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산에서 만날 가족을 그리며
이등성이 저 등성이에서 청년들이 함성을 지르니 곰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하필이면 진외가 할아버지 쪽으로 내리달아 드는데 급한 김에 설매(서림 지역 방언, 작은 모양의 사냥하기 편리하게 만든 지금의 스키와 비슷한 모양)를 미처 벗지 못하고 창으로 곰을 겨누고 공격했다. 그런데 곰이 창을 앞발로 여러 차례 세차게 치는 바람에 그만 창을 놓치고 마니 갑자기 무방비 상태인 할아버지에게 곰이 덥석 달려들어 얼떨결에 갑산 할아버지는 곰과 맞붙어 서로 끌어안고 뒤넹기질(엎치락뒤치락)을 쳤다.
아무리 사람이 기운이 세다 하여도 커다란 곰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는 정신없이 곰과 맞붙어 싸우다가 힘이 빠진 가운데 생각해 내기를 곰은 사람이 엎드려 있으면 달리 공격하지를 못한다는 말이 순간 생각나서 죽을힘을 다하여 눈구덩이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미련하다던 곰이 할아버지 등을 타고 덮친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양 어깨를 앞발로 내려치는데 온 내장이 다 흔들려 터지는 듯했고, 뼈마디가 모두 부서지는 듯했단다. 또 곰이 뒤통수를 치면서 양쪽 귀를 긁어 잡아당기며 손등을 긁었는데 머리 가죽이 긁혀 다 달아나는 것 같았고, 이로서 훗날 할아버지는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신경이 끊어져서 나중에도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마을 청년들이 설매(스키)를 신고 급히 모여들어 창질을 하는데 곰이 어떻게나 날래고 힘이 센지 모든 사람들이 찌르는 창을 다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산기슭을 뛰어 올라 도망을 갔다. 할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이 들이닥치는 기색이 있자마자 그만 기절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집에 간신히 업혀 온 할아버지는 보름도 더 앓았는데 “곰 잡아라! 곰 잡아라!” 하다간 한참 있다가 “오르고― 오르고―.” 하면서 허공을 향하여 연신 헛손질만 했다. 그 사이 마을 청년들이 곰이 흘린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곰은 어느 바위 구석에 늘어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잡은 곰의 웅담을 꺼내와 할아버지에게 복용시켰더니 그제야 할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의 작은집 할머니의 친정도 할머니와 같은 마을의 아래황이라는 곳(지금의 양수 발전소 하부 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할머니와는 아래 윗동네였는데 작은집 할머니는 경주 최씨였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멧돼지를 모는데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로 뛰어들었단다. 마침 앞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작은집 할머니의 친정아버지가 멧돼지가 달려오는 걸 보고서 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석에 세워 두었던 창을 들고 나와 급한 김에 날카로운 창끝을 싸맨 가죽집을 벗기지도 않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겨냥해 냅다 던졌는데 창은 날아가서 그대로 멧돼지의 등덜미에 꽂혔다.
그런데 가죽집을 벗기지 않아 창끝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치명상을 입지 않은 멧돼지가 등덜미를 몇 차례 흔들거려 창을 털어 버리더니만 부아가 나서 그대로 쏜살같이 창을 던진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어금니로 장딴지를 들이받고 번쩍 들어 공중배기로 휘둘렀다. 장딴지가 멧돼지 어금니에 꿰어져 두어 차례 공중에서 빙빙 돌려 흔들거리다가 저만치 떨어져 기절했다.
뒤따라오던 동네 사냥꾼들이 돼지를 잡긴 하였으나 그 이후 할아버지는 장딴지가 다 나았는데도 평생 다리를 절뚝절뚝하고 조금씩 절었다. 원래 방식대로 사냥을 한다면 창을 놓치지 않고 양손으로 들고서 가까이서 맹수를 공격해야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도 하면서 사냥은 아주 위험한 것이니 이담에 사냥하는 데는 아예 따라가지도 말고 산속에 혼자 다니지도 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바깥세상은 전쟁 직전의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한여름 저녁때 멍석을 깔고 할머니 옆에 누워 타들어가는 모깃불 연기를 쐬면서 은하수와 별자리를 살피기도 했다. 또 초가지붕 위에 핀 하얀 박꽃 주위를 맴도는 박풍을 쳐다보면서 나는 부모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할머니와 지냈다.
