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인터뷰/‘不敗의 名將’ 李秉衡 예비역 중장
6·25 때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名將, 자주국방 위한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자, 인민군의 휴전선 도발에 155mm 포 400발을 퍼부은 배짱, 전쟁기념관의 건설자, ‘한국의 클라우제비츠’로 불리는 名著 ‘대대장’의 著者, 그의 전쟁과 인간과 국가, 지휘관과 부하와 전우애에 대한 20시간 대토로!
적을 눈앞에 두고도 전쟁을 잊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한국인에게 드리는 老兵의 苦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국민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는 지도자가 과연 있는가”
●“한국적 리더십의 본질은 同苦同樂, 솔선수범”
●“군사력은 민족의 비극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
●“武士가 세운 국가는 선진국이 됐고 선비가 통치한 나라는 식민지가 됐다”
●“군대가 약해지면 국민은 中立이 된다”
●“6·25 때 인민군은 타도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가간의 우열은 엘리트간의 우열”
●“朴대통령은 인민군의 도발에 보복을 철저히 했다”
●朴대통령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
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不敗의 신화 창조한 6·25의 전쟁 英雄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클라우제비츠가 있다면 한국에는 李秉衡 장군이 있다.”
6·25의 전쟁영웅 李秉衡 예비역 육군중장(70). 대한민국의 수많은 군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李장군을 軍 사회에서는 군사전략분야의 名著 ‘戰爭論’의 著者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926년 함북 북청 출신의 李장군은 1947년 陸士(4기)를 졸업하고 6·25 때 용맹을 떨쳤던 수도사단 18연대(백골부대)의 연대부관, 18연대 1大隊長, 보병 제8연대장으로 參戰하여 不敗의 신화를 창조한 名將이다. 전쟁 후엔 제1사단장, 5군단장, 합참본부장, 제2군사령관 등을 지내며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진 방위산업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976년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軍門을 떠난 李장군은 전쟁기념사업 회장을 역임하며 용산 전쟁기념관 설립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념관 개관을 3개월여 앞두고 은퇴한 뒤 현재는 분당의 아들집과 주문진 사이를 오가며 老後생활을 즐기고 있다.
李장군은 예편 후 자신의 전쟁 체험기인 ‘大隊長’을 집필하여 후배들에게 선사했는데, 이 著書는 오늘날 대한민국 장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 됐다고 한다. 최근에는 ‘大隊長’에 다 쓰지 못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새 저서의 출간을 준비중이다.
이러한 몇 줄의 履歷으로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李장군이 살고 있는 강원도 주문진의 주공 아파트를 찾았다.
李장군을 처음 대한 순간, 마치 泰山이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듯한 강인한 인상을 받았다. 그 강인함은 넉넉한 미소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느릿느릿한 말투,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 신념에 찬 의지로 더욱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李장군은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용케 살아남은 행운아였다. 그는 6·25라는 역사적 사실은 처참한 동족상잔의 悲劇이었지만, 그러한 悲劇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은 모든 권력과 제도의 파괴
―우리 사회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줄고 있고, 사회 분위기도 전쟁은 남의 일처럼 여기며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쟁은 모든 권력과 제도의 파괴이자 역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전쟁을 학술적으로 풀이하여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합니다만, 이런 해석으론 무자비한 파괴와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전쟁을 ‘정치의 表裏’라고 이해합니다.”
―李장군께서 쓰신 ‘大隊長’이란 저서를 보니 6·25는 동족상쟁의 비극이 틀림없지만 우리 민족이 1천3백여 년 만에 재무장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百萬大軍을 지휘 운용할 만한 위대한 군인들을 탄생시켰다고 썼던데요.
“군사력은 민족의 비극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6·25를 통해 국가의 자존을 위해서는 맨주먹으로라도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배우게 됐고, 또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죠. 또 정치지도자와 군사 지도자, 즉 우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위험의 선두에 서서 국민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고 봅니다.”
―李장군께서는 우리나라가 文武의 불균형으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亡國의 비운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金泳三 정부 출범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文民’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데요. 이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軍 출신들은 ‘文民’이란 말에 저항감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그 말속에 軍이 惡役을 담당했다는 의미가 깔려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文民정부 출범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文武兼全, 즉 文과 武의 조화가 국가 구성의 궁극적 이상이라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文民’이란 용어가 文에 대한 우월의식을 강조하지는 않을지, 또 군사문화를 청산한다면서 尙武정신을 업신여겨 새로운 형태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요.
“오늘날 선진국은 文武를 잘 조화시켜 국가를 운영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사관학교 출신은 5년간 의무 복무하고 제대 후 공무원으로 임용하기 때문에 고급 공무원 중에는 사관학교 출신이 상당수라고 하더군요. 나폴레옹이나 드골,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과 같은 엘리트를 수없이 배출한 파리理工大는 원래 육군포병 학교였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이 학교는 현역 육군 소장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政府는 군대 조직의 확대판입니다. 선진국은 군인들이 몇백 년 통치하며 軍 조직과 행정조직을 일치시켜오다가 현대에 이르러 정부와 군으로 분리된 겁니다.”
공업생산력만으로는 선진국 불가능
―우리처럼 군사문화와 文民문화를 분리하고, 또 군사문화의 폐단을 지적하며 文民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의식은 어디서 연유한다고 보십니까.
“국민정신의 중요한 덕목인 騎士道, 즉 애국·충성·복종·희생·책임·용기라는 정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물질적 풍요나 공업생산력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騎士道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이 있어야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우리보다 오랜 전통과 국민정신으로 무장된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애국·충성·복종·희생·책임·용기로 상징되는 군사문화는 매우 소중한 덕목입니다.”
李장군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는 武士통치(騎士통치) 형태와 文民통치 형태가 있었다며 그 통치형태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武士통치로 역사발전을 경험한 나라는 왕 자신이 騎士이며, 국가 지도부도 騎士로 구성됩니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고, 선비들로 지도부를 형성한 文民통치국은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며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기 이전 시대에는 ‘大地에서의 수확’이 경제활동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大地의 생산은 늘 부족했고, 경작 가능한 大地도 한정되어 이 시대엔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이 경제 활성화와 富國强兵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전쟁은 국가의 생존을 담보한 제로섬 게임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과학적 연구’와 ‘국민의식교육’이라는 두 가지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의 발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한 결과입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도 敵時에 물자와 병력 수송을 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이 산업분야에 활용되어 오늘과 같은 고도 산업사회의 원동력이 된 거죠.
또,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尙武정신의 강화를 위해 꾸준히 국민의식교육을 시킵니다. 무사통치국가의 근본이념은 騎士道입니다. 그것은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며,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大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임무에 책임을 다하고, 용기를 세우는 오늘날 우리의 군인정신과 같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花郞이라는 騎士道 집단과 그 정신적 이념이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멸하면서 文武兼全의 틀이 무너지고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文을 숭상하는 문화가 지배했다고 보는데요.
“그렇습니다. 신라는 중국의 힘을 빌어 통일을 했고, 東夷에게 생존을 위협받았던 중국은 우리에게 과거제도라는 文民통치의 틀을 요구하면서 尙武정신이 퇴색해 갔습니다. 선진국은 武士통치를 경험하며 전쟁을 현실로 인식하고 과학기술과 정신문화를 꽃피웠지만, 우리는 文民통치구조를 이어오며 전쟁을 두려워하고 국민정신은 나약해졌습니다. 전쟁이라는 사생결단의 현실을 회피한 채 비 오면 농사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만 바라보는 소극적인 의식에 젖게 된 겁니다.
또, 武士통치국은 국가운영구조가 지방분권적인 장원문화이고 文民통치국은 중앙집권 문화입니다. 武士통치국은 전쟁으로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영주에게 영토와 농민을 분배합니다. 그 대가로 평시와 전쟁시 물자와 병력동원의 의무를 부과하죠. 영토와 농민은 영주의 소유로서 세습되기 때문에 수탈이나 부정부패가 구조적으로 줄게 됩니다.
文民통치국은 행정구역별로 지방을 분할한 후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합니다. 관리는 한 지역에서 2~3년 정도 순환근무를 하므로 지역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부정부패의 구조적 모순이 오늘까지 반복되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알력과 불신이 이어져 온 겁니다.”
