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일신서적출판사에서 나온 [史記列傳 2권](司馬遷씀, 權五賢 譯解]의 匈奴열전 중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匈奴列傳
夏·殷·周 三代 이래로 匈奴는 항상 中國의 患害였다. 漢室은 匈奴의 강하고 약한 시기를 알고 대비하여 이를 치려 했다. 그래서 『匈奴列傳 第五十』을 지었다.
흉노인들의 습속
匈奴의 선조는 夏后(禹)씨의 후예로 淳維라 불렀다. 唐(堯), 虞(舜) 이전에는 山戎(산융)·험윤*훈육 등의 여러 종족이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그들의 가축은 주로 말․소․양이었는데 특이한 것으로 낙터 나귀 노새 버새 도도 타해(야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들을 따라 옮겨 살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마저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 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자라나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나 싸울 때에는 전원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은 거의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 거리에 쓰는 무기는 활과 화살이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무기는 칼과 창이었다. 싸움이 유리할 경우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는 물러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 무엇이든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 하며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썼다. 건장한 사람을 소중히 위하고, 노약자는 천대했으므로 고기를 나눠줄 때만 해도 좋은 살코기는 우선적으로 장정들에게 돌아갔고 그 나머지가 노약자의 차지였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이나 아우가 차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字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趙나라 武靈王은 풍습을 고쳐 胡服을 입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가르쳐 북쪽으로 林胡,樓煩을 무찔러 長城을 쌓고, 陰山山脈 기슭을 따라 高闕에 이르는 사이를 요새지로 만들고 雲中,鴈門,代 등 三郡을 두었다.
그 뒤, 燕나라의 명장 秦開가 흉노에게 인질로 가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다음 燕나라로 돌아오자 곧 東胡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때 東胡는 천여 리나 후퇴를 했다. 荊軻와 함께 秦王 政(秦始皇)을 죽이러 갔던 秦舞陽은 秦開의 손자다.
燕나라 역시 造陽에서 襄平에 이르는 長城을 쌓고 上谷,漁陽,右北風,遼西,遼東의 여러 郡을 두어 胡를 막았다. 당시 중국에는 文物制度를 갖춘 戰國이 7개 국이었는데 그 중 3개 국(燕 趙 秦)이 흉노와 경계를 맞대었다. 그 뒤 趙나라 장군 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趙나라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그 뒤 秦나라가 6국을 없애 버리자, 始皇帝는 몽염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북쪽으로 흉노를 치게 했다. 蒙염은 河水(黃河) 남쪽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 河水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드는 한편, 河水를 따라 44개 소에 縣城을 쌓고 流刑兵을 옮겨 이를 지키게 하였으며, 九原(烏자特)에서 雲陽(陜西省)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또한 지형의 험세를 살려 경계선으로 하고 골짜기를 살려 참호로 만들며, 보충해야 할 곳은 손을 더해 臨洮(임조)를 기점으로 遼東에 이르기까지 1만여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또 河水를 북쪽으로 건너가 陽山과 北假(九原의 서쪽) 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묵특 선우의 출현
당시는 東胡가 강하고, 月氏(월지)도 세력이 왕성했다. 흉노의 單于(선우, 흉노의 君主 칭호)는 頭曼(두만)이라 불렀다. 頭曼은 秦나라를 당해 내지 못해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蒙염이 죽고 제후들은 秦나라를 배반하여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秦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내었던 수비병들은 모두 이탈하고 말았다. 흉노는 마음놓고 다시 차츰차츰 河水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마침내 옛날 요새선에서 중국과 경계를 맞대었다.
頭曼單于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冒頓(묵특)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총애하는 閼氏(연지-皇后의 뜻)에게서 다시 작은 아들을 얻어서 묵특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선우는 묵특을 月氏에게 볼모로 보낸 다음 갑자기 月氏를 공격했다. 月氏는 선우의 예상대로 묵특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특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頭曼은 일이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특을 1만旗의 장군으로 맞았다. 그러나 묵특은 鳴鏑(명적,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騎射 연습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같이 그곳에 대고 쏘아라. 쏘지 않는 자는 죽인다.”
그런 다음 수렵에 나섰을 때 묵특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 댄 곳에 쏘지 않은 자는 가차없이 잡아 죽였다.
그 뒤 묵특이 또한 명적을 자기의 愛馬에게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당장에 그들을 잡아 죽였다. 얼마 후에 그는 또 명적을 자기의 愛妻에게 날렸다. 좌우에서 겁이 난 나머지 갑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특은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여버렸다.
