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지난 1월 3일자 1면 머리기사로 “일본의 민주당 관계자들이 작년 여름부터 몇 개 루트로 중국에서 북한 측 인사들과 극비 접촉, 납치피해자의 생존을 확인하고 있는데, 북측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을 시사(示唆)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의하면, 작년 10월 중순 일본 집권여당인 민주당 관계자가 총리실의 뜻을 받들어 중국을 방문해 중개자를 통해 북한정권의 고위인사를 만났으며, 일련의 접촉에서 북측은 신원(身元)을 밝히지 않은 채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생존자 정보의 진위(眞僞)는 알 수 없으나 북한은 민주당 정권의 의향(意向)을 탐색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하토야마 총리도 납치된 일본인을 데리고 올 수 있다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을 만날 의사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두 여인의 생존 여부(與否)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인 전 북한공작원 김현희(金賢姬)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다구치 야에코(가명 이은혜·현재 54세)와 중학생 때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현재 46세).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역사적 사건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납치자 구출회(‘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의 니시오카 쓰도무 회장은 두 여인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메구미는 김현희의 친구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고, 야에코는 김정일이 친필지령한 KAL기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돌려보내지 않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니시오카 씨는 메구미가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했다는 첩보도 있다고 했다.
 
  북한정권은 김정일이 대한항공 폭파 지령범이고, 한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들을 납치해 와서 간첩교육에 활용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고 한다. 두 여인이 일본으로 돌아오면 김정일의 반(反)인류범죄와 사생활(私生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므로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金賢姬의 메구미 추억 

  지난해 11월 20일 김현희는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요코다 메구미와 다구치 야에코 씨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다구치가 1986년 7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제가 1987년에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환했을 때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다구치가 군사학교에서 근무하고 납치된 한국인과 결혼했다는 정보가 있으므로 저는 다구치는 서류상의 사망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생명은 죽었지만 육체적 생명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유일한 친구인 숙희와 메구미는 나이도 비슷하며 성격도 다 얌전하고 조용하여 잘지냈습니다. 둘이서 동요를 좋아했는데, 서로 자주 불렀습니다. 메구미는 착실하고 알뜰했습니다. 북한제 화장품은 질이 나쁜데 자신은 그걸 쓰면서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1983년에 숙희와 헤어질 때 외화(外貨)상점에 가서 원피스, 구두, 핸드백을 사서 주었습니다. 그 뒤에도 숙희는 그 옷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면서 입고 다녔습니다.”
 
  김현희씨는 자신이 메구미와 같이 어울린 것처럼 실감 나게 이야기했다. 이토 료지(伊藤良司) 서울 지국장이 “메구미를 몇 번 만났습니까?”라고 묻자 김현희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메구미) 부모님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기회에, 부모님을 만났을 때 제가 알고 있는 사실 전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NHK를 통하여 김현희씨의 인터뷰 장면을 지켜본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 여사는 이런 감상(感想)을 밝혔다.
 
  “내 딸이 상대(김숙희)를 소중하게 여기고, 조용하고 자상하게 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쁩니다. 납치당해 간 사람들이 아직도 건강하게 있는지 궁금하고 하루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메구미 아버지(요코다 시게루)도 “내 딸이 (주변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니 다행스럽다”고 했다. 김현희씨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일본어로 다구치 야에코 씨의 아들(이즈카 고이치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번에 부산에서 만났을 때 내가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고이치로 씨는 인터뷰 장면을 보고는 “뭔가 여운을 남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구치 씨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 씨는 “본인이 일본에 오고 싶어하니 정부에서 빨리 우리와 만나게 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현희-김정일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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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구치 야에코와 그가 납치될 때 젖먹이였던 아들(이즈카 고이치로. 작년 3월 부산에서 김현희를 면담) |
  김현희씨는 작년 1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동료인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준 사람이 요코다 메구미였다고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 전에 자신이 쓴 책이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유일한 친구’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거나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돌려보낸 일본인 납치자들 입에서 메구미가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김현희씨는 이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다.
 