軍복무는 騎士道 함양의 교육장
―騎士道가 오늘날의 군인정신과 같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군 복무는 ‘尙武정신 함양과 騎士道 정신의 교육장’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軍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騎士道와 같은 군인정신을 철저히 가르쳐 사회에 내보냈기 때문에 국가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 싱가포르의 李光耀 수상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중동 사막에서 일하는 한국 청년들을 칭찬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사막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을 보면서 李수상은 ‘한국 근로자의 강인한 정신은 軍이라는 특수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라며 부러워하더군요.
희망이 없으면 생존도 없습니다. 승리하는 역사만이 생존을 담보합니다. 우리는 군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는 정신교육을 시켰고, 월남전을 통해 그러한 가치관을 직접 체험시켰습니다. 그것이 자원과 기술의 不毛地에서 오늘과 같은 경제의 약진을 가져온 원동력이 된 겁니다.”
―군사문화에 대한 비판을 ‘권위주의의 타파’라는 측면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부모가 자식을 죽인 패륜사건을 언론은 ‘30년 군사문화의 惡習’으로 보도했더군요. 저는 권위주의가 왜 지탄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人間事에서 권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매우 실망스러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상하관계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상호간에 아무 제약이나 통제가 없는 원시사회를 지향하자는 뜻인지…”
―젊은이들 사이에 현역 입영은 ‘어둠의 자식’, 방위 입영은 ‘장군의 아들’, 병역 면제는 ‘神의 아들’이라는 寓話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군복무 기피현상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 원인과 치유방법을 국가 차원에서 연구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원래 군대란 한 나라의 지도급 인사나 지배세력을 주축으로 조직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선진국은 대부분 그러한 역사과정을 겪어왔습니다. 프랑스는 軍 경험이 없는 인사는 대통령 출마자격을 제한하는 전통이 있다고 하더군요.
현역시절 저와 교분이 있던 모간 駐韓 美 해군사령관은 유명한 금융회사인 모간그룹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하버드大 재학시절 ‘海士에 입교하라’는 집안의 결정에 따라 사관학교에 입교했어요. 오늘날 미국 지배 계급은 모두 軍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사들입니다. 그 집안의 자제들이 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제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회의 지도급 인사로 성장한 것이죠.
우리 현실은 지도자 그룹일수록 군 입대를 기피하는 풍조가 역력합니다. 6·25 때 전선에서 싸운 것은 越南者와 길거리에서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온 힘없는 서민의 아들, 일부 학도병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面長만 지내도 그 아들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징집면제를 받게 만든 것이 현실이었으니까요.”
李장군은 정치인들이 군복무를 기피하고 타락하면 국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6·25를 경험한 국민들의 사회심리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데올로기보다는 南과 北 어느 쪽이 힘이 센가에 관심이 큽니다. 6·25 때 정부는 국민을 팽개친 채 혼자서만 도망가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목숨이 달아난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요. 우리가 북한과의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이긴다는 보장이 있어야 국민은 정부를 신뢰합니다. 국가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정치인이나 국가 지도자들 중에는 兵役의 의무를 필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軍 경험이 왜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軍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릅니다. 인간은 위기에 닥쳤을 때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군사적 판단을 해야 할 때 軍 경험이 없는 국군통수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軍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 지도부를 구성할 때 국가안보에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됩니다.”
愛國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
李장군은 軍 경험이 없는 기업인이나 정치인, 언론인, 대학교수 등은 육군대학이나 국방대학원 과정을 이수시켜 軍의 본질을 이해하고, 국가이익과 안전보장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삼는 자세를 길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애국·충성·복종·희생·책임·용기라는 군인정신의 궁극적인 지향은 ‘국가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 즉 愛國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드문데요.
“愛國이란 국가의 주체인 국민, 즉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이 땅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애국이라고 할 수 있죠.
선진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국가관과 전쟁관을 길러왔습니다. 전투에서 부상한 戰友를 살리기 위해 업고, 메고 死地를 탈출하면서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우정과 우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남의 자식이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배워온 겁니다. 우리는 이런 국민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행착오에 직면해 있는 겁니다.”
李장군은 武士통치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쳐온 선진국들과 경쟁하려면 정신력 강화를 위한 국민정신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국민을 산업 노동자와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수준을 騎士道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明治維新 지도부는 사무라이 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의 근대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국민정신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사범학교를 세워 사무라이를 교사로 양성해 평민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日帝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교단에 선 이유는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죠.”
李장군은 우리 국가 지도부는 평민을 兩班으로 끌어 올리는 정신교육을 시도할 의욕도 능력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평민을 양반화하는 노력이 없는 상황에서 日帝 식민지 생활을 했고, 해방이 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국민정신교육이 全無했다는 지적이다.
“전쟁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逸話입니다. 6·25의 재조명을 위해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참전국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전쟁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윌리엄스 교수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더군요. 미국의 전쟁문학 작품은 어떤 전투를 막론하고 영웅을 설정하여 그의 활약과 교훈을 전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쟁문학을 분석해보니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놀랐다고 하더군요. 전쟁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고생했고, 고통을 받았으며 비참했는가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전쟁을 개인적인 고통으로 혐오하는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평민을 양반화하는 국가관 교육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전쟁을 통한 승리의 결과
―국제관계에서 모든 사고방식은 국가이익으로 귀결됩니다. 또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승리의 결과’라고 합니다. 전쟁과 평화, 이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느 일본인이 ‘한국은 敵을 눈앞에 두고 平和病에 걸려 있다’고 쓴 칼럼을 본 일이 있습니다. 국제관계는 군사력이 없으면 존재를 인정받기 힘듭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만 평화애호를 주장하면 주변국에게 ‘우리는 힘이 없다’고 항복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죠.
국가정책의 목표를 ‘평화’에 두면 전쟁을 부정하고 軍備를 축소하며, 자주국방의 기틀인 방위산업을 등한시 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자위적 목적에서 전쟁도 하고 침략도 해본 경험이 있어야 살벌한 국제무대의 현실을 이해할텐데,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오직 평화만이 ‘절대 善’이라며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겁니다.”
李장군은 2천년 전 自主國防을 통해 국가의 위엄과 개인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荀悅(중국 後漢 말기 曹操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강의한 학자)의 정치철학에 감동한다고 했다.
“荀悅은 정치지도자는 네 가지 憂患이 되는 일을 하지 말며, 다섯 가지의 뜻을 세우라는 정치철학을 설파했습니다. 憂患이 되는 네 가지 일은 위선적인 정치를 하지 말라, 私慾을 위한 정치를 하지 말라, 교만하고 방종한 정치를 하지 말라, 사치를 조장하는 정치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섯 가지 뜻을 세워야 할 요소는 백성을 배불리 먹여 살리며, 군주가 모범을 보여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 교육을 통해 국민수준을 높이며, 자주국장을 통해 개인의 위신과 국가의 위엄을 높이고, 信賞必罰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하라는 뜻이죠. 우리 국가 지도부가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李장군은 오늘과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중국 경제가 선진국의 기득권을 위협할 때 그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기성 경제대국이 신흥공업국을 상대로 집단린치를 가한 것 이었다고 해석한다.
“만약 美日간에 제2차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거나, 美中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어느 한 편에 가담해야 합니다. 국가안보 개념이 의심스러운 우리 정치인들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전투에서 승리하는 비결과 지휘관의 역할>
韓日合邦은 싸우지 않고 전쟁에서 패한 결과
‘국가의 힘을 조직화한 군사력은 민족 역사의 비극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고, 따라서 군사 지도자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자주독립은 국가안전보장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한 사실은 국가란 전쟁이라는 인간투쟁의 소산이고, 멸망이란 또한 전쟁의 결과에 연유된다는 사실이다’(李秉衡 著 ‘大隊長’)
―전쟁이란 끝없는 전투의 연속으로 이해됩니다. 李장군께서는 저서 ‘大隊長’에서 ‘전투는 행군의 끝이며, 행군은 전투를 위한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전투를 해본 경험을 소개해 주십시오.
