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를 손에 들고, 관광객을 사살하고, 댐의 水門을 열어 同族(동족)을 죽이고, 천안함을 격침시킨 김정일 정권을 향하여 "그래도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인질범을 상대로 "武力을 쓰지 않고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경찰과 같다.
김정일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해결책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여러 번 실증되었다. 김대중 집권 이후 없어진 김정일 제거계획을 다시 세우고 북한정권 붕괴 공작을 再開(재개)해야 할 때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지 않는 한 對南도발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은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다섯 차례나 기도하였다. 1.21 청와대 습격사건, 문세광 사건, 아웅산 사건은 한국의 국가원수 겸 국군통수권자의 생명을 노린 테러였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한국 정부는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지휘자들을 벌써 처단하였을 것이다. 1972년 뮨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을 죽인 이슬람 테러단원 전원을 암살한 것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당하고도 보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북한정권은 한국 정부를 '살찐 돼지' 취급하여 왔다. 보복력과 응징력이 없는 국가는 '야윈 늑대'에게 계속 당한다.
1. '김정일 참수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斬首(참수)작전'(Decapitation)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시도된 적이 있는 개념으로서, 敵의 지도부를 일거수일투족 관찰하다가 결정적 순간 때 新種(신종)무기로 공격하여 無力化시킴으로써 군사 및 정치체제를 마비시키는 작전개념이다.
2. 군사적 선제공격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북한이 核공격이나 全面남침을 할 것이 확실한 순간엔 기습을 기다리지 말고 선제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3. 북한노동당 간부들에 대한 정치적 와해 공작을 추진하여야 한다. 김정일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태에서 돈만 들어가면 反김정일 親韓派(친한파)를 만들 수 있다. 이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남한주도의 흡수통일이 가능하다.
4. 김정일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금융제재 포위망에서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금강산 관광은 核폐기 때까지는 再開하지 않아야 한다. 북한에 대한 결제수단을 원貨로 통일해야 한다.
이런 보복계획은 국가 생존차원의 당연한 권리이다. 300만 동족을 사실상 굶겨죽이고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로 수많은 한국인을 죽인 김정일에게 人權(인권)이 있을 리 없다. 김정일과 그 정권을 와해시키지 않는 한 核문제와 對南도발을 해결할 수도 없다.
북한정권 와해공작은 통일공작이기도 하다. 북한정권이 한국을 상대로 대통령 암살, 테러, 핵위협, 정치공작을 계속하는데 우리가 평화주의자처럼 행동한다면 체제방어는 불가능하고 국민교육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잘 살아도 敵에 대한 적개심이 없는 나라는 반드시 그 代價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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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참수 작전 이야기
美CIA 부장 조지 테닛 회고록에서.
조갑제닷컴
전 미국 CIA 국장 조지 테닛이 쓴'폭풍의 한복판'(조갑제닷컴)에서 뽑음.
이라크의 추종자들이 그냥 ‘장군’으로 부르고 있는 샤와니는 곧 CIA를 위해 이라크 안에 강력한 조직망을 개발하는 작업에서 핵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불행히도 이 조직망은 사담의 보안기관 때문에 1990년대 중반 와해되어 샤와니의 세 아들이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샤와니는 계속 정력적으로 노력해서 이라크 안에 공작원 조직망을 만들었고, CIA가 2003년 봄의 침공에 앞서 몇 달 동안 이라크의 부족장 및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샤와니는 CIA가 지원하는 ‘스콜피온’이라고 알려진 준(準)군사조직을 개발하고 지휘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샤와니는 이라크 정규군 안에서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쿠웨이트에 수용되어 있는 이라크군 포로들을 만나기 위해 갔을 때 많은 이라크군 장교들이 일어나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몇 시간 또는 며칠 전에 CIA 팀은 샤와니 및 그 밖의 사람들 덕택으로 이라크 안으로 침투해서 이미 그곳에 있던 조직망과 만나 이라크군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교량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른 팀은 공작원들을 만나서 사담이 남부 유전을 태워버리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활동을 했다.
