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군과 인민군간의 치열한 交戰

내가 겪은 6.25 ⑦ / 악랄한 金日成 추종자들의 행패
1.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9월 마지막 날 오후 동네 아저씨들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알려 왔다. 내일 물치 장거리에 모두 국방군을 환영하러 나간다고 했다. 준비물은 태극기인데 네모난 흰 종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동그라미 가운데 선을 그리고 위에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 동그라미 주변 네 모퉁이에 비스듬히 검정색으로 세 개씩 선을 그려서 손에 들 수 있는 깃발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농사만 짓는 우리 동네 많은 사람들이 글자를 배우지 못했고,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나에게 만들어 보라고 하여 내가 대충의 얘기를 듣고 할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를 생전 처음 그리게 되었다. 방바닥에 종이를 깔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뚜가리를 엎어 놓고 연필로 사발 언저리를 따라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리고 대충 들은 말을 근거로 태극기를 그렸는데 제일 가관인 것은 원 한가운데는 원의 중심점을 지나는 선이 직선이었고 위에는 붉은색 아래는 푸른색 이런 정도였다. 동네 누나들이 물감을 타고 나는 그리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기대하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참으로 우습기가 짝이 없는 형국이었다. 내가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이 그려 도덕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태극기를 보았는데 규칙에 맞게 원칙대로 그린 태극기였다. 아주 정교히 잘 그린 것을 보고 내가 그리던 그때를 생각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도 교사에게 제출한 것 중 제일 잘못 그린 태극기도 그때의 나의 태극기에 비교하면 최고로 우수한 태극기라고 할 만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태극기가 아닌 태극기를 그린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린 태극기를 보고 “찬수가 태극기를 잘 그린다.” 하면서 너도 나도 태극기를 그려 달라는 바람에 신바람이 나서 여러 장의 태극기를 그려 드렸다.

태극기의 음양, 사괘는 처음부터 모르고 그저 네 귀퉁이에 짤막한 굵고 검은 줄 세 개씩을 그려 가운데 원을 둘러싸고, 배치 등 규격이 한 군데도 맞지 않은 그런 태극기였지만 갑자기 태극기 제작의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한편 생각하면 그때의 태극기는 참으로 나의 나라사랑 정성이 가득 담긴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태극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튿날 10월 1일, 김일성이 기습 불법 남침으로 6.25가 난지 석달 뒤에 대한민국 국방군이 38선을 처음으로 넘어 공산치하로부터 내 고향 양양을 해방시킨 날이다. 그날은 아주 쾌청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물치 장거리터에 내려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내려갔다. 학교 운동회 날 등교하던 기분보다도 더 신나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양양 읍내 쪽 낙산사 어귀에서부터 길 양쪽으로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들 마음이 들떠서 군대 행렬이 오지 않았는데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덩실덩실 춤들을 추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의 물치 농협 앞쯤 되는 곳에 모여 있었다. 나에게 증조모뻘 되는 일가의 좀 젊으신 쉴집(택호) 할머니는 벌써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들떠 있었다. 8ㆍ15 해방이 되고 얼마 뒤 그 할머니의 아드님 영배, 진배, 갑배 삼형제가 모두 월남하여 국방군 헌병이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동네에서 비밀리에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국방군이 저기 온다고 술렁거리더니 맨 처음 나팔을 불고 큰 북을 쿵쿵 치는 군악대 차가 나팔소리도 우렁차게 천천히 들어오는데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팔을 부는 군악대 아저씨의 번쩍번쩍하는 철모가 아주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우렁찬 군가가 온천지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하늘을 찌르는 기개! 핫바지 입고 환영 나온 촌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우리 국군의 위용! 북진하면서 부르는 국방군의 군가를 따라 어느덧 우리들도 그 가사를 금방 익히고 그 길고도 긴 진군 차량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고 외치며 함께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 군가! 그 만세 소리! 그 환영! 자유의 감격! 암울한 공산 치하에서의 해방! 8ㆍ15 광복 때는 이보다 더했다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어른들만 쳐다보고 그저 좋아하기만 했으나 어느 정도 철이 든 뒤에도 생각해 보면 이때의 감격은 내 평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희의 장면이었다. 아마 암울했던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에 포근히 안긴다는 감회 때문이었으리라.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50년 10월 1일, 이 날이 우리 대한민국의「국군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6󈸩 새벽 불법 기습남침이 있은 후 3개월 하고도 6일이 지난날에 우리 대한민국 국방군은 서해 옹진반도로부터 동해 양양군 현남면 기사문리에 닿는 38선에 이르기까지의 전 전선에서 쫓겨 가는 인민군을 격파하면서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하여 북진 한 날이다. 인공치하에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대한민국 국군이 올라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린 우리 주민들을 구출하여 해방시킨 감격의 날이었던 것이다. 삼팔선을 돌파한 10월 1일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나라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하니「국군의 날」이 아무렇게나 제정되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던 옛 일이 다시 떠오른다.