“전투란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리다가 정면충돌할 때의 섬뜩함이랄까요. 아니면 거대한 댐이 무너져 해일과 같이 쏟아져 오는 물길 앞에 선 느낌입니다. 전투는 극한과 비관만이 존재하고 낙관과 유리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勝戰이란 극한과 비관 속에서 열심히 싸우다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孫子는 승산없는 싸움은 하지 말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두 가지 원칙으로 兵法을 주장했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전쟁은 할 필요가 없는 거죠. 韓日合邦 이전에 우리는 군사가 7천 명 정도였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백만 대군이 근대무기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孫子兵法으로 해석하면 우린 전쟁을 해보지도 않고 패하여 국민이 노예로 전락한 거죠.”
―우리 학계에서는 6·25의 성격에 대해 전통주의, 수정주의가 거론되더니 최근에는 內因論, 外因論, 南侵유도설 등 수많은 이론적 근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아픈 기억’이라는 6·25 포스터를 만들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고, 6·25를 同族간의 명분없는 전쟁이라고 해석한 장관도 있었는데요.
“일부 지식인이나 진보적 인사들은 전쟁을 너무나 감상적으로 해석하는데요. 6·25를 同族간의 명분없는 전쟁으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은 국민에 대한 정신적 무장해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戰線에서 인민군과 부닥쳤을 때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한 적은 없었는지요.
“인민군은 타도해야 할 敵이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낭만적이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80~90% 정도가 민족간의 內戰이었고, 나머지가 異民族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일본도 몇백 년간 섬에 갇혀 민족간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오늘에 국가를 건설한 겁니다.”
‘못배운 사람이 용감하다’는 말은 허구: 제대로 교육받은 병사가 용감했다
―전쟁터는 인간 本性의 적나라한 모습이 표출되는 곳으로 상상됩니다. 실제로 전투에 돌입하면 어떤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웁니까.
“저는 전투경험을 통해 적나라한 인간본성을 관찰하면서 그동안 알려진 풍문과 달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체험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염치가 없고 자기 가족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야간방어전투에서 陣地가 돌파당하는 이유는 대부분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의 진지이탈 때문입니다. 진지를 이탈한 병사들은 전선 후방의 취사장이나 박격포 진지 등 불꽃이 보이는 곳으로 모입니다. 후방을 책임진 장교들은 이곳에서 진지이탈자들을 모아 주의를 주고 교육시켜 원대복귀시킵니다.”
李장군은 전투에서 용감한 군인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극한상황에 처해도 ‘敵에게 끝까지 타격을 가한다’는 신념으로 용감하게 싸운다는 것이다.
반면에 부정적 사고를 가진 군인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철수나 후퇴를 염두에 둔다고 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지휘하는 부대는 정신력이 허약해지고 매 전투마다 소극적으로 대응해 패배하게 된다는 것이 李장군의 설명이었다.
―李장군께서는 전쟁을 ‘극심한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남북간에 위기감이 돌면 싸울 생각은 뒷전인채 라면이 동이 나고 생필품 사재기 경쟁을 벌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중국 春秋전국시대의 吳起라는 병법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德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德의 첫째 요소는 道, 즉 전쟁수행이나 국가운영에 있어 원칙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義로서 大義名分에 따라 정의로운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禮, 전쟁이나 정치에서 비굴하거나 교활한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은 仁, 즉 중요사를 독선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죠. 지도자가 이러한 德을 갖추고 전쟁에 대비하면 나라가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며,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政府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
―李장군의 저서 ‘大隊長’에서 6·25 첫날 전투를 위한 작전지도 한 장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무방비 상태에서 어떻게 전쟁을 했는지 상상이 안갑니다.
“吳起는 將帥의 자격이나 처신을 설명한 ‘將帥論’에서 전쟁을 위한 군사행동을 하기 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부하들에게 임무와 목적을 이해시켜 일치된 마음으로 행동하라고 했습니다. 毛澤東도 ‘준비가 되지 않은 전투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어요. 6·25는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었습니다. 그 때는 정치가나 군인, 국민들이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혼란의 연속이었죠. 그러다보니 정부가 국민을 버린 결과가 되어 오늘까지 정부와 국민간에 보이지 않는 불신감을 조장하고 있는 겁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그 의무를 포기한 채 혼자서만 도망쳤기 때문에 가족이 학살당하고 拉北당한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무엇하는 존재인가를 의심하는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은 이 사실을 각성해야 합니다.”
―李장군께서는 지휘관의 중요성을 누누이 역설했습니다. 지휘관의 덕목이나 판단능력, 역량은 군대조직 뿐만 아니라 사회조직에서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는데요. 지휘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휘관은 임무와 목적을 제시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임무와 목적을 성공적으로 완수시켜야 하는 책임을 진 사람입니다. 毛澤東은 ‘幹部정책’을 통해 군 간부의 덕목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간부는 간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간부는 즉각적인 투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셋째 국가가 간부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중에서 간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많은 사람 중에서 간부가 될 사람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요한 일을 맡기는 일이 간부의 중요한 자질이라는 겁니다.”
지휘관의 솔선수범이 한국적 지휘 통솔의 비결
―전투지휘를 하면서 한국인의 心性이랄까, 성격상의 특징같은 것을 느끼셨을텐데요.
“우리 민족을 흔히 ‘恨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저는 恨이라는 것은 매우 우수한 자질을 가진 국민이 통치자들의 잘못된 지도로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데서 온 의식구조라고 봅니다. 우리 국민은 恨으로 똘똘 뭉쳐서 그런지 心性이 대단히 감상적이고 예민합니다. 이들을 원활하게 지휘 통솔하려면 지휘관이 병사들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죽는다는 각오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적 지휘통솔의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희생적 사고가 없으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로서의 우열은 知的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기가 맡은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희생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李장군은 지휘관의 리더십과 희생정신을 감동적으로 체험한 사례를 소개했다.
李秉衡 대위가 지휘하던 18연대 1대대가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서 방어 작전을 펴던 1951년 1월 초의 일이다. 인민군 10사단이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월정사 부근으로 철수하다가 1대대의 기습을 받았다. 李장군의 저서 ‘大隊長’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민군 포로에게 “너의 사단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단장을 이미 통과했다고 한다. 나는 혼잣말로 “그놈을 잡았어야 하는 것을” 하고 독백했는데, 그 포로는 “우리는 죽어도 사단장 동무는 살아야 합니다”하는 것이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다그치자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 포로의 대답은 자기들이 대구 팔공산에서 보급이 두절되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는데, 자기들은 하루 두끼씩은 겨우겨우 식사를 했지만 사단장은 거의 먹지 않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들은 죽어도 좋지만 사단장은 살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이유인 듯싶었다.’
―지도자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대결입니다. 미국의 천재학자 J 바담은 ‘국가간의 능력의 우열은 그 나라 엘리트들의 능력의 우열’라고 설명했어요. 국가가 엘리트를 길러내는 과정,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과정, 능력발휘에 관한 방법의 차이가 곧 국가능력의 차이이며,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뜻이죠. 국가를 지도하는 엘리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으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들의 책임이기도 하죠.”
부하에게 생명을 주면 부하들이 한없이 용감해진다
―李장군께서 저서를 통해 大隊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투부대 중에서 대대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大隊는 전술단위 부대로서 공격이나 방어, 행군시 언제나 한 팀이 되어 행동합니다. 연대장이나 사단장은 대대의 전투부대와 함께 행동하기 어렵습니다. 지휘폭이 넓고 전투부대의 4~8km 후방에 지휘본부가 위치하기 때문이죠. 반면에 大隊長은 병사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최대의 전투단위입니다. 전선에 배치된 각 대대의 승리는 곧 상급부대의 전술적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大隊의 역할과 임무가 매우 중요합니다.”
―李장군은 6·25의 전쟁영웅으로서 大隊단위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神話의 주인공인데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대도 전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고군분투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 해도 수백회의 전투를 한번의 판단 실수도 없이 승리로 이끈 사실을 단순히 운으로 돌리는 것은 겸손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가 소속됐던 수도사단 18연대는 6·25 전쟁 전에 웅진에 주둔하며 전투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백골부대’라는 명칭을 얻게 되어 대단한 긍지로 여겼습니다. 新兵들도 이틀만 지나면 고참병과 같은 긍지로 임무를 수행해 준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백골부대’의 元祖였던 수도사단 18연대는 50년 12월,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며 3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대신 3사단 26연대가 수도사단으로 배속됐다. 현재는 3사단이 백골부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병법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없다고 합니다. 李장군의 전투경험으로 볼 때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부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최상의 비결이더군요. 지휘관이 부하를 위해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부하들이 이해하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활기차고, 용맹해지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지휘관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더군요.
