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 항공기의 폭격과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내가 겪은 6.25 ⑥ / 負傷입은 패잔병들의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다!
1. 양양 군청 철수 이동

6ㆍ25, 그 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한번은 내 또래 동네 친구들과 노는데 두세 살 많은 형들 몇이서 우리들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 동네 윗 개울 마을이 있었는데 우리 친척 먼 집안 종대 아저씨(아저씨는 귀가 어두워 고생하다가 작년 2006년 여름에 타계하였음)가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멋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그 형들이 과수원 쪽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우리 보고 개울가에서 망을 보라고 하고선 복숭아 서리를 하러 울타리 밑을 걷어 올리고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몰래 따는 것을 처음 보는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망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개울가 커다란 돌 바위 뒤에 숨어 오금도 못 펴고 납죽 엎드려 있는데 용감한(?) 개구쟁이 형들이 훌떡 벗어젖힌 윗도리에다 복숭아를 수북이 따왔다. 나도 한 개를 주어 받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재미있어 하면서 잘도 먹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보다 가슴이 더 뛰어 한입 물어 보았을까? 뒤로 도저히 먹지를 못하고 그저 얼이 빠진 채로 멍청히 들고만 있었다.

모진 훈련(?)을 해보지 못한 결과라고나 할까?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그 복숭아를 논 한가운데 팔매질을 해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복숭아 맛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냥 가지고 올걸, 아니지 던져 버리기를 잘했어.’ 하고 뒤죽박죽 생각을 하다가 정면 돌파를 하자는 생각이 번쩍 났다. 밖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할머니 몰래 윗방의 쌀독에서 보리쌀 세 사발(지금에 생각하면 너무나 작은 분량이었다) 가량을 자루에 넣고 큰 길 따라 위 개울 종대 아저씨 댁으로 한참 올라갔다.

마당 문을 들어서서

“아저씨!”

하고 부르니 마침 마당에서 일하던 아저씨가,

“찬수 네가 웬일이냐?”

하고 물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 제가 복숭아가 먹고 싶어 왔는데 이 보리쌀과 복숭아를 바꾸어 주세요.”

하고 말했다. 세상에 나서 나는 처음으로 흥정(?)을 해본 셈이다. 한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얘, 찬수야, 너 마침 잘 왔다.”

하더니만 보리쌀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자루에 수복하게 담아 주었다. 쉽게 메고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는

“원산에 간 네 아버지가 고향에 온 이듬해에 우리 집 복숭아나무 전지를 잘 해주어서 이렇게 열매가 잘 달리는데 한 번도 은혜를 못 갚았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네가 왔구나.”

하면서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 내 생각에 한 너 댓개 정도이거니 했는데……. 보리쌀은 그대로 자루에 두고…….

나는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어안이 벙벙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그냥 부자 된 기분으로 복숭아가 들어있는 자루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아직 밭에 일하러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큰 고민에 빠졌다. 할머니 몰래 보리쌀을 퍼낸 것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나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제일 나쁜 사람이니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치는 말을 너무나 잘 이행하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도 그러하였으리라.
저녁에 돌아온 할머니에게 나는 숨김없이 낮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다 말했다. 형들이 남의 집 복숭아를 몰래 따먹으러 가는데 따라갔다가 일어난 일과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 이러이러 했노라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는 “그랬더니 이렇게 복상(복숭아)을 많이 주시대요.” 했다. 다 듣고 난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만 꼭 껴안아 주었다. 복숭아를 보며 할머니는 원산의 아버지 생각을 또 한 번 하였으리라.