  김현희씨는 작년 3월 11일 부산에서 다구치 가족을 면담한 뒤 한국에 온 일본 정부의 납치자 조사팀을 만나 신문(訊問)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김현희씨는 “(북한에 있을 때) 요코다 메구미를 만났다”면서 그 정황(情況)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양국(兩國) 관계자 사이에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고, 김씨도 NHK 인터뷰 때 그런 선(線)에서 답변한 듯하다.
 
  김현희씨가 일본인 납치 문제의 상징적 인물인 요코다 메구미를 북한에서 자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22년째 계속되는 ‘김현희-김정일의 진실게임’에 있어서 새로운 사태 발전이다. 김현희씨는 주범 김승일(金勝一)과 함께,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날아가는 KAL 858편 보잉 707기에 폭탄을 두고 내려 이 여객기가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공중폭발, 탑승자 115명 전원을 죽게 했다.
 
  두 테러리스트는 가짜 일본여권을 갖고 있었다. 바레인 공항에서 일본 대사관 직원의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이 든 앰풀을 깨물어 현장에서 죽었고, 같이 깨물었던 김현희씨는 경찰관이 제지하는 바람에 소량의 독을 섭취, 응급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한국으로 넘겨진 김씨는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자신과 합숙하면서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라는 가명(假名)의 납치된 일본인 여자에 대해 자세히 진술했다. 이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만든 일본 경찰은 1991년 봄 김현희씨의 사진 확인을 받은 다음 이은혜가 두 아기를 두고 사라진 다구치 야에코라고 발표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납치자 문제가 커지는 계기가 됐다.
 
  북한정권, 조총련, 남한의 친북세력은 사건발생 직후부터 서로 연대하여 김현희를 가짜로 몰고, 폭파사건을 안기부의 자작극(自作劇)이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 파장이나 규모, 그리고 시간의 면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진실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김현희 가짜설’ 의 배경 
  1997년 무렵엔 니가타 해안에서 13세이던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가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간 사실도 확인됐다. 다구치 야에코의 경우도 그렇지만 메구미가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배경에는 공개되지 않은 한일(韓日) 막후의 정보협력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북한정권의 반인류적 범죄에 분노해 반북(反北)-반조총련 여론이 들끓고 이런 분위기가 일·북(日北)수교 회담의 결정적인 장애가 됐다. 일본 정부는 막후에서 북한 측에 납치자 문제의 해결 없이는 일·북수교와 대북(對北)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하면서 압박했다.
 
  북한당국은 이때 어느 선까지를 인정하고, 누구를 돌려보낼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이 검토과정에서 “절대로 돌려보내선 안되는 사람”으로 점 찍힌 것이 다구치와 메구미였다.
 
  북한정권이 이런 고심(苦心)을 하고 있을 때인 2001년 가을부터 한국에선 느닷없이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캠페인이 친북·좌익 진영과 MBC 등 방송에 의하여 전개되기 시작하고 김씨는 피신상태에 들어간다. 이에 대하여 니시오카 쓰도무씨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 안의 좌익, 그 배후엔 북한이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북한은 한국 내에서 김현희씨가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뒤 메구미와 다구치 씨를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다. 바꿔 말한다면 한국에서 일어난 ‘김현희 가짜설’은 북한의 사전공작이다. 북한은 납치를 인정하되 김정일의 책임은 부인하는 시나리오를 짰고, 다구치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가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는 아니라는 억지를 꾸몄다. 이런 거짓이 통용되도록 하려면 그 시기에 김현희씨는 입을 닫고 있어야 하는, 즉 박해를 받는 구도였다.>(작년에 출판된 <김현희의 편지>에서 발췌)
 
 
 
고이즈미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연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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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9월 17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정일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김정일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평양으로 초청, 납치문제의 해결을 꾀한다. 회담장에서 김정일은 맞은편에 앉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뗐다.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던 점에 대하여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북한정권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납치 지령자가 고백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물론 김정일은 납치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했다). 이때 고이즈미 총리 옆자리에서 김정일의 표정을 관찰했던 당시 관방부(副)장관(뒤에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최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까지 대화 분위기는 밝았으나 납치를 인정하는 순간 김정일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문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눈을 위로 치켜떠 고이즈미 총리의 표정을 살피곤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인물이 의외로 기(氣)가 약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북한정권은 13명의 일본인을 납치해 간 사실만 인정하고 그 가운데 다구치와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 다섯 명만 생존해 있다고 발표했다.
 