행군 도중에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을 때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나가려면 병사들이 먼저 뛰어가 처리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지휘관이 부하를 위해 목숨을 걸면 부대는 엄청난 사기와 위력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병사들이 흔쾌히 죽음의 언덕으로 돌진해 가는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백골부대 不敗신화의 원동력
―백골부대도 구성원이 다른 부대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요. 오직 백골부대만이 그런 명예나 긍지를 이어온 원천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백골부대는 후에 국방부 장관을 지내신 任忠植 장군이 지휘한 연대였습니다. 그 분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지휘관으로서 큰 德性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부대원의 선두에서 모범을 보였고, 작전운영계획을 잘 세운 덕에 天下無敵 백골부대의 명예와 전통이 생긴 겁니다.”
―부대의 전통이나 기강이 서 있으면 新兵들도 그 전통에 쉽게 동화가 되는지요.
“명예와 긍지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敵이 만들어줍니다. 전투 중에 잡은 포로를 심문하면 ‘백골부대를 만나면 겁을 집어먹어 능력발휘를 못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병사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용기백배하고 백골부대의 긍지와 자부심이 강해지더군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戰場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텐데요.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임무수행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려면 임무에 대한 책임감을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백골부대라는 특수한 부대를 지휘하면서 늘 유리한 전투를 해 왔기 때문에 병사들이나 지휘관도 늘 전투에 자신이 있고, 패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의 속성을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그 본질은 파괴와 살륙입니다. 병사들이 적과 부딪쳤을 때 무시무시한 파괴와 살륙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병들뿐이 아니라 일반국민들에게 전쟁의 大義名分, 즉 왜 우리가 전쟁을 해야 하며 꼭 승리해야 하는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라는 과격한 정치적 현실의 명분을 이해시켜야 고통과 죽음을 이겨내는 정신력이 생깁니다. 그러한 명분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전쟁의 공포와 고통과 죽음을 고민하고, 그 결과는 戰力의 약화로 어어집니다.”
軍 통수권을 무시하면 국가安保가 위태로워진다
―전투의 양상은 공격과 방어라고 합니다. 경험상으로 볼 때 공격과 방어 중 어떤 상황이 더 싸우기 편하다고 보십니까.
“같은 전투라도 방어할 때가 긴장감이 더합니다. 방어진지를 형성한곳에 적이 접근하면 공포심이랄까 긴장감이 극도로 증대됩니다. 막상 총격전이 벌어지면 그러한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공격할 때는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아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공포감이 거의 없더군요.”
―전투부대가 공격과 방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병사들이 명령받은 대로 움직여주는 겁니다. 실제 전투에 임하면 병사들이 지휘관이 원하는 대로 원활하게 움직여집니까.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군대가 아니죠. 그것은 평소의 훈련을 통해 연마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서 분대장에 이르기까지 통수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평시에도 군 통수권에 해가 되는 군 지휘관 인사나 상벌조치는 신중해야 합니다.”
―金泳三 정부 출범과 더불어 육군참모총장이 전격 해임되고 최고 지휘관들이 司正의 명목으로 호된 여론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2차대전의 영웅 롬멜은 히틀러 암살의 주모자였습니다. 히틀러는 롬멜의 범행을 알고도 그를 즉각 체포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스스로 자결할 것인가, 아니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인가를 결정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롬멜은 자결을 택했고, 히틀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군대의 통수권에 영향을 미치면 국가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어요. 軍 지휘관의 통수권이란 안보를 책임지는 조직을 맡기고 국가가 절대적인 위엄과 위신을 특별히 부여한 겁니다. 만약 통수권 계통에 있는 군 지휘관들의 위엄을 훼손시키면 유사시 그들이 부하를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군통수권을 신성시하는 이유죠. 金泳三 정부 출범 초기 군의 최고 지휘관들을 비리혐의로 몰아 여론재판을 한 것은 통치권에 대한 인식부족, 국정운영 경험부족이었다고 봅니다.”
―陸士 8기들이 펴낸 ‘老兵들의 증언’이란 책에는 6·25 전투과정에서 장교들의 즉결처분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즉결처분이 꼭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즉결처분은 우리 군에만 있는 제도는 아닙니다. 인민군은 다반사로 즉결처분을 행했어요. 2차대전 때 유럽 각국도 즉결처분을 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약식 재판과정을 거친 후 즉결처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결처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즉결처분을 해도 통솔이 어려운 부대가 있습니다. 결국 즉결처분이란 지휘통솔상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죠.”
宋堯讚 장군과의 인연
李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가신 宋堯讚 장군이 즉결처분 문제로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됐을 때 宋장군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宋장군에게 즉결처분 당한 17연대 大隊長은 비상식적인 작전지휘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피해를 입은 인접부대 지휘관들이 문제를 제기하여 즉결처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宋堯讚 장군은 지휘관으로서는 상당히 엄격하고 어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李장군은 6·25 당시 宋장군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어 18연대 1대대는 경주 인근의 형산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인민군은 형산강 너머 형제봉 8부능선에서 강력하게 저항했어요. 宋堯讚 사단장은 주간渡河를 하여 형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연대에서는 피해가 막심할 것 같아 사단장이 직접 주간渡河를 지휘해 달라고 꾀를 냈죠.”
李장군의 저서 ‘大隊長’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단장께서(宋堯讚) 직접 연대 관측소를 방문하고 재도하를 시도하라는 현지명령에 의해 우선 1개분대를 도하부대로 선정했다…. 도하부대는 용감하게 하천에 뛰어 들었다. 도하중인 병사들은 목까지 물에 잠겨 뛸 수도 없었고 장비와 탄약 등은 그들의 행동을 더욱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300고지에서 하향사격을 맹렬히 가하는 적의 소화기들은 도하부대의 지근거리에 소나기와 같은 물방울을 형성하면서 집중되었다. 수중에서 검게 보이는 철모가 하나 둘씩 물속에 잠기더니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 말없이 이 훈련아닌 實戰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단장은 주간도하를 중지하고 야간에 실시할 것을 즉석에서 결정하고 연대 관측소를 떠났다.’
―‘大隊長’이란 책을 보면 포로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전쟁터에서 생포한 포로를 합리적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까.
“부하들에게 제네바 협정을 교육시키지만 막상 전투에서 부하나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면 동물적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극도로 흥분하여 눈이 뻘겋게 충혈되고, 살벌하다는 말로 표현할 정도를 넘어서게 되죠. 이 상황이 되면 포로에 대한 아량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포로 문제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는 아량을 보인다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6·25 당시 우리 국군이 훨씬 용감하게 싸웠다
―눈앞에서 부하들이 전사하는 모습을 보거나, 죽음이 뻔한 고지로 돌격을 명령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전우애를 형제애라고 한다면 지휘관과 사병의 관계는 父子간의 사랑에 해당합니다. 지휘관 입장에서 부하란 살이라도 떼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하의 죽음을 목격한 지휘관이 흥분하여 변을 당하는 사례가 아주 많아요. 초급장교들의 소모율이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군사령관이나 군단장 등 대부대 지휘관은 야전병원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부하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 지휘관이 과단성 있는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인민군들은 초기엔 규율이 엄격하고 民弊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국군은 北進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야전 軍紀는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우리 국군도 야전軍紀를 잘 지켰습니다만 일부 부대가 실수를 했다고 봅니다. 일본군이나 소련군이 야전軍紀를 지키지 못해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하는 요인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民弊는 군에 저항하는 사회 분위기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6·25 때 직접 맞서 싸운 인민군과 우리 국군은 어떤 차이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6·25 당시 인민군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최고 지휘관들도 젊어서 그런지 부대기동이 패기만만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한을 해방시키고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신념도 있었겠죠. 그러나 전투를 거듭하면서 저는 국군이 인민군보다 훨씬 강한 군대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국군은 6·25를 통해 한번도 적에게 항복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은 조직적으로 투항하더군요.
