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馬具와 사회-신라 가야를 중심으로-](姜裕信, 學硏文化社)라는 고고학 관련 책을 읽어보았다. 재갈, 등자(발걸이), 안장 등 마구는 주로 고분에서 많이 나온다. 馬具의 출현은 騎馬, 즉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하므로 고대 역사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고대사를 연 주인공들은 한반도로 들어온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에 馬具 연구는 그들의 유입경로, 출신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도 필요하다.
예컨대 숭실대학교 崔秉鉉 교수는 신라 고분에서 나오는 등자를 분석하여 목이 긴 등자는 신라 적석 목곽분에서 나오는데, 이는 북방의 胡族的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胡族이라면 중국의 漢族이 북방초원에 살던 흉노, 선비 등 기마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崔교수의 이 말은 신라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김씨족이 흉노계라는 의미이다.
부산 대학교의 申敬澈 교수는 4세기로 추정되는 부산 복천동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마구류를 분석하여 이들은 夫餘系로서 동해안의 루트를 따라 경남지방으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남지방은 가야 지방이기도 한데, 가야족이 어느 계통이냐 하는 것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사에서 아주 중요하면서도 定說이 없는 대목이다.
대륙 기마민족이 한반도의 가야 지방을 거쳐 일본 서해안과 규슈에 상륙하여 교토 나라 지방으로 진출,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夫餘系 기마민족이 가야에 진출했다가 이곳에 있던 倭族을 따라 현해탄을 건너가 倭族의 본거지인 일본을 점령했다는 주장을 했는데 申교수의 주장과 일맥 상통한다. 가야족이 부여계인가 신라 김씨족처럼 흉노계인가 하는 이견이 대립되고 있는 듯하다.
대체로 馬具 연구는 신라, 가야에 국한하여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곳 마구의 출토예가 백제지역보다 많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연구를 요약하면 3세기 후반을 시작으로 하여 북방계(부여계) 마구가 동해안의 해상루트를 따라 부산,김해지방으로 들어왔고, 여기서 개량된 뒤에 영남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5세기 초 후엔 고구려가 신라의 후견국처럼 영향을 끼치면서 고구려계 馬具가 신라, 가야에 들어왔고, 일부의 이 마구류는 가야에서 더욱 발전시켜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로 수출했다는 것이다.
신라 고분에서는 5세기 이후 안장 등 馬具를 금으로 장식한 호화스러운 儀裝用이 등장한다. 그 전에는 철제 마구로서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5세기 이후부터는 마구가 실용성을 넘어 신분 과시용으로 쓰일 정도로 예술적으로도 발전했다는 뜻이다. 6세기 초로 추정되는 천마총 고분에서는 말이 달릴 때 흙탕이 배에 튀는 것을 막는 배 가리개에 질주하는 天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자 姜裕信씨는 5세기 이후의 신라 지방 마구류는 고구려에서 수입한 유형으로 추정했다. 4세기 말, 5세기 초에 고구려는 소수림왕 광개토왕 장수왕 시대로서 불교 공인 등 체제정비를 끝낸 다음 영토확장 정책을 편다. 고구려는 南進정책으로 왜와 연합한 백제를 치고 신라를 보호국처럼 삼는다.
이 무렵에 고구려식의 마구가 들어왔을 것이라고 한다. 姜씨는 이렇게 썼다.
<경주세력의 고구려 선진 마구문화 수용은 단순히 일시적인 수용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선진문물을 모델로 하여 독자적인 자체 발전의 과정을 걷고 있어 당시 신라인의 능동적인 문화 수용자세와 진취적인 개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내용은 당시 문화를 전수하고 받아들이는 양국간의 관계가 결코 경직되거나 主從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상호간 호혜의 입장에서 교류가 이뤄지고 문물의 전달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성사되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고분에서 호화스러운 마구류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는 내물왕 이후의 金氏王 시대이다. 내물 마립간부터 지증마립간까지의 약140년에 걸친 마립간(이 명칭은 북방유목민족이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 신라는 고대국가로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고분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금관, 허리띠, 마구, 공예품, 로만 글라스 등 서방 수입품들이 당시 국력을 말해준다.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은 신라를 침범한 왜를 치기 위하여 원병을 보내고, 신라는 내물왕의 조카 實聖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낸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식 馬具를 수입한 신라는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신라것으로 만든다. 姜씨는 이를 신라사람들의 자주성과 진취성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외래 문물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것으로 소화해내는 능력은 한 국가와 민족의 주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를 강요할 정도로 토속적인 저항이 많았다. 그들은 그러나 일단 불교를 수용한 뒤에는 그 불교를 삼국통일의 정신력으로 발전시킬 정도로 독자적인 문화 소화력을 보여준다.
신라의 삼국 통일 그 원동력은 馬具, 불교의 수입과 발전, 금관 등 북방계 유물의 독자적 발전의 예에서 나타나는 개방과 自主의 균형감각, 그리고 自我의 발견인 것이다. 독자성, 주체성, 자주성은 '나는 나다'는 자신에 대한 긍정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신라의 그런 주체성은,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이 파병의 대가로써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對唐 결전을 통해서 한반도를 민족의 활동공간으로 확보해가는 역사의 전개를 연출한다. 통일 이후에 신라는 唐 지배 체제하의 동북아 질서 속에서 唐과 함께 평화체제의 두 기둥 역할을 하게 되지만 이때부터 급속도로 문화적으로 중국화되는 과정을 밟으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민족의 정체성과 기백과 자아의식이 얇아지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면 드디어 漢族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의 포로가 된 양반 지배층이 漢族인 중국을 조국보다 더 아끼는 사대주의로 전락한다. 이들의 그릇된 역사관이 불러들인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을 스스로 불러들인 조선의 선비들은 오랑캐에게 굴복했다는 수치심을, '아버지 나라 明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우리가 진짜 中華이다'고 자위하는 정신병적인 위선으로 덮으려고 한다.
당시 조선조의 선비들은 신라의 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잘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속에서 난국을 타개하려는 교훈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의 낡은 고전 속에서 典範을 구했다. 자신의 역사를 자학하고 남의 역사를 우상숭배하는, 혼이 나간 껍데기 조선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대한민국 지도층이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실패와 신라의 성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는 또 다시 이민족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순국하려 했던 인조 시대 선비 집단의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다. 지금 김정일 집단은 이런 조선조의 후예로서 서양제인 사회주의를 부둥켜안고 인민을 굶겨죽이면서 자멸의 길,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신라 馬具에서 보이는 진취성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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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1-22, 1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