2. 국방군의 최초 38선 돌파와 김일성 폭정에 시달린 북한주민의 환호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 이후 내가 62년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한 뒤에도 지금까지 군가와 행진곡만 나오면 내 몸은 기쁨과 용솟음치는 애국의 기상이 몸 안에서 서서히 일어남을 느낀다. 북진하는 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게 간혹 여러 가지 물건을 던져 주는데, 태극기를 흔들던 내 가슴 앞으로 종이 뭉치가 날아와 얼떨결에 받아 뜯어보니 화랑 담배 한 뭉치였다. 담배를 피우는 내 할머니는 나중에 피워 보고 맛이 좋다고 하면서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었다.

쉴집 할머니는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가운데 길 쪽으로 나가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연신 “어서 오너라! 어서 오너라! 자꾸 자꾸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일 뻔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한참까지도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는 남쪽에 가서 국방군이 된 세 아들을 기다리는 열정은 우리 어머니들의 모성과 같으리라. 기다리던 아들들이 온다는데 신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머일 이모할아버지도 희색이 만면하여서 이상하게 매달고 다니는 상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뻐했다. 온 마을 동해안 우리지방의 갑작스런 대축제였던 것이다.

인민군이 다 퇴각하였다고 하는 늦가을부터 우리 마을은 며칠간 평화롭게 지냈다. 남쪽으로 월남했다가 귀향한 동네 아저씨들이 여기저기에서 의기양양했고 그 가족들은 어깨를 재고 큰소리치면서 다녔다. 한편 이북으로 도망간 인민위원장 친인척 등 동네에서 인민재판 한다고 이웃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패거리 빨갱이들이 모두 다 이북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의 먼 친척들은 혹시나 하여 주목을 받을까 보아 무슨 다른 잘못도 없는 듯 하였음에도 마을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곤 했다.

인민재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실제로 본 인민재판의 광경은 이렇다. 동네 회관 마당에서 모임이 있다고 동네에 알리면 그날 어른들은 모두 다 나가야 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더러는 나갔고 동네 형들은 거의 다 나온다. 어린 우리도 야밤에 회관 마당에 쪼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구경을 했는데 갑자기 빨갱이 아저씨가 동네에서 순하기로 소문난 아저씨들 몇을 끌어 연단 앞에 세우더니 동네 어른 한 사람씩을 지목하면서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하며 사설을 미리 늘어 놓는다.

빨갱이들이 거론한 동네 사람들은 평상시 그분들과 농사를 지으며 다정하게 지냈고, 옛날은 거의 동네가 집성촌이므로 서로를 잘 안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말들을 늘어 놓으며 엉뚱하게 갑자기 “그렇지요? 혼이 나야지요?” 하고는 다 같이 “찬성박수!” 하면서 떠들면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지 않고 두리번거리면서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만 본다. 동네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동의도 하지 않는 이런 분위기에서 마을 사람 군데군데 들어있던 빨갱이 앞잡이들이 동네 사람 들으라고 저들끼리 일방적으로 “옳소! 옳소!” 하고 그들만이 박수를 요란스럽게 쳐댄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 모두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불안한 기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쫒아 나와 서 있는 아저씨들을 한사람씩 개 패듯이 두들겨대고, 아저씨들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 되었다. 어린 우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놀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고함을 친다.

“동무들은 어서 집으로 가라!”