우리 병사들은 포로가 되면 1백명 중 99명 정도는 탈출할 생각을하지 않더군요. 그들에게 왜 도망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인민군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우리국군은 평소엔 헐렁한 느낌이 들다가도 일단 전투에 임하면 용맹한 부대로 변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6·25 때 전쟁포로였던 趙昌浩 중위가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후에야 국군포로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국군 포로 문제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요.
“휴전 때 국군포로를 버린 것은 국가 통수권자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어려워서 신경쓰지 못했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발칸반도에서 격추당한 미군 조종사 구출작전이라든지, 월남전에서 실종한 미군병사들의 유해찾기 등을 보면서 국가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거나 부상을 당하면 국가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들의 삶을 책임집니다. 국가가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운 국민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민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남북이 다같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똑같이 부상자와 전사자가 생겼지만 金日成은 國力을 다해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들은 혁명유자녀 학교를 세워 그 가족들을 교육시켜 오늘의 북한 체제를 이끄는 존재로 키워낸 겁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해 두고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겁니다.”
<자주국방을 목표로 했던 방위산업>
국내 최초의 방위산업은 서치라이트 개발
화제는 자연스럽게 방위산업으로 이어졌다. 李秉衡 장군은 오늘날 우리 방위산업의 기초를 다진 主役 중의 한 분이다. 그는 방위산업을 ‘신라통일 이후 1천3백년 만의 재무장’으로 이해했다. 李장군이 방위산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6·25 전쟁기간 중이었다. 작전지도 한 장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전투를 치르며 自主國防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구체적 추진이 시작된 것은 1967년.
李장군은 1967년 7월 하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엔 해안을 통해 북한 간첩과 게릴라들이 무시로 침투하던 때였다. 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잡기 위해서는 서치라이트가 필수불가결한 장비였지만 미군은 이 장비를 보급해 주지 않았다. 李장군은 우리 기술로 서치라이트 개발계획을 세우고 연구에 착수했다.
“마침 일본 요코하마에 2차대전 당시 서치라이트를 만들던 회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들에게 일제시대 때 쓰던 설계도를 얻어다 국산 서치라이트를 개발했어요. 이것이 군사장비 국산화의 시초였습니다.”
자신을 얻은 李장군은 다음 과제로 낙하산 국산화에 도전했다. 당시 육군 작전참모부에서는 전투능력 강화를 위해 1개사단을 적 후방에 공수 낙하하는 능력을 가진 부대로 전환시킬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필요한 낙하산 1만5천개를 미군측에 요구하자 “낙하산은 공격용 장비라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그래서 낙하산 국산화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李장군은 鄭柄宙 당시 공수특전단장에게 “우리 기술로 낙하산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美製 낙하산 하나를 완전분해하여 설계도를 그려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간단해보이는 낙하산은 1백80여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모두 분해하여 설계도를 완성했다. 알미늄 합금으로 된 부품은 영등포의 합금공장에서 제작토록 했고, 낙하산 천은 방직협회 도움으로 미국에 수출하는 회사의 것을 얻어다 낙하산을 만들었다. 1백 회 이상의 낙하시험을 한 결과 美製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한국이 최고급 낙하산 수출국으로 浮上한 것이다.
李장군은 1968년 작전참모부 산하에 전쟁물자 개발과 전쟁 敎理개발을 목적으로 한 ‘전투발전사령부’를 창설했다. 이때부터 미국측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美 태평양사령부 책임자가 李장군을 찾아와 “한국의 전투발전사령부에 미국 군사고문단을 배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한국의 방위산업을 감시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李장군은 미군들에게 의심을 사면서까지 고문관을 물리칠 수 없어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105mm 야포 개발 秘話
전투발전사령부의 첫 작품이 1백5mm 야포 국산화였다. 李장군은 당시 한국의 기계공업 수준으로 야포 생산이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40여 명의 장교를 동원해 4개월 동안 우리 기계공업 분야를 샅샅이 조사했다. 한편에선 1백5mm 야포 한 문을 완전분해하여 설계도를 만들었다.
야포 국한화 작업이 추진되던 중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게릴라 부대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기습을 당하는 등 국가안보에 허점을 노출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朴正熙 대통령은 정부의 계획과 관료들의 思考를 국가의 戰時소요계획과 일치시키자는 뜻에서 을지연습을 시작했다.
때마침 을지연습 기간 중에 朴대통령이 작전참모부를 방문했다. 李장군은 이 기회에 육군에서 추진중인 방위산업의 개요를 브리핑했다. ‘방위산업’이란 말이 나오자 朴대통령의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朴대통령에게 1백5mm 야포 국산화계획을 설명하고 우리의 경제성장속도로 볼 때 자주국방을 목표로 방위산업을 착수할 시점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대통령께서 대단히 좋아하면서 ‘李장군, 정말 1백5mm 야포를 만들 수 있는가’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砲身과 砲鏡 만드는 기술을 제외한 87%는 우리 기술로 제작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朴대통령은 ‘회사를 하나 정해 보게. 야포 생산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 거야. 그 비용은 정부 예산으로 지원해서 운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시더군요. 그 분은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던 국방비 항목에 ‘방위비’ 항목을 더 만들자는 의견까지 내놓은 겁니다.”
그후 李장군은 우리 경제능력, 북한의 군사력과 우리 군사력의 강약점을 연구한 다음 ‘군사력 건설계획’이란 방위산업 육성계획을 만들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여섯 시간에 걸쳐 보고한 이 계획이 오늘날 추진되고 있는 방위산업의 기본지침이었다.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가 10억원의 국가재산을 지키기 위해 9억원을 투자하면 1억원이 남는다. 그러나 9억원을 투자하는것이 아까워서 5억원만 썼다가 국가 재산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출범
朴대통령은 중요한 정책 하나가 구상되면 밤낮으로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골똘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방위산업에 대한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누구와 만나든 방위산업을 화제로 올렸다. 그 결과가 ADD, 즉 국방과학연구소의 출범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朴대통령 生前에는 국방부에 소속된 대통령 직속기구였습니다. 대통령의 직접 관장하에 방위산업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었죠. 성능이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개발해 軍의 戰力을 최고로 유지하는 것이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대통령이 인식했던 겁니다.”
朴대통령은 단순히 무기 국산화차원이 아니라 국가 산업구조를 방위산업이 가능한 구조로 개편하는 혁명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청와대에 방위산업담당비서관을 신설했고, 중공업과 기계공업 육성을 위해 창원공업단지를 만들었다. 예산 지원을 위해 방위세를 신설했고,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道마다 기계공고를 설립하는 등 원대한 계획들이 속속 추진되었다.
李장군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 “이 나라가 운이 있어 朴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만난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국가 지도부가 국민을 잘 먹이고 입히는 것은 둘째 과제라고 했습니다. 국가의 생존이 첫째 과제라는 겁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도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뜻이었죠. 그 분은 자나깨나 自主國防, 국가安保를 통치의 최우선과제로 삼았습니다.”
ADD가 본격가동된 것은 72년 5월이었다. 李장군이 합참본부장으로 부임했을 때 꿈에 그리던 1백5mm 국산 야포가 생산되어 해병대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사격과정에서 砲身이 파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청와대까지 보고되어 ADD 소장인 신현택 박사가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정밀조사 결과 주퇴복좌기(사격을 했을 때 포가 뒤로 후퇴하는 부분)에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원인을 해결할 기술도 경험도 없었다. 신박사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1백5mm 포를 생산하는 회사에 부탁해서 미국인 기술자 두 명을 초빙했지만 6개월 동안 월급만 받아벅고는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 自衛隊에 문의했더니 “군복입은 사람은 와도 좋지만 기술자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방위산업이란 권총 설계도 한 장 보여주지 않는 것이 국제관례란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거죠.
결국 죽기 살기로 ADD 기술진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포사격을 할 때 포신이 뒤로 후퇴하는 속도는 유압장치의 기름을 조절하는 구멍의 크기와 관계가 있었다. 기술진은 기름구멍 크기가 서로 다른 주퇴복좌기를 여러 개 만들어 각각의 포에 장착한 후 5군단 사격장에서 수천 발 시험사격을 했다. 여기서 주퇴복좌가 가장 우수한 것을 설계에 채택한 것이다.