2. 김일성의 기습남침
1949년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1950년 봄철까지 김일성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농사일이나 집안 일 틈틈이 별도로 밤이면 그릇에 곡식을 담아 그 그릇 안에 있는 곡식 알갱이를 정확히 세어 한 그릇에 곡식 종류별로 몇 개씩이나 들어가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릇안의 콩도 세고 보리쌀도 세고 심지어 깨알까지도 세었다.
또 낮이면 소와 말먹이 풀을 베어 바짝 말려 온 동네마다 쌓아두곤 했다. 어느 정도 쌓이면 그 말린 마초(馬草 : 말먹이풀)가 강현 역 안에 우마차로 실려 왔다.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지게까지 동원하여 동네마다 법석을 떨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억새풀을 베다가 손도 베어가면서 참여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기운이 센 형들이 지게로 그 풀을 동네 공회당 마당이라든지, 각자의 집에 말렸다가는 강현 역 역사 앞으로 날랐다.
모아 놓은 마초더미가 초여름인데도 강현 역 이곳저곳에 산처럼 쌓여 보관되었다. 학교 한구석에도 마른 마초더미를 높다랗게 쌓아 놓곤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어다 말린 풀은 인민군들이 6ㆍ25가 일어나자마자 남쪽으로 내려갈 때 군대의 장비를 실어 나르는 우마차 끌 소와 말에게 먹일 풀이었다. 들판에 소와 말이 먹을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계절인데도 말이다.
2월 초순, 어머니는 아버지와 몰래 약속을 하고 여섯 살 난 여동생은 걸리고, 세 살 난 여동생을 업고 강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떠났다. 중간 간성 역 어디에서 아버지가 몰래 타고 원산으로 함께 간 것이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나만 고향에 남아 6월 이후 1952년까지 전쟁 한복판에 들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면서 전쟁 통의 모진 고생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두 여동생이 원산으로 간 뒤 이른 봄부터 우리가 하교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아저씨들이 군인아저씨들과 같이 나무로 깎은 총을 들고 매일같이 앞에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찌르면서 “이야! 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지르면서 훈련했다. 우리가 모여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면 선생이 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 훈련은 6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1950년 6월 초순쯤 아침에 등교해 보니 학교 교사 건물 양쪽으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집채보다 훨씬 커 보이는 탱크가 그물(위장망)이 씌워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난꾸러기인 우리들은 호기심이 생겨 탱크 가까이 접근해 구경도 하고 만져 보려고 했는데 선생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히 일러서 멀찍이 떨어져 신기한 듯이 쳐다보기만 하였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놀았다.
탱크의 크기가 너무 크고 앞의 포신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크고 무서우면서도 위력 있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8ㆍ15 해방 될 때 함경북도에서 소련군 탱크도 보았다는데 나이가 어려서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1950년 6ㆍ25가 나기 3일 전쯤 학교에 등교해 보니 홀연 탱크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6ㆍ25 당일부터 며칠 뒤까지는 38 이북 우리 고장 전 지역에서는 전쟁이 난 줄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까 6월 중순이 넘어서까지 인민군군이 많이도 38선께로 이동하더니만 6ㆍ25 당일 지금은 연어가 올라오는 남대천이 있는 마을 양양 읍께서는 38선이 그어진 인구리 훨씬 남쪽 방향 주문진 쪽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포 소리가 쿵쿵 하고 들렸다 했다. 인민군이 갑자기 남쪽으로 쳐 내려간 것이다.
