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V. 유럽 세계의 전개

1. 유럽의 봉건사회

(1) 서유럽 세계의 형성

◑ 훈 족 : 중앙 아시아의 스텝 지방에 거주하였던 투르크 계의 목축 민족. 중국 사상(史上)에 등장하는 흉노와 같은 종족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4세기 초엽에 유럽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다뉴브, 타이스 양강 사이에 약 반세기 동안 머문 후 370년경 동고트 족의 대부분을 굴복시키고 서고트 족을 압박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의 발단을 만들었다. 4세기 말 루아스 왕 때에는 지금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하고, 다음 아틸라왕 때에는 그 전성기를 이루어 동로마 및 서로마를 압박하고 주변의 게르만 민족을 복속시켜 헝가리를 중심으로 서는 라인 강, 남은 다뉴브강, 북은 스칸디나비아 남부, 동은 이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아틸라 왕 사후(453)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다뉴브강 하류로 후퇴하고, 얼마 후에 타민족과 혼혈하여 민족으로서는 멸망하였다.



◑ 원시 게르만 사회 : 게르만족은 거칠고 야만스러운 민족이었다. 북유럽, 그들의 땅은 늘 비가오고 춥고 습한 곳이라 사람이 살기가 마땅치 않아 게르만족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어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로마 제국에까지 삶의 터전을 넓히게 되었다. 그들은 왕과 장수를 문벌에 의해서 선출한다. 왕은 무제한적인 전제 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장수들의 지위는 권세보다도 사람의 모범됨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들은 결연히 전열의 앞에서 싸워, 사람들을 감탄시켜 그 지위를 얻는다. 사소한 일은 수장(장로)들이, 중대사는 인민 전체가 협의한다. 그러나 결정권이 인민에게 있는 문제도 미리 수장들에 의해서 논의된다. 예기치 않은 긴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일정한 시기, 즉 초생달 혹은 보름달에 집회를 갖는다. 그들은 이 때를 그들의 일을 시작하는 데 가장 길한 시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군중들이 모여 충분한 수가 되었을 때, 그들은 무장한 채로 자리에 앉는다. 왕이나 수장들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함을 지름으로써 거부한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창을 마주친다. 무기로서 칭찬하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찬성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싸움터에서는 종사가 족장과 대등하게 용감하다는게 명예였다. 그러나 족장이 전사했는데도 살아서 돌아온 자는 평생토록 치욕이요, 오명이었다. 족장을 돕고 보호하고 자신의 용감한 행동을 족장의 영 광으로 돌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종사의 의무였다. 족장은 승리를 위해 싸우고, 종사는 족장을 위해 싸운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 게르만의 이동과 건국 : 기원 전 50년경 시저가 알프스를 넘어 게르만의 땅에 발을 디딤으로서 게르만 족은 처음 로마의 문명이란 것과 만나게 되고, 따뜻하고 기름진 땅과 화려한 로마 문화에 동경을 하다가 때마침 로마 제국이 약해지자 그들 중 일부가 로마의 용병으로 또는 소작인으로 로마 영토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때 마침 볼가 강 근처에 살던 아시아계 유목민 훈족이 게르만의 땅에 쳐들어오자 이들을 피해 게르만 인들이 로마 제국 영토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고 이들의 세력이 점차 커져 로마의 군대가 거의 게르만으로 차게 되어 게르만인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고 게르만이 유럽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Frankische Reich ;481-843) : 게르만 부족의 일파인 프랑크 족이 5세기말에 갈리아에 건설한 국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 프 랑크 족은 몇 개의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왕국 가운데 하나를 지배하던 메로빙거라는 가문에 클로비스 왕이 나타나 통일된 프랑크를 세웠다(486). 로마시대에 갈리아 지방의 중심이었던 루데시아를 수도로 하여 이름을 파리라고 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태반을 포함하는 대제국이 되어, 유럽 문화의 역사적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건국의 시조 클로비스 이후 751년까지 계속된 메로빙 왕조는 지중해 상업에 의존하여, 다른 게르만 부족 국가처럼 로마적 전제 관료 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으나, 클로비스 사후의 게르만적 분할 상속 원리에 의한 각 분국왕(分國王) 사 이의 싸움 속에서, 상업의 쇠퇴에 따르는 토지 경제(농업)의 진전과 더불어 왕권은 점차 약체화하고 6,7 세기에는 대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이 대두하여 레우데스를 중심으로 한 봉건 관계도 발전을 보게 되었다. 왕국의 중심은 네우스트리아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로 옮겨지고, 후자의 궁제인 카롤링가는 이들 새로운 귀족 세력을 배경으로 삼아 피핀(中), 카알 마르텔의 위업을 거쳐, 751년 피핀(小)때에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여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그의 아들 카알 대제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교황과 제휴하여 800년에는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대제는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실현을 바라면서도, 한편 기존의 귀족 세력을 법리적으로 봉건 제도 하에 재편성하여 이후의 각국 봉건법의 기초를 만들었다. 대제의 사후 루드비히 경건왕을 거쳐 왕국은 베르덩 조약과 메르센 조약에 의하여 동 프랑크, 서 프랑크, 이탈리아의 3왕국으로 분열된 후, 마쟈르, 아라비아, 노르만인의 침략과 봉건적 분립주의 때문에 각각 911, 987, 877년에 멸망하였다. 이 세나라는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초가 되었다.



