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魂조차 도전받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국가존망의 위기시기에도, 평화의 시기에도 국기는 말없이 펄럭이며 후손들을 격려했다
‘國旗 파문’이 몰려올 것 같다.
부산교육청이 관내 초, 중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매일 실시하도록 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자기정체성과 국가정체성을 확립토록 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반대론자들은 이러한 강제적 조치가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발성을 빼앗는 군사문화의 산물로서 시대착오적 구시대의 발상이고, 국가에 대한 굴종강요’라고 반발하면서 자발적 저항운동까지 들고 나오고 있다. 찬성론이나 반대론 모두 일리가 있다. 다만, 시행 방법상에 문제가 있다면 고쳐서 근본취지를 퇴색케 하지 않는 여유와 융통성이 아쉽다. 그래서인지 찬반 논란의 攻防이 이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를 어떤 잣대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침 7년 전에도 똑같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개혁을 주창하며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모 정치신인의 한마디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었다. 그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마다 “한없이 괴롭고 수치스럽다” 고 했다. 2002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내팽개친 일에 대해서도 “태극기, 던졌으면 또 어때?”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개인의 內面的 가치를 무시하고 박정희 정권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민에게 강제한 파시즘적 국가주의 체제의 유물로서, 민주공화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眞意를 잘 이해해줄 것과 아울러 비판해 줄 것도 당부했었다.

당시 이 파문을 깊은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발언의 당사자가 개혁을 상품으로 자신을 마케팅 했고, 개혁을 열망하는 지역주민들이 표를 밀어주어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이름으로 개혁의 본질이 왜곡되고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묻고 싶었다.
그의 논리 잣대에 따를 때 과연 대한민국 건국 이후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오늘을 일구어 냈던 기성세대들의 애국심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이 사회를 이루고 지탱해온 기성세대가 역사의식이 없어서 역사에 죄짓고 살아왔다는 것인가? 국기에 대하여 敬意를 표하는 것이 민주공화국에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고,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한없이 괴롭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더란 말인가? 스스로 자문해보면서 참담함과 처절한 자괴감을 숨길 수 없었다.

냉정히 돌이켜 보자.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이 강제하여 국민에게 앵무새처럼 ‘복창’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1968년 2월 충남도 교육청이 최초 ‘자발적’으로 그것을 만들어 초, 중, 고에 시행했고, ‘나라사랑’의 취지가 좋은 호응을 얻자 이웃 전남도 교육청이 이를 본 따 역시 자발적으로 시행했다. 문교부가 관여하여 지침을 하달한 것은 1972년 8월의 일이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1361호 제3조)으로 법제화된 것은 1984년 2월의 일이었다.

문교부가 시행지침을 내린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가 횡행하던 시기로서 10월에는 ‘10월 유신’이 발동되었다. 그렇다면 국기에 대한 맹세가 ‘10월 유신’ 한참 전에 충남 교육청에 의해 순수 자발적으로 시행되고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등의 긍정적 측면을 보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록 군사독재 시절이긴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가 독재정권의 통치수단으로만 작용했다는 해석은 역사에 대한 편견이고 진실에 대한 폭거다.

유신반대를 외쳤던 젊은 대학생들도 국기 앞에 서면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크게 걱정했었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순수함 그 자체였었다. 이것이 유신독재 권력을 옹호하고 충성하기 위한 행위였을까? 오히려 국기를 바라보며 간절하고 애틋한 눈망울의 애국적 정열로 나라의 소중함을 그 얼마나 수없이 되 뇌이지 않았던가? 오기에 받쳐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불러대지 않았던가?

이처럼 애국심은 개인의 소중한 내면적 가치다.
국가는 헤겔이 설파한 것처럼 개인이 자유를 소유하고 즐기는 현실을 목표로 한다.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국가의 존재근거는 말없는 애국심에 있고 민족혼과 國魂으로 이어져왔다. 따라서 애국심은 국가의 영혼이다. 바람 부는 들판의 잡초와 같이 애국심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져 가야한다. 그것의 애국적 표현이 國旗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다.

히틀러 파시즘의 제3제국에 맞서 민족저항 운동을 펼쳐온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국기를 ‘트리꼴로즈’(3색깃발), 오스만 제국의 침공 이래 저항해온 터키 국민들은 ‘아이율드즈’(초승달과 별), 아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민족 생존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마겐다비드’(다비드의 방패)라고 부르며 그들의 국기를 사랑했다.

태극기에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묻어있고, 선열들의 숨결과 영혼이 배어있다.
태극기 한 장을 가슴에 묻고 목숨을 내 놓았던 선열들의 애절한 사연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기 앞에 서면 경건함이 앞선다. 국기와 國歌 사랑은 더 크고 아름답게 펼쳐져야 한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경건한 마음의 표현을 卑下하는 것은 자기뿌리에 대한 자기부정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국혼을 상징하는 국기에 대한 경외심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넘칠수록 더 아름답다.
국가존망의 위기 시에도, 평화의 축제 시에도 국기는 말없이 끈질긴 생명력의 메시지를 펄럭이며 후손들을 격려했고 감동의 한마당으로 국민들을 단결케 했다. 지난 월드컵 대회에서 태극기의 감동적인 물결이 이를 웅변했었다.

그래서 역사는 단합된 민족저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문화를 꽃피울 때 세계는 그들을 우러러 찬양했다. 역사는 애국심으로 뭉쳐진 불굴의 국혼을 키워 나갈 때, 그들에게 발전과 융성의 복음을 주었던 것이다. 누가 이토록 소중한 애국심을 흔들려 하는가?


(백병훈/ 프라임경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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