비명소리가 나오든 말든 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런 식의 무법천지의 일로 6ㆍ25 전후의 우리나라 전 강토의 국민들은 억울하게도 깊은 슬픔에 젖었었다.

소위 저 악랄한 김일성 추종자 빨갱이들이 어진 농촌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모아놓고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는 인민들이 원하는 대로 올바르고 합법적인 재판을 하였다고 널리 알린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인민재판이란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설치는 당시의 현상이 이렇게 무법천지였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아주 원시적인 수단으로 몇 사람을 의도적으로 겁을 주어 동네사람들 전체가 꼼짝 못하고 그들의 말을 순순히 잘 듣게 할 목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국군이 38선 이북 북괴 공산치하에서 억눌렸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물치 장거리를 차량으로 지나 속초와 간성께로 행군한 그 이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는 다시는 전쟁이 없고 서로 맞대고 총질을 하는 일이 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 다 북으로 퇴각해 인민군이 더 이상은 없는 줄 알았는데 패잔병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멀리 낙동강까지 진격해서 대한민국 국군과 싸웠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앞서 우리 마을을 지나간 인민군 숫자들보다 훨씬 많게 보름여나 양짓말 소금재 고개를 줄을 이어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을 아저씨들이 말하기를,

“지금 저 인민군들이 훈련을 잘 받은 진짜 무서운 군인들인데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모두다 국방군에 얻어맞고 저렇게 꼴사납게 거지행색이 되어 도망가네!”

하였다. 참으로 묘한 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국군은 모두 원산 쪽으로 치달으며 진격하는데 그 뒤로 인민군 패잔병들이 걸어서 이북으로 우리 국군들을 뒤따르듯이 해안 도로 큰길을 피하여 시골길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줄을 지어 퇴각을 하다니…….
그러다가는 어떻게 맞닥뜨리면 멀리서 위협사격을 하며 총성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그저 어물어물 서로 조용조용 넘어가는 그런 형국도 있었다 한다.

패잔병들이 올라오다가 양양 낙산 해수욕장 남쪽 남대천 하단을 중심으로 갈벌 넘어가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쑤군대었다. 민간인과 군대 할 것 없이 무수한 사람이 거기서 죽었다는 바람에 낙산사 북쪽 강현 사람들은 갑자기 보따리를 싸가지고 북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해변을 따라 멀리 갔다가 온 사람들은 고성 금강산 지나 통천까지 갔다 왔다고도 했다.

해변에서 조금 내륙에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도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고약한 군대들이 이북으로 도망가며 동네 사람들이고 국방군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다는 얘기에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이 크게 놀라 갑자기 피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어둑한 저녁 때 소금재 고개를 넘어 북쪽 넘은들(넓은들이라고도 한다) 벌판을 지나 쌍천 벼락 바위를 거쳐 옹기점 중도문 뒷산 너머 청됀(청대리)까지 그날 밤 내내 북쪽으로 피난보따리 들고 이고 지고 피해 갔다.

청됀까지 갔는데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을 못 간다는 것이다. 지금의 속초 서남쪽으로 되린덕(도리원이라고도 함), 지금의 동우대학 동쪽 밑 벌판에 국방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북으로 올라가는 피난민을 보면 총질을 해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네에서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 저녁, 청됀 북쪽 산기슭에 후퇴하는 인민군 패잔병 부대가 마을로 들이닥쳤다. 산기슭과 마을까지 웅성거렸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인들이었고, 부상당한 군인들은 마을 집집마다 배치되어 밤새도록 치료하며 아우성치고 북적댔다. 이로써 양쪽 군대가 대치한 한가운데에 놓인 피난민과 동네 사람들은 그저 전전긍긍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인민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보따리에 들고 온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선선히 내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와 호각소리가 급하게 요란스레 나더니만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되린덕 벌판 배나무골 쪽으로 모두 몰려가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국방군의 진지를 뚫고 후퇴하려는데 국방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바람에 필연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때 산꼭대기까지 피해 가 숨어 있으면서 그 치열한 전투를 직접 목격하였다.