◐ 클로비스(Clovis ;465/6-511) :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481∼511). 메로빙 왕가의 시조로 살리족 프랑크의 수장으로서 각지를 정복했는데 486년경 북부 갈리아의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의 나라를 정복하여, 솜 강에서 르와르 강에 이르는 지역에 진출했다. 게르만 국가의 약점은 지배 민족인 게르만의 수가 구로마계 원주민보다 아주 소수라는 점(전 인구의 3%를 넘지 못함), 그리고 게르만족은 이단(아리우스 파)을 믿어 정통 카톨릭(아타 나시우스 파) 교도였던 로마인과의 융화가 안되었다는 점이다. 클로비스는 496년에는 알라만 족을 정복, 마인 강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하고, 같은 해 전승을 기념하는 뜻에서, 또한 진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인 왕비 클로틸다 및 갈리아의 이른바 교양 귀족의 청을 받아들여,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로마인으로부터 이단시되는 아리우스 파 크리스트교를 믿는 다른 게르만 여러 국가 중 이채를 띠었다. 507년에는 부이예 부근에서 서 고트 왕 알라리크와 싸워 르와르 강에서 가론 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전쟁 후 동 로마 황제 아타나시우스로부터 파트리키우스 및 콘술의 칭호를 받아 수도를 파리로 정하였으며, 프랑크 인과 로마인(갈리아) 사이의 사상적 융화를 도모하는 등 프랑크 왕국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그가 죽은 후 왕국은 게르만의 관습에 따라 4 왕자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 메로빙거 왕가(Merovingiens) :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가(481∼751). 그 이름은 5세기 중엽(448∼457) 살리 족 프랑크를 지배한 메로비스에서 유래한다. 메로비스의 손자 클로비스(481∼511)에 의하여 기초가 확립되고, 그 아들 클로타트 1세(511∼561) 때에 거의 갈리아 전체에 걸쳐서 번영했다. 시리아인, 유다인 등 오리엔트 상인의 내왕이 많아, 고대적 상업으로부터의 관세 수입에 의존하는 로마 양식의 관료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게르만 고유의 재산 균분 상속의 원칙 때문에 왕국은 항상 분열의 위기에 놓여져, 그 후 지중해 상업이 쇠퇴하는 한편 각 분국 왕들이 서로 싸우자 대 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이 대두하여 클로타르 2세(613∼628), 다고베르트 1세(622∼638)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상의 실권은 이들 귀족 중 제일 세력이 강한 분국의 궁재의 손으로 넘어갔다. 분국 오스트라시아에 이어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된 카롤링거 가의 쿠데타로 751년 실데리크 3세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 푸아티에 전투 : 732년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제국의 원정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 파리 남쪽 루아르 강변의 투르(Torus)와 푸아티에(Poitiers) 사이에서 벌어졌다. 프랑크군을 이끈 사람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宮宰 : 궁내 대신) 카알 마르텔(Karl Martell)이었다. 궁재는 왕의 직할지를 관리하고 군 통수권을 장악한 최고 장관이었다.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에서 일어나 페르시아·중동·북아프리카로부터 스페인 남부까지 점령했다. 이어서 지중해와 피레네 산맥에 도달해 유럽 대륙을 반원형으로 포위하는 형세를 취해 기독교 제국의 제후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슬람 원정군은 아부드 알 라만의 지휘 아래 713년,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730년에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를 공격했으며 이어서 가론 강 포도밭을 망가뜨리고, 보르도 탈환에 나섰던 아키텐 군을 격파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카 알 마르텔은 이슬람 군의 경무장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보병 중심의 기존 군대를 개혁해 중무장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루아르 강 남쪽의 평원에서 북진하던 이슬람 군 9만명을 맞아 7일간에 걸친 전투 끝에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 군 경기병은 마지막에 프랑크의 중무장 보병의 밀집 부대에 돌격했으나 방패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부드 알 라만은 전사하고 이슬람 군은 스페인으로 물러났다. 궁재 카알 마르텔의 명성은 한층 높아지게 됐다. 카알 마르텔의 세력은 국왕을 능가했으며 그의 아들 피핀 대에 이르러서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을 손에 넣게 됐다. 이 때부터 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메 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다. 카알 마르텔이 기독교 국가의 위기를 일단 극복하게 된 것은, 이슬람 군이 여전히 원정을 계속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직속 기병대를 증강했기 때문이다. 궁정 친위 대의 기병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분에 상응하는 은대지를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카알 마르텔은 전 국토의 3분의 1에 달하던 교회령의 일부를 몰수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카알 마르텔이 이때 편성했던 중무장 기병대는 나중에 봉건 기사의 지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부터 전투력의 중심 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옮겨져, 이전에 보병으로 프랑크군의 중심이 됐던 소토지 소유자인 자유농민의 지위는 낮아졌다.



