右翼이 6.25 때 90만 양민을 학살했다고?

세계일보의 끔찍한 역사왜곡
▲ 6.25 전쟁 당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위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인민군의 학살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사진출처: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한국은 「죽은 언론의 사회」이다. 事實을 알리고 眞實을 전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 채 거짓과 선동의 스피커로 전락한 매체가 늘고 있다.

세계일보는 22일 6·25 전쟁 발발 60돌 특집기사에서 끔찍한 역사왜곡에 나섰다. 이 신문은 「이념 대립이 부른 상처 치유 안 된 채 아직도 멍에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6·25 전쟁 중 민간인 희생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 100만 명 중 90%가 남한의 군·경과, 우익청년단,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추산하고 있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좌익을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이 꼽힌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30여만 명은 전쟁 발발 후 정부와 경찰의 후퇴 과정에서 무차별 검속을 받아 즉결처분됐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남한은 주로 피난민, 북한 지역은 무차별 폭격으로 이뤄졌다』

세계일보의 주장과 달리 실제 6·25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주체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바닥빨갱이」로 불리는 남한 좌익들이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좌익들이 이른바 人民裁判(인민재판)을 통해 경찰과 군인 가족을 잡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6.25전쟁 중 북한군과 좌익들이 학살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이 숫자는 남경대학살, Warsaw Getto의 유태인 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좌익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저질렀다.

開戰 초기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일보의 「30만 보도연맹원 학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左편향된 역사해석으로 물의를 빚어 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委, 위원장 안병욱) 조차 2009년 11월26일 『6.25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등 4,934명이 국가기관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었다. 진실화해委는 이날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방첩단)와 경찰, 헌병, 해군 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후 집단 학살됐다』며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이라고 발표했었다.

세계일보는 4천 여 명으로 확인된 보도연맹원 희생자 숫자를 30만 명으로 부풀려 놓았지만 그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6·25전쟁 중 좌우익 사이 報復(보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9·28 서울 수복 이전은 좌익의 人民裁判이었고 9·28 이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구속·재판이라는 公的 처벌을 통해 이뤄졌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소위 우익들에 의한 좌익 보복 역시 국회에서 私刑(사형)금지법령이 만들어지면서 금지됐을 뿐 아니라 살해당한 우익들의 가족들 역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어서 보복을 하기도 어려웠다. 人民裁判으로 양민학살을 주도한 좌익들은 이후 재판을 통해 수감돼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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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들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기도...』>

전쟁사학자들은 6.25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12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殘酷性(잔혹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좌익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 중 인민군과 좌익에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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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 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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