  북측은 놀랍게도 다구치 야에코의 납치사실까지 인정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다구치는 김현희가 말한 이은혜가 아니다”고 했다.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억지였다. 그들은 또 다구치가 ‘젖먹이 두 아기를 호텔에 남겨 놓고 북한관광을 위하여 공작원을 따라나섰다’는 허술한 설명을 덧붙여 일본인들을 화나게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다섯 명의 생존자와 그 가족을 돌려받는 선에서 이 문제를 매듭짓고 일·북수교로 나아가려 했으나 분노한 여론이 이 계획을 뒤집었다. 특히 메구미의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 여사는 차분하고 품위 있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모습으로 대응해 일본인들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2002년 10월 북한은 일시방문 형식으로 생존자 5명을 일본에 보내 주었다. 여론이 이들의 북한 복귀를 반대하는 바람에 일본 정부도 당초 약속을 깨고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일본의 전후(戰後) 정치사에서 여론이 정책을 엎어버린 드문 예이다.
 
 
 
진실게임 제2라운드 
  납치자 구출회와 가족회는 북한정권이 죽었다고 발표한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현희의 실체를 둘러싼 남북 간 진실게임이 1라운드였다면, 다구치와 메구미의 생사(生死)를 건 일본과 북한 사이의 공방전(攻防戰)은 2라운드였다.
 
  북한정권은, 1977년 11월 15일 니가타 해변에서 납치해 간 당시 13세의 메구미가 1993년 3월 13일 제49병원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통보했다.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나중에 한국에서 납치된 고교생 출신 김영남으로 밝혀졌다)은 메구미 부모 앞으로 자필(自筆)편지를 보냈는데, 메구미가 1993년에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귀국한 납치자들에 의하여 메구미는 1994년에도 목격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북한 측은 2004년 11월 일·북 실무자 협의 때, “죽었다는 8명의 사망진단서는 원본(原本)이 아니고 2002년 9월 17일에 서둘러 작성한 것이라 내용에 착오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북측은 메구미의 사망시기를 ‘1994년 4월 13일’로 고쳤다. 진단서는 그렇다 치고 남편까지도 부인의 사망연도를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북한 측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는 법칙에 따라 계속하여 악수(惡手)를 두기 시작했다. 2002년에 북한당국은 납치된 뒤 북한에서 죽었다는 마쓰기(松木薰·남·사망 당시 40대) 씨의 화장한 유골이란 것을 일본 측에 건넸다. 일본 언론은 이 유골이 1200도의 고열(高熱)에 의해 화장되었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턱뼈에 남아 있던 치아뿌리의 흔적을 근거로 하여 사자(死者)는 60대의 여자라고 단정했으나 이 사실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북한 측은 일본 언론의 기사를 읽고는 1200도 이상의 고열로 화장한 뼈를 보내면 일본이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2004년 11월 일·북 실무자 협의에서 북한 측은 ‘자살한 병원의 뒷산에 묻어 놓았던 메구미의 시신을 발굴, 화장한 유골’이란 것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이 유골을 감정한 제경(帝京)대학은 “요코다 메구미의 부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다른 두 사람의 뼈를 섞은 가짜 유골”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측은 일본의 감정기술을 오판(誤判)했던 것이다.
 
  김정일이 ‘국가에 의한 납치를 국가가 인정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행동에 나선 것은 일·북수교를 앞당겨 약 100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받겠다는 뜻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측의 거짓 발표에 따른 일본 국민여론의 악화로 경제지원은커녕 경제제재를 당하게 됐다.
 
 
 
김정일의 불만 토로: “내가 연극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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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1월 북한이 일본 측에 전달한 사진임. 납치 직후 찍힌 사진과 어른이 된 뒤에 찍은 사진. 메구미가 납치되기 직전에 찍은 중학생 교복 차림의 모습. |
  2004년 5월 22일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김정일과 회담하고, 북한이 2002년 10월에 돌려보낸 다섯 명의 피랍 일본인이 북한에 남겨 놓은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이 회담에서 김정일은 고이즈미 총리가 일·북수교를 핵심으로 하는 2002년 수뇌회담의 약속(‘평양선언’)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작년 NHK가 입수한 회담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렇게 불평했다.
 