◑ 카롤링거 왕가(Carolingians) : 751년 이래 메로빙거 왕가와 바뀌어 프랑크 왕국을 지배한 왕가. 카알 대제를 낳은 왕가로 카롤링은 카알의 라틴명인 카롤루스에서 유래한다. 계보가 한쪽은 노(老)피핀, 다른 한쪽은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아르눌핑 가라고도 한다. 원래 마아스, 모젤 강 유역의 대토지 소유자로서, 메로빙거 왕조 내란기에 대두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아, 7세기 대(大)피핀이 메로빙 왕가의 프랑크 왕국에서 궁재직을 발판으로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그 자손은 계속하여 궁재가 되고, 그의 증손 카알 마르텔은 이슬람 교도의 침략을 격퇴하여 더욱 강성해지고, 그의 아들 소(小) 피핀은 7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가를 창건하였으며 다음의 카알 대제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받아, 반(半)고대적인 집권적 관료국가로서 번영하였는데, 고대적인 상업에 기생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가와는 달리, 토지 경제 내지는 농업 분야에 권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 대제의 사후, 봉건적 분권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점차 약체화하였다.



◐ 피핀(Pepin ;714-768) : 프랑크 카롤링 왕가의 초대 왕으로 741년 부친 카알 마르텔의 사후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고, 743년에는 737년이래 비어있던 왕좌에 힐데리히 3세를 앉히고, 747년 형 카를만이 수도사가 되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겸하여 전 프랑크 왕국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교회령 몰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여 교회의 십일세(十一稅) 징수권을 광범위하게 승인하였다. 751년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얻어 왕을 폐위하고 스와송의 제후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왕에 추대되고 게르만의 옛 풍습인 방패를 타는 의식 외에, 교회측의 기름 붓는 의식도 함께 거행하여 즉위했다. 754년 다음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랑고바르트 국왕에게 압박되어 구원을 청해 오자 754년과 756년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에 원정하였다. 그는 라벤나 지방과 아드리아 해 연안의 펜타폴리스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는데,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교황 사이에 굳건한 유대 관계가 확립되었다.



