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우리 동네 어른들은 전쟁 통에도 알량한 농사지만 가을걷이를 했다. 이 싸움 통에 동네의 민심은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한 집안이라도 사촌끼리, 동서끼리 사상이 달라 갈라서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모 자식을 잃은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네가 옳다, 내가 옳다’며 따졌다. 우리 마을을 비롯하여 38선 이북의 마을들은 곳곳이 이렇게 완전히 황폐한 공간처럼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들은 끼리끼리 모여 동네 아저씨 집 사랑방에서 아저씨들과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데 조력하기도 했다. 한참 가을걷이가 끝날 때였다. 물치 장거리에서 북으로 진군하는 군인들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지금 원산 이북 쪽으로는 B-29 폭격기가 폭격을 하도 많이 해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다. 특히 원산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동네 아저씨가 전해 와서 할머니와 나는 원산으로 피신한 가족들을 생각해 공포와 슬픔에 젖어 울기도 했다.
어느 초겨울에 가까울 무렵, 우리 마을엔 또 커다란 이야기 거리가 하나 생겼다.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며 낙동강까지 쳐내려갔던 인민군 보병의 총사령관 ‘무정 장군’이란 사람이 우리 집 바로 옆집에서 이틀을 묵고 간 것이다. 패전군의 사령관이지만 경계가 아주 삼엄했는데, 나도 그 집 마당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담 밖에서 건너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앞산 정승골께를 바라다보던 무정이라는 인민군 장군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어 나도 그가 나이 많은 어른이라 얼떨결에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말없이 서 있었지만 위세가 아주 당당했고 그를 본 온 동네 사람들이 말하길 키가 훤칠하고 아주 잘 생겼다고 했다. 무슨 팔로군 출신이라면서 어떤 면에서는 김일성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라고 쑤군거렸는데 당시 이북에서는 최고의 거물급이라 하였다. 후일담이지만 6ㆍ25 남침 총지휘자였는데 낙동강 전투에서 패전하는 바람에 김일성에게 제거 당하였다고 했다.
이 무정이란 사람이 총지휘하는 인민군이 다부동 전투와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북상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먼저 퇴각한 행렬보다 더 초라하고 더 비참한 행색이었다. 이들이 퇴각군인 부대의 마지막 행군 행렬이라고 하였다.
12월 말쯤 되어 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또 난다는 것이다. 바로 중공군의 전투 개입 때문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서로가 눈치들을 보고 걱정이 태산 같았고, 한숨소리만 온 동네에 가득했다. 월북했다는 사람들의 남은 친인척들이 눈초리가 다시 사나워지는 듯한 낌새였다.
1월에 들어서자마자 하루 저녁에 물치리에서부터 강선리 등 송암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온 강현 일대에 집집마다 난데없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인민군대가 또 밀려오는데 그들이 머물 민가를 없애야 싸움하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로 청년방위댄가 뭔가 하는 국군 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치안경비대라는 민간인 비슷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초가집들에 불을 싸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우성치며 모두 매달려 초가지붕에 불을 붙이지 말아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더러는 그들과 동네 사람들의 친분으로 불을 지르지 않고 넘어가는 집도 있었다. 물치에서부터 시작해서 강현 면 일대 강선, 회룡, 장산, 석교, 둔전, 간곡, 복골 곳곳에 불을 질렀는데 한 밤중에도 송암산 아래 강현의 온 고을이 훤하도록 초가집들이 활활 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동네 중간부터 송암산 쪽 윗동네는 청년들이 많이 올라가지를 않아 불붙은 집이 초입새 한두 집 정도였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또 한 차례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다. 눈 덮인 산야는 새하얗게 되어 깨끗해 보였고 고요했으나 집집마다엔 전쟁이 스치고 간 흔적으로 추수한 낟가리보다도 더 높게 근심들만 쌓여갔다.
2.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물치 장거리에서 신나게 춤을 추면서 국군을 환영하던 쉴집 할머니, 51년 6월 이후 국방군이 계속 주둔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쉴집 할머니의 세 아들은 영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했다. 동네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마도 남쪽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을 거라고 하였는데 그 뒤 쉴집 할머니는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한동안 정신을 잃고 생활하다가 60년대 초반에 많은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이런 슬픔은 서로가 말을 않고 지나서 그렇지 지금도 우리나라 도처에 깔려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 현대사에 깊이깊이 들어 있는 상처가 바로 6ㆍ25의 아픔이고 슬픔인 것이다.
