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 결전을 준비해간다. 말과 글을 중시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민간출신 정치인들은 항상 개혁, 민주화, 진보, 부패척결, 2만불 시대, 동북아 중심국가, 자주국방 등 좋은 말을 앞세우고 행동 대신 그 좋은 말로 때우지만, 군사와 외교전략의 천재인 문무왕과 김유신은 은인자중하면서 입체적 대응을 해나갔다. 우리 민족사상 이 정도의 깊이와 넓이의 자주국방 자주외교는, 1953년 李承晩이 휴전을 앞두고 미국을 붙들고 늘어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만들어낸 사건이 있을 뿐이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숫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당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성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大唐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귀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을 어기고, 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의 서두에 문무왕은 唐이 약속을 어겼음을 지적해두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당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왕(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당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당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 일만명과 신라 명 7천명을 두어 지키기 하였는데 賊臣 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일천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 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문무왕의 반박문
- 조갑제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4-01-22,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