◑ 카알(카롤루스) 대제([독] Karl der Grosse [프] Charlemagne ;742-814) : '마호메트 없이는 카롤루스 대제도 없다' 라고 피렌이 주장했듯이, 지중해 연안을 주름잡고 있었던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여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 문명권을 확립하고 일체화시킨 군주였다. 768년 부친인 피핀의 사후, 동생 카알만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다가 771년 카알만이 죽자 전 프랑크 왕국을 통일 지배하였다. 재위 40여 년간 사방을 경략하여 대통일 사업을 성취하여 772∼804년에는 작센을 병합하고, 774년 에는 교황의 청으로 북 이탈리아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켜 이를 합병하였으며 778년 서쪽의 사라센 족을 토벌하여 에스파냐 변경 영토를 설치하였다. 또한 778년 바이에른, 케른텐을 합병하고 791∼803년 에는 멀리 동방의 아바르, 벤드 등의 제 민족을 정복하여 거의 대부분의 게르만 부족을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 즉 프랑크 왕국과 크리스트교로 통합하였다. 각 부족이 저마다의 법전을 가지고 통치하던 이들 광대한 지역을 중앙 집권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료 제도를 정비하면서도, 한편 봉건 제도 발전의 바탕을 만들어 중앙의 각 봉건 국가가 성립될 수 있는 공통적인 출발점을 만들어 놓았다. 이 밖에 이탈리아의 영토의 일부를 교황에 헌납하는 등 교회에 대한 봉사가 컸으므로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 황제로 대관하여 게르만 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확대하는 사명을 위탁하였다. 그것은 형식으로는 서 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피핀, 클로비스이래의 과 제였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로마 황제권과 크리스트 교 교황, 즉 속권(정치적 권력)과 교권(영적 권력)이라는 두 권력이 대두하여 서유럽 세계가 어우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으나 로마 제국의 부흥의 이념은 10세기에 신성 로마제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수도 아리헨에 궁정 학교를 설립, 알퀴누스 등 학자를 초빙하여 교 육 사업을 장려하였으므로 소위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화가 번영하였다. 이 점에서 유럽을 형성하는 3대 문화 요소(고전 문화, 크리스트교, 게르만 민족 정신)는 카알 대제의 통치하에서 비로소 완전한 융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 카롤링거 르네상스 : 원래는 카롤루스 대제가 성직자의 교양을 높이고 그들에게 올바른 라틴어를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전의 부활, 나아가서는 일반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 중심 인물인 알퀸 (Alquin)은 영국 출신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중세 초기의 영국 문화가 프랑크 왕국에 옮겨져 꽃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에도 여러 곳의 학식 있는 성직자들이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 모여들어 전 유럽적인 문화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전반적으로 고전의 모방을 위주로 한 독창성이 없는 라틴문화였으나, 신학의 부흥과 더불어 중세 전성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 11세기에 지어진 무훈시의 대표작. 4002행으로 되었으며 각 행은 10 음절로 되어 있다. 카알 대제의 크리스트 교 군대와 에스파니아의 이교도 사라센 군과의 싸움을 테마로 하여 지어졌다. 사라센 왕 마르실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지명된 가넬롱은 위험한 사명을 노여워하고, 또 마르실의 뇌물을 받아 대제에게 반역한다. 대제의 군대가 에스파냐로부터 퇴각하여 롱스보의 험로에 이르자 갑자기 사라센 군이 기습하였으나, 대제의 조카 롤랑은 올리비에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구원도 청하지 않아서 롤랑, 올리비에, 대주교 튀르팡 등이 모두 죽움을 맞는다. 대제는 복수로 사라센 군을 토벌하고 돌아오지만, 롤랑의 애인 오드는 롤랑의 죽음을 듣고 따라서 죽는다. 조국애와 신앙을 결합한 최고 걸작이며 또한 카페 왕조의 정치적 통일의 문학적 표현이다.