또 얼마 뒤에 묵특은 수렵에 참가해서 명적을 선우가 타는 말에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일제히 거기에 쏘아 댔다. 그제서야 묵특은 비로소 부하 전원이 자기의 명령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頭曼에게 날렸다. 과연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려 頭曼單于를 죽였다. 묵특은 잇달아 그의 계모,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은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東胡 정벌
묵특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쪽에서는 東胡가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頭曼이 생전에 탔던 天里馬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내주었다. 얼마쯤 뒤에는 묵특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로 안 東胡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閼氏 중에 한 사람을 얻어 가지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게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東胡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閼氏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쳐서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閼氏 한 사람을 골라 東胡에게 보내 주었다.
이로써 東胡는 더욱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국경을 침범하려 했다. 당시 東胡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있었다. 東胡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들이고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의 경계지점인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이래저래 버린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령을 내렷다.
“이번 출전에 낙후한 자는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東胡를 습격했다. 東胡는 처음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서 순식간에 東胡를 대파해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으로 月氏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河南(오르도스)의 樓煩王․白羊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는 한편 일찍이 秦나라의 蒙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이렇게 본래의 河南(오르도스)의 樓煩王․白羊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는 한편 일찍이 秦나라의 蒙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이렇게 본래의 河南 요새선(長城線)으로 漢나라와 경계를 삼고 그곳에 관문을 설치해 朝那(甘肅省)․膚施(부시-陜西省), 나아가서는 燕․代에까지 침입하였다.
당시 漢軍은 項羽와 서로 싸웠으므로 중원 천하는 전쟁에 지쳤다. 묵특이 손쉽게 흉노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흉노에게는 활에 능숙한 군사만 해도 30만에 이르렀다.
흉노의 국가제도
淳維에서 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혹은 강성하고 혹은 약소해지기 여러 번이었으며 이합 집산 또한 무상하였으므로 흉노 선우의 世系를 순서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묵특의 대에 들어와 흉노는 가장 강성해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조리 항복시키고 남쪽으로 중국과 적대관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선우의 계승이나 관직 따위는 기록할 수 있다.
즉 左右의 賢王(貴族의 封號), 좌우의 谷"849;王(곡려왕, 藩王의 封號), 좌우의 大將, 좌우의 大都尉, 좌우의 大當戶, 좌우의 骨都候(異性의 大臣) 등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어질다는 것은 屠耆(도기)라고 했기 때문에, 언제나 태자는 左屠耆王(左賢王)이라 일컬었다. 좌우의 賢王 이하 當戶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1만 기에서 적게는 몇천 기를 거느리는 대소 통솔자가 총 24長이 있었는데, 이들은 통상 만 기를 거느렸다고 했다. 여러 대신들은 그 벼실을 세습했으며 呼衍(호연)․蘭, 뒤에는 須卜씨가지 3개 姓이 貴族이었다.
모든 左方의 王과 將들은 동쪽 방면에 살며 上谷郡에서부터 동쪽을 맡아 穢貊(예맥)과 朝鮮에 접했다. 右方의 王과 將들은 서쪽 방면에 살며, 上郡에서부터 서쪽을 맡아 月氏와 氐(저)․羌(강)과 접했다. 또 선우의 庭(도읍지)은 代郡․雲中郡과 마주보았다. 이들은 각각 일정한 영역이 있어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는데, 左右賢王․左右谷"849;王의 영역이 가장 크고, 左右骨都侯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하였다. 長들은 또 각각 자기들 대로 千長․百長․裨小王․相․封都尉․當戶․且渠(저거) 등의 벼슬을 두었다.
정월에는 선우가 있는 庭에서 모든 長들이 小會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338;城에는 大會를 열고 조상과 천지 신명과 귀신들을 제사지냈다. 가을에 말이 살찔 때에는 蹛林(대림)에서 대회를 열어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조사했다.
그들의 법률은 대개 이러했다. 평상시에 칼을 하 자 이상 빼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경범죄를 범한 사람은 軋刑에 처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옥에 가둬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 이내이며 옥에 갇힌 사람은 전국을 통해 몇 명에 불과했다.
