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賢姬의 일본 방문 手記

끝없이 펼쳐진 푸른 山野와 港口를 낀 아름다운 도시 東京, 田口八重子와 橫田 메구미 등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했던 조국의 대지였습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고 귀환하면서 이 山野와 都市를 내려다보겠지요.
*이 글은 대한항공 폭파범 金賢姬씨가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여 산케이 신문에 보낸 手記이다.

안녕하세요. 金賢姬입니다. 그 뜨거운 暴炎(폭염) 속에서도 저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日本을 訪問(방문)하였습니다. 저는 日本 政府의 정식 招請(초청)에 의해 3박 4일 간의 滯留(체류)를 하였습니다. 저의 生涯(생애) 첫 일본 방문을 하고 서울로 돌아와 짧은 여정 동안이었지만 그 곳에서 느낀 所感(소감)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올 年初에 産經新聞에 게재한 저의 글에서 저는 일본을 방문하여 拉致(납치) 被害者 가족들을 뵙고 慰勞(위로)와 希望(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 하순 저의 꿈이 실현되어 歷史적인 日本 訪問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원님께 感謝를 드립니다.

작년 3월 중순 부산에서 田口八重子(다구치 아예코)의 가족을 面談하고 記者會見을 하고 난 후 저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 警察廳(경찰청) 등 정부기관에 납치 피해자 정보 및 관련 정보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러한 저를 관심 있게 지켜본 새 政府는 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는지 제가 入國禁止者(입국금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를 許可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國務大臣(拉致問題擔當) 中井洽님으로부터 정식 招請狀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北韓當國에 의해 납치된 일본 피해자 가족들과의 面談과 납치 眞相糾明(진상규명)을 한국정부의 協力을 얻어 저를 일본에 초청한다는 內容이었습니다.

제가 1990년 5월 일본인 납치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지 꼭 20년 만에 납치 피해자들 가족의 나라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에게 있어서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하고 한국에 온 지 23년 만의 일입니다. 오래고 긴 세월이 지났건만 제가 한없는 苦痛(고통)을 받고 있는 그 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에 感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흘 간 일본에서 머무는 동안, 저는 공식적인 행사인 公安委員長 中井洽님과의 面談을 시작해서 田口八重子의 오빠이면서 납치피해자 家族會 會長인 飯塚繁雄씨와 八重子의 아들 耕一郞씨를 면담하고, 橫田 메구미의 가족을 면담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납치 피해자 가족들과도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행사로 납치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國會議員들과 담화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동경을 떠나던 날, 저는 NHK방송 등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7월 20일 새벽, 저를 태운 경비행기가 仁川空港을 출발하여 두 시간 반 정도 지나 어둠속에서 羽田(하네다) 空港 활주로에 무사히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많은 불빛들이 깜박이며 넓게 펼쳐진 東京의 夜景(야경)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가슴이 뭉클해 왔습니다. 아, 이 곳이 바로 자신이 생활하였고, 가족들이 살고 있고, 간절히 돌아오고 싶었던 田口八重子의 고향’ 東京이었습니다. 저처럼 그녀도 비행기를 타고 平壤공항을 출발하여 東京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저의 첫 日本 訪問은 저의 생애에 있어서 歷史的인 사건입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당시 대학에서 日本語를 전공하고, 工作員(공작원)으로 소환되어 田口(다구치. 假名 리은혜)와 함께 생활하면서 일본의 言語와 文化를 학습하였고, 그 후 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을 가지고 공작활동을 하였지만 정작 일본에는 한 번도 入國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기회가 되면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機會(기회)가 아이러니컬하게도 合法的인 신분으로, 北韓이 아닌 韓日 政府에 의해 성사되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엄중한 경호 속에서 도착한 곳이 東京에서 멀리 떨어진 長野縣 輕井驛의 한 별장이었습니다. 많은 취재진들이 지상파 공중에서 立體的으로 취재경쟁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의 拉致 문제가 국민들에게 엄청난 關心事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대단한 취재 熱氣(열기)는 그날의 폭염보다도 더 뜨거웠습니다. 그들은 저에게서 납치 피해자들에 대한 情報(정보)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취재해 납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 하였습니다. 拉致者(납치자)와 생존 국군포로가 약 1000명이나 되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저를 초청한 일본 정부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취재 경쟁이 처음 일본을 방문한 저에게는 무척 긴장이 되고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끼가 넓게 깔린 숲으로 둘러 싸여져 있는 별장에서 첫 공식행사는 초청해 주신 公安委員長 中井洽님과의 面談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신 그로부터 현재 처해 있는 납치 문제의 전반에 관해 意見을 들었습니다.