  “나로서는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회담에 합의를 해도 끝나자마자 또다시 약속이 뒤집어지는 상황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전번 회담 때 우리는 과감하게 납치문제를 마무리 지어 이것으로 문제는 끝날 줄 알았는데, 총리께서 귀국하자마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 데 대하여 나로선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정부 수반의 권한은 있을 것인데, 수반의 권한이 이렇게 간단히 뒤집어지는 것을 보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총리의 상대역으로 연극에 출연한 셈이 되는 것이고, 그 뒤로는 좋은 일이 아무것도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곁에서 지켜본 일본 외무부 아시아-대양주(大洋洲) 국장 야부나가 미토지는 이렇게 평했다.
 
  “김정일은 여론이 힘을 쓰는 민주주의 국가에 대하여 혼란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체제의 차이이고,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체제와 그렇지 못한 체제 사이의 이해의 갭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북한정권이 하는 행동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였으니까요.”
 
  미토지 국장의 관찰은 매우 흥미롭다. 북한주민들을, ‘친애하는 지도자를 결사(決死) 옹위하는 총폭탄’ 정도로 취급하는 데 익숙해진 김정일은 몇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정부와 언론이 그렇게 야단을 치는 데 대하여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국가적 존중심을 이해하지 못한 김정일의 패착(敗着)이었다.
 
 
 
김정일,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의 核보유를 지지”  
  고이즈미-김정일의 2차회담이 있었던 2004년 5월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제2차 북핵(北核)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이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을 때였다. NHK가 입수한 회담록에 의하면 김정일은 열변을 토한다. 고이즈미를 앞에 두고 90분 회담의 약 3분의 1을 “왜 우리는 핵을 가질 수밖에 없느냐”라는 설명을 하는 데 썼다.
 
  고이즈미 총리는 “핵을 포기하여 얻는 이득이 핵을 가져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많다. 천지(天地) 차이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그런 경제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핵무기를 가지게 됐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우리를 선제(先制)공격하기 위하여 책상 위를 가득 채울 정도의 계획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로선 기분이 나쁩니다. 상대가 몽둥이로 때리려 하는데 가만히 참고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라크는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희생양이 되었어요. 우리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면 핵무기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겠지요.”
 
  김정일은 또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의 핵보유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에 우리 입장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입장에 동의(同意)하고, 동정하고, 이해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을 대하는 면에선 우리의 선배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방적) 무장해제에 반대했습니다. 우리의 핵보유에 반대하는 것은 미국뿐입니다.”
 
  김정일은 계속하여 독백(獨白) 같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민주국가 지도자들끼리의 회담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 이어졌다.
 
  “미국이,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은 젖혀두고 우리에게 핵무기의 완전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완전폐기는 패전국(敗戰國)에 대해 강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라크와 같은 패전국이 아닙니다.”
 
 
 
“리비아는 미국 시나리오에 이용된 것” 
  고이즈미 총리는 리비아가 그 여섯 달 전에 핵개발 포기를 선언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한 것을 북한이 참고로 해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에 대하여도 김정일은 반발한다.
 
  “내 개인 의견으로는 리비아가 미국이 쓴 시나리오에 따라 연극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만든 게 없으면서 있는 척하여 미국이 세계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데 이용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이즈미는 “김 위원장은 오해하고 있다. 미국은 선제공격 의사가 없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여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낫다”고 말하자 김정일은 본심을 드러냈다.
 
  “문제는 미국이 남조선 일변도의 정책을 쓰면서 그들을 동맹국, 우리를 적(敵)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미국이 진정으로 대국(大國)답게 행동한다면 모든 나라를 평등하게 대하고 우리를 적대시(敵對視)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김정일은 미국과 신뢰가 구축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핵무기를 먼저 폐기할 수 없고, 핵시설을 동결(凍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이즈미는 그런 뜻을 부시 대통령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베이징에서 진행 중이던 6자회담의 역할에 대하여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6자회담에서) 미국과 함께 목이 쉬도록 이중창(二重唱)을 부르고 싶습니다. 다른 네 나라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잘해 주기를 바랍니다. 반주가 잘되면 노래도 잘 나올 것입니다.”
 
