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山출신 金씨가 金城에서 만든 金冠


金秉模-辰韓, 秦, 낙랑, 匈奴


중국의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馬韓, 辰韓,弁韓의 三韓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여 남긴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인의 조상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史實이다. 이 기록과 삼국사기,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종합하면 신라의 김씨 왕족은 동북아시아를 서북쪽에서 동남방향으로, 즉 대각선으로 이동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흉노계열의 민족이 말, 활, 그리고 철제무기를 가지고, 몽골 초원의 서쪽인 알타이 산맥에서 중국 북쪽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을 거쳐 평양 부근의 고조선-낙랑 시대를 지나 경주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북-남의 이동방향을 보이는 부여-고구려-백제계통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흉노-신라계통이 보다 서방적이고, 유목기마민족적인 데 비해, 부여-고구려-백제계가 퉁구스적이고, 만주적이며, 半유목적인 出自라는 뜻이다.

東夷傳에 따르면 진한의 왕이 항상 마한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양대 인류학과 金秉模 교수는 '이는 신라의 前身인 辰韓 사람들이 토착민인 지석묘인들과는 경제방식이 다른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 辰韓의 외래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東夷傳의 기록을 본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에 따르면 옛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勞役을 피해 韓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떼어 이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고 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신라김씨=흉노족說]을 가장 확신 있게 주장하고 있는 金秉模 교수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그 秦인데, 감숙, 섬서성에서 일어난 나라로서 다수 주민들은 유목민들이었다. 戰國시대 7雄중에서 秦만이 유목국이었고 나머지는 농경국이었다. 서기 전 221년에 秦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秦의 시황제는 몽염의 지휘하에 만리장성을 쌓고, 함양에 궁궐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했다. 이때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秦人들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방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辰韓은 秦韓이라 불리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서라벌의 산과 계곡속에는, 기원 전 2세기 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條에는 또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던 秦人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이 秦人과 고조선 유민들을 다 같이 흉노계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다시 서기 1세기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천명이 신라로 투항해와서 육부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의 魏誌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 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이들은 유목민 출신이거나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은 漢族이었을 것이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온 遺民들. 경기도 李鍾宣 박물관장에 따르면 평양 주변의 고분 발굴 결과 고조선 주민들 중에는 흉노계 민족이 많았을 것이라는데, 이 유민들도 흉노계일 가능성이 많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온 5천명. 이들은 漢族일 가능성이 높다.

김병모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중 어느 계층이 4세기 이후 김씨왕족이 되어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같은 거대 고분을 만들면서 신라를 발전시켜가는 세력이 되었을까. 이 김씨왕족들의 특징은 금관, 금팔찌, 금귀걸이 등 금공예품을 미칠 듯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신라의 금관은 모두 이 김씨왕들이 마립간이라고 불리던 400-520년대 사이 고분에서만 나오고 있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샤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흉노풍의 집단은 2세기 이후에 새로 들어온 집단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4세기초가 되면 경주지방에 황남대총 같은 거대 적석목곽분이 만들어지고 부장품으로서 금관, 금허리띠, 금귀걸이등 호화를 극한 공예품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전형적인 스키타이-알타이-흉노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은 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온다. 김알지는 신화적 인물로 보인다. 김알지의 알지는 알타이, 즉 金이란 뜻의 유목민 단어이다. 4-6세기 흉노계 김씨족 신라 왕들은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으로 불렸다. 이 호칭도 우두머리를 干이라고 부르는 북방식이다.

4세기에 갑자기 흉노족의 일파가 경주에 나타나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먼저 들어왔던 흉노계가 은인자중하다가 이때 비로소 정권을 잡았다는 해석도 있다. 적석목곽분의 갑작스런 출현은 혁명적인 것, 즉 기마군단의 침입에 의한 정복왕조 신라의 탄생을 나타내는 것이란 해석과 흉노족이 수백년에 걸쳐 여러번의 민족이동 흐름을 타고 신라지역으로 들어와 점진적으로 정권을 잡은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古朝鮮-古新羅와 匈奴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가 쓴 「古新羅王陵硏究」란 책은 북중국 오르도스의 무덤 발굴과 고조선, 낙랑시대 평양 근방의 발굴 결과를 비교하여 신라의 金氏王族이 북중국 오르도스 지방에서 평양지방을 거쳐 들어온 흉노계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흉노계 기마민족집단이 경주에 이른 과정에 대해서는 평양 근방의 낙랑지역 징검다리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기원 전 3-4세기경에 이미 흉노계 기마민족들이 철제 무기와 말을 가지고 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평양근방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古朝鮮의 지배층도 이 계통이고, 서기 2세기경 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한 漢四郡은 흉노세력권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흉노계로 분류된 조선을 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李 교수는 평양 근방까지 진출했던 흉노계가 한 200년 머물다가 漢四郡 설치 이후 다시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경주지역(당시는 辰韓)에 이르렀고 여기서 약200년간 세력을 확장하다가 4세기 이후 辰韓의 후신인 新羅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여 績石木廓墳(적석목곽분)을 만든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발견되는 大形목곽분은 신라로 들어가서 한국화된 뒤 4세기 이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천마총 형식의 적석목곽분으로 나타난다. 李鍾宣 경기도 박물관장은 오르도스 지방의 흉노족 墓制-평양의 목곽분-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자연스런 진화과정으로 파악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그는 결국 古朝鮮과 古新羅의 지배층을 같은 흉노계통으로 보는 셈이다. 李鍾宣 원장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기마군단의 급작스런 경주 침입과 정복설을 부정하고 장기간에 걸친 흉노계 민족 이동의 흐름 속에서 흉노계 신라 金氏王朝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편이다.

