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판 입구 산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면 30대 이상 주차할 수 있는 널찍한 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30 계단쯤 올라가면 흰색 풍차 모양의 탑과, 조금 뚱뚱해 보이는 전투복 차림의 군인이 집총 자세로 서있다.

풍차 중앙에 ‘네덜란드군 참전비념비’란 글이 한글과 네덜란드어, 영어로 적혀 있다. 軍靴(군화) 밑의 碑文(비문)엔 ‘충성과 용기로서 신조로 삼는 오렌지공의 억센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가 피를 흘린 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란 글이 적혀 있다.

국방부 주관으로 1975년 9월29일에 탑과 동상이 세워졌다. 예술원 회원이던 조각가 故(고) 金景承(김경승)씨의 작품이다. 네덜란드군 참전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6.25 당시 네덜란드군이 횡성 부근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고 특히 횡성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로 지상군 1개 대대1819명을 보냈다. 해군은 인도네시아에 정박중이던 구축함 1척을 한국 해역으로 진출시켜 영국 극동 함대 지휘하에서 해상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지상군은 1950년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하여 11월 말에 전방으로 이동, 美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네덜란드군이 강원도 횡성과 인연을 맺게 된 전투가 바로 횡성 전투(1951. 2.12~13)이다. 네덜란드 대대가 횡성에서 전방 부대(미군·한국군)의 철수 엄호임무를 수행하던 중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치른 전투이다. 1951년 2월 12일 횡성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이던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의 2월 공세에 부딪쳐 철수하게 되자, 네덜란드 대대가 횡성에서 이들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대대로서는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날 야간이 되자, 한국군으로 가장한 중공군이 대대의 동측 후방으로 침투하여 대대 본부에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대장 오우덴 중령이 전사하고 대대 지휘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선임자인 화기 중대장이 대대장의 지휘권을 계승하고 부대를 능동적으로 지휘 통제하여 침투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13일 날이 밝을 무렵에 원주로 철수하였다.

횡성군 횡성읍의 읍하리의 3·1공원(군청 뒤편 언덕)엔 이때 사망한 오우덴 중령을 기리는 4 m 높이의 비석이 세워졌다. 碑文(비문)을 소개한다.
‘단기 4294년(1951년) 2월12일~13일 횡성지구 전투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해 과감히 싸우다 애석하게도 전몰한 주한 화란부대장 마리뉴스. 피. 에이덴 오덴 중령 이하 화란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이 현충비를 건립함’

이 비석은 1956년 10월22일 당시 1군사령관이던 白善燁(백선엽) 대장이 세웠다. 이 비석은 최근 처음 세워진 곳에서 50m 아래쪽 우측켠으로 옮겼다. 3·1공원은 강원도에선 처음으로 횡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최근 이 공원을 단장하면서 오우덴 중령의 현충비를 네덜란드 참전비가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戰後(전후) 횡성군은 횡성읍 북천리에서 전투중 사망한 오우덴 대대장의 고향인 가스펠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기념행사를 가지다 1990년대 들어 가스펠市가 다른 시와 합쳐지면서 행사가 중단됐다고 한다. 횡성군의 두 네덜란드軍 관련 기념비 관리는 다른 지역에서도 본받을 만큼 잘하고 있었다. 네덜란드군의 6·25 전쟁 당시 주요전투를 소개한다.
*인제 전투(1951. 5. 30~31)
이 전투는 네덜란드 대대가 인제 동측 2km 지점인 548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치른 방어전투이다. 북한군은 중공군의 제2차 춘계 공세가 실패한 다음 반격을 감행한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인제를 점령할 목적으로 주변이 내려다 보이는 548고지를 공격하였다. 네덜란드 대대는 사력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였으나 한때 고지 정상을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대대는 대대 예비 중대를 투입하고 공격 부대에 협공을 가하여 다시 54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 결과로 차후 작전의 길목이 되는 인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우산 전투(1951. 7. 15~31)
이 전투는 네덜란드 대대가 미 제2사단의 일부로서 중동부 지역 대암산(1038고지)-도솔산(1148고지) 부근 전선에 투입되어, 방어선 전방의 주위가 다 보이는 대우산(1179고지)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남쪽의 대머리산(1120고지)을 점령한 공격 전투이다. 이 대대는 7월 15일에 이 전선을 인수하고, 정찰전을 전개하면서 대우산 공격을 위한 준비를 갖춘 후, 7월 27일에 대머리산을 정면에서 공격하여 진지 일부분을 점령하였으나 방어 부대의 완강한 저항과 예비 부대의 역습을 받아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때 주공인 미군은 이날부터 4회에 걸친 공격으로 29일 대우산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진전에 따라 그간 화력으로 주공을 지원하고 있던 이 대대도 공격을 재개하여 30일 야간에 대머리산을 점령하고 대우산의 방어진지를 확보하였다.
*별고지 전투(평강 남쪽 10km, 1952. 2. 18)
이 전투는 네덜란드 대대가 포로를 획득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前哨(전초) 진지를 공격한 전투이다. 네덜란드 대대는 연대로부터 주저항선 1km 전방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 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하여 포로를 획득하고 방어 시설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1개 중대를 선정하여 항공기·포병·전차포 등 각종 가용 지원 화력의 엄호하에 별고지를 공격하였다. 이 중대는 별고지를 점령한 후 벙커·수류탄·지뢰·탄약 등을 폭파하고 약간의 장비를 노획하여 복귀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 대대는 적에게 많은 손실을 입히기는 하였으나 포로를 획득하지는 못하였다.
휴전 후, 네덜란드 지상군은 1954년 12월에, 해군은 1955년 1월에 철수하였다. 네덜란드군은 참전기간 중 전사 120명, 부상 645명, 포로 3명의 人命 피해를 입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