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J.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大作에서 文明(민족과 국가와 문화와 사회)의 興亡(흥망)을 挑戰(도전)과 應戰(응전)의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어느 文明이 도전을 극복하면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하고 또 다른 挑戰에 직면한다. 이 도전을 물리치면 또 한 단계 더 발전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 순간 應戰에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 再응전한다. 다시 실패한다. 세 번째, 네 번째 응전에서도 실패한다. 이렇게 되면 문명의 衰亡(쇠망)이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을 ‘大敗(rout)-반격(rally)-大敗-반격-大敗-반격-大敗’의 공식으로 설명하였다. 3.5 박자의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즉 세 번 반격하여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쇠퇴를 막지만 결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물론 2.5, 4.5 박자도 있을 수 있다.
1. 북한은 언제 처음으로 挑戰에 실패하였던가? 1970년대 후반이다.
북한은 1971년부터 신6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면서 서방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자본도입을 시도하였다. 북한은 1970년에 서방으로부터 3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72년부터는 서방선진국 차관이 공산권을 앞지르게 되었다. 1973년의 경우 서방차관이 3억7500만 달러, 소련차관이 1억900만에 달러였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확대도 꾀하였다. 그러나 수입증가로 무역수지의 赤字(적자) 폭이 늘어나면서 1975년부터는 外債(외채) 상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거의 끌어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최초의 對外 개방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경제개발 마라톤에서 隔差(격차)는 더욱 넓어져 갔다. 1966∼70년 사이 남한은 10.4%, 북한은 5.8%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71∼75년 사이엔 남한이 연평균 9.7%, 북한은 2.3%에 그쳤다.
북한의 1970년대식 대외개방시도가 실패한 것은 외국기술과 자본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내부 체질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에 金日成은 金正日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여러 가지 무리를 범했다. 金日成은 金正日을 위해서 黨과 軍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金正日은 金日成을 위한 神格化(신격화) 작업을 지휘함으로써 父子간에 북한체제를 경직화시키는 相乘(상승)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체사상의 經典化(경전화), 유일체계의 확립, 중국 문화대혁명시의 홍위병을 본 딴 金正日직속의 3대 혁명소조활동 등등으로 체제의 창의성과 자율성, 그리고 신축성을 말살하였다. 국가발전 단계상 대중의 창의와 자율을 촉진하고 국제교류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서 金日成은 주체사상과 세습체제로써 북한의 역사적 진행방향을 거꾸로 돌려놓고 말았다. 역사발전의 흐름을 탄 남한과의 격차는 1970년대에 결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발전도상에서 도전은 늘 있는 법이다. 국가의 흥망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식의 결정에 지도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비서실장을 9년간 지낸 金正濂(김정렴)씨는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색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在任時(재임시)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도전을 깊은 사색에서부터 나오는 면밀한 계획과 무서운 추진력으로 하나하나 헤쳐가면서 나라를 이끌고 갔습니다.”
1970년대에 남한은 발전했지만 朴대통령의 고민은 더 깊어졌고, 북한은 침체했지만 金日成은 우상화 운동에 의해 더 즐거워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남북한 격차를 있게 한 두 지도자의 차이점이란 얘기다.
1970년대의 10년간 북한의 군사비 지출은 1.5배가 늘었는데 남한은 2.4배나 늘었다. 1976년부터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1인당 GNP가 북한을 앞선 지 7년 뒤의 일이었다. 북한은 1974년부터 인민군에 대한 白米(백미)지급의 관례를 수정해 옥수수를 섞어 주기 시작하였다. 건설 공사장에 現役군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경제 성장의 둔화는 서서히 북한의 군사력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조해진 북한정권은 核개발이란 또 다른 자충수를 생각하게 된다.
2. 1978년부터 중국의 실력자 鄧小平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펼 때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같이 가자고 설득하였다. 새로운 외부 환경의 도전에 북한을 살릴 수 있는 應戰이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식 개혁 개방의 길이었다. 김일성 김정일은 중국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같은 시기 새로운 도전이 한국으로부터 왔다. 全斗煥 정부가 88 서울 올림픽 유치권을 따낸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여기에 응전하였다. 최악의 방법으로. 아웅산 테러, 김포공항 테러, 김현희-김승일에 의한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켜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犯人이 잡히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올림픽에 대항, 유치한 게 89년 세계청년 祝典이었다. 이 준비에 약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는 바람에 경제는 더욱 멍들었다. 북한은 두 번째 應戰에도 실패하였다.