쌍천 벼락바위께 안쪽 마을 옹기점이란 동네에 나의 할아버지와 이종사촌간인 안학조(安鶴祚) 할아버지가 살았다. 오래 전부터 천주교 신자 가족이었는데 아마 천주교 박해 시절부터 신자이던 것 같다. 지금 따져 보면 나의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115~6세 정도? 이 할아버지 가정도 슬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내가 1963년 23살 군 복무 중 보름 휴가를 받아 서울 집에 머물다 할머니와 같이 고향엘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안학조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을 곱게 길렀는데 외모와 풍채가 고운 선비의 풍모였다. 할머니와 내가 왔다 하여 그 댁 할머니가 아주 반겼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나의 할머니와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때 같이 들었는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을 그리는 한 맺힌 이야기였다. 그 댁 아저씨는 8ㆍ15 해방된 뒤 6ㆍ25 전에 남하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었다. 6ㆍ25가 지난 뒤 수복 후에 할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기에 할아버지는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입대한 때와 아들 이름과 병과를 대니까 조사 기록을 보더니 장교는 맞긴 맞는데 전사하지는 않았고, 지금 어느 부대에서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아들이 복무하는 군부대를 찾아갔는데 면회 신청 후 나타난 고급 장교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름도 같고, 병과와 입대 시기도 같았는데 말이다. 장교 전사자 명단에도 없고, 그 장교의 본적도 강원도 양양군 속초읍 옹기점 할아버지 사는 집터 번지로 되어 있었다는데…….
할아버지는 그 때부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돌아가기 전까지 노력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들 이야기만 하였다.
1ㆍ4 후퇴 그 뒤에도 우리 동네 청룡 뒷산 너머 넘은들 벌판과 또 양양 남대천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주둔하고 국방군이 밀고 올라와 주둔하고 하는 치열한 전투가 여러 번 있었다. 양편의 죽은 군인들의 시체가 벌판에 즐비하고 흘린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 처절함을 짐작케 한다. 이런 공방전이 몇 달 동안 이어졌고 첨예한 대치 상태가 강산과 사람들의 마음을 무서운 침묵으로 가라앉게 했다.
1ㆍ4 후퇴 뒤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머일 이모할머니와 나의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며 한탄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일이 있었다. 양양 면 낙산해수욕장 안쪽께로 조산리 어느 집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데 남편은 전쟁 통에 인민군대에 끌려간 뒤에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을 기다리는 집이 있었다.
사실은 젊은 가장들이 없어진 경우는 38선 이북 공산치하 우리 고을에는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판국에 전쟁 통이라 먹을 것도 없었다. 그때 마침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는데 배가 너무 불러 꼼짝을 못할 지경이다가 용케 견디며 출산을 하고 보니 딸아이가 출산되어 출산을 마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진통이 있어 한참 뒤 또 낳으니 딸아이였다 한다. 쌍둥이였던 것이다.
둘째아이를 낳자마자 산모가 어지러운 정신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시어머니와 같이 그 둘째를 탯줄도 끊지 않고 장독대 밖의 수북이 쌓인 눈 위에다가 포대기에 싼 채 내버렸다는 것이다. 갓 나은 영아가 추운 한겨울에 세 시간이나 울다가 소리가 나지 않아 나가 보니 가련한 아기는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57년 지난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어디서나 어린이를 본다든지 임산부들의 숭고한 모습을 볼 때, 또 서울 성북동 가톨릭 입양원이라든지 그 외의 장소에서 어린 생명들의 엄숙함을 보면 하느님이 내는 존재의 귀함을 항상 생각하고 만나는 이웃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그때마다 마음자세를 바르게 추스릴 때가 많다.
생명의 존엄성이 전쟁 통에 어린 영아처럼 버림을 받고 또 전쟁까지 일으켜 가면서 백성 잘 살게 해준다며 결과적으로 독재자 자기들 무모한 욕심만 채우려고 우리 젊은이들을 인간 살육의 장으로 마구 몰아넣다니……. 잘 이어 나가던 하나뿐인 국민들의 생명을 옳게 펴지도 못하고 벌레목숨보다 더 못하게 취급을 하는 얼치기 독재자 살인마 김일성의 무모한 통치방식이라니!
우리 마을 강현은 끔찍한 전투가 왔다간 가고 또 오고 하는 통에 민심이 마구 엉클어졌다. 국군의 진격과 마을마다의 주둔으로 인민군 따라 월북한 가정의 친척들은 그들대로 쥐 죽은 듯이 말도 못하고 기웃기웃 여기저기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대들이 재차 들어오면 금세 어깨를 꼿꼿이 펴고 우쭐대고, 그러면 국군이 왔다고 좋아서 뛸 듯이 기뻐하던 사람들은 금세 풀이 죽어 분위기 살피고, 이런 시대 변화 속에서 한 마을에 살고 있게 된 국민들…….
1950년 10월초에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아직도 많다. 그 즈음 국방군이 양양을 거쳐 속초를 탈환하고 계속 북상하여 고성, 통천을 차례로 탈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할머니와 나는 원산에 있는 부모와 어린 두 여동생이 그래도 무사하길 바랐다. 할머니는 집 뒤 장독대 옆의 돌 바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는 틈이 날 때마다 밤낮으로 두 손을 싹싹 빌며 치성을 드렸다.
밖에서 원산지역에 대한 불길한 소식만 전해 듣고 온 날은 몇 번씩이나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누구에게 하는지 그저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청됀에서 무시무시한 전투를 보고 놀란 가슴으로 마을에 돌아온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전쟁 사이사이에 지어 놓은 들판의 곡식들을 거두어들였다.