◑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과의 제휴 :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성장했다. 여기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하에 있었다. 교황은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다. 이때 가장 적절한 인물로 생각된 것이 프랑크 왕 카롤루스였던 것이 다. 카롤루스 역시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선 교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 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 주었다. 동로마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일개 국왕이 아닌 황제와의 제휴라야 했기 때문 이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의 서 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로써 침입자였던 게르만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새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 서유럽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수호자요, 서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유럽 일대를 석권하게 되었다. 서 로마 제국은 부활되었으나, 그 주인은 바로 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 게르만 족이었던 것이다.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루트비히 1세가 영토와 함께 서 로마 황제의 제관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영토 분할 문제를 놓고 골육 상쟁을 하다 죽자, 왕국은 다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일대, 그리고 서 로마 제국 황 제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2남 루트비히 2세는 동 프랑크 왕으로서 라인 강 동쪽을, 막내 칼은 서 프랑크 왕으로서, 서 프랑키아, 아키텐, 가스코뉴, 셉티마니아를 각각 물려받았다. 이 같은 영토 분할은 843년 베르됭 조약(843)으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분할은 로타르가 아아헨 시, 로마 시, 롬바르디아 평야, 라인 강을 수중에 넣은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일체감과는 관계없이 순전히 경제적인 견지에서 실행되었다. 그런데 로타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남은 두 형제에게 다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북동부는 동프랑크로, 서북부는 서프랑크로, 남부는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 메르센 조약으로 그어진 경계선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 오토 1세(Otto I) 936년 독일 작센 왕조의 2대 왕으로 즉위하여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을 창건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1 세는 작센의 제후로 여러 부족의 선거에서 동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랐고 933년 마자르 족을 격퇴하고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1세는 국가 통일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각지에 할거했던 제후와 호족에게 봉건적인 군신 관계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들이 반항하자 친족을 각지에 봉하는 한편, 변경백을 지방에 파견해 정치의 상급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가부장적 봉건적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은 애써 파견했던 변경백과 친족이 토호화해 각 지방의 제후나 유력자와 결탁하고 왕의 권위에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됨에 따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오토 1세는 다음에는 성직자를 요직에 등용하여 교회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성직자들은 이미 독신의 의무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습적인 이해 관계로 골치를 썩힐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토 1세가 정책을 전환한 논거였다. 955년 오토 1세는 마자르 족을 아우크스부르크 근교에서 무찌름으로써 동쪽 국경의 위협을 제거했다. 이보다 몇 년 전에 오토 1세는 부르고뉴 왕의 딸 아델하이트와 약혼을 했는데, 아델하이트와의 결혼을 둘러싸고 북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바이에른 공인 동생과 대립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원정해 아델하이트를 왕비로 삼고, 이탈리아 왕도 겸했 다. 961년에는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했고, 이듬해인 962년 교황 요한네스 12세의 집전으로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이 오토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배자로서, 고대 로마의 유업을 계승해 기독교 왕국의 정통자의 지위를 확인해 주는 결과가 됐다. 이후 독일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1806년 나폴레옹 1세에게 해체될 때까지 약 1천년 가까이 형식적 인 이름을 유지하게 됐다(그러나 끝내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의 혼란을 이용해 교황권에 대한 지배도 확립하게 됐다. 이후 분쟁의 씨앗이 됐던 교황권과 황제권의 다툼도, 오토 1세의 시대에는 황제권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신성 로마 제국(Heuluges Ro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962∼1806) : 중세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존속한 독일 국가의 명칭. 독일 왕 오토 1세가 962년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독일에서는 왕이 즉위하면 이탈리아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戴冠)하여 신성 로마 황제의 제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제권과 교권의 결합은 황제들에게 교회 지배권을 가져다주어, 그들은 그것을 통해 국내의 분립적 제후를 누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은 관념적이기는 하나 유럽 세계에 있어서 속계의 최고 군주로서 영예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교회 지배권은 하인리히 4세 이후 성직 서임권 투쟁을 통하여 붕괴되었고, 또 당초의 이념을 실천하려던 역대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은 본국의 봉건 제후들에 대한 양보를 불가피하게 하여 중세 말기 이후 독일이 영방 국가로 분열되는 커다란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황제 선거권은 13세기 말 이래 7선제후에 의해 고정되고 황제의 선출은 그들의 이해를 제국 전체의 이해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것은 1437년 이후 황제위를 계속 차지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대공위 시대에서 종교 개혁 시대에 걸쳐서 진행되던 영방 주권의 확립은 제국을 명목상의 존재로 떨어뜨리던 중 30년 전쟁 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영방 국가의 체제가 문서로서 승인되어 제국은 사실상 해체 되었고, 1806년 나폴레옹 세력하의 라인 동맹 16방이 제국을 탈퇴하게 되자 합스부르크 가의 황제가 제위를 사퇴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 카페 왕조(Capetian dynasty: 987-1328) : 카페 왕조는 987년, 위그 카페가 창건한 프랑스의 왕조로 14세기 초의 샤를 4세까지 14대에 걸쳤다. 카페 가문은 본래 일드 프랑스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파리 백이라고 일컬어졌다.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887년 파리 백 외드(Eudes)는 노르만 족 침입군을 센 강 유역에서 격파한 공으로 한 때 왕위를 얻었다. 그러나 외드가 죽은 뒤 왕위는 다시 카롤링거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 뒤 외드의 손자 위그 카페의 시대에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올라 카페 왕조를 열었다. 왕이라는 이름을 얻기는 했으나 카페 왕조의 영토는 좁아, 부르고뉴·플랑드르·가스코뉴·아키텐· 프로방스 등에서 할거하고 있던 제후에 비해 왕가의 세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카페 왕조는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선진 농업 지대였던 일드 프랑스 지방을 영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 상업·기술·문화의 발전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파리는 프랑크 왕국 초기부터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 대주교가 있었으며,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시민 생활은 갈수록 번영했다. 카페 왕조의 5대 왕인 루이 6세(재위 1108∼37년)는 왕권의 기초를 다지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루이 6세의 뒤를 이은 루이 7세(재위 1137∼80년)는 아키텐 공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해 그녀의 지참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토 를 얻음으로써 영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사에 몰두한 나머지 왕비를 보살피지 않아서, 제2차 십자군 원정 도중 엘레오노르가 잘생긴 아라비아인 하인과 정숙하지 못한 행실을 보여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러 나라의 왕족과 제후들 앞에서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자, 루이 7세는 어쩔 수 없이 왕비와 이혼함과 동시에 어렵게 손에 넣었던 영토까지 잃었다. 게다가 엘레오노르는 다음에는 영국 왕 헨리 2 세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국내에 영국의 영토가 생기게 돼, 양국에 숙명적인 분쟁의 화근이 됐다. 카페 왕조 권력이 안정되기까지 로마 교회가 왕권에 제공했던 정신적·물질적 지원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왕의 영지 외의 사제들까지도 교계의 봉건 영주로서 국왕에게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했으며, 또 궁정에서 교양 있는 측근의 역할을 했다. 국왕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주장도, 주로 국왕이 교회로부터 신성성을 부여받았던 결과이다. 루이 7세에 이은 필리프 2세와 루이 9세 시대에 카페 왕조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2·13세기 유럽에서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왕권과 도시가 서로 협조하게 됐고, 왕의 영지가 확대되면서 종전의 봉건 가신적 지배가 국가적 지배로 바뀌어 왕의 정치력은 향상됐다. 왕권은 지방 통치를 위해 대관(bailis)·지사(Seneschal)라 일컫는 관료 조직을 갖추고 행정·사법·재정· 군사의 상급권을 장악했다. 또한 루이 9세 시대에는 중앙 관제를 정비해 사법을 담당하는 파를망 고등 법원, 재정을 담당하는 회계 검사원과, 나중에 대고문부라 일컬어지는 행정 관청을 설립했다. 그리하여 13세기 말 필리프 4세 시대에는 삼부회를 설립해 신분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신분에 따라 대표를 회의에 보내 국왕의 자문과 과세 요구에 답변하는 구조가 갖추어졌다. 카페 왕조의 발전과 함께 왕권의 수도였던 파리는 더욱 번창해 영역도 필리프 2세 때보다 확대됐다. 루브르 왕궁과 왕실 고문서관, 파리 대학이 본격적으로 착공된 것도 이 시기다. 또한 파리 동쪽의 습지대도 상업가로 변해, 시청과 중앙 시장도 건설됐다.