전쟁물자와 장비 100% 국산화가 방위산업의 목표였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국산 1백5mm 야포는 美製보다 명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개발 과정에서 포신을 더 늘이고, 후퇴압력을 줄이기 위해 소염기를 다는 등 여러 부분을 우리의 지형에 맞도록 개량했기 때문이다.
―李장군께서 구상하신 방위산업의 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방위산업의 핵심은 군사장비나 물자의 자급자족입니다. 戰時에는 정치적 영향을 받아 물자나 장비를 외국에서 구입하지 못할 위험이 큽니다. 따라서 국가안보에 필요한 병기와 전쟁물자는 우리 기술로 자급자족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정치권 일부에서 방위산업에 대한 회의론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런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자주국방에 대한 투자와 노력을 아까워하다가 막상 전쟁이 나면 국가의 안전은 끝입니다. 국민들이 안이한 생각을 가진다면 국가 지도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올바른 사고라고 봅니다.”
―당시 자주국방의 원칙을 세웠던 방위산업이 오늘날에는 그 목표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외국제 첨단무기 도입이 주된 목적이 되어 自主國防 의지가 퇴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최근의 방위산업 추진 현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朴正熙 대통령 생존시보다 위축된 것만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외국제 무기를 사다 쓰는 것은 너무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어요. 의지만 있다면 우리의 능력이나 기술수준으로 첨단 과학무기 생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朴대통령이 미국과 마찰을 빚은 것도 방위산업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요.
“아마 朴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방위산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 방위산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오더군요. 그들은 기회만 나면 주한미군 철수, 원조중단 등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들고나왔습니다만 朴대통령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에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의지로 버틴 겁니다.”
日本, 朴대통령 시절 방위산업 공동개발 제안
―미국이 우리의 방위산업에 제동을 건 이유는 무엇입니까.
“1968~69년 무렵 일본에서 韓日 공동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일본이 기술을 제공하고 우리가 생산을 맡아 兩國의 수요를 충당하고 해외시장에 수출하자는 내용이었죠. 朴대통령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 분은 자주국방을 못하면 자주독립국이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방위산업은 자립적 기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철학이었죠.
방위산업의 자주성을 상실하면 국가주권을 침해받을 위험이 큽니다. 또 朴대통령은 정밀무기 가공기술로 산업발전을 이룬다는 계산까지 이미 하셨던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우리 방위산업에 대단히 냉담합니다. 자기들의 방위산업권 내에 우리를 편입시켜 미국이 무기를 대주면 살고, 공급을 중단하면 망하는 생사여탈권을 쥐려는 목적이죠. 우리가 자주국방을 달성하면 통제하기 어려우니까 국산무기 개발을 방해하는 겁니다.”
―개발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개발비가 많이 드는 무기는 외국에서 도입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마전 일본에서 나오는 ‘國防’이란 잡지를 보니 민간회사 회장들이 공군용 수송기 개발을 주장하는 내용이 소개되었더군요. 이 비행기를 외국에서 사오는 것보다 개발비가 열배나 더 드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발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유사시 국제간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무기도입이 금지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현대전에서 해·공군의 지원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공군은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융통성 있는 전력입니다. 요즘엔 미사일이 공군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만 미사일이 항공기를 필적하기는 어렵습니다. 미사일에 날개를 단 것이 비행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부딪쳐 폭발하면 그만입니다.”
李장군은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현대 육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듭니다. 그만큼 항공기 성능이 발달했기 때문이죠. F-4 팬텀 전폭기는 2차대전 당시 용맹을 떨쳤던 B-29 폭격기보다 더 많은 폭탄을 적재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폭탄을 투하한 다음엔 전투기로서 훌륭하게 공중전을 수행할 수 있어요.”
―해군전력 강화를 위해서도 애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3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입니다. 적이 한국을 침공하려면 상륙작전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중전력을 강화해 적의 항만 입구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여 우리 해안에 접근을 못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울러 對潛水艦전력 강화를 위해 구축함 건조계획도 수립했죠.”
초기에는 기술이 없어 미군에게 잠수함 도입을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모간 주한 미 해군사령관은 “잠수함은 공격용 무기이기 때문에 원조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잠수함 도입요청을 거절당한 李장군은 잠수함 설계기술을 지원해줄 상대를 은밀히 물색했다. 그 때 駐英대사관 무관부에서 은퇴한 영국 잠수함 기술자와 접촉하여 그를 한국에 초청했다. 그런데 잠수함 기술자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駐韓영국대사관에서 요원이 나와 그를 납치하다시피 영접해 갔다. 우리 기술진과 만나는 장소마다 감시자가 同席했고, 숙소는 대사관 내부에 정해 우리측의 접근을 원천봉쇄했다.
사정을 알아보니 合參과 駐英대사관 사이에 오고간 비밀전문을 미국이 모두 도청하여 영국 정보부에 통보한 것이다. 이 사실을 영국 대사관측에 항의하자 이런 답변이 날아왔다고 한다.
“영국 국내법에 의하면 방위산업에 종사했던 기술자는 보안감시 대상이다. 이들이 해외여행시 영국 정부는 신변안전을 도모할 책임이 있다.” 결국 잠수함 설계 기술자 초청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군사력은 정치적 협상의 배경
―공군능력 강화를 위해서는 어떤 계획들이 추진되었습니까.
“제가 合參본부장 시절 국방부에 ‘국산 전폭기 개발’을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선배 장성들이 ‘우리가 무슨 기술로 전폭기를 만드느냐’며 말도 못 꺼내게 하더군요. 저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선진국은 태어날 때부터 비행기 기술을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되든 안 되든 만들어보자는 의지가 중요한 거죠.
合參과 국방부가 전폭기 개발문제로 대립한다는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국방부에다 ‘앞으로 몇 년 안에 고성능 전폭기를 생산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F-5 전투기를 국내에서 조립생산한 후 우리기술로 부품을 개발해 완전 국산화한다는 계획이 세워진 겁니다. 이 계획이 5共 시절에 많이 수정되었죠.”
―방위산업은 자주국방을 통한 군사력의 강화로 귀결됩니다. 세계화시대의 국제환경에서 군사력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군사력은 협상의 배경이자 정치력의 백그라운드이며 국가의 생존능력이 강한 국가만이 自尊을 인정받았습니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 전쟁을 예방하는 결과도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육해공군의 균형적 발전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사시 육군이 언제 전차를 타고 북경이나 도쿄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나 공군전투기는 몇 분이면 가능합니다. 육군만 가지고는 상대국이 높은 전력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처음 방위산업을 구상할 때 통일이후의 국제정세까지를 염두에 두었습니까.
“국방력 발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북한뿐이 아니라 통일 이후의 군사력 전개까지를 염두에 두고 전략 목표를 연구합니다. 우리가 통일이 되든 안되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강국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국회의 국정감사에서 朴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방위산업 의지 속에 핵무장도 포함된 것이 사실입니까.
“국가안보를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방위산업은 군의 필요에 의해 민간산업체가 생산을 담당하는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과 민간 산업체간의 원활한 협조체제가 중요한데요.
“방위산업은 정부와 민간과 군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범국가적인 위기관리능력, 협조체제 등을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런 사례를 보고 배워야죠.”
전쟁기념관의 B-52 폭격기는 韓美 血盟관계의 상징
李장군은 2차대전 당시 독일에게 기뢰공격을 당했던 영국이 民官軍의 신속한 대응으로 피해를 막았던 사례를 소개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영국해안 봉쇄를 위해 침전기뢰를 개발해 비행기로 영국 해안선과 항만 입구에 투하했다. 이 기뢰로 인해 영국 해군과 전쟁물자를 운반하는 상선대가 심한 피해를 당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 즉각 기술동원위원회를 소집해 독일제 기뢰의 대응방법 연구를 지시했다. 기술진은 선박 밑창에 두 줄의 아연봉을 매달면 침전기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24시간만에 아연봉 제작도면까지 완성했다.