  북한 측이 일본인 생존자 다섯 명의 재북(在北) 가족을 돌려보내 주었지만 일본의 가족회와 구출회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집착과 증거주의에 따라 납치된 일본인이 더 있다고 주장하고, 태국과 마카오에서 납치된 인물들을 새로 찾아냈다.
 
  그중엔 김정일의 명령으로 납치된 최은희(崔銀姬)씨가 초대소에서 만났고, 김현희-김숙희씨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준 마카오 여인(孔令·공영앵)도 포함됐다. 김정일은, 10여 개 국가에서 수십 명을 납치해 간 일종의 ‘인종(人種)수집가’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같은 境內에 있었던 김현희-다구치-메구미 
  2004년 11월 일·북 실무자 협의 때 북한 측은 다구치와 메구미가 1981년부터 84년까지 같이 생활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김현희씨가 이은혜(다구치)와 함께 살았다는 그 시기에 다구치는 김현희가 아니라 메구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현희씨가 안기부 수사 때 “1981년 7월 4일부터 1983년 3월까지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이은혜라는 일본인과 같이 기거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진술하였던 것을 부정함으로써 다구치는 이은혜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NHK 인터뷰에서 김현희씨는 “나의 친구 김숙희와 메구미는 (1981년부터 동북리 초대소에 함께 있다가) 1983년에 헤어졌다”고 증언했다. 김현희씨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1981년 4월 17일부터 7월 4일까지 김숙희와 함께 동북리 9호 초대소에서 남한화(南韓化) 교육을 받았다.
 
  7월 4일 김현희와 김숙희는 갈라져 동북리의 각기 다른 초대소로 옮겼다. 김현희씨는 이은혜와 함께 3호 초대소로 갔고, 김숙희는 메구미와 함께 다른 초대소로 갔다. 건물은 다르지만 같은 경내(境內)의 초대소였다. 김현희-다구치조(組)와 김숙희-메구미조는 같은 경내에 있었으므로 서로 왕래하면서 자주 만났음이 확실하다.
 
  일본인 납치문제의 초점이 되어 있는 메구미의 재북생활에 대해 김현희씨가 누구보다도 생생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김숙희를 통하여, 또는 직접 만나서 메구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입이 무겁고 말은 계산적으로, 정확하게 하는 김현희씨는 그 내용을 최근에야 국정원과 일본 경찰에 털어놓았다. 김씨는 메구미 이외의 일본인 납치자, 아마도 북한정권이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납치자들을 이때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김현희와 메구미가 살았던 초대소는 공작원 교육시설이므로 행동에는 제약이 많았겠지만 같은 경내에서 몇 년간 생활하다 보면 편법과 요령이 생기는 것이다. 김현희씨는 이때 목격한 메구미에 대하여 그의 부모를 만나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다는 자세이다.
 
  김현희-다구치-메구미 세 여인은 김정일의 비밀과 약점을 잡고 있다. 다구치는 1982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 만찬에 초대되어 가서 “나처럼 납치되어 온 일본인 부부를 만났다”고 김현희씨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 부부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조사했을 터이지만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11년간 김정일의 일식(日食) 담당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읽어 보면 김정일이 재일동포 출신인 고영희(高英姬·사망)를 부인으로 맞은 이유가 일본식 교양이 몸에 밴 여인들을 좋아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일본 납치자 구출회 회장인 니시오카 쓰도무 씨는 이런 주장을 한다.
 
  <메구미는 1995년부터 2년간, 즉 북한이 죽었다고 발표한 1994년 이후에 김정일의 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정보가 있다. 정철, 정은 두 사람 중 하나인데, 고영희가 김정일에게 끈질기게 간청해 이뤄졌다고 한다. 이것도 메구미를 돌려보낼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이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김정일이 1976년 대남(對南)공작 부서에 교육요원으로 써먹기 위하여 한국인 및 외국인을 납치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기자에게도 비슷한 첩보가 들어오고 있다. “메구미와 다구치 두 여인은 살아 있고, 평양의 초대소에 함께 수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 측은 여러 정보 채널을 통하여 두 사람, 특히 메구미는 죽었다는 소문을 많이 퍼뜨렸다. 북한은 메구미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일본 사회에서 말살해야 구출운동도 약화되고 일·북수교 회담이 진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메구미는 죽었다”는 증명을 끝내 하지 못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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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구미의 부모. 요코다 사키에(어머니)와 요코다 시게루(아버지). |
  북한당국은 그런 목적으로 2006년 6월 28일 금강산에서 기괴한 쇼를 연출했다. 북한정권은 한국에서 납치해 간 고교생 김영남을 김철준으로 개명(改名)시켜, 간첩교육에 써먹다가 메구미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기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납치된 것이 아니라 표류 중 북한 측에 구출됐다고 억지를 부리더니 메구미가 죽었다고 역설(力說)했다.
 