이종선 관장의 주장을 진수가 쓴 삼국지의 위지동이전 기록과 비교하면 古朝鮮이 망할 때 진한 지방에 들어와 살던 遺民들이 李 관장이 말한 흉노계 고조선 집단이 된다. 낙랑에서 투항해왔다는 5천명도 한족이 아니라 원래 평양지방에 살던 흉노계 고조선인들이 낙랑이 무너지니 선배들이 먼저 이주해간 진한지방으로 緣을 찾아 들어온 이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아니면 이와는 별도로 3-6세기 북방 유목민족들의 남진, 동진 흐름을 타고 일단의 흉노계 기마군단이 경주로 직진하여 토착정권을 정복하고 김씨왕조를 세운 것이든지. 이런 문제에서는 구체적인 사항으로 접근할수록 이견이 많아지는데, 그런 세부적인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넘겨주고 일단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라지역으로 여러 波의 흉노계 민족 진입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평양 근방의 고조선(낙랑)-신라를 잇는 서북-동남 방향의 민족이동 루트를 흉노계가 애용했다는 뜻이다.

이 루트는 또한 북방민족계통의 청동기 문화가 들어온 길이기도 하다. 흉노계 기마민족은 철기를 갖고 들어왔으므로 오르도스-평양-경주를 잇는 이 길은 북방민족의 청동의 길, 철의 길인 것이다.
기자는 李鍾宣 관장에게 이런 물었다.
-그러면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흉노계입니까, 흉노와 다르지만 서로 많이 섞인 鮮卑계통으로 보십니까.
『유물 등으로 보아 흉노쪽으로 봅니다』
-흉노쪽이란 것은 신라의 金氏 지배층이 북방 草原 유목민 사회에서 보면 활동 무대나 성향이 서방적, 투르크적, 순수 유목적이란 이야기이고, 서방과의 접촉이 잦았다는 뜻이며, 그런 점에서 동방적이고 半農半牧, 半狩半牧的이었던 퉁구스 계열의 부여-고구려-백제계통과는 다르다는 의미가 되는데요.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

고고학자들이 아주 조심해서 쓰고 있는, 흉노로 대표되는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문화가 신라 가야에 들어왔다는 표현은 문화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를 가진 집단이 들어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한반도의 동남쪽 구석인 신라, 가야 지방으로 북방초원문화가 들어올 수 있는 루트는 흉노계의 알타이-오르도스-평양-경주 루트와 함께 만주-한반도의 동해안-가야(신라) 지역이 거론되고 있다.

동해안을 따라서는 육로이든 해상로이든 가로막는 산맥이 없어 편하다.
가야시대의 부산 복천동 및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馬具를 연구한 부산대학교 申敬澈 교수는 서기 4세기대의 초기 마구류는 그 계보가 3세기 후반을 시점으로 한 북방계-보다 구체적으로는 夫餘系-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서 그 경로는 동해안의 해상루트를 통하여 수용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전래된 마구류는 가야 지방에서 개량되어 신라지역으로까지 퍼져갔다는 것이다.

權寧弼 한국종합대학교수는 백제가 한반도의 중부권과 평양근방까지 장악했던 4세기말 이후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서 고구려, 중국, 북방유목민과 접촉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 침입, 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유동적인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뜨인다.

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고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김씨왕족들이 적석목곽분과 금관의 주인공들이며 그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김씨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그는 신라(가야) 적석목곽분 등에서 나오는 신라만의 독특한 유물들이 알타이 산맥의 서쪽 유목민족 스키타이와 동쪽 유목민족 흉노와 이어져 있음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이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 샤머니즘, 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왕 선우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인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 관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 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시,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 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각배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각배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 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페르샤나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 고구려, 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김씨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는 민족임을 보여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김씨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이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사마천의 史記에서부터 閼智란 (흉노왕의 아내를 의미)단어가 등장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알타이 문화권에서 閼智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서기 전 2세기 한무제 시절 흉노를 격파한 청년장군 霍去病이 감숙성 지방에 있던 흉노의 일파중 休屠王의 아들 김일제를 인질로 데리고 왔다. 한무제는 휴도왕을 金人, 즉 알타이(金) 사람의 祭天主로 대우하여 김씨 성을 내렸다. 이때 김일제의 어머니도 함께 왔는데 이름이 알지였다고 한다. 알지는 흉노왕의 정실 부인을 가리킨다.

문무왕의 碑文에는 자신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김일제는 한무제로부터 벼슬을 받아 살다가 前漢을 무너뜨린 왕망에 협조했다고 하여 後漢 광무제 때 후손들이 학살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김알지 신화와 비문을 합쳐서 해석한다면 漢에 투항한 흉노왕의 후손인 김알지 집단이 신라로 피해와서 선주민인 석탈해, 박혁거세 세력 속에서 한 200년 살다가 4세기경에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李鍾宣 관장의 고고학적 추적 결과와도 거의 일치한다. 김알지의 탄생 연도가 광무제 치하와 맞추어져 있는 것도 흥미롭다.

10.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金金’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계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경주에 뒤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선주민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1.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활약하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씨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거리,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었다가 죽을 때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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