다음 단계로 산업동원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이 위원회는 민간회사에 아연 원료 제공, 생산, 운반, 설치, 공급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즉시 아연봉이 대량으로 생산돼 해군과 선박회사에 제공됨으로써 독일의 침전기뢰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최근 국회에서 항공모함 보유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방위산업을 구상하면서 항공모함 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는지요.
“大洋해군 건설은 해양적 조건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의 바다는 大洋的 성격이 아니라 폐쇄된 성격이기 때문에 대형함정이나 항공모함 운영에는 불리합니다. 전술적으로 설명하면 항공모함이나 대형함정이 상대국의 감제관측하에, 즉 뻔히 보이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력보존이나 발휘, 투자對 효과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봅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해상수송로의 확보와 방어를 위해서는 大洋해군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요.
“군사력은 경제적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해상수송로 확보를 大洋해군건설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동맹관계를 통해 해결할 것인지 국가적인 大戰略하에서 연구검토할 과제라고 봅니다.”
李장군은 월등한 군사력과 엄청난 인구, 세계 일류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주변국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강력한 경제력의 뒷받침을 받는 국방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강력한 국방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력, 방위산업 육성, 그리고 적절한 동맹관계 유지 등 세 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무대에서 동맹관계는 더없이 중요한 국가전략의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가 유용한 가치가 있을 때만 동맹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라고 한다.
李장군은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B-52 전략폭격기가 미국과 군사동맹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역사상 현역에서 활약중인 B-52를 제공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폭격기는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았던 李장군의 노력으로 도입된 것이다.
“저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상징하기 위해 B-52를 얻어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리스카시 美8군사령관을 만나 그를 설득했어요. 미국이 세계전략 수행에 있어 한국은 유럽의 영국, 중동의 이스라엘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존재다. 따라서 한국의 전쟁기념관에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B-52를 전시하여 우리 국민에게 미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죠.
미국에서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소련이 민감하게 대응하더군요. 마침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다가 ‘한국에 B-52를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한 달 이내에 회신이 없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하고 우리에게 이 폭격기를 제공한 겁니다.”
자위목적의 선제공격은 정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
―한국군은 방어위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북한과 전쟁이 벌어져도 우리는 급소를 기습당한 후 반격하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다고 합니다. 만약 북한의 도발징후가 확실할 때 기습당하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선제공격을 할 것인가는 국가의 存亡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선제 기습공격이 가능하려면 정보체계가 확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기습 선제공격으로 승리한 것도 정보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기습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정확한 정보가 있을 때 북한을 공격하면 자위적인 선제공격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을 하게 되면 침략이 되죠. 우리 군에서도 자위적 목적의 선제공격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으며, 그런 프로그램도 전력계획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朴대통령 시절에는 북한이 도발을 계속하자 대통령이 나서서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공산당과의 협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우리 정부의 對北협상은 북한에 질질 끌려다니고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라는 불만이 많습니다.
“朴대통령은 북한이 게릴라를 침투시키거나 우리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면 보복공격을 철저히 수행했습니다.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 정확히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만 그들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보복공격을 하여 공산당의 기를 꺾었어요. 金日成이 朴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朴대통령에게 철저하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李장군이 5군단장이던 시절, 금화지역에서 인민군이 무반동총으로 우리 對北방송용 스피커를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보복공격을 지시, 휴전 이후 처음으로 1백55mm 포 4백여 발을 인민군 진지에 퍼부어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북한을 상대할 때는 전쟁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방위산업을 추진하면서 느낀 교훈이 여러 가지였을텐데요.
“저는 방위산업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저력을 실감나게 체험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폐막한 후 미국 언론인이 쓴 칼럼을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는 ‘한국인은 자기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다. 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야 자기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極東의 약소국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철 제철능력은 1천만t을 넘어섰습니다. 일본이 2차대전을 시작할 때의 제철능력이 3백70만t이었습니다. 수치상으로 봐도 자동차 세계 6위, 조선 세계 2위, 반도체 메모리 분야 세계 1위입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국정을 잘 펼치기만 하면 어떤 일도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교훈이라고 봅니다.”
李장군은 방위산업을 설명하며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대단히 말을 아꼈다. 적들이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대비책을 세울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전쟁기념관은 무엇을 기념하는 장소인가>
혁명은 엘리트의 급속한 교체
李장군은 野戰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名將이다. 그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도 “5·16은 필연이었지만 5共 탄생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5·16과 5共 탄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 5·16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엘리트의 급속한 교체’입니다. 엘리트란 국가의 장래를 예측해서 그것을 해결하는 쪽으로 이끄는 능력을 가진 집단입니다. 의지와 능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과격하고 급속한 방법으로 무능한 舊시대 엘리트를 몰아내고 국가 지도부를 형성하는 것이 혁명입니다. 저는 朴正熙라는 지도자와 군인들이 빈곤의 수렁에 빠진 국가를 살려냈다는 측면에서 5·16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습니까.
“그 분과 한 부대에 근무한 적은 없지만 1960년에 1군 작전참모를 할 때 그 분이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이었기 때문에 자주 만나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신 후에는 제가 작전참모부장을 하면서 김신조 사건, 울진 삼척 게릴라 침투사건 등으로 자주 찾아 뵙고 작전 계획을 보고드린 적이 있습니다.”
―朴대통령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분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이었죠. 어떤 내용에 대해 발언을 하면 그것은 행동이 임박해 있거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16 당시 李장군께서는 혁명주체들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혁명주체로 참여하라는 권유는 없었습니까.
“5·16이 벌어진 날 저는 미국 유학중이었습니다. 5·16이 나고 20일쯤 후에 귀국해서 1군사령부에 있을 때였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을 하던 李錫濟 중령(총무처장관, 감사원장 역임)에게 전화가 왔어요.
대뜸 저보고 혁명재판소장을 맡아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군에 남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더니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서더군요. 그 때 제가 혁명재판소장을 맡았다면 직속상관이었던 李翰林 장군을 재판하는 입장에 서게 됐을 겁니다.”
“전쟁기념관 지어달라”고 盧대통령이 부탁
―5·16이 필연의 결과였다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요.
“저는 군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군인은 野戰에서 군인답게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야전을 모르고 정치권에서만 맴도는 군인들을 과거엔 ‘국방대령’ 이라고 불렀죠. 그러한 군인들에게 부대지휘를 맡기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정치군인이 전쟁을 그르친 예로 러일전쟁 당시 동해해전을 지휘했던 러시아의 로제스트 윈스키 제독의 사례를 설명했다.
“로제스트 윈스키 제독은 니콜라이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장교였습니다. 그는 중위 시절부터 궁중 근위대장, 시종무관장까지 지낸 정치군인의 표본이었어요. 정치적 센스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實戰경험이 전무해 일본 함대에 대패한 겁니다.”
―12·12와 5共탄생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지금도 5共 탄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私的인 감정과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군사행동을 하고 정치에 참여한 것을 이해도 못하고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전쟁기념관으로 돌려보겠습니다. 李장군께서는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용산 전쟁기념관을 건설한 주역이었습니다. 전쟁기념관 건설을 책임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시죠.
“전쟁기념관은 1988년 盧泰愚 대통령 당시에 결정된 겁니다. 어느날 盧대통령께서 저에게 전쟁기념관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전쟁기념관이 왜 필요한지 개념조차 몰랐습니다만 盧대통령의 설명을 들으며 감명을 받았습니다.”
―盧대통령과는 군 시절에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까.
“제가 군단장 시절 盧대통령이 연대장으로 근무한 인연이 있습니다. 저는 전쟁기념관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어 정중히 거절했죠. 그러나 盧대통령은 제가 적격자라면서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세계 각국은 전쟁을 기념하는 전시관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기념관을 통해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영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쪽 책임자가 ‘한국이 전쟁기념관을 만들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6·25가 끝난지도 오래 되어 전쟁을 체험한 국민이 줄고 있다. 우리 국민에게 전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전쟁은 전쟁을 할 자격이 있는 국가와 민족만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李장군께서는 전쟁기념관에 어떤 철학을 담으려고 하셨는지요.
