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1949년 여름방학이 될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기억나는 행사 하나가 있었다. 상급생 어린이위원장(학생회장 격) 형이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고 했다. 운동장에서 교문까지 선생들과 학생들이 모두가 도열한 한가운데로 그 형이 양 어깨에 손바닥만 한 계급장 같은 것을 달고 어깨를 재며 당당하고 멋스럽게 지나 갈 때 선생이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의 최영호가 영명하신 김일성 장군님의 은혜로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면서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환송하던 기억이 난다. 얼마쯤 뒤 그 어린이위원장 형이 돌아올 땐 더 대단했다. 선생이,
“보라! 드디어 최영호 동무가 김일성 장군님의 가르침을 받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라!”
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이다음에 커서 저 형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하면서 몹시 부러워했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생각이 나서 우리 대한민국의 청소년 학생들이 우리나라 입장에서 단순한 목적으로 금강산으로 관광 가는 것을 그리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김일성 우상화의 사상교육에 자칫하면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또 ‘동무’란 호칭이 그때부터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강요되었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 ‘동무’ 호칭이 너무 우습다고 수군거리며 웃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 아저씨 동무, 할아버지 동무, 위원장 동무, 어버이 수령 동무……. 그저 갖다가 붙이는 게 동무라서 형들은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지만 비아냥거리면서 쓰레기 동무, 바가지 동무, 삽살개 동무, 송아지 동무 하며 킥킥대고 웃던 생각도 난다. 나도 그 때 처음 불러 보는 이 ‘동무’ 호칭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아버지 동무라니!
1949년 3월 중순, 그러니까 6ㆍ25가 나기 전 해에 우리 동네 개울마을 아래쪽 다리께 돌담 울타리 안에 커다랗고 멋진 노송이 있는 집에 머일 이모할머니 가족이 이사를 왔다. 머일 이모할머니는 나의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이다. 이모할아버지는 윤씨이고 키가 크며 거의 대머리인데 상투가 정수리에 틀어 올려있지 않고 뒤통수에 매달려 있어서 볼 때마다 그 상투 매달린 이상한 모습부터 눈에 띄었다. 중국 청나라 때의 변발을 한 사람과 이모할머니 집터 개울말 노송 고목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보다 연하인 아재 둘과 6촌 동생 남매와 아주머니 이렇게 일곱 식구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이모할머니 가족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었다. 1947년 이모할머니 가족이 38선이 가까운 양양 광정리 머일에 살 때에 일어난 일이다.
이모할머니의 둘째아들, 당시 중학교 3학년인 석빈 아저씨와 몇몇 친구가 서로 짜고 38선 넘어 남쪽으로 몰래 숨어서 내려간 일이 있었다. 그때 광정리 쪽은 38선이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어서 왕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 공산주의 김일성 우상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데, 담임선생이 너무 심하게 학생들을 혼내며 몰아치는 바람에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학생들이 담임선생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남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내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한민국 국방군 경비초소에 들키고 말아 모두들 초소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다. 국방군이 이들을 보고 내려온 사유를 자세히 말하라고 하니 석빈 아저씨와 친구들은 담임선생이 너무 못살게 굴어 기분 나빠서 길을 들이려고 내려 왔다고 철부지 같은 말을 했다. 말을 듣고 난 후에 국방군이 사춘기 어린 소년들을 설득하기를,
“너희들은 한참 공부할 나이고 또 부모와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나이다.”라고 하면서 “어서 다시 넘어가서 열심히 공부 하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라.”고 당부까지 하니 순진한 그들은 다시 몰래 넘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 사실을 담임선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 때의 학생들을 모두 호출하고 이들은 일시에 사상범으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학생들 가족까지 모두 조사받게 되었다. 이 바람에 그 동네 몇몇 학생들의 형들도 억울하게도 사상범으로 몰려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징역을 보내게 되니 부모들과 친척들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온 마을이 슬픔으로 가득하였다.
석빈 아저씨의 형인 석순 아저씨도 쇠사슬 차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게 되었고, 두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이모할머니와 이모할아버지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그 이후로 슬픔 속에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머일 이모할아버지 가족은 그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큰 딸이 출가해 사는 하복리 동네 개울말로 이사를 온 것이다. 이사 온 뒤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몇 번인가 수도 없이 아오지 탄광으로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 헛걸음하고 돌아와 아들들에게 주려고 가지고 간 미숫가루가 든 보따리를 땅에다 내동댕이치며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을 하는 이모할머니를 여러번 보았다.
