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국민들의 선택
 
1987년 이후 우리 국민들은 전임 대통령과 대비되는 이미지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택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노태우 대통령은 비록 군(軍)출신이지만, 전임 전두환 대통령이 갖고 있던 ‘철권(鐵拳) 대통령’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는 군 출신답지 않은 온유한 이미지를 내걸었고,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는 ‘물태우’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결코 무리수를 두거나 강경책을 동원하지 않았다. 나중에 김영삼 정권에 의해 군사쿠데타와 부정비리 혐의를 단죄받기는 했지만, 그는 ‘장군 출신 대통령’의 시대에서 소위 ‘문민(文民)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잘 수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임 노태우 대통령, 더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 이래 ‘장군 출신 대통령’들과는 대비되는 ‘문민 대통령’이었다. 그 자신도 ‘문민정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자랑스러워 했다.
 
IMF사태의 와중에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의 가벼움, 경제에 대한 무지 등과는 대비되는, 뭔가 지적이고 경륜이 있어 보이는 이미지(물론 그건 김대중 세력에 의해 교묘하게 다듬어진 허상이었지만)의 소유자였다.
‘준비된 대통령’을 자처한 김대중은 그의 ‘경륜(?)’이면 IMF사태라는 미증유의 국난(國難)을 극복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주었고, 국민들은 거기에 넘어갔다.
김대중은 단순히 그의 전임자인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이후 계속되어 온 영남정권, 아니 더 나아가 건국 이래 계속되어 온 기득권세력 전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먼저 80이 넘은 노(老)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반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느릿느릿한 말투,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거리는 걸음걸이의 대통령에게 식상한 국민들에게 노무현은 젊고 팔팔한 이미지로 다가갔다. 거침없는 이단아(매버릭)적인 언동으로 노무현은 여야, 좌우, 영남과 호남을 막론하고 ‘기성세대=기득권세력’으로 보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아 청와대의 주인이 됐다.
 
‘이단아 노무현’의 실속 없는 ‘말(言)의 정치’ 내지 ‘이념과잉의 정치’, 예의염치를 모르는 막가파식 언동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CEO대통령’이었다.
30대의 나이에 국내 굴지 기업의 CEO가 되어 ‘샐러리맨의 우상’이 됐었고, 서울시장 재직시에는 ‘청계천의 신화’를 만들어낸 이명박이라면 업적, 성취, 실적, 이런 것들로 뭔가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때문에 국민들은 노무현 못지않은 ‘말의 정치인’인 정동영 대신 이명박을 선택했다.
 
이명박은 ‘利의 정치인’
 
과연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도실용(中道實用)’이라는 그의 구호가 바로 이를 상징한다. ‘중도실용’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몰(沒)이념의 정치’(이명박 대통령은 ‘탈(脫)이념’이라고 강변하겠지만)고, ‘이(利)의 정치’다.
‘몰이념’이란 이 나라와 국민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야겠다는 철학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혹은 글자 그대로 중도이든 간에,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는 비전이나 청사진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대운하나 4대강, 녹색성장, 친(親)서민,통일세 같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들에는 감동이 없다. 대운하가 4대강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하루아침에 친서민으로 둔갑하는 것, 난데없아 녹색성장이나 통일세가 튀어나오는 것은 그때그때의 ‘이(利)’를 쫓은 결과임을 국민들은 알기 때문이다.
 