◑ 노르만족의 활동 : 노르만 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지금의 덴마크에 거주하는 게르만 계통의 부족들로서, 모험심이 강하고 항해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노르만이란 북부 사람들(North men)이란 말에서 유래되며, 이들은 또 바이킹(Vikings)이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이는 협만(Vik)의 자손(King)이란 뜻이다. 이밖에 바이킹, 데인인, 바랴그인 등의 별칭이 있다. 게르만의 대이동 때에 원주지에 머물러, 어업, 농경, 목축 또는 해상 약탈에 종사했는데, 8세기경 본국의 통일 왕권의 형성에 따라,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은 세력들은 인구 증가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 범위는 전 유럽에 미치고, 제2차 민족 이동이라고 부를 만한 양상을 보였다. 스웨덴의 노르만은 동으로 슬라브족의 땅으로 진출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노브고르트에 기지를 설치하고, 다시 남쪽으로 진출하여 드네프르 강변의 키예프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일명 바랑고이 족으로도 알려졌으며, 여기 저기에 요새화한 기지를 마련하여 주변의 농촌 주민을 정복하였다. 10세기 바랑고이 족은 현재의 서부 러시아의 지배자가 되고, 이 넓은 땅에 키예프 공이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국가를 건설하였다. 노르만은 북해와 대서양에도 출현하였다. 9세기에 그들은 수시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 지대와 하천 유역에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의 침입과 약탈에 시달린 서 프랑크 왕은 10세기 초(911)에 그들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주어 봉신으로 삼았다. 이것이 후에 커져서 노르망디 공국이 되고 11세기에는 그들의 일부가 멀리 지중해로 진출하여 시칠리아를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고 남 이탈리아에 나라를 세우는 한편,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우기도 하였다.(1066) 이보다 앞서 9세기 후반에 영국은 덴마크 계통인 데인족의 침입에 시달린 끝에 북동부 지방을 그들에게 할애하였다. 이들은 후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여 앵글로 색슨족과 융화하게 되었다. 노르만은 아일랜드에도 침입했으나 원주민인 켈트족에게 격퇴되었다. 그들은 다시 멀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진출하고, 일부가 그 곳에서 북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노르만과 이민족의 침입은 가까스로 이루어졌던 질서 회복과 안정을 완전히 파괴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봉건화를 촉진하고 부흥하는 듯이 보였던 문예도 완전히 사라지는 형편이 되었다. 서 프랑크에서는 대부분 수도원이 노르만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도시가 약탈되고 불탔다. 인명의 피해도 많았거니와 많은 경작지가 방치되어 삼림이나 황무지로 변하였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 었으나, 정착과 더불어 점차 평화적 상업에 종사하게 되어, 상업의 부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정주 지에서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유럽 중세 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마자르 족의 침입은 노르만처럼 장기간은 아니었으나, 파괴성에서는 더욱 격심하였다. 이러한 황폐의 늪으로부터의 부흥 과정에서 유럽의 중세 사회와 문화가 발전되었다



