고 계엄사령관으로는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내정했다. 그런데 시위가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지방에서도 확산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서울에는 헌병대와 공병대 병력밖에 없었다. 김정렬 장관은 경비계엄을 비상계엄으로 바꾸고 서울, 부산, 대전, 대구, 광주로 확대하여 이를 선포하기로 하고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다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김정렬 장관은 하와이로 출장 간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을 대리하고 있는 에머슨 커밍스 부사령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가평 15사단을 계엄군으로 삼아 서울에 진주시키겠다고 통보하여 양해를 받았다. 5대 도시에 대한 비상계엄령은 이날 오후 5시를 기해서 선포되었다.
50년 전 오늘 馬山에서 역사가 바뀌었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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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15, 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