그 당시 예로부터 내려오는 농촌 풍습은 청소년들의 경미한 서리인 경우에는 알고도 모르는 척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주인이 때에 따라 그 광경을 보았을 때에도 멀리서 헛기침하며 “어험! 이놈들!” 하면서 들릴 듯 말 듯 소리쳐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두기도 하던 때였다. 적당히 묵인하는 관습, 즉 일종의 교육적인 배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린 청소년들이 바른 교육을 받고 그런 행위를 스스로 하지 않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사회 풍습이라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는 미풍양속이라 볼 수도 있는데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이후 할머니는 손자 자랑하실 일이 있으면 어디 가든지 가끔 그 복숭아 얘기를 꺼냈다. “얘가 그런 애라우!” 하면서……. 할머니가 80세가 넘었고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30이 넘어 장가들어 아이를 둔 뒤에도 이웃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그 해 8월초, 남쪽 읍내에 있는 양양군청의 직원들이 북쪽 우리 마을로 피해 와서 동네 집집마다 자리 잡고 군청 사무를 보았다. 갑자기 군청이 도심지로부터 시골구석으로 피신해 숨는 꼴이니 마을 전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남조선 해방시키러 나갔다는 이야기도 별로 신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군청에서 동네 집 뒤 대나무밭 산비탈에 여기저기 방공호를 파는데 양양 철광산에서 쓰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와서 터뜨리면서 굴을 팠다. 지금도 내 고향 마을 집 뒷산엔 방공굴이 여럿 그대로 남아 있다.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려고 길게 이어 놓은 남포 심지들이 나중에 국군이 주둔했을 때도 남아 있었다.

이때 나는 고금(학질)이 걸려 무진 고생을 했다. 하루는 열이 나면서 부쩍 아팠다가 다음날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멀쩡했다. 군청 직원들이 금계랍(학질약)이란 노란 알약을 줬는데 약을 먹고 나서도 쉽게 낫지를 않았다. 참으로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약을 많이 먹으면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한두 알이 정량인 알약을 네다섯 알이나 한꺼번에 먹었다. 그날 밤 밤새도록 꿈속에서 캄캄한 낭떠러지에서 한도 끝도 없이 떨어지다 올라가고, 떨어지다 올라가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거의 죽기에 이르렀고, 할머니는 늘어져서 정신을 잃은 나를 안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얼마 뒤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후일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전문가의 지시 없이 약을 오남용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경험으로 알았다.

우리들은 전쟁이 한참 치열했던 10월 이후와 그 이듬해 1ㆍ4후퇴 뒤에 피난 갔다 돌아온 여름철엔 그 광산용 폭약에 잇는 줄을 개울에 가지고 나가서 흔하게 널려있는 장총이나 기관총 탄피에서 총알을 빼고 화약을 그대로 둔 채 다이너마이트로 이어지는 심지를 화약이 있는 곳에 들이밀어 넣고는 돌로 탄피 입구를 꼭꼭 우그러트려서 개울 큰 바위 밑에 집어넣고서 멀리서 심지에 불을 붙여 그 탄피가 터지게 하여 큰 바위가 들썩할 정도였고 물위로 둥둥 뜬 고기를 건지는 놀이를 하였으니 실로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폭약을 터뜨리고, 고기 잡는 재미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몰랐다. 여름방학이 다 지날 무렵, 어른들이 서로들 삼삼오오 모여서 쑤군덕거렸는데 그 때부터 우리들도 학교를 나오지 말라고 휴교령을 내려 학교도 쉬고 좋아라고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에서 가재 잡고 멱 감으면서 놀기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38선 남쪽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일성이 저지른 불법 남침으로 갑자기 예상도 못하는 전쟁이 터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목숨이 벌레보다도 못하게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이상한 일만 자꾸 있었고, 동네 인민위원장, 여맹위원장 등 새빨간 사람들이 성난 사람처럼 긴장한 안색으로 다녔다.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우리 집안 친척 어른들과 나이 든 형들은 마음속으로 무언가 좋은 것을 기다리는 그런 분위기였다.


2.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양력 8월 초순이 좀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위 개울 물레방앗간 집 바로 위 지소 건너편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까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우리 모두가 그 소리에 놀라 2.5km 쯤 떨어진 강현 역 쪽(지금의 속초 공항 아래 바닷가 쪽)을 내려다보았는데 날개가 엄청나게 큰, 이제까지 처음 보는 비행기(B-29) 두 대가 바다 쪽으로부터 강현 역 상공 하늘을 배회하더니 강현 기차역 상공에 낮게 내려와 시꺼멓고 커다란 쌀가마니 정도의 기다란 물체를 몇 번 떨어뜨리고는 바다 쪽으로 다시 유유히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떨어지는 시꺼먼 물체가 우리 눈짐작으로 땅에서 상공으로 10m 정도 보이더니 홀연 없어지면서 역 주변에 갑자기 연기가 풀썩 하고 일더니만 조금 있다가 “쿠웅!”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천둥치는 소리와 흡사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먼 곳까지 땅이 흔들렸다.