◑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 ;1066-1154) : 노르망디 공 윌리엄 정복왕(1066∼1087)의 즉위에서 비롯되는 영국 왕조. 그 뒤 왕위는 윌리엄 2세, 헨리 1세로 계승되었다. 헨리 1세는 그의 딸 마틸다(독일 황제 하인리에 출가시켰으나, 그가 죽은 뒤 앙 주 백 제프리와 재혼)를 후계자로 했으나, 귀족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블르와 백 스티븐(1135∼1154)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틸다는 의형 그로스터 백 로버트와 함께 서부 영국을 근거로 스티븐 왕과 대 립, 19년간의 내란을 겪은 뒤, 마틸다의 아들 앙주 백 헨리 2세가 즉위(1154)해서 앙주 왕조를 열게되어 노르만 왕조는 끝나고, 플랜탄지네트 왕조가 들어선다. 정복왕은 노르만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귀족을 지 배, 중앙 집권적 봉건제를 유지했으나, 헨리 1세 시대에 다시 중앙 정부가 전문화되고, 주 법정에 중앙 에서 임명한 사법관을 두어, 왕의 순회 재판이 행해지는 등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 뒤 스티븐 시대의 내 란에 의해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왔으나, 앙주 백 헨리의 즉위로 다시 봉건 왕정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 롤 로(Rollo, 860∼931) : 노르만 족의 수장으로 890년 노르만 족의 대부대를 이끌고 센 강 하구에 침입하여 그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나아가 파리를 포위했을 뿐 아니라(892), 내륙 깊숙이 침공해 들어갔다. 그래서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그와 조약을 맺어 센 강 하류의 점령지를 그에게 봉토로 주었다. 롤로는 초대 노르망디 공 로베르 1세로서 프랑스 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고, 영내의 통치에 있어서도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잘 정비된 봉건제도는 그 뒤 1066년의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에 옮겨졌다.



◑ 마쟈르 인(Magyars) : 우랄 어족의 우고르어 파에 속하는 민족으로 원주지는 우랄 산맥 서남방이었으나, 4세기경 동방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오늘의 아조프 해 동안의 쿠반 강 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이어서 9세기 초엽에 페체네그 인의 압박으로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돈, 드네프르 두 강 사이의 흑해 북안에 머물다가 896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현재의 헝가리 땅으로 들어왔다. 그 후 다시 비잔틴 제국, 독일 등으로 진입하려다 하인리히 1세, 오토 1세의 반격으로 대 타격을 받은 데다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자, 점차 그 자리에 평화로운 정주 생활을 시작하여 10세기경에 국가 통일을 완성하였다.






















































































































































































2 . 중세 유럽 세계의 형성

( 1 ) 민족의 대이동과 유럽 세계의 형성

가 . 게르만족의 이동

1 . 초기의 생활

1 > 부족국가 ( Civitas )

2 > 종사제도 - 군사적 주종관계

◇ 봉건제도하의 주종관계의 기원

3 > 다신교 사회

4 > 로마제국 이주 - 용병과 농민 : 콜로누스(=소작인)

5 > 아리우스파 신앙 ( 프랑크족은 제외 ) - AD 4 C 울필라스가 전파

2 . 이동 원인

1 > 인구 증가 - 토지(경작지) 부족 현상

2 > 선진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

3 > AD 3 7 5 훈족의 침입

4 > 로마 제국의 무방비

☞ 4~5세기 동, 서 세계의 민족 대이동
원인
4~5세기 지구는 급격히 한랭화하여 내륙초원지대의 오아시스를 고갈시키고, 초원을 축소시켰으며, 이러한 한랭화 현상으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약화된유목민족은 농경사회로 대거 이동하게됨.