6ㆍ25 동란 중 미군의 폭격으로 아오지 탄광에서 석빈 아저씨와 친구 한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였는데 탈출할 때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곳에 먼저 온 친구가 여러 시간 숨어서 기다렸지만 오지를 않자 석빈 아저씨를 뒤로 하고 혼자 고향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고향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그 일가친척들은 좋아하였지만 이모할머니는 두 아들이 오지 않아 또 한 번 더 큰 슬픔에 잠겼다. 혹시나 하며 그 탈출 때까지의 아들 얘기를 더 들으려고 고향에 온 그 아저씨 집을 한동안 출퇴근하듯이 하였고, 나중에는 그 아저씨를 수양아들로 삼고 지냈지만 할머니의 한이 그것으로 풀리랴.
1992년, 머일 할머니가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나는 양양읍내 장거리께에 사는 아흔셋 되는 이모할머니를 찾아갔다. 허리가 꼿꼿하고 안광이 빛나기는 여전하였다. 송이와 산삼을 캐러 한 달여씩이나 산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할 정도라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가끔 찾아뵈었지만 안방에 나와 같이 앉으면 그때마다 으레 공산당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아저씨들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하도 많이 들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소연하듯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온유한 이모할머니가 아저씨들의 기억을 떠올릴 때는 아주 달랐다. 그 연약하고 가냘픈 팔의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내 앞에서 방바닥을 손목에 멍이 들도록 내리치면서,
“네 이놈! 김일성 이놈! 내 그 놈의 살을 깨물어 으깨 먹어도 시원찮은 놈! 그놈의 살이 내 앞에 있으면 씹어 찢어 버리고 말테야!”
하며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며 말할 땐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방바닥을 내리치면서 절규할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나서 할머니 앞에서 같이 주먹을 불끈 쥐어 가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할머니 말을 듣곤 하였다.
“김일성 이놈 뒈지는 꼴을 보고 난 뒤 나도 눈을 감아야 할 텐데!”
하던 이모할머니가 김일성이 죽기 전, 1993년 조금이나마 한도 풀어 보지 못하고 두 아들을 천국에서나 만나려고 돌아가신 것이다. 1993년 초겨울 장례식날 나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발인 때 이모할머니가 생전에 땅을 친 것처럼 나도 땅을 치며 관을 붙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할머니의 평생의 한이 떠올라 너무 슬펐다. 지금도 이모할머니의 슬픔이 생각나 눈물이 앞을 가린다.
2.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나는 학교 가는 날만 빼고는 매일 할머니 치맛자락만 붙들고 졸졸 따라 다니다시피 하였다. 할머니의 나에 대한 정성은 대단했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았는데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다 유행병(주로 홍역)에 걸려 6남매를 잃은 충격과 한을 가슴에 가득 지니고 산 분이었다. 심지어 하루 저녁에 두 아들을 잃은 적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한번은 석 달 가량이나 정신을 잃고 지냈다고 했다.
오직 나의 아버지만 무녀독남으로 살아나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아들과 손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이 대단하였다. 연년생으로 난 내 아우 때문에 나는 돌이 조금 지나 할머니 차지가 되었고, 할머니의 젖을 5살까지 먹어 젖이 나왔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주로 다른 집 농사일을 거들어 주고 겨우 끼니 되는 정도만 얻어 와서 우리 집 양식으로 했다.
할머니는 체구는 작았으나 워낙 부지런하고 기운이 세어 장정들이 지는 지게를 지고 일을 해 동네 어른들이 놀랄 정도라 하였다. 또 삼베 베틀에 앉아 하루 종일 삐이꺽 찰가닥, 삐이꺽 찰가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북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왔다갔다 건네고, 그때마다 오른손 쪽에서 건네받은 북을 왼손에 쥐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바디집을 잡아당겨 가로로 이어진실을 다지고 한쪽 발에 베를 짜는 신을 신고 그 신의 코끝에 굵은 끈이 달려 베틀 뒤쪽 위로 이어진 끈이 잡아 당겨졌다가 풀어질 때마다 들리는 베 짜는 소리는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특이하고도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베 짜는 모습과 누에명주실로 비단을 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폭의 예술적인 동작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 동네에서 베와 비단을 제일 잘 짰다고 소문이 났으니까.