전쟁이 다가오자 바그다드로 부임명령을 받은 고위 요원 ‘찰리 S’는 도하로 가서 토미 프랭크스 장군의 옆에 앉았다. 찰리는 그 군사팀의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그는 우리의 정보원으로부터 입수된 잠재적인 군사목표에 관한 첩보를 계속 공급했다. 그는 어떤 때는 폭격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중앙사령부(CENTCOM)가 이라크 정보기관의 고위 관리가 숨어 있는 곳을 알게 되자 군의 첫 반응은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을 그 좌표에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미 프랭크스의 본부에 나가 있던 우리 연락관 찰리는 상대격인 軍장교에게 그 이라크 관리를 살려놓는 것이 낫다고 설득했다. 어려운 설득이었지만, 그 후 그 관리에게서 입수한 첩보를 분석한 결과 지상군을 그가 있는 곳에 투입하여 그를 확보한 것이 대단히 큰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북부 이라크연락반(NILE) 팀은 2002년 7월 이후 북부 이라크에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아래서 군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사담의 보안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도 계속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몇 가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서 사담의 정권을 전복시킨 이라크 공작 조직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종교적 연합으로 뭉친 한 이라크 그룹은 특히 중요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들에게 이번에는 미국이 정말 사담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고 확신시키고, 그 후에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결심을 보여 주기 위해 200만 달러를 제공하자, 그들은 고도로 실용가치가 있는 정보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그룹은 비밀리에 1주일에 한 번씩 4명의 이라크군 장교를 데려와서 CIA NILE팀이 질문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교황’이라고 부른 이 종파의 수장(首長)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끔 그 장교들은 우리의 질문이 ‘너무 민감하다’는 이유로 답변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교황’이 개입해서 질문에 대답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그 명령을 따랐다. 우리가 신문한 모든 군장교들은 사담이 정말 WMD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초기에 얻은 횡재 하나는 그 그룹의 멤버가 준 사담의 특수보안기관원 명단을 수록한 CD-ROM이었다. 우리는 그 명단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름 몇 개와 대조해 보았다. 그것은 진짜 명단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 이라크 정보기관이 우리에게 침투시키려던 이중 간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조직망의 다른 조직원은 이라크의 미사일이 배치된 위치와 그것을 시험하는 날짜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우리는 미군의 정찰기를 사용해 그 첩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미사일은 우리 정보원이 지적한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 결과 미군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간단히 사담의 지대공(地對空)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국은 북부 이라크에 있는 두 개의 주요 쿠르드족 그룹(PUK와 KDP)에 대량의 무기를 공급해서 닥쳐올 전투에 효과적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무기를 입수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터키는 그 무기가 자기 나라를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다.
CIA는 대형 화물기 몇 대를 임대했지만, 인접국가에 상공통과를 요청하자 모두 거절했다. 쿠르드족은 무기 지원이 지연되자 격분했다. 그들은 우리가 약속했던 무기가 어디 있느냐고 계속 물었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2003년 2월, 술레이마니아에 있던 NILE팀의 지휘자인 톰 S는 그 지역 PUK 대표로부터 걱정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기가 있던 기지(基地)에서 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창고로 트럭대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쿠르드족에 전달하기 위해 이란의 혁명수비대(IRGC)가 잔뜩 싣고 온 무기였다.
이 NILE팀은 CIA 본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수백 건의 정보보고를 본부에 보냈다. 그 대신 그들은 워싱턴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보받았다. 한 대화에서는 워싱턴의 공작담당관이 현지의 요원에게 미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CIA 본부에 있는 스타벅스가 방금 24시간 영업체제로 전환되었다고 말했다. 현지에 나가 있던 CIA 요원들은 그것이 전쟁 시작이 임박했다는 신호라고 추측했다.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이라크 자유작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약간 일찍 시작되었다. NILE의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원으로부터 공공(公共)의 적(敵) 제 1호인 사담 후세인의 소재에 관한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룹의 일부 조직원은 사담을 포함하는 고위 이라크 관리들의 통신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정권의 통신본부 상황판에는 이라크의 통신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때는 초록색등(燈), 그렇지 않을 때는 적색등(燈)이 켜지게 되어 있었다. 보통은 그 지시등이 초록색이었다. 우리의 정보원은 항상 사담의 보안군이 그들이 여행할 지역의 통신을 차단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담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 군부 인사가 그의 소재를 적에게 누설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통신을 차단하면 사담이 가려는 목적지 근처에 적색등이 켜지게 된다. 우리의 정보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색등이 켜지면 얼마 후 사담이 그곳에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담이 떠나면 초록색등이 다시 켜졌다. 시스템의 이런 허점 때문에 상황판은 기본적으로 사담의 소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준수하도록 설정한 시한의 만료를 이틀 앞두고 우리 정보원은 그날 저녁 사담의 아내가 소유하고 있는 도라 농장에서 회의가 열릴지 모른다는 낌새를 챘다. 누가 그 모임에 참석할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사담의 아들이나 全 가족이 그곳에 모여 미국이 침공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토의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 정보원은 이 소식을 북부 이라크에 있는 NILE팀에 전달했다. 이들은 즉각 그 소식을 본부와 카타르의 도하에 있는 토미 프랭크스 장군의 CIA 연락관에게 보냈다.
다음 날인 3월19일 아침, 그 CIA 연락관은 프랭크스 장군에게 그 전 날 입수된 정보를 브리핑했다. 그날 저녁 우리 정보원은 다시 보고했다. 상황판의 적색등이 다시 한 번 도라 농장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 지도자들이 그날 저녁 그곳으로 갈 가능성이 있었다. 도라 농장 근처에서 보안을 담당하던 다른 정보원 역시 그날 밤 그 농장에서 사담의 가족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미군(美軍)에게 상공 정찰을 명령해 그 장소를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했다. 우리는 농장의 나무 아래 숨겨놓은 많은 보안 차량들을 볼 수 있었다. 사담이 이동할 때 앞에 가고 뒤를 따르는 바로 그런 차량들이었다.