  유목민족(군사적 우위)

↓

농경민족(경제, 문화적 우위)

훈족(Huns)
↓ 305년 훈족의 서고트 압박

게르만족 → 로마

5호(胡)
↓ 304년 남흉노의 반란

5호16국 시대


 

3 . 이동의 확대

국가 위치 존속기간 붕괴
건국 멸망
반달 아프리카 북부 429 534 동로마
서고트 이베리아 반도 415 711 사라센
프랑크 갈리아 지방 481 843 유일하게 발전
부르군트 라인강 상류 443 434 프랑크
동고트 이탈리아 반도 493 555 동로마
롬바르드 이탈리아 반도 568 774 프랑크
앵글로 색슨 브리튼 섬 449 1066 노르만

cf. 훈족의 아틸라왕 ( A D 4 0 6 / A D 4 5 3 )

 

4 . 이동의 결과

1 > AD 4 7 6 서고트족의 오도아케르 - 서로마 멸망

2 > 중세 유럽의 시작

 

나 . 프랑크 왕국

1 . 게르만 국가의 단명 원인

1 > 문화적 · 수적 열세

2 > 종교상의 문제

2 . 프랑크 왕국의 발전 원인

1 > 아타나시우스파 신봉 - 서로마 제국의 부흥 까지

2 > 서로마 문화 부흥 - 케사르 공헌

3 > 민족 이동거리가 단거리 ( 여타 민족에 비해 ) - 세력의 팽창 ← 분할 상속 관습

4 > 지리적 요인으로 이슬람 · 비잔틴 세력의 공격이 미치지 않음

3 . 메로빙거 왕조 ( AD 4 8 1 ~ AD 7 5 1 )

1 > 건국 - 클로비스 : 캐톨릭으로 개종

2 > 카알 마르텔 ( 망치 ) - AD 7 3 2 투르프와티에 전투 - 르와르 상류

◇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부터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 구출

4 . 카롤링거 왕조 ( AD 7 5 1 ~ AD 8 4 3 )

1 > 건국 - 피핀

2 > 교황과 제휴 - 롬바르드족 토벌 : 교황령 기증

◇ 유럽 발전사의 주된 흐름

5 . 카알 ( 카룰루스 ) 대제 ( AD 7 6 8 ~ AD 8 1 4 )

1 > 서유럽 통일

① 롬바르드 멸망

② 오스트리아 정복

③ 에스파니아 진격

2 > AD 8 0 0 서로마 황제의 대관 - 레오 3 세

① 서로마 부흥

② 로마교회 독립

③ 로마 + 게르만 + 기독교 융합

3 > 중앙 집권제 - 전국 3 0 0 주 - 백 ( 지방관 )

4 > 카롤링거 르네상스

① 궁정 학교 건립 - 성직자 교양

㉠ 라틴어 교육

㉡ 고전의 부활

② Alquin ( 영국 ) 의 활약

6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카알대제의 아들 루이 1 세 ( AD 814 ~ AD 840 ) 의 사후 상속문제로

1 > AD 8 4 3 베르덩 조약

① Lothar ( 장남 ) 중부 프랑크 · 이탈리아

② Ludwig der Deutsche ( 3 남 ) 동프랑크

③ Charles the bald ( 4 남 ) 서프랑크

2 > AD 8 7 0 메르센 조약

① 독일 ( 동프랑크 )

② 프랑스 ( 서프랑크 )

③ 이탈리아 분열

 

다 . 노르만족의 활동

1 . Northmen 에서 유래 : Vikings ( Vik 협곡만 의 ing 자손 )

2 . 시기 : 다발성 ( AD 9 C ~ AD 1 1 C )

3 . 노르만족의 이동

1 > AD 9 1 1 노르망디 공국 - 롤로 : 세느강 유역

2 > AD 1 0 6 6 노르만 왕조 -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3 > AD 8 6 2 노보고르드 왕국

AD 8 8 2 키에프 공국

- 러시아의 기원 : 루릭

4 > AD 1 1 3 0 양시칠리아 왕국 - 로제르 2 세

4 . 마쟈르족의 활동 ( 동유럽 )

1 > 원주지 - 우랄산맥 남서 지역

2 > AD 4 C 경부터 남서쪽으로 이동 시작 - AD 9 C ~ AD 1 0 C

3 > 독일왕 오토 1 세가 격퇴 ( AD 9 6 2 신성로마황제 제관 )

- 신성로마제국의 시작 : 기독교 정신에 입각 보호 육성 ( 독일 ? )

cf. AD 1 8 0 6 프란쯔 2 세 : 신성로마황제 칭호 폐지

5 . 슬라브족의 활동 - 폴란드인· 체코인· 세르비아인 · 러시아인 · 우크라이나인

→ 이민족의 침입에 따른 혼란이 봉건사회 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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