며칠간 조용하던 마을에 또 큰 일이 벌어졌다. 대청봉과 화채봉 아래 송암산 쪽에서 인민군 50여 명이 개울말로 들이닥친 것이다. 집집마다 밥을 빨리 지으라고 총을 겨누고 주민이 밥을 짓는 동안 보초 경계를 서고 난리가 난 것이다. 동네의 친척 형이 몰래 빠져나가 물치 장거리께로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 내려가 국방군 부대에 인민군이 왔다고 신고했다.
곧 국군 전투부대가 출동하여 위치가 높은 양짓말 벌판의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인 논두렁 끝에 완전히 매복하고 바로 아래 개울말의 동정을 지켜보다가 개울말의 인민군을 향하여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으니 항복하라!”고 소리를 쳤다. 한동안 기척이 없던 인민군들은 밥도 못 먹고 갑자기 들고 일어나 앞산 정승골 쪽으로 살금살금 튀기 시작했다.
국군들은 일제히 건너편 산에 도망가는 적을 발견하고 일제히 사격을 했는데 먼젓번 청됀 전투 때처럼 총소리 위세가 대단하였다. 양짓말 논둑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 많은 인민군들이 일시에 도망가다가 거의 전멸되는 일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마을은 며칠간 조용했다.
3. 인민위원장의 말로
그러던 어느 날, 아래 윗동네 아저씨들 여러 명이 소금재 고개 넘기 전 왼쪽에 사는 아저씨 집으로 올라갔다. 재산이 아까워 미처 월북하지 못했다고 하는 인민위원장 집으로 손과 손에 지게작대기 등 몽둥이를 모두 하나씩 들고 웅성거리면서 다급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동네 친구들도 와글거리며 구경거리 났다고 뒤따라갔는데 나도 호기심이 나서 따라가 보았다. 그 집 앞에 다다른 아저씨들 가운데 남쪽(38선 이남)에 나갔다가 고향에 들어온 몇몇 아저씨들이 주동이 되어 집안을 향해 누구누구는 밖으로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같은 문중 아저씨들은 그곳까지는 같이 갔으나 멀찍이 떨어져 매질에 합세하지는 않았다. 여러 번 외치자 인민위원장이 흰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힘없이 마당으로 나오니 동네 아저씨들이 다짜고짜로 대들어 둘러싸더니만 지체 없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어떤 아저씨가 작대기로 인민위원장의 왼팔 가운데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인민위원장 아저씨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댔다. 왼쪽 팔이 부러졌는지 피가 나와 겉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 인민위원장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사정하듯이 말하였다.
“이거 너무하는 게 아닌가? 잘 좀 봐주게나…….”
하니 머일 이모할머니의 큰 사위 영옥 아저씨가 큰소리를 지르며
“야, 이 개 같은 놈아! 우리 동네 죄 없는 사람들을 인민재판에서 두들겨 병신을 만들어 놓고 너는 영영 잘 살 줄 알았느냐! 너도 한번 당해 보아라!”
하면서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날렸는데 때를 같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그 때의 처참한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오지 않았지만 인민재판을 받았고 들것에 실려 집에서 앓고 있던 종덕 아저씨와 동네 다른 아저씨들이 생각났고 인근 동네에서도 인민재판 때마다 몽둥이질을 당했을 터인데 ‘아! 거기서도 바로 이러 했겠구나’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인민위원장 가족들, 아주머니와 딸 등이 나와서 울고불고 살려 달라 하니까 한 아저씨가,
“야, 이 여맹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개 썅년아!”
하더니만 발길로 허리께를 걷어찼다. 그 딸은 우리도 동네에서 가끔 보는 아주 멋쟁이인 공산당 청년 당원인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아이고 선생님”
하며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고 비겁해 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집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인민위원장은 국군이 데려가 집 너머 뒷산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였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하였지만 목격자가 없어서 확실하지가 않다. 비밀리에 보따리 싸가지고 피해 급하게 북으로 진격한 국방군의 꼭뒤를 따라 요리조리 피해 이북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물치 장거리에서 어느 쪽 군대인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이 총질을 하면서 복골 쪽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ㆍ중ㆍ하복골 세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상복골 화채봉 올라가는 골짜기로 몰려들어 피신을 하였다. 이때 나는 할머니가 신겨준 두툼한 버선을 신고 집신을 단단히 얽어맨 뒤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비탈 저 비탈 바위 뒤와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숲이 있는 곳에 밤새도록 머물면서 비워 두고 온 우리 마을 동정을 살폈다. 늦가을이라지만 설악산 아래는 밤이 되면 벌써 초겨울 날씨로 바뀐다. 남쪽에서 어마어마한 군대가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말도 있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리민다는 말도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는 말에 초조감만 가득하였고 그래도 하루 낮밤을 더 피신하다가 망보던 사람들이 올라와서 물치 장께가 조용하다 하여 사람들은 살금살금 자기 집을 찾아들었다.
인민위원장의 비굴함…그리고 최후
- 김찬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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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0, 08:31