“국가정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 요구하는 정책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그러한 부탁을 하려면 사회정의가 바로 서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가 선두에 서야합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희생된 국민을 진실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 업적과 공적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을 전쟁기념관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神社의 교훈
李장군은 전쟁기념관 연구를 위해 일본 야스쿠니 神社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야스쿠니 神社 내부에 약 4천여평 짜리 ‘護國館’이란 건물이 있습니다. 그곳이 일본 전쟁영웅들의 업적을 기록한 전쟁기념관이었습니다. 한구석에 11명의 여자 교환수 얼굴이 걸려 있더군요. 사할린에서 일본군이 철수할 때 마지막까지 교환수로 활약하던 분들입니다. 소련군이 교환대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여 많은 일본군을 무사히 철수시켰다고 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전쟁기념관을 언제 구상했습니까.
“明治維新 이후 처음 수행한 외국과의 전쟁이 淸日전쟁이었습니다. 明治維新 이전의 전쟁은 사무라이들의 싸움이었지만 淸日전쟁은 국민개병제에 의한 근대적인 전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明治維新으로 일본은 사무라이 제도를 폐지하고 일부 사무라이는 사범학교를 통해 교사가 되었고, 나머지는 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국민을 징집하여 군대를 조직했죠.
그러나 국민개병제하의 군대는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군대와 비교할 때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휘관들의 구상대로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군대의 사기도 기대이하 였어요. 그래서 착안한 것이 ‘야스쿠니 神社’입니다. 그들은 야스쿠니 神社를 만들어 전쟁에서 戰死한 평민의 자제에게 天皇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의 가치를 높이는 데 성공했고,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전통을 세운 겁니다.”
―우리는 야스쿠니 神社를 우익집단의 망령쯤으로 혹평하지만 일본 국민들이 볼 때는 의미 있는 聖地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도 이제는 일본을 감정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배워야 할 때라고 봅니다. 호주는 일본과의 전쟁 50주년 기념일에 일본 戰歿將兵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습니다. 비록 적이었지만 상대방 죽음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 騎士道의 본질입니다.”
―전쟁기념관을 건설할 때 정치권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전쟁기념관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 金泳三, 金大中, 金鍾泌씨 등 정치 지도자들이 찬성하여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저는 건립 책임자로서 마스터 플랜이 확정된 후 盧대통령과 세 분 정치 지도자를 찾아 뵙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金大中씨는 예산이 얼마나 드는지 깊은 관심을 표시했고, 金泳三 당시 민주당 총재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이 다행’이라면서 야당도 전쟁기념관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쟁기념관 빼앗기 위한 청와대의 압력
―金泳三 정부 출범 초기 전쟁기념관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하려다가 말썽이 난 적이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어느날인가 청와대 비서관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전쟁기념관에 전시할 물건이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전시물도 없는 기념관을 왜 지었겠소’ 하고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 비서관이 돌아간 후 모 언론에서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는 보도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건물이 완성단계였어요. 이제 와서 성스러운 기념관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현실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기 위해 외압이 심했다고 하던데요.
“한번은 모 기관의 요원이 찾아왔더군요. 전쟁기념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內査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6·25 때 전사자 명부에서 자신의 가족 이름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달라져 돌아갔습니다.”
여론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하루는 상이용사 한 분이 휠체어를 타고 李장군을 찾아왔다. 그는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는 기사를 읽고 흥분하여 그 기사를 게재한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항의하고 오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회가 국가를 위해 목숨바쳐 싸운 參戰용사에게 너무 심한 학대를 합니다. 우리가 왜 팔과 다리를 국가에 바쳤는지를 증명해 주는 기념관을 세운다고 해서 이제나 저제나 문을 열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니요. 金泳三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이 그렇게도 못마땅하다는 말입니까. 이 기념관은 상이군인들이 생명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장군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기념관을 지어 주십시오.”
李장군은 혀를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고 한다.
“제가 1953년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그 학교 안에 병원이 있더군요. 입원환자 대부분이 제1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포슈장군 아래서 싸우다 부상당한 미군들이었습니다. 35년 전에 부상하여 노인이 다 된 상이군인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을 보며 국가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어요.”
―전쟁기념관이 완공되기 3개월 전에 사임을 하셨는데요. 金泳三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습니까.
“저는 임명 때부터 기념관 완공 즉시 물러나기로 결심했습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건설과정에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기념관은 합리적 운영이 필요합니다. 건물을 만든 사람이 합리적인 운영을 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관식 3개월 전에 청와대에 사임 의사를 알렸습니다.”
정치인 수준 4·19 시절이나 같아
―후임 관장으로 부임한 李在田 장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 분은 육군참모총장을 해야 할 분인데 불행한 사건(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 당시 李在田 장군은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근무했다)으로 군복을 벗게 됐죠. 저는 그 분이 전쟁기념관을 훌륭한 민족의 聖地로 만들 것으로 믿습니다.”
―전쟁기념관 건립 당시에 숱한 일화들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우리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뼈저린 각성을 하게 됐습니다. 各軍본부에 6·25 전사자 名簿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더군요. 국가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2년 여에 걸쳐 6·25 때 散花한 護國英靈들의 명단을 겨우 정리했어요.”
―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대통령입니다.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보니 군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소개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저도 군 최고통수권자 차원에서 대통령 기념관을 별도로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정치권 인사나 국민들이 너무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감이 없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전쟁기념관에 왜 독재자 전시관을 만드냐고 싸움을 걸어왔어요. 우리는 아직 전쟁기념관에 대통령을 모실 자격이 없는 국민이라는 각성과 함께 후세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국회의원 總選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양상이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습니다. 은퇴한 정치인이 다시 복귀하고 ‘보수의 원조’ ‘온건보수’ ‘개혁하는 보수’라는 등 갖가지 이념논쟁이 벌어져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요. 우리 정치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국민전체의 책임이 아니라 정치인의 책임입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보세요. 같은 땅이 이어진 곳인데 한쪽은 빈곤과 불결, 외채로 신음하고 한쪽은 질서와 부강의 세계 강국입니다. 그것은 곧 정치인의 자질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질에 관한 한 4·19 시절이나 오늘이나 별다른 개선이나 발전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생활에 대한 배려는 뒷전이고,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국가안보가 심히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정파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통해 전술전략연구를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전략가는 누구입니까.
“저는 李舜臣 장군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은 연구개발에 뛰어난 창의력이 있고 함대 운영에 있어 통찰력이 뛰어나더군요. 그분은 적이 무엇을 원하며 어떤 전략을 운영할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곳에 방어력을 집중시켜 勝戰을 거듭한 겁니다.”
李舜臣 장군, 朴正熙 대통령 가장 존경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朴正熙 대통령만큼 우리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만든 분은 없다고 봅니다. 영웅 나폴레옹도 死後 50년이 지나서야 객관적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우리도 세월이 더 흐르면 朴正熙라는 영웅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軍 생활을 하면서 주로 작전부서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북한군의 戰力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북한군 전력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십니까.
“지금 북한은 굉장한 동요와 불안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국민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또 국가 지도부가 노쇠하여 패기도 줄었다고 봅니다. 군사력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가 담보되지 않습니다.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굳건한 국민의식과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저는 북한군 전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李장군은 강행군과도 같은 인터뷰 내내 지도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국가안보의 일부를 외국군에 의지하고, 외국의 무기를 사다가 國防을 한다는 안이한 사고, 적이 침략의 시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가는 이 시점에 大權싸움으로 국가질서를 어지럽히면 그것은 국가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2천년 전, 자주국방을 통해 국가의 위엄과 개인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荀悅의 주장에 저는 감명합니다. 자주국방 능력이 없으면 국가로서의 위엄이 서질 않습니다. 선진국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장 멸시합니다. 그들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피하면 나라를 지도할 자격이 없어요.”
국가가 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문화를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국가 지도부와 정치인들이 과연 전쟁을 결심할 수 있을까. 조국을 지키기 위해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좋은 군사문화까지도 청산하겠다고 쓸 데없는 國力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不敗의 神話를 창조한 李秉衡 장군의 마디마디마다 千金의 무게가 실려있는 苦言을 들으며 기자는 전쟁과 평화, 국가와 애국심, 軍의 중요성에 대해 自問自答하며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 李秉衡 장군과 같은 名將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不敗의 名將’ 李秉衡 예비역 중장
- 金容三(月刊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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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22, 11: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