저녁에는 田口八重子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오빠 飯塚繁雄씨는 저의 일본 방문을 환영해 주시면서 작년 釜山에서 면담한 후 재회한 것에 기뻐하셨습니다. 다음 날 점심 때에는 田口 가족들을 다시 만나서 아들 耕一郞씨에게 가지전과 불고기 요리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더 잘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맛있게 먹고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정말 즐거운 한 때를 보냈습니다. 田口도 이 사실을 안다면 무척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도착 이튿날(7월 21일) 저녁에는 橫田 메구미의 가족으로 부모님과 쌍둥이 남동생들을 만났습니다. 저에게는 그 가족들을 만난 것이 歷史的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메구미가 와야만 하는 건데 제가 오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자 메구미 어머니 早紀江씨는 자신의 딸을 대하듯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메구미를 만났던 상황과 그간 남겨 두었던 얘기들을 부모님께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早紀江씨는 깊은 관심과 공감을 표시 하시면서 자신의 딸이 어린 시절에 행동했던 모습들을 하나하나 떠 올리셨습니다.

早紀江 씨는 저에게 “내 딸은 기구한 運命(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내 딸이 북한에 의해 拉致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신이 悲劇的인 運命을 고비마다 잘 견디어 내고 꿋꿋이 살아서 일본을 訪問한 것처럼, 내 딸도 북한에서 모든 고난을 잘 이기고 굳세게 살아서 祖國으로 돌아와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다. 누가 뭐래도 내 딸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애틋한 心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早紀江 씨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7월 22일) 장소를 옮겨 東京의 某 호텔에서 납치 피해자 가족 분들과 面談을 하였습니다. 이미 자료속의 사진들을 통해 알게 되어서인지 그 분들이 낯설지 않았고, 그 분들은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납치된 가족의 사진을 제시하면서 한 분 한 분의 事緣을 얘기할 때마다 저는 그 분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대답을 그 자리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이 송구스러웠고, 참석한 가족 대부분이 나이가 年老(연로)하셔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수 십 년간 북한에 强制로 납치된 피해자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苦痛(고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당국은 납치 피해자들이 死亡했다고 말하지만 북한 어디엔가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慰勞와 勇氣를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정부의 마지막 行事로서 납치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國會議員들과의 면담을 하였습니다. 참석한 議員 한 분께서는 제가 訪日하여서 납치문제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납치 문제의 早速(조속)한 해결을 위한 政策과 여러 意見들을 들었습니다.

체류 마지막 날(7월 23일) 오전에는 NHK방송 등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取材記者는 저에게 일부 시각에서는 저의 일본 방문이 北韓을 자극하게 될 것이라며 否定的(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質問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1987년 당시 바레인에서 죽지 않고 살아났고, 韓國 政府가 저를 살려준 것은 歷史의 證人으로서 어떠한 일을 하라는 使命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마침 일본을 방문하여 납치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사명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새로운 정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저에게 헬기 유람을 시켜주는 등 個人에게 너무 우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일부 批判的(비판적)인 시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資格도 없는 저에게 일본 정부가 헬기를 태워준 것에 대해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저에게 정말 부담스러웠고, 다음 방문이 허용된다면 걸어 다니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캄캄한 羽田공항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長野縣으로 갈 때에 身邊安全을 위해 커튼으로 둘러싼 차량으로 외부와 차단된 채로 이동하였습니다. 저의 첫 방문에 바깥 全景(전경)들을 볼 수 없게 한 일본정부가 長野縣에서 東京으로 이동할 때만이라도 全景(전경)들을 볼 수 있도록 配慮(배려)하여 차량이 아닌 헬기를 運行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헬기를 타고 東京으로 오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山野와 港口를 낀 아름다운 도시 東京, 田口八重子와 橫田 메구미 등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했던 조국의 대지였습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고 귀환하면서 이 山野와 都市를 내려다보겠지요.

그들을 救出(구출)하기 위해 애쓰는 정부와 그리운 家族들, 그리고 그 뒤엔 바로 조국의 山河가 변함없이 묵묵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7월 23일, 무더위 속에서도 나흘간의 공식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東京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日本 정부와 국민,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 저를 극진히 환영해 주신 것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저를 招請해 주신 공안위원장 中井洽님께 고마움을 表示(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납치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 그들에게 얼마만큼 慰勞와 勇氣를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부 言論들은 저에게 새로운 정보를 기대하였지만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실망시켜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저의 日本 訪問으로 인해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 心的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고 拉致 문제가 잘 해결되어 北韓에 있는 피해자들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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