‘이(利)’를 좇는 대통령 주위에 몰리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利)’를 좇는 사람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던 군인, 관료들은 ‘조국근대화’라는 가치를 공유(共有)했고, 김영삼-김대중의 가신(家臣)들은 ‘민주화’라는 철학을 공유했다. 스스로 ‘82학번’임을 자처했던 노무현 주위에는 386운동권 정서로 뭉친 옛 운동권과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주위에는 누가 있나?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지명됐다가 탈락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을 나와서 당시 잘 나가던 신문인 한국일보에 들어가 사회부장, 정치부장 등 노른자위 부서를 거쳐 부국장까지 올랐다가 한국일보가 기울자 선대(先代)의 인연에 기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사람이다.
조선일보에서 그는 주간조선 편집장을 했다. 그리고 나서 ‘기자 이후’의 삶을 고민해야 할 때(이번에 문제가 된 부동산 건 등은 바로 이 시절 장래에 대한 ‘고민’의 소산일 것이다)에 이명박 캠프에 몸담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미국에 건너갔던 시절의 인연 덕분이라나.
그리고 '실세차관' 소리를 들으며 2년간 행세하다가, 장관으로 올라서려는 순간 온갖 문제가 터지면서 낙마하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 주위 사람들은 죄다 이런 사람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밟아야 할 계단을 밟아 올라간 사람들이고, 나름 실력은 있는 사람들일 지는 몰라도 철학이나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연한 기회, 혹은 ‘고소영’인 덕분에 대통령과 연이 닿은 ‘잘난 사람들’, 하지만 뜨거운 가슴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통령이나 대통령 주위 사람들이나 ‘이(利)’로 뭉친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 사이에는 끈끈함이 없다.
이번 김태호 총리 내정자의 경우에서 보듯, 이명박 대통령은 그가 자신에게 보탬이 될 것 같으니 쓰려 했다가, 부담이 된다 싶다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김태호 내정자도 그걸 알기에, 즉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명박 청와대가 자신을 지켜줄 것 같지 않자 총리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이번 국무총리 및 장관 인사의 실패는 이명박식 '이(利)의 정치'의 총체적 파산을 의미한다. '이(利)'만을 좇는 대통령이 '이(利)'를 좇는 인간들을 중용하려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義의 정치인’을 갈망한다
 
‘이(利)를 좇는 대통령’과 그 주변세력에게 질린 국민들은 2012년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 ‘의(義)를 좇는 정치인’을 택할 것이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대의명분, 철학, 이념을 얘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류의 공허한 이념이나 철학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에 반하는 반역의 이념이나 철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5년에 질린 국민들이 제2, 제3의 노무현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라는 것은 대지(大地)에 굳건하게 두 발을 딛고 선 대의명분, 철학, 이념을 말한다. 노무현 식의 뜬구름 잡는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면서 대한민국을 더 강하고 잘 살게 만드는 이념이나 철학을 말한다.
 
그런 ‘의(義)의 정치인’은 어떻게 알아보나? 100% 정확하지는 않다해도, 일단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국민을 속이려는 정치인이 있을 수 있으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념이나 철학이 부족한 것을 감추기 위해 아예 입을 다무는, 그러다가 아주 가끔 자신의 당파적 이익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만 ‘의(義)’를 빙자해 입을 여는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정치인은 ‘이(利)의 정치인’도, ‘의(義)의 정치인’도 아니다. ‘은(隱)의 정치인’이라고나 할까.
이런 정치인은 말을 해야 할 때에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이념과 철학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과 이런 면에서 닮았다는 것은 2012년에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다시 누가 ‘의(義)의 정치인’인가로 돌아가자.
나는 누군가가 몇 년을 두고 국가와 사회의 현안들에 대해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그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지켜보든 지켜보지 않든, 언론이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동료 정치인들이 이해하든 말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일 없이 반듯하게 할 말은 하고, 꾸준히 실천해 온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그런 언행이 또다른 형태의 포퓰리즘일 수도 있다. 그의 이념이나 철학이 거칠고 다듬어 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또 다른 문제가 파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의(義)의 정치인’이 ‘이(利)의 정치인’이나 ‘은(隱)의 정치인’ 보다는 낫지 않을까?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우왕좌왕하는 대통령은 이제 지겹다. ‘이(利)’만을 바라보고 대통령 주위에 부나비같이 몰려드는 모리배들을 보는 것도 역겹다.
이런 생각은 아마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1987년 이후 전임자와 대비되는 입장에 선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해 온 우리 국민들은 아마 2012년에는 '의(義)을 좇는 정치인'을 선택할 것이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의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