우리들은 너무 놀라 금방 죽을 것 같아 옷이고 뭐고 입는 둥 마는 둥 홀딱 벗은 채로 맨발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반격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지원하는 유엔군 비행기(미국 비행기)가 강현 역뿐만 아니라 양양 철다리, 물치의 쌍천 철다리 속초 역 등 그렇게 올라가면서 원산 흥남 그 이북까지 폭격을 했다고 한다.

앞에 뛰는 형들이 비탈길 솔밭 야산으로 한 100m 쯤 떨어진 방공호로 치달리는데 모두 옷을 벗어 한손에다 거머쥔 채로 20여 명의 사내애들이 홀딱 벗고 줄지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들고뛰어 치달리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일이나 그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사가 걸린 판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모두 컴컴한 방공호 안으로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며 들어가서 마음을 진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방공호 안쪽으로 들어가던 형들이 또 한 번 놀랬다. 우리도 웅성거리며 그 안쪽을 보니 방공호 바로 아래에서 멱 감던 윗동네 누나들과 우리 또래 여자 애들이 먼저 피신했는데 우리 일행이 뒤미처 들이닥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서로 어색하게 놀랬다. 밖으로 나갈 수 도 없고 옷도 챙겨 입지도 못하고 서로 웅크리고 눈만 멀뚱거리고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지금 다시 생각하니 배꼽을 잡고 웃을 그런 장면이었다.

한동안 진정이 된 뒤 우리도 굴 밖의 기미가 조용해 밖으로 나갔다. 또 동네에선 그동안 조용히 숨어 있던 어른들이 비행기가 날아간 지 한참 지나서야 밖으로 나와 자기 집 아이들을 찾아 목청 높여 불러대느라고 온 동네가 고함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강현 역 역사는 계속 타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무시무시하게 치솟고 있는데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지나 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강현 천 기차 다리가 폭격으로 끊어졌고 역사는 흔적도 없어졌으며 역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 놓은 마초더미(말먹이 풀) 등 전쟁 지원용 군수물자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다 타버렸다. 함경도에서부터 기차로 실어온 전쟁 지원물자들이 몽땅 다 타버린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군청요원 정치보위부 인민위원, 여성연맹위원(여맹위원) 등 동네 각 집에 숨어서 사무를 보던 집단들이 보따리를 싸기 시작 하더니 그날 밤중에 동네 사람들 몰래 우리 동네를 떠나 북으로 철수하고 동네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다. 원산의 내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죽었을 것 같은 무서움 때문이라 하였다.

가끔 하늘에 검정색 정찰기가 날아 다녔는데 우리는 그 정찰기를 “뿌웅―” 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방구 비행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방구 비행기가 제일 무서웠다. 폭격기보다도 더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 비행기가 떴다 하면 곧이어 공격용 ‘쌕쌕이(제트기, 훗날 들은 얘기인데 호주비행기라 했다)’가 순식간에 날아오기 때문이었다.

방구 비행기가 뜨면 2, 3분도 못되어 어디서 오는지 엄청나게 빠르고 “샤아악―” 하는 소리를 내는 쌕쌕이가 몇 대 날아와 양양 읍내 상공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폭격을 하고, 어떤 때는 속초 북쪽으로 날아가는데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우리 마을 논에도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땅에서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땅 속까지 흔들려 방공호 땅굴 천정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비행기가 가고 나면 우리들은 그 폭탄이 떨어져 땅이 넓고 깊게 움푹 팬 곳으로 달려가 구경하며 폭탄의 위력에 놀라기도 했다.


3.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9월도 중순이 되어갈 무렵부터 우리 동네에선 매일같이 비참한 구경거리가 연일 생겼다.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씩씩하게 나갔다고 자랑하며 기세등등하던 인민군 전사들이 기가 다 꺾여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 북쪽으로 후퇴하는 모습이었다. 국군의 진격과 UN군의 공습을 피해 해변 큰 대로로 퇴각하지 못하고 양양에서 내륙 송암산 아래쪽으로 2km 떨어진 화일리에서 회룡리로 이어지는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 후퇴하고 있었는데 우리 동네를 가로질러 퇴각하는 것을 보는 그런 구경거리였다.

더러는 높다랗게 말을 탄 남녀 장교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딱쿵장총’과 ‘따발총’을 거꾸로 맨 그야말로 초라한 걸인행색의 군대 패잔병 도보행렬이었다. 부상병이 어찌나 많은지 그 처참한 모습은 어린 우리들도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던 생각이 난다. 행군 중이었는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들것에 실려 가는 군인도 부지기수였다.