  그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메구미가 자살을 여러 번 기도했다”면서, “어릴 때 사고를 만나 머리에 심한 손상을 입어 두통이 심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 이 장면을 본 메구미의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 여사는 “어릴 때 계단에서 떨어진 적은 있으나 아무런 후유증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영남은 4년 전 메구미의 부모 앞으로 편지를 쓸 때는 아내가 1993년에 죽었다고 했는데, 이날 회견장에 나와선 북한정권이 써 준 시나리오대로 1994년에 죽었다고 말했다.
 
  북한정권은 지난 8년간 메구미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해 왔으나 그때마다 거짓말로 밝혀졌다. 메구미의 삶의 조건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죽었다”는 증명을 하는 데 실패했다면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
 
  2004년 11월 일·북 실무협의 때 북한 측은 메구미가 납치된 후 찍은 사진 석 장을 일본에 전달했다.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 씨는 울먹이면서 “어른이 된 뒤 찍은 두 장은 차분한 모습인데, 납치 직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은 너무 슬픈 표정이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가 찾아다니던 그 메구미의 얼굴입니다. 애원하는 눈, 적막(寂寞)한 눈으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묻는 듯 여기를 보고 있네요. 나는 무심코 그 사진 위에 손을 얹고 ‘메구미야, 네가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구나’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김현희씨는 메구미의 가명이 ‘김옥희’였다고 기억한다. 김현희는 공작원이 되면서 이름이 ‘김옥화’로 변했다. 김현희씨는 작년 인터뷰 때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공작원 지도원이 ‘얌전한 숙희가 얌전한 일본 아이(메구미)와 생활하니 더 얌전해졌다. 공작원은 활발해야 하는데, 숙희를 이은혜와 배합시킬 걸 잘못했다’고 말했어요.”
 
  작년 5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 내 공회당에서 열린 ‘납치피해자의 조기(早期) 구출을 요구하는 국민 대집회’에서 요코다 사키에 씨가 연설했다.
 
  “내 딸이 중학생 때 납치되었는데, 김현희씨의 최근 증언에 의하면 동료 공작원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나는 그 아이를 기를 때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할아버지의 짐을 들어 주고 받은 사과를 가져와선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하고 난처해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가 공작원을 양성하는, 무서운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니, 정말 원통합니다.”
 
 
 
김현희가 살았으니 김정일은 죽을 차례 
  김현희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음독자살 기도(企圖)에 실패해 살아남은 것은 KAL기 폭파 지령자 김정일에게는 기나긴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김현희의 증언에 의하여 김정일은 폭파 지령자로 밝혀지고, 북한정권은 테러국가로 규정되어 국제제재를 받게 됐다. 그가 동족(同族)을 떼죽음시켜 방해하려 하였던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한국 정부는 이 성공을 북방정책으로 연장시켜 중국 및 소련과 수교, 북한정권을 배후에서 고립시켰다. 서울올림픽에 대응하여 북한이 주최한 ‘세계청년축전’에 투입한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는 북한경제를 더욱 멍들게 했다.
 
  김현희의 이은혜 관련 증언은 일본에서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고, 임박하였던 일·북수교를 저지해 100억 달러의 경제지원 약속도 성사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북 경제제재를 불렀다. 북한정권의 만행에 대한 일본인의 분노로 조총련이 궤멸상태에 들어갔다. 조총련이 그동안 북한으로 보내던 연 10억 달러의 돈줄도 막혔다. 김현희의 증언이 김정일에게 가한 금전적 타격은 200억 달러를 넘을 것이다.
 
  김현희씨는 작년 기자에게 이런 무서운 말을 했다.
 