흉노 戰法
선우는 아침에 營을 나와 막 떠오르는 해에게 절을 하고 저녁에는 또 달을 보고 절을 했다. 앉는 자리의 차례는 왼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쪽을 향해 앉았다. 戌日과 己日을 吉日이라 하여 소중하게 알았다. 죽은 사람을 보낼 때는 시체를 널과 바깥 널에 넣고, 그 속에 金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거나 하는 일은 없고,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사랑받던 신하나 첩들 중에 따라 죽는 사람이 있는데, 많을 때에는 몇십 명에서 백 명에 달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의 모양을 보고 결정했다. 달이 커져서 둥글어지면 공격을 하고 이지러지면 후퇴했다. 공격이나 싸움을 할 때에 적의 목을 배거나 적을 포로로 한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노획한 본인에게 주는데 사람을 생포했을 경우는 잡은 사람이 하인이나 하녀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마당에서는 누구나가 이득을 얻으려고 교묘히 적을 유인하여 한꺼번에 내리덮치곤 했다. 그래서 적을 보기만 하면 이득을 바라고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일단 싸움이 불리해져서 패색이 짙어지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또한 싸움에서 자기 편 전사자를 거두어 준 자에게는 전사자의 재산을 몽땅 주었다.
흉노와 한족의 비교
그 뒤 얼마 안 있어 묵특이 죽자 그의 아들 계육이 뒤를 이어 스스로 老上單于(노상선우)라 칭했다.
老上 계육單于가 즉위하자, 孝文帝는 곧 종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 선우의 閼氏로 만들었다. 그리고 환관으로 燕나라 사람인 中行說(중행열)을 공주의 傅로 했다. 說은 흉노에 가는 것을 꺼려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떠났다.
“내가 가면 반드시 漢나라의 화가 될 것이다.”
中行說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투항하더니 곧 그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 흉노는 漢나라의 비단,무명이나 음식 등을 애용하는데 中行說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의 인구는 漢나라 한 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漢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漢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漢나라 물자를 좋아하시면 漢나라가 자기 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채 흉노에게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漢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漢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또 漢나라의 음식을 얻으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乾酪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을 조사하독록 시켰다. 또 종래 漢나라가 선우에게 편지를 보내올 때에 나무쪽은 한 자 한 치의 것을 쓰고 이런 글투였다.
“황제는 삼가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나니 무양하신지. 그리고 보내주는 물건은… 용건은….”
中行說은 선우가 한나라에 글을 보낼 때는 한 자 두 치의 나무쪽을 쓰게 하고, 도장과 봉투를 세로나 가로가 다 크게 하며, 글투도 거만스럽게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漢나라 황제에게 문안하나니 무양하신지. 그리고 보내주는 물건은…용건은….”
하고 쓰게 했다. 또한 漢나라 사신으로서
“흉노의 풍습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
고 하는 사람이 있자, 中行說은 그 漢나라 사신에게 모질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 漢나라 풍속에도 누군가가 주둔군의 수비를 위해 군대로 떠날 때에는, 그 늙은 양친이 자기들의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주고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군대에 나가는 사람에게 보내 주지 않는가?”
“그렇다.”
“흉노는 다 잘아다시피 싸움을 일로 안다. 늙고 약한 사람은 싸울 수 없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먹을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인다. 즉 이같이 분수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만큼, 아비와 자식이 오랫동안에 걸쳐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는 노인을 가볍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흉노는 부자가 같은 천막 속에 살며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이나 동생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해 버린다. 옷과 관과 묶는 띠 등 아름다운 예복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다.”
“흉노의 풍습에서는 삶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을 옷으로 한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에 따라 이동을 한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말타고 활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일없는 것을 즐긴다.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간단하고 쉬워서, 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과도 같다. 부자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하는 것은 뒤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어지럽기는 하지만 종족만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외면상으로 아비나 형의 아내와 장가드는 일은 없지만, 친족 관계가 거리가 멀어지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혁명이 일어나 帝王의 姓이 바뀌는 것도 다 그런 예다. 그리고 에의를 말하더라도 충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원한으로 맺어지고, 집만 보더라도 너무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필요한 힘을 다 써버리고 만다. 대개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먹고 입는 것을 구하고 성을 쌓아 방비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시에는 싸움을 익히지 않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슬프다. 흙집에서 사는 漢나라 사람이여!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 반성해 보고 필요치 않은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을 써 보았자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 뒤로 漢나라 사신이 뭐라고 변론을 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中行說은 이렇게 말했다.
“漢나라 사신이여, 여러 말이 필요없다. 漢나라에서 보내오는 비단,무명,쌀,누룩을 수량만큼 좋은 것으로 해 주면 그만이다. 그 밖에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보내 주는 물건이 수량 대로이고 질이 좋은 것이면 좋지만, 수량도 맞지 않고 질도 나쁠 경우에는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로 농작물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러고는 밤낮으로 선우에게 漢나라로 쳐들어가는 데 편리한 지점을 지켜보게 했다.
史記중 匈奴 이야기
-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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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1-20, 14: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