한쪽 팔이 없는 군인, 양쪽 팔 모두가 없는 군인도 있었고, 들것 위의 군인들은 다리가 없는 군인들이었다. 한쪽 다리를 다친 군인들은 엉성한 목발을 하고 걸었고, 어떤 여자 군인은 배가 아주 불러 곧 출산할 때가 되었다고 동네 누나들이 손가락질로 배부른 흉내를 내면서 킥킥거리면서 쑤군거렸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클까말까 하는 어린 군인이 자기키보다 더 긴 장총을 질질 끌며 가는 모습도 많았다. 한 마디로 처절한 지옥행렬 같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했다.

동네 누나들과 아주머니들은 물동이를 가져다가 지나가는 인민군들에게 물도 떠 주곤 했는데, 인민재판을 받아 몸이 성치 않은 종덕 아저씨와 동네 아저씨들은 물을 떠다 주는 사실을 알고는 화가 나서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을 향해 “그깟 놈들에게 무슨 물을 떠다 주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 바람에 물 떠다 주던 누나들은 훌쩍훌쩍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도 우리들과 야단맞은 누나들은 어린 동생들을 등에 업고 점심 먹을 때만 제외하고, 어떤 때는 점심도 걸러 가며 하루 종일 길가에 서서 패잔병 행렬을 구경하다가 지쳐서 목말라 하는 패잔병들에게 또 물을 떠다 주었다. 패잔병 행렬은 보름도 넘게 계속 되었다.

하루는 패잔병들의 퇴각 행군이 우리 동네에서 멈추어 하룻밤을 지내고 간 일이 있었다. 집집마다 인민군 여럿이 빼곡하게 찼는데 멀쩡한 군인들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상처가 심하게 난 부상병들이 큰 문제였다. 우리 집에도 부상병들이 아랫방 윗방에 묵었는데 윗방의 부상병은 팔다리가 모두 다 절단이 나서 수족을 못 쓰게 되어 그냥 방바닥에 누워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고함만 지르고 있었다.

나는 몹시 겁에 질려 그 아파하는 인민군 부상병 아저씨를 힐끗 힐끗 건너다보았다. 할머니가 감자를 삶아서 나더러 갖다 주라고 해서 삶은 감자를 뚜가리(나무로 깎아 만든 그릇)에 담아서는 뜨겁다고 야단치는 그 아저씨 입에 “후― 후―” 불어가며 넣어주던 생각이 난다. 몸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코를 찌르고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입에다 넣어주는 감자를 허겁지겁 받아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되면 어린 군인들이 상처의 고통으로 밤새도록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엉엉 우는데 할머니와 나는 그저 무섭기만 했다. 할머니는 나를 꼭 안고 독백하듯 되뇌었다.

“에 휴―! 전쟁은 하지 말아야지! 제발 전쟁은 하지 말아야지 저 어린사람들이―”

하면서 어린 군인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던 생각도 난다. 돌이켜보면 그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청년들은 순박하고 선량한 우리 땅의 같은 이웃들이었는데, 김일성의 욕심에 하수인들이 되어 전쟁 통에 나아가라면 나아가고, 물러나라면 물러나는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그렇게 동족을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내몰리어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니…….

젊은이들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처참한 전투지역으로 몰아넣는 전쟁의 상흔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하고 또 무서운 것들뿐이었다. 이런 행렬이 네댓 차례 지나가고 또 며칠간은 조용하였다. 9월 말경 동네 아저씨들이 수군대며 국방군이 곧 들어온다고 하며 해방이 된다고 했다.

10월이 되기 바로 며칠 전날인가, 한밤중에 아래 동네에서 얼마 전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나이 많은 동네 형이 있었는데, 전쟁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다고 갑자기 고함치며 다녔다. 워낙 겁에 질린 동네사람들이라 서로가 원인규명이나 따질 새도 없이 혹시나 하고 온 동네가 간단한 보따리만 챙겨들고 한 군데 몰려 갑자기 엄청난 피난 행렬이 되었다. 아래 복골 절벽 아래 강현천변으로 이어지는 넓은 벌판에 모두 모여 밤새도록 숨어 덜덜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음날 모두 맥없이 기진하여 뿔뿔이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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