1ㆍ4 후퇴 뒤에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피난 보따리를 지고이고 강릉 옥계 방향으로 피난을 갔을 때 강릉 경포대께 초당마을에 머물렀을 때 들은 얘기이다. 그 동네 어른들이 말하기를, “6ㆍ25 그날은 공휴일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북쪽에서 인민군대들이 몰려 내려온다는 말들이 들리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멀리 피난도 못가고 옥계 쪽으로 줄행랑을 쳐 백봉령 산골로 숨어들어 그곳 산골마을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마을로 돌아 왔노라”고 하면서 “양양서 아주머니들이 어린아이 데리고 여기 까지 짐들을 지고 내려왔으니 고생이 참 많겠다.”고 위로했다.
바로 38° 이북 우리 산골 마을이 있는 강현면에서는 6월 25일 직후엔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우리 모두는 학교를 다녔다. 사나흘 여를 지나서부터인가 예쁜 여자 담임선생은 교실에서 우리를 앉혀 놓고 기쁜 얼굴로 칠판에 남조선 지도를 그리면서 분필로 화살 표식의 줄을 그어가며 목청을 높여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게 말을 하였다.
“어린이 동무들 ! 우리의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대원수, 우리 장군님의 드높으신 영도로 지금 남조선 해방전선에 뛰어들었어요. 며칠 전 여러분이 학교 양 옆에 있는 땅끄(탱크)를 보았지요? 바로 그 땅끄를 앞세우고 우리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힘차게 내려가고 있어요.”
말하자면 인민군이 남쪽으로 쳐내려갔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날마다 학교엘 가면 서울도 해방, 서해안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도 쪽으로 모두 해방, 칠판에다 분필로 많은 줄을 그어가며 나중엔 중부지방 강원도 동해안 해안을 따라가며 해방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춘천이란 곳은 인민군대가 뺑뺑 둘러싸기만 했지 해방 시켰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여기저기 해방시켰다며 그렇게 신나게 설명하는 담임선생은 여느 때와 아주 달랐다. 말끝마다 “자! 동무들 모두 박수!” 하면 그때마다 우리 반 급우들은 좋은 일 났다고 “야―!” 소리를 지르며 박수 치느라고 덩달아 신나서 야단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밖엘 나가 보니 매일 같이 전교생의 얼굴들이 설 명절에 웃음 가득한 그런 얼굴 표정 같았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쳐 내려간 것을 비로소 모두 알게 되었다.
“아니 싸움 났다는 말이 사실인가?”
“언제부터 싸움 났다는 거야?”
“학교에 놔뒀던 땅끄가 보이지 않던 그때 모두 남쪽으로 쳐내려갔대”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3. 인민재판
전쟁이 나고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저녁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인민위원장 주도로 인민재판이 뻔질나게 벌어졌다. 우리 아랫집 종덕 아저씨도 인민재판을 받고 전신을 두들겨 맞아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끌다시피 하고 다녔다.
그 이유는 종덕아저씨의 형 종순 아저씨가 남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이었다. 종순아저씨가 얼마 전에 남쪽 강릉 쪽으로 공산 치하를 피해 월남하였는데 동생 되는 순박한 종덕아저씨를 지목하여 한 동네 성씨 다른 집안 패거리가 인민재판이란 명목으로 뭣도 모르고 모여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경우 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것이다.
난데없이 갑자기 억울하게 얻어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저씨는 그날 저녁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옮겨졌다. 그 집 가족들이 울고불고 야단이 났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런 일이 인근 여러 동네에서 비일비재했다. 무법천지였던 세상이다.
날짜가 지나면서 철없는 우리 친구들은 남쪽 해방이고 전쟁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와서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평화로이 놀러 다니기만 했다. 학교에서 전쟁에 대한 얘기만 가끔 듣고 다닐 뿐이었다.
