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와 노무현의 차이

신라의 삼국통일은 金春秋(뒤에 태종무열왕)의 목숨을 건 통일외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비행기도 발동선도 기차도 없던 시대에 당과 일본과 고구려에 가서 동맹관계를 모색했다.

적대관계였던 고구려에선 구금되기도 했다. 648년 당태종과 담판하여 羅唐동맹을 맺고 돌아오는 항로에선 고구려 순시선에 적발되어 김춘추로 위장한 부하가 대신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미국과의 동맹이 羅唐동맹처럼 중요한 시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미국에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 부하로서 안보 문제를 보좌하는 핵심 간부도 소위 자주파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직책을 맡기 전에는 미국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비행기가 나는 세상에 대통령이 되려고 한 사람이, 세계 최선진국을 나이 50을 넘을 때까지 한번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여비가 없어서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다.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 대한 반감이 있을수록 더욱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김춘추가 적국인 고구려와 일본에 건너갔던 것처럼 말이다.

목숨을 건 외교는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어내었고 오기를 건 반발은 대한민국을 세계속의 이단아로 고립시켜갈 것이다.

신라가 唐에 파견한 사신들은 1급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 왕이 된 사람이 세 명이 되었다. 시중, 병부령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춘추는 두 아들 金法敏과 金仁問을 對唐 사신으로 썼다. 그는 金仁問을 당의 궁정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김유신의 동생 欽純과 아들 三光도 對唐 사신으로 투입되었다.

신라는 對唐결전을 할 때 唐의 심장부에 박아둔 이들 인질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金仁問 등은 당의 궁정에 있으면서도 당에 이용되지 않고 항상 조국을 위한 정보수집과 공작을 진행했다. 신라가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상대로 일면 전쟁 일면 화해를 진행하면서 한반도를 확보해갈 수 있었던 데는 당대 일류 인물들이 唐의 사령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라의 국가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서해를 건너 唐을 오고간다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오고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했다.

신라 지도층은 그때 세계제국 唐의 사정을 배워 그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목숨을 걸었다는 이야기이다. 신라가 당에 이용당하지 않고 오히려 당을 활용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저력도 지도층의 이런 자세, 겸허하면서도 고귀한 배움의 자세 덕분이었다.

반미친북성향의 인사들이 보여주는 건방지면서도 천박한, 무지 무모한 자세와 비교해보라!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특히 정보가 이렇게 빨리 소통하는 데도 盧武鉉 대통령이 보여주는 거친 외교자세는 1300년 전의 金春秋-金法敏에 비교하면 어리고 치졸하게만 보이는가. 아무리 사회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교양과 품위는 단련과 배움과 겸손과 고귀한 품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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