이상한 현상은 인민군은 북쪽을 향해, 국방군은 남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왔다고 좋아하던 피난민이 국군의 공격을 받는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어 마을 뒷산 방공호에 뿔뿔이 숨었다. 지금은 전쟁 영화에서 보는 그런 싸움이었는데 내가 생각하기는 내가 본 그때의 전투 장면이 더 무서웠고 양쪽에서 쏘아대는 각종 총소리는 참으로 무섭고 더 컸다고 생각된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여 지금도 코끝에 그대로 묻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몇 차례인가 싸움은 반복되었고 그날 밤 인민군들은 속초 쪽 영랑호 서쪽을 따라 북으로 후퇴하였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방군이 패잔병 인민군들에게 후퇴하라고 일부러 길을 터 준 것이라 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 한가운데 들어 있던 피난민들은 인민군이 철수하자 남쪽 마을로 돌아왔는데 곧이어 마을 어귀를 지나서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보름도 넘게 매일 매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엄청난 인민군 패잔병과 부상병들이 양양 쪽에서 해안 길을 피해 설악산이 가까운 내륙 길로 화일리, 장산리 윗길, 회룡리를 거쳐 우리 마을에 머물러 집집마다 묵어갔다. 심지어 다리가 없는 인민군을 대롱같이 커다란 망태기에 담아 나의 집 윗목에 먼젓번처럼 가져다 내팽개치듯 놔두어 식사 때면 부상병이 밥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러 할머니가 허겁지겁 감자 삶은 것을 가져다주는 걸 본적도 있다. 가가호호마다 이러했다.

이런 가운데 국방군들과 인민군들이 맞닥뜨리면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강릉 북쪽에서부터 원산 아래 통천까지에 머물러 멀리 피난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살던 주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올려 밀면 북쪽으로 피난가고, 내려 밀면 남쪽으로 피난가고 그때그때마다 누가 죽으면 울고불고 슬픔과 공포에 싸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같이 전쟁 속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이제까지 살아남은 것이 모두 다 기적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생각해 본다. 살아 돌아가는 군인들이 저렇게 많은데 그보다 죽은 군인들이 더 많다고 하니 이 땅의 남북 젊은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투하다가 죽었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애통한 일인가? 또 민간인들은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가? 이산가족이 전국을 덮어 그 한이 55년 뒤 오늘에도 풀리지 않으니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먼저도 말했지만 당시 우리 집 아래쪽엔 종덕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아저씨에게는 친형님인 종순 아저씨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의 학정을 피해 한동안 38선 이남인 강릉 쪽으로 넘어갔다. 유순하고 마음씨 고운 아저씨는 친형님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았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상처가 대단했다.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오셨을 정도였다. 나중에 상처가 거의 다 나은 뒤에도 한쪽 다리를 잘 못 쓸 정도로 그 후유증이 오래가 질질 끌고 다녔다.

얼마 후 국방군이 들어와 마을에 주둔할 때 아저씨더러 다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면서 분하고 저주스런 목소리로 “아―! 인민군 놈들이 이렇게 했지.”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얼마 후 인민군이 내려와 같은 질문을 하니까 이번엔 남쪽 하늘을 가리키면서 “아―! 국방군 놈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했지.”라고 엉뚱하게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당시 어린 나였지만 친구들과 같이 아저씨의 그 일관되지 않은 처신을 몹시 우스워했다.

내가 거제도로 간 이후 청소년 때까지도 그랬다. 세월이 지난 먼 뒷날 그 때의 일을 다시 생각했을 때 농사만 지으며 착하고 순박하게 살았던 아저씨가 전쟁 도중에 가정을 지키고 살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러하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가득하다.

말 한번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 중에 가정을 지키려고, 생명을 부지하려고 처절하게 살았던 종덕 아저씨 같은 순박한 우리 국민들! 일관성이 있는 행동을 했다면 경우에 따라 사람들의 목숨은 한순간에 잃게 되는 처량한 세월! 아저씨가 했던 행동을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며 아저씨의 영혼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사실 종덕 아저씨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모든 국민들은 다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도자란 진정으로 모든 국민들을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평화는 나를 버리고 타인을 위할 때만 찾아지는 것이다. 사회 분열 대립의 구도는 또 다른 슬픈 충돌을 불러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끔찍했던 일제시대와 8ㆍ15 광복 직후의 혼란과 6ㆍ25 같은 슬픔이 다시는 없고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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