내게 진외가 집으로 8촌이 되는 평창 이씨 집안의 병시 형이 말했다. 6월 하순 우리 동네 사람들이 6ㆍ25 전쟁이 난 줄도 모르던 그 시기에 나의 진외가 마을 형편은 우리와 아주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곰이 출몰하고 멧돼지가 산골을 누비는 서림마을 나의 진외가 동네에서는 6ㆍ25 당일 벌써부터 인민군이 삽시간에 진격해 들이닥쳐 평화로운 산골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38선에서 남쪽으로 겨우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남설악의 고산지대 마을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하늘밑 첫 동네 미천골 마을도 모든 파괴 상황이 예외는 아니었다. 한동네에 사는 전주이씨 집안의 청년들이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그중 몇 명은 전쟁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뒤 다시 이번엔 국군으로 또 입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인민군도 되었다가 국방군이 되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후일 국군의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들 중 몇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산골마을에도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란 무법천지의 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희생당했다고 한다. 난데없이 그 순박한 산골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모두 깨져 버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양쪽 군대가 번갈아 들어오면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군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안 해도 될 신고를 일부러 해 가면서 사는 환경으로 바뀌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병시 형네 집 할아버지는 당시 연세가 많아서 항렬로 형에게 숙항이 되는 아저씨들이 교대로 지게에다 모셔 지고서 강릉 아래 맹방까지 나갔다 왔다 한다. 병시 형도 경상북도 경산까지 피난 나갔다가 고향 수복 후 돌아왔다. 나의 작은댁 할머님 친정 아래동네 ‘황이’라는 곳의 경주최씨 마을에서도 이 같은 처참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지금도 산골 여기저기 6ㆍ25 이야기만 나오면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끔찍한 마을 파괴 현상에 대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는 분위기이다. 얼마나 처참한 당시의 일들이었겠는가.
내 어머니의 고종사촌동생 중 김성호라는 아저씨가 있다. 성호 아저씨의 어머니는 바로 설악동 상도문에서 절만 짓는 대목으로 유명한 나의 외할아버지의 여동생이다. 나에게 외갓집 고모할머니가 되는데 할머니 가족은 해방 후 금강산 온정리에 살다가 곧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성호 아저씨는 6ㆍ25때 서울을 사수하던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6ㆍ25가 나고 3일 뒤 새벽에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일부 국군들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성호아저씨가 속한 부대도 서울을 지키다가 후퇴를 하게 되었다. 27일 자정이 넘어서 성호아저씨는 지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데 인도교 전체가 남쪽으로 향하는 서울 피난민 행렬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뒤섞여 천천히 인도교를 건너는데 서울역 부근에서는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고, 피난민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꽝! 꽝!”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다리 위에서 남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한강 다리를 폭격해 끊는 줄도 모르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까마득한 다리 밑 물속으로 폭포수 떨어지듯이 모두 떨어졌다. 성호아저씨도 밀려 앞으로 나가다가 차에 탄 채로 경황없이 다리 밑 강물로 떨어졌다.
성호 아저씨가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여의도 샛강 얕은 물가였고 동료들과 지프차는 어떻게 된 줄도 모른 채 심하게 다친 몸을 이끌고 요행히 부대를 찾아갔다. 전투를 할 수 없어서 대구 육군병원에 부상병으로 장기간 입원을 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의가사 전역이 되었는데 다친 몸이 완쾌되지를 않고 늑막염으로 내내 고생을 하였고 다른 합병증까지 도져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는 유화를 잘 그리는 화가였다. 마음이 인자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노래도 잘하였다. 당시 아저씨에겐 미봉, 용기, 미선 어린 삼남매가 있는데 어린 시절 그들은 아버지 잃고 어머니와 고생을 하며 성장했으나 모두들 재능이 뛰어나고 또 성실하다. 특히 미선 여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재원이다. 지금도 성호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 아저씨의 외사촌 누이인 내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6ㆍ25의 아픔이 그렇게 클 수가 있었는가 하고 모두들 눈시울을 적신다.
인민재판의 狂風이 몰아닥친 마을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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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13, 08: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