3. 북한정권에 대한 세 번째 도전은 1989~91년의 소련-東歐공산권 붕괴와 이를 활용한 盧泰愚 정부의 북방외교였다. 북한정권은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修交(수교)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김일성-김정일은 이 위기에 核개발로 應戰하였다. 이 應戰은 일시적으로 성공하였다. 1994년 미국은 북한정권과 제네바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북한체제를 무너뜨리거나 核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한 셈이다.
4. 북한정권에 대한 네 번째 도전은 1994년 김일성의 죽음과 그 직후의 大飢僅(대기근)이었다. 김정일은 체제개혁을 거부하고 버티기式 應戰을 하였다. 그 결과로 정권은 건졌으나 수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市場을 만들었다. 이 市場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거대한 ‘市場세력’이 생기고 이들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아래로부터 허물면서 정권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5. 북한정권에 대한 다섯 번째 挑戰은 好材(호재)이고 기회였다. 한국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김정일은 햇볕정책 逆利用(역이용) 공작으로 應戰하였다. 10년간 약100억 달러의 金品을 뜯어갔다. 核실험도 성공시켰다. 한국에 거대한 친북세력을 만들어냈다.
6. 김정일의 햇볕정책 逆利用 공작은 그러나 한국 보수층의 應戰을 불렀다. 각성한 보수층이 2007년 大選, 2008년 總選에서 친북세력을 정권으로부터 몰아냈다. 새로 등장한 李明博 정부는 對北퍼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북한주민들의 市場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7. 작년 11월 김정일은 市場세력의 확산이란 도전에 화폐개혁으로 應戰하였다. 市場세력이 반발, 개혁은 실패하고 책임자는 희생양이 되었다. 김정일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자 김정일은 黨 대표자 대회로 應戰하였다. 1인 지배로 망가진 黨의 지휘부를 再建하고 셋째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8. 이 應戰(당의 재건과 후계체제 구축 시도)은 성공할 것인가? 토인비는 한번 기울기 시작한 사회는 영웅적 노력에 의하여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970년대 이후 북한정권의 應戰은 거의 모두 실패하였다. 햇볕정책 역이용 공작처럼 일시적으로 성공적인 듯 보였던 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붕괴되는 사회에서 應戰은 일시적 성공밖에 거둘 수 없다고 한다. 화폐개혁을 실패하게 만든 市場세력이 김정은 세습 체제 시도를 좌절시키는 원동력이 될지 모른다.
체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김정은을 성급하게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은 權力투쟁을 유발할 것이다. 김정일의 건강이 좋지 않고, 김정은의 권위가 全無하고, 市場세력이 세습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민간 부분이 자원을 동원, 김정은 반대세력을 지원하면 權力갈등은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權力갈등의 와중에 김정일이 죽는다면 流血(유혈)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정권은 1953년에 끝난 스탈린 체제가 57년 동안 延命(연명)하고 있는 경우이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에서 일어났던 변화가 지금부터 북한에서 압축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소련에선 스탈린 死後 강제수용소가 폐지되고, 流血숙청과 학살이 중단되었으며, 스탈린의 하수인 베리아는 체포 처형되었다.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市場세력의 강화, 김정일 권력의 약화, 지배층내의 권력투쟁, 외부의 영향력 증대는 그러나 한 방향으로 수렴될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 체제의 붕괴, 對南혁명 노선의 포기, 경제적 실용정책의 추진 등이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 一族의 생존을 보장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김정일에 의하여 목숨을 빼앗긴 700만 명의 가족들이 복수를 요구할 것이고 寃魂(원혼)들의 저주는 一族에게 쏟아질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가장 무서운 힘은 복수심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쌓은 惡業의 무게가 김정은을 壓死시킬지 모른다. 양심에 눈을 뜬 북한사람들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 3代 세습 시도를 좌절시킬 때 한반도 자유통일의 첫 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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