그것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시나리오였으므로 나는 럼즈펠드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중대한 가치가 있을지 모를 상황을 브리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좋다고 대답했다. 나는 즉시 존 맥라플린과 우리 이라크작전그룹의 책임자를 소집해서 그의 차고(車庫)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우리는 우리 공작처의 2인자인 스티브를 만났다. 나는 같이 가자고 고함을 치고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들어갔다. 스티브를 우리 장갑 SUV에 태우고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CIA 구내를 빠져나갔다.
우리는 펜타곤에 도착하자 즉시 럼즈펠드의 넓은 사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급히 그에게 사실을 설명했다. 그는 즉시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백악관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는 즉시 전화기를 잡고 우리 모두가 당장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수배했다. 우리는 다시 SUV를 타고 백악관을 향해 전속력을 냈고, 럼즈펠드의 리무진과 수행 경호차량은 간단히 우리를 따라잡고 앞서 나갔다.
우리는 대통령을 만났다. 부통령과 앤디 카드, 콘돌리자 라이스가 이미 와 있었다. 대통령은 콜린 파월에게도 오라고 했다. 합동참모본부 의장 딕 마이어즈도 럼즈펠드 장관과 함께 왔다.
우리는 대통령 집무실 바로 근처에 있는 개인전용 식당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대통령에게 입수한 정보를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첩보가 상당히 훌륭하고 신뢰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첩보가 틀리지 않는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것이 계략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었고, 사담이 그곳으로 고아원을 옮겨 우리를 난처한 상황으로 유도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 그 공격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추가적인 첩보를 입수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조금 뒤 첩보가 더 들어왔다. 현장에서 보안을 담당하고 있는 한 정보원이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기 동료들 사이에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 시간으로 오전 3시와 3시 30분 사이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얼마 후 또 하나의 보고가 들어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위기의 한복판에 항상 실시간 정보보고가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라크작전그룹 단장을 불러내어 대통령의 스케줄러 책상 옆에서 보안전화를 받도록 했다. 그 최신 첩보는, 그곳으로 가는 사람은 아랍어로 ‘지하실’이나 ‘피난처’란 뜻인 ‘말리자’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벙커라면 크루즈 미사일은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것은 유인(有人)폭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순간에 접근하고 있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결과였다. B-2 폭격기는 이라크의 방공망이 제거되기 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그 임무에서 살아남으려면 스텔스 성능과 기습에 의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위험성은 더 커졌다.
대통령은 모든 첩보를 검토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첩보수집 모드에서 정책결정 모드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집무실 책상 뒤로 돌아가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캐런 휴즈와 댄 바틀렛이 대통령의 성명을 위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몇 시간 후 그 공격과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도하에서는 중앙사령부가 공격 패키지를 구성하고 있었다. 크루즈 미사일은 원하는 공격시간보다 몇 시간 앞서 발사되어야 했다. 한편 벙커를 파괴할 수 있는 폭탄을 싣고 비행 중이던 B-2에는 목표가 전달되고 있었다. 도라 농장은 많은 건물이 있는 커다란 단지였다. 토미 프랭크스는 사담의 부인과 관련된 별장은 목표 리스트에서 빼기로 결정했다.
그 건물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의도하지 않은 민간인 피해가 늘어날 가능성을 피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 전쟁이 최소한의 인명 손실이나 파괴로 끝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그 공격의 결과를 기다렸다.
몇 시간 뒤 40발가량의 크루즈 미사일과 B-2에서 투하된 수많은 폭탄이 그 시설에 명중했다. 얼마 뒤 현장으로부터 첫 번째 정보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정보원 중 하나가 그 공격에서 사망했고, 다른 두 사람은 도망쳐서 자기 군부대를 이탈했다(그들의 아내는 나중에 사담의 하수인들에게 고문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바그다드의 날이 밝자 다른 우리 정보원이 그 파괴 더미에서 사담처럼 생긴 창백한 모습의 사람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 사람이 앰뷸런스에 실려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우리 희망이 전쟁의 첫 몇 초 안에 실현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도라 농장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을 대통령 집무실로 가지고 갔다. 단지 안의 커다란 별장은 손상 없이 그대로 있었다. 사담과 그의 아들들은 목표목록에서 제외한 건물에서 죽음을 피했을까? 우리는 나중에 도라 농장에서 고위 바트당 간부들의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상황판에 적색등이 켜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담은 그 출석자 속에 끼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 정보원이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잔해에서 사담을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한 두 번째 정보원은 그 이야기를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몇 주일 후 도라 농장에 가본 CIA 요원들은 그 정보원이 있었던 자리에서는 그가 보고한 장면은 볼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동일한 첩보와 동일한 상황이 다시 생기면 나는 다시 대통령에게 공격을 허가해 달라고 건의할 것이다. 전쟁의 첫날 밤 사담을 제거할 수 있었더라면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파괴를 피할 수 있었을까? 사담이 그늘에서 조종을 하고 있지 않는데도 반란을 촉발시킨 조건이 성숙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라크의 군부(軍部) 인사가 사담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우리와 협력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국보다는 그가 돌아와 다시 집권할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 2009-09-08, 08:04 ]
한국은 '김정일 斬首(참수)작전 계획'을 세워야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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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30, 1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