아버지가 열다섯 되던 해 음력 동짓달 초여드렛날, 할아버지는 대포에 가마니를 짜러 갔다가 밀폐되다시피 한 방안에 숯불 피운 데서 가스가 나와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어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할머니는 외아들을 데리고 억척스럽게도 세상 속에서 살았다. 세상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다 해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공깃돌과 땅 따먹기 놀이 할 때 손가락을 굽혀 튕기는 사금파리를 동그랗게 다듬은 것이라든지, 심지어 자치기 막대까지 방 한구석에 신주단지 모시듯 잘 보관해 놓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옛날 얘기를 해주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우리 집안 내력을 노상 들려주었고, 특히 7대조부터 우리 집안의 가계 이야기라든지 조상님들과 얽힌 이야기, 할머니가 경험한 이야기와 이에 얽힌 동네 다른 집 이야기, 해방 전 함경북도에서 가장 유명한 전 포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때 나는 매일저녁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었다.
할머니가 얘기할 때 나는 할머니의 청수(聽手) 곧 지음(知音)이 돼 드린 것이다. 할머니가 입만 열면 나는 할머니의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 정도였다. 내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지금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매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라도 할머니는 처음 말하는 것처럼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날짜라도 잊어버리겠니? 아무 해 동짓달 스무 아흐렛날 저녁이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할머니는 17살 되던 해 할아버지와 혼인을 했다. 할머니의 친정, 즉 나의 진외가는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라는 곳이다. 바로 작년에 새로 생긴 양수 발전소 하부댐 저수지가 있는 윗마을 황이라는 곳이다. 지금은 구룡령으로 길이 아주 잘 나서 홍천에서 쉽게 넘어 미천골 입구 쪽으로 올 수 있지만 예전엔 타지 사람들 구경도 잘 못하는 산골이었었고 사철 맹수가 출몰하였으며 특히 겨울철에 눈이 많이 왔을 때에는 사냥꾼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이라 한다.
17살의 나이에 시집온 할머니는 아주 부끄러움이 많아 농담 잘하는 시어머니(나의 증조할머니)의 말을 듣고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애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하루는 시아버님 즉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 때 술이 아주 거나해서 들어왔다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술을 마시면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는 잠들지 않고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어느 날 증조할머니에게 술 더 가지고 오라고 술주정을 하는 바람에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이러이러하게 일러 17살 된 할머니가 술 대신에 쌀뜨물을 걸쭉하게 퍼서 가져다 드리니 증조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맛이 좋다고 들곤 주정을 더 심하게 했단다.
이튿날 일찍 증조할아버지는 고조모의 부름을 받아 몸을 생각하지 않고 과음하고 주정까지 한다고 야단을 맞곤 어색하게 증조할머니한테 다가와서는,
“어제 내가 주정을 많이 했나?”
하고 묻기에 증조할머니가,
“내 보다 보다 쌀뜨물 마시고 주정하는 양반 처음 보았네.”
하고 말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대뜸,
“아! 어제 저녁 새아기(나의 할머니)가 나중에 가지고 온 것이 쌀뜨물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내 주정이 좀 뜨더라!”
하고 농담을 했다. 할머니는 어른 앞에서 웃지도 못하고 혼자 장독대 뒤로 돌아 나가서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할머니는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며 소박하게 웃으면서 얘기해 주었다.
할머니는 친정 동네에서 일어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할머니 동기간이 4남매인데, 딸 형제가 셋이고 남동생이 하나였다. 나에게는 진외가 댁 할아버지가 되는 할머니 동생은 기운이 천하장사처럼 세었고 성함이 이갑산인데 깊은 산골 마을에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을 청년들과 같이 사냥을 자주 하곤 했다.
당시는 호랑이를 비롯해서 곰이나 산돼지 등 맹수도 많았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에 마을 청년들이 산골짜기에서 곰 몰이를 했다.
아오지 탄광에서 두 아들을 잃은 이모할머니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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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08, 08: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