  “공작이란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항공기 폭파엔 성공하였으나 신원이 들통났기에 책임을 지고 독약 앰풀을 깨물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가 타의(他意)에 의하여 살아났습니다. 저를 가짜로 몰려는 공작이 실패하였으니 그들도 독약을 깨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 외교관의 김현희 飮毒 목격기 
  2001년 가을부터 김현희씨를 가짜로 몰기 시작한 세력들은 그가 바레인 공항에서 독약 앰풀을 깨물고 자살하려 했던 일까지도 ‘음독(飮毒) 쇼’의 의혹이 있다고 트집을 잡았다. “왜 그때 죽지 않고 살아서 북한정권을 괴롭히느냐”는 원망이 서린 억지였다.
 
  김현희씨는 당시 경찰관들이 둘러서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으려고 끈질긴 노력을 했다. 독약 앰풀은 가방 안에 있는 말보로 담뱃갑 속의 담배개비 안에 들어 있었다.
 
  김씨는 곁에 앉은 김승일이 건네준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우면서 신호를 기다렸다. 김승일이 “나는 살 만큼 살았지만 마유미 씨(김현희의 일본인 위장 이름)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자 이를 신호로 해석한 김씨는 가방 속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려 했다.
 
  이때 경찰관이 가방을 달라고 했다. 김현희씨는 담뱃갑만 챙기고 가방을 건네주었다. 경찰관은 담뱃갑도 달라고 했다. 독약이 든 담배개비를 꺼내고 담뱃갑을 건네주자 경찰관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김현희가 김승일의 행동과 타이밍을 맞추려고 주저하는 사이 경찰관이 담배개비를 빼앗으려 했다. 이때 김현희씨는 경찰관의 손에서 담배개비를 낚아채어 독약 앰풀이 들어 있는 부분을 깨무는 순간 경찰관이 덮쳤다. 앰풀의 앞이 터지면서 기화된 청산성분이 김현희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김승일은 앰풀을 와작와작 깨물고 들이마셨다.
 
  실신한 김현희를 관찰한 사람이 있다. 바레인 주재 일본 대사관의 사무관 스나카와 쇼준(砂天昌順) 씨였다. 그는 2003년에 출판된 <극비지령>이란 수기(手記)에서 이렇게 적었다.
 
  <신이치(김승일)와 마유미는 격렬한 발작 상태에서 전신(全身)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였다. 몸의 모든 근육의 말단까지 경련 상태였다. 마유미의 몸이 더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이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오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입은 조금 열려 있었다. 입의 왼쪽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고 피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신이치의 경련이 심해지고 마유미는 조용해졌다.>
 
 
 
정부, 김현희의 방일활동에 제동 
  이때 김현희마저 죽었더라면 KAL기 폭파사건은 남북한 좌익들의 선동에 의하여 일본인 남녀가 일으킨 사건이라든지, 안기부가 저지른 사건으로 각색되어 한국 정부를 괴롭혔을 것이다. 김현희가 음독하고도 살아났으므로 다음은 김정일이 죽을 차례이고 그 긴 죽음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부터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 김현희에 의하여 진실게임은 이제 제3라운드로 돌입했다. 김현희는 더 날카로워진 진실의 비수(匕首)를 김정일의 가슴에 겨누고 있다.
 
  문제는 김현희 관련 정부부처의 행태이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판단했음인지 김현희씨가 하고 싶어하는 방일(訪日) 활동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다.
 
  좌파정권 10년간 김현희씨가 입을 열 수 없게 됨으로써 득을 본 것은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지령한 목적은 대남적화를 위한 공작에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 납치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대신하여 희생된 면이 있다.
 
  일본에서 납치 피해자 구출운동을 펼치는 이들은 우파인데, 이들은 이 운동을 통하여 북한정권의 악마성을 절감(切感)하고는 “한국의 자유통일을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납치피해자 구출운동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김현희씨는 한국의 반공(反共)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일본의 친한(親韓)세력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이기도 하다. 원한 맺힌 세 여인-김현희, 다구치, 메구미는 김정일이 살아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진실의 덫’을 친 셈이다. 북한정권의 기반은 거짓과 핵무기인데, 진실이 그 기반을 허물 때 북핵, 종북(從北), 납치자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