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초원의 대폭발(3)/신라통일의 원동력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역사적 흐름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과학적인 답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定義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집단 정체성이란 결국 민족이 걸어온 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역사관의 기초가 된다. 정체성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관이 뒤집어지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다.

지금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공작에 넘어간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부정으로 넘어가고 적화통일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선조 선비들은 漢族의 정치이데올로기로 변한 주자학에 세뇌되어 자신들을 漢族 정권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고 북방기마민족을 경멸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렀다. 한국인은 명나라의 漢族보다는 여진족과 더 가깝다. 신라의 유민은 여진족을 지휘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姓을 따서 金이라 이름붙인 적도 있다. 이 금은 고려를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치지 않았다.

이 금의 후신인 後金과 조선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후금도 최소한의 체면만 세워주면 조선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망해가는 明과 떠오르는 後金 사이에서 줄다리기 실리외교를 하면서 전쟁을 피해갔다.

이 광해군의 實利외교를, 부모국가인 명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하고 쿠데타를 해서 집권한 인조 세력은 신흥강국 후금을 적으로 삼는 자살적 외교정책을 펴다가 병자호란을 불러 임금이 언땅에 머리를 박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잘못된 정체성과 역사관이 부른 국가적 대재난이었다.

그런 재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업적이며, 우리가 한국인으로 생존하고 있는 근거이며, 자유통일을 넘어서 선진국을 만들어갈 때 귀감이 될 만한 지혜의 보따리이고, 민족사의 황금기를 열고 최초의 일류국가를 만들어낸 계기이기도 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사의 치욕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엉터리들이 득세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영광을 최고의 수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애국심도 공중윤리도 교양도 생기지 않는다. 최고를 최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동에 넘어가는 국민들은 집단 자살하라고 부추기면 따라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흉노계 金氏王族의 줏대, 안목, 전략, 용기인데, 이 덕목은 '우리는 흉노 오랑캐이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出自를 드러낼 수 있는 정직함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정직한 확신이 그것이다.

그들은, 중국적인 가치관에 비교하여 자신들을 야만이라고 비웃는 문화인을 경멸할 줄 알았다.

이런 자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신라는 중국의 한족 문화를 삼국 중에서 맨 나중에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씨왕족은 스카타이-흉노계열의 초원 문화의 계승자였고,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서는 로마문화도 흡수했다. 신라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로만 글라스 등 많은 서방 유물들이 로마문명권과의 교류를 증명한다. 로마가 무너지고 북방 초원의 길이 막히면서 신라는 불교 등 중국문물을 선택적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인다.

불교를 받아들일 때 백제, 고구려에선 저항이 없었지만 신라에선 이차돈이 순교할 정도로 저항이 있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불교보다 뭐가 못하단 말인가.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주체성과 개방 필요성 사이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이런 갈등은 외래 문물의 여과과정 역할을 함으로써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선진문물을 흡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신라김씨들은 흉노적인 것, 북방적인 것을 主로 놓고 중국적인 것을 副로 하는 문화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7세기 신라김씨왕족들이 唐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중국적인 것이 主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7세기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교하여 깊이 있고 다양한 문화의 축적을 이룬 상태였다. 당시 신라인의 구성은 농경을 가지고 온 남방계, 기마전술을 갖고 들어온 북방계, 피난온 漢族의 혼합이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는 북방계, 서방계, 남방계, 중국계의 혼합이었을 것이다. 다양하고 풍성한 문화적 인종적 종합이 이뤄진 신라였으므로 국력을 동원할 때도 입체적 안목과 다양한 수단의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다.북방계의 용맹성, 남방계의 성실함, 중국계의 지성, 서방의 그 어떤 요소들을 두루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라는 북방계가 가져온 기마전술뿐 아니라 해군 또한 강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은 당시 동아시아의 최고 수준이었다. 백제의 3만군사-400척의 대함대를 백촌강에서 전멸시킨 唐의 해군을 신라 해군이 기벌포에서 격멸함으로서 對唐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문무왕 때 船府, 즉 해양수산부를 창설했고, 일본인들은 唐을 오고갈 때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으며 장보고는 9세기 한국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해군력은 남방계의 소질이었을지 모른다.

화랑도는 흉노적, 북방적인 샤머니즘(仙道 또는 神道)를 바탕으로 하되 불교와 유교적인 요소를 더한 종합적인 교양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엘리트는 사물을 넓게 깊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화랑도의 대표인 풍월주 출신 김춘추와 김유신이 보여준 통일 외교와 전략은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콤비가 보여준 독일통일전략의 깊이와 넓이를 오히려 무색케 한다.

김춘추는, 비행기도 없던 시절, 서해와 현해탄을 건너 당과 일본을 오고가고, 적진인 고구려로 단신 돌입하여 목숨을 건 담판을 벌이는가 하면, 김유신은 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시면서도 쿠데타를 꾀하지도, 왕의 경계심을 부르지도 않는다.

신라가 羅唐연합을 이뤄내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다가 唐이 신라마저 삼키려 했을 때 세계최강의 전성기 제국을 상대로 결전을 감행하는 모습은, 세계사 어디를 뒤져보아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운 감동적 장면이다.

신라의 이런 행태 속에서 작동한 가장 중요한 민족적 유전자는 